조용히 들리는 지혜자들의 말들이 우매한 자들을 다스리는 자의 호령보다 나으니라
전 9:17
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하나님이여 손을 드옵소서 가난한 자들을 잊지 마옵소서
시 10:12
아직 살아서 주를 바라고 의지할 수 있는 기회가 복이다. 돌이켜 주의 이름을 부르고 자신의 죄를 인정할 수 있는 것으로 아름답다. 이에 “모든 산 자들 중에 들어 있는 자에게는 누구나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기 때문이니라(4).” 함은 “산 자들은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들은 아무것도 모르며 그들이 다시는 상을 받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이름이 잊어버린 바 됨이니라(5).” 죽음으로 더는 기회도 돌이킬 방도도 없다. 살았을 때 이미 충분하여서 그로 주를 따르게 하신다. 이를 아는 것이 지혜이고 귀하다. 그러므로 “지혜가 무기보다 나으니라 그러나 죄인 한 사람이 많은 선을 무너지게 하느니라(18).” 오늘의 여러 상황과 그에 따른 설전이 그러하다.
그러므로 인생에서 최선의 자세에 대하여 오늘 본문은 말한다. 8장 14절에서 9장 12절 후반부까지, 부조리하고 불가해한 해 아래 세상에서의 허무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한다. 이는 한 마디로 희락이다. 기쁨으로 주 안에 감사하며 살라는 것이다. 인생의 현실을 지적하고 인생을 사는 동안 삶의 최선책이 무엇인지를 알라는 것이다. 현실과 죽음의 보편성을 지적하고 죽음 앞에 선 자로서 인생의 허무를 강조하고 있다. 이는 죽음을 향해 살 수밖에 없는 인생이 어떻게 허무를 극복할 수 있는가를 돌아보게 한다.
전도자는 먼저 해 아래서 주어진 생명의 날들에 대해 그 가치를 깨닫고 사랑할 것을 권한다(4-6). 해 아래서 주어진 날 동안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분복으로 만족하며 희락을 추구할 것을 알게 한다(7-9). 해 아래서 주어진 생명의 날들 동안에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도록 권한다. “네 손이 일을 얻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스올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10).” 우리 인생은 제한적이라 곧 돌아가게 될 죽음은 평생의 수고와 업적과 지혜를 모두 순식간에 무의미한 것으로 만든다. 다들 죽음이 찾아올 때 가차 없음을 알기에 두려운 것이다.
죽음이 이르기 전, 남은 생을 즐겁고 보람 있게 보내라는 것이 오늘 본문의 당부다. 전도자의 권면은 해 아래 속한 자들 모두에게 해당된다. 누구도 해결할 수 없는 죽음이 이르기 전에 이생에서나마 즐거움을 누리라는 것으로, 다소 냉소적인 권고로 정신 차리라는 함의다. 이는 해 위의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의 섭리에 순종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는 완전하시고 그의 선하심은 전폭적이시다. 이를 신뢰함으로 죽음의 문제에 집착하지 말고 주어진 삶에서 최선을 다하며 즐겁게 사는 날을 누리라는 권고이다.
곧 하나님을 알고 주를 바라면 바랄수록 더욱 더 주신 이 한 날의 수고로 족한 줄을 안다. 성도는 이러한 모순된 현실에서 흔들림 없이 신앙을 지키며 산다. 이를 오늘 본문은 첫 구절에서 두괄식으로 언급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을 내가 마음에 두고 이 모든 것을 살펴 본즉 의인들이나 지혜자들이나 그들의 행위나 모두 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으니 사랑을 받을는지 미움을 받을는지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은 모두 그들의 미래의 일들임이니라(1).” 누가 자신의 미래를 알 수 있겠나? 다만 오늘을 감사함으로 채우고 주신 바 이 날의 수고로 애씀이 족하다. 하여 예수님도 이르시기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 6:34).”
하심인데, 이는 오늘 지혜가 말하길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그 모든 것이 일반이라 의인과 악인, 선한 자와 깨끗한 자와 깨끗하지 아니한 자, 제사를 드리는 자와 제사를 드리지 아니하는 자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모두 일반이니 선인과 죄인, 맹세하는 자와 맹세하기를 무서워하는 자가 일반이로다(2).” 이는 모든 사람이 죄인임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지 못하더니,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3-24).” 이로써 오늘 우리도 노아와 같이, 아브라함과 같이 의롭다 하심을 입었다.
성경의 어떤 사람이 자신의 의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던가? 다윗도 바울도 주의 은혜와 공로가 아니었다면 죄인으로 해 아래 살다 죄인으로 스올 깊은 곳으로 갔을 터인데…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누구도 자신은 아니라고 말할 수 없고 자기 의와 공로를 내세우며 주의 은혜를 값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오늘 본문에서 이를 알게 하시려고 ‘일반’이라는 표현을 3회나 사용하여 ‘의인과 악인’, ‘선하고 깨끗한 자와 깨끗지 않은 자’, ‘제사를 드리는 자와 제사를 드리지 아니하는 자’, ‘선인과 죄인’, ‘맹세하는 자와 맹세하기를 무서워하는 자’ 등등 사람의 생각에 매우 큰 질적 차이가 없다는 것을 일깨운다. 그러니까 마치 누가 누구를 뭐라 하면서 마치 자신은 저와 다른 공의와 정직으로 살았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일깨운다. 나는 종종 이러한 나 자신과의 싸움이 드러난다. 더욱이 누구에 대해 나의 판단을 말할 때 자칫 내 스스로가 저와 같지 않음을 나의 공로로 치부하게 되는 것이다. 이를 알고 오늘 본문은 ‘일반이라!’ 하고 마치 서로가 견주는 게 도토리 키 재기와 같다는 것이다.
욥은 자신을 공격하는 아내에게 한 말과 같다. 먼저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욥 2:9).” 하고 현재 당하는 욥의 처지와 사정에 대해 한탄하듯 말하였고, 그러자 욥은 그러한 고통 중에도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10).” 하고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표현하는데,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의문문으로 강조하고 있다.
이는 사도들도 같은 입장으로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행 5:41).” 오히려 능욕과 멸시를 감사함으로 치환하였다. 그렇게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7-18).” 이것이 성도와 성도 아닌 자들의 차이다. 믿음으로 승리하는 자들과 인생으로 승부를 보려는 자들의 다른 점이다. 곧 마지막 날 임하게 될 심판을 생각하며 사는 자만이 이와 같은 가치를 알고 복된 삶을 살 수 있다.
오늘 본문도 “모든 사람의 결국은 일반이라 이것은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모든 일 중의 악한 것이니 곧 인생의 마음에는 악이 가득하여 그들의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고 있다가 후에는 죽은 자들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3).” 하고 우리 인생의 일반을 알리었다. 즉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일반인 것은 해 아래서 모든 일이 악할 따름이라, 이는 인생의 마음에 악이 가득하여 평생이 그처럼 미친 마음을 품고 살다가 후에는 다 죽은 자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한다. 곧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이지, 우리 누구도 자신의 의로움으로 의롭다하심을 받는 게 아님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종종 느끼는 일이지만 특히 목회를 하면서 어떤 이는 마치 자신의 공적으로 교회가 부흥하고 여러 업적을 이룬 줄로 오해한다. 이를 부추기는 게 그를 떠받들어 공경하는 성도들이기도 하다. 사람을 중심으로 모이는 교회는 분파가 일게 돼 있다. 어제도 어느 교회에 대해 누구에게 듣다가 그곳에서 부목사로 있던 이가 그 교회에서 부유한 장로들 몇과 함께 분리해서 나와 교회를 새로 하였다는 것이다. 그렇게 십 수 년이 흐르고 또 갈라져서 이번에 새로 독립하게 된 곳인데… 이를 두고 이쪽은 자신들의 의를 주장하고 저쪽은 배신이라 한다. 교회나 사회나 모두가 일반인 것도 그런 것이다. 서로가 너는 어느 쪽이냐? 하고 묻는 듯한데, 다를 게 없다. 이를 지혜는 ‘미친 마음’이라며 강한 표현으로 나타낸다.
그러나 선인과 악인이 동일한 운명에 처해지게 됨은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자들의 마음이 더욱 강퍅하게 되어 더욱 악행에 전념하게 됨을 나타내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르시되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눅 21:34).” 서로가 누가 옳다 그르다 따지느라 헛된 것으로 씨름하느니 조심하라 이르신다. 그렇게 또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가 임하는 것이어서 이로써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임한다.’ 이를 분별하였던 이삭은 우물을 팔 때마다 분쟁이 일 때 자신의 소유를 주장하여 싸우지 않고 피하였던 것이다.
이 땅에서의 내 것이나 네 것이나… 저마다 자기 소유를 주장하고 사느라 더 많은 쪽을 선호하지만, 그런들 그 끝은 모두가 죽음으로 단절일 뿐인 것을.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엡 5:15-16).” 그러느라 아등바등 그 일에 정신 팔려서 시간을 다 보내다 어느덧 훌쩍 나이 들고 병들어 그 신세가 일반이다. 하여 지혜는 풍자적으로 “모든 산 자들 중에 들어 있는 자에게는 누구나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기 때문이니라(전 9:4).” 그저 다만 살아있음에 감사할 것은 아직 기회가 있기 때문이다.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의 이 기회를 헛되이 쓰지 않기를.
결국은 방주 문이 닫히기까지, 소돔성이 무너지기까지 사람들은 모두 희희낙락 먹고 마시고 즐기면서 하루를 살다 죽어도 여한이 없는 것처럼 굴었으니…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마 24:37).” 그렇듯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38-39).” 보면 오늘 우리의 삶도 다르지 않다. 마치 자신은 아니라는 듯 외면하고 살지만, 그래서도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나음’인가? 개는 역시 개다.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 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잠 26:11).”
이를 들어 사도는 전하는 바, “참된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벧후 2:22).” 어쩜 이는 시대가 아무리 바뀌어도 여전한지 모르겠다. 안 듣는 자는 죽어도 안 듣는다. 죽기까지도 손에 쥔 것을 놓지 못한다. 끝내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나는 전에 평생을 무속인으로 살던 이가 임종할 때 그의 귀에 대고 예수 믿으세요! 하고 말한 적이 있다. 그 말이 어찌 됐는지 알 수 없지만 목숨이 떠나기 전, 저가 의식이 있었다 한들… 어쩌면 지옥에서 고통 가운데 이 글을 듣고 있을까? 천국에서 주의 품에 안겨 이 글을 읽고 있을까?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그들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따르게 하실까 함이라(딤후 2:25-26).”
고로 우리가 사는 동안에,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마 16:26).” 종종 나는 이처럼 묻기를 이 땅에서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서도 갖은 재물을 다 쓸 텐데, 하물며 우리 영혼을 위하여, 저 한 영혼을 위하여 그 영생에 있어 무엇인들 아까울까?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13:44).” 우린 이 놀라운 비밀을 알고부터 나의 전부를 드려서 이 값진 것을 팔지 않을 것이다.
이에 바울은 자신의 남은 전부를 걸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8-9).” 하여 우리는 그 어떤 것으로도 이 귀한 진리를 바꾸지 않을 것이다. 이에 오늘 지혜는 이르기를,
“너는 가서 기쁨으로 네 음식물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네 포도주를 마실지어다 이는 하나님이 네가 하는 일들을 벌써 기쁘게 받으셨음이니라(전 9:7).”
이는 마치 부모가 그 아이의 똥오줌도 더러운 것을 모르고 귀히 다루는 것과 같다. 어릴 때 아이가 아플 때 똥을 만져보고 살펴서 소화가 어려운가, 하고 살핀 기억이 난다. 우리의 이와 같은 사랑 같이 주의 사랑도 우리의 허물과 실수도 모두 덮으심으로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엡 2:1-2).” 하여 나의 고약했던 시절도 모두 용서하심으로 선으로 바꾸신 것이다. 그리하여,
여호와여 들으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를 돕는 자가 되소서 하였나이다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이는 잠잠하지 아니하고
내 영광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심이니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영원히 감사하리이다
(시 30:10-12).
이는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셨으니 주 앞에서 내게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므로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행 2:28-29).” 모두는 죽어 한 곳으로 가나, 서로가 죽음 너머에서는 갈리어 하나는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스올 깊은 곳에서, 하나는 기쁨으로 슬픔으로 영생을 알게 될 것이라, 지혜는 강조한다.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1:2, 12:8).” 인생을 굳이 논하자면 이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엡 4:30).”
이에 오늘 지혜는 권한다. “조용히 들리는 지혜자들의 말들이 우매한 자들을 다스리는 자의 호령보다 나으니라지혜가 무기보다 나으니라 그러나 죄인 한 사람이 많은 선을 무너지게 하느니라(17-18).” 하여 주 앞에 엎드려 기도한다.
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하나님이여 손을 드옵소서
가난한 자들을 잊지 마옵소서
…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사오니
그들의 마음을 준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고아와 압제 당하는 자를 위하여 심판하사
세상에 속한 자가 다시는 위협하지 못하게 하시리이다
(시 10:12, 17-1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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