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길이 어떠함과 아이 밴 자의 태에서 뼈가 어떻게 자라는지를 네가 알지 못함 같이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네가 알지 못하느니라
전 11:5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
시 12:6
저마다 자기는 잘 아는 것처럼 인생을 논한다. 오늘 본문은 이를 주목하여서 그에 따른 바른 길을 제시한다. 우리는 누구도 하나님의 일을 알지 못한다. 바람의 길을 알 수 없고, 태중에 아이가 생성되어 가는 과정을 알지 못하듯 한 치 앞도 알지 못하는 것이 인생임을 깨닫게 한다. 하여 말씀 앞에 앉는 것으로, ‘바람의 길이 어떠함과 아이 밴 자의 태에서 뼈가 어떻게 자라는지… 알지 못함 같이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도…’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
(시 12:6).
말씀이 우리 발의 등불이요 빛인 것을 새삼 인정한다. 그리하여 누구라도 저를 돕는 것이 유익하다. 오늘 본문 첫 구절에서부터 “너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1).” 나에게도 유용한 것이나 이를 물 위에 던짐으로 어디로 흘러갈지 알지 못하나 남을 위하는 것이 어느 순간,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을 것이다. 그러므로 할 수 있는 최선에 하나를 더하여 나누는 게 재앙의 땅에서 사는 올바른 지혜이다. “일곱에게나 여덟에게 나눠 줄지어다 무슨 재앙이 땅에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함이니라(2).” 모든 만물은 이에 하나님의 뜻에 순응하여 살아간다. “구름에 비가 가득하면 땅에 쏟아지며 나무가 남으로나 북으로나 쓰러지면 그 쓰러진 곳에 그냥 있으리라(3).”
그런데 나름의 판세를 알고자 하고 스스로의 판단을 운운하는 자는 맡은 바 그 일에서 오히려 때를 놓친다. “풍세를 살펴보는 자는 파종하지 못할 것이요 구름만 바라보는 자는 거두지 못하리라(4).” 우리가 누구라도 하나님의 일을 알지 못하듯이 “바람의 길이 어떠함과 아이 밴 자의 태에서 뼈가 어떻게 자라는지를 네가 알지 못함 같이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네가 알지 못하느니라(5).” 그리하여 주신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성실함으로 생을 살아가는 게 복이다. “너는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놓지 말라 이것이 잘 될는지, 저것이 잘 될는지, 혹 둘이 다 잘 될는지 알지 못함이니라(6).” 오늘도 빛을 더하시고 해를 보는 것이 복되다. “빛은 실로 아름다운 것이라 눈으로 해를 보는 것이 즐거운 일이로다(7).”
그러므로 세상에 사는 동안에 우리는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10).” 이와 같은 비결은 주 안에서이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 그러므로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 이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의 사명이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인생이란,
“사람이 여러 해를 살면 항상 즐거워할지로다 그러나 캄캄한 날들이 많으리니 그 날들을 생각할지로다 다가올 일은 다 헛되도다(전 11:8).”
이는 곧,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히 3:13).”
이는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나니(4:7).” 그러므로 주어진 때를 성실하게 사는 것으로 복이다. 이후에는 심판이 있을 것이다.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들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들과 네 눈이 보는 대로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전 11:9)” 그러므로 오늘 말씀은 짧고 간결하게 오늘, 이 한 날의 복됨을 가리키며 “그런즉 근심이 네 마음에서 떠나게 하며 악이 네 몸에서 물러가게 하라 어릴 때와 검은 머리의 시절이 다 헛되니라(10).”
다 지나고 나면 모든 게 헛되다 주를 바란 것으로 복된 것을 알게 한다. 이와 같이 전도서는 인생의 절대 허무의 문제를 다양한 측면에서 심층적으로 다루고 있다. 동시에 그 답을 찾는 데 있어 ‘해 아래 세상’에서는 모든 게 절대 허무하나 ‘해 위’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이 모든 허무를 극복할 수 있고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므로 인생을 살아내는 데 있어 최선의 자세 네 부분으로 나누었다. 먼저 교훈을 더하는 부분으로 8:14-12:7에서 8:14-9:12은 교훈을, 9:13-10:20에서는 비탄을,11:1-12:7에서 다시 교훈으로 이루어졌다.
본문은 이 가운데 ‘하나님의 심판’을 전제로 하여, ‘선한 삶’을 살면서 주신 바 그 한 날을 기쁨으로 살 것을 권면한다. 생이 어둡고 힘들다 해도, 불확실한 해 아래서의 세상을 유한자로 무한한자 같이 취할 것은 ‘최선의 생활’로 가능함을 알게 한다. 곧 언제 어떤 일이 우리 앞에 닥칠지 모르지만 우리는 항상 영원히 살 자들로 구제와 선한 일에 힘쓸 것을 권한다. 더불어 오늘의 기쁨을 추구할 것을 권면한다. 언제 재앙이 닥칠지 모르기 때문에 이와 같은 삶의 태도가 지혜이다.
나는 한동안 흑인 문화를 좋아했는데 저들 음식이나 삶의 태도가 샤머니즘적이지만 그 바탕에는 그리하여 오늘을 즐거워한다. 가령 저들의 장례문화도 음악이 있고 춤이 있어 슬픔을 기쁨으로 승화시키는 힘이 있다. 오랜 고난과 고통의 날들을 통해 저들이 체득한 것은 기쁨으로 이를 되살리는 것이다. ‘해 아래 세상’에서 모든 삶은 고난을 겪는다. 대기업을 다닌다고 해서 그 날들이 평탄대로인 것만은 아니다. 손위 처남은 어디 도시가스에 근무하는 동안 맨홀 밑으로 들어가 당시에 마땅한 장비도 없이 악취와 먼지를 뒤집어쓰고 맨손으로 일하던 때를 말했다. 아무개 역시 모 대기업 식품부에서 일하면서 진열대에 상품을 일일이 진열해주고, 점주들 비위를 맞추느라 저녁에는 또 술자리에 불려 다니는 일로 매일 매순간이 고달프다고 하소연이다.
사는 게 다들 고역이라, 매일 점심께 산책으로 한 바퀴 도는 방향에 재래시장이 있는데 가끔은 그 안쪽 길로 걷다보면 저마다 참 치열하게도 산다. 급격히 기온이 떨어지고 추위가 찾아온 날, 언 손을 비벼가며 누구는 상품을 진열하고, 생선을 씻고, 과일을 나르고, 고기를 썰고, 뒤섞여 오가는 사람들을 일일이 응대하며 목청껏 소리 지르고 다시 또 반복적인 일을 되풀이 한다. 바깥쪽 행길에는 그나마 시장 안으로 편입되지 못한 이들은 평상 위에 나물이며 옷가지며 가판을 벌이고 눈치껏 사람을 끌어 모은다. 나이가 지긋하니 허리가 폭삭 꾸부러진 할머니는 매일 나물줄기를 다듬어서 한소쿠리씩 나눠 담아 3천원에 판다. 시장으로 산책하면서부터 평소 사용하지 않던 현금을 가지고 다니기 시작한 것도 시장 특성상 이를 선호하기 때문이다.
사는 게 일이다. 그런 가운데 우리의 선한 사업이란 무심히 ‘흐르는 물에 떡을 던지듯’ 힘쓰는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를 온전히 알 수 없는 세상에서 우리의 선택은 늘 그 하나님을 염두에 두고 가능한 선한 마음으로 현실을 마주하는 것이다. 재래식시장 근처로 산책을 하기 시작하면서 우리 부부는 습관처럼 배낭을 메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럼 아내는 나물이며 반찬 등 그때 필요한 것을 사서 내 가방이나 자신의 것에 나누어 넣는다. 그리고 늘 각자의 텀블러를 가지고 다니는데 무심히 버려지는 일회용 컵을 좀 줄이자는 요량에서다. 늘 내 것에는 물이 담겼고, 아내 것으로는 카페라떼를 한 잔 사서 둘이 나눠 마신다.
무의식적인 일에 의식을 더해 선을 추구하려는 것은 그 너머의 심판을 의식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도 최선의 노력을 다해 이와 같이 선을 강구하라고 한다. 이는 우리 삶이란 마치 명암이 혼재된 것 같기 때문이다. 언제 기쁨이 슬픔이 될지, 슬픔이 기쁨이 될지, 그러므로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7:14).” 하는 것이 지혜로운 삶이다.
고로 ‘너는 네 식물을 물 위에 던지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고 하심도 8:14-12:7의 교훈에 해당한다. 하여 어떤 대가를 바라고 하는 게 아니라,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 6:2-4).” 그래서 산책길에 저만치 좀 멀지만 시장에서 필요한 것을 사고, 살 때도 가급적이면 길가쪽 가판을 벌인 노인의 손에서 사고, 현금을 주고 깎기 않고 지불한다. 서로가 그렇듯 길가에서 파스를 파는 이는 열 개를 사면 하나를 꼭 덤으로 더 준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인 것이다.
하나님이 갚으실 것이다. “너는 반드시 그에게 줄 것이요, 줄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과 네 손이 닿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신 15:10).” 이는 성경에서의 복의 원리라고 지혜는 가르친다.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이웃을 업신여기는 자는 죄를 범하는 자요 빈곤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는 자니라…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자는 궁핍하지 아니하려니와 못 본 체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크리라(잠 11:24, 14:21, 19:17, 28:27).”
그런 점에서 내가 어떤 진영논리나 다단계식 사고를 특히 경계하는 것은, 가령 자신들 진영에 맞지 않는 선택이나 주장을 한다고 해서 저의 장애나 그러한 약점을 꼬투리 잡는 오늘 이 현실 정치의 팍팍함에 치를 떤다. 그런 가운데 고성이 오가고 조롱이 난무한 게 슬프다. 왜냐하면 구제는 그 ‘마음 씀’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선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세상에 드러내는 가장 가치 있고, 일상적인 삶의 아름다운 일이기 때문이다. 성경이 이를 원하시고 그리 명하시기 때문이다. 많은 곳에 구제하고, 요란하게 소문을 내며 봉사하라는 게 아니다. 주신 상황에서 누가 알든지 모르든지, 흐르는 물 위에 던져지듯 자신의 선행을 마치 대단하지 않은 일처럼… 그리 행하라는 것이다.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마 10:42).” 겨우 보잘것없는 일 같으나 이름도 없이 묵묵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19:21).” 그러자 부자 청년은 고민하다 돌아갔다.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22).” 그러므로 가진 것이 오히려 그 마음을 은연중에 강퍅하게 한다. 자기 가진 것으로 내어주지 않으려는 게 다를 바 없다.
누가 수시로 전화하여 미주알고주알 자기 이야기에 늘 푸념을 할 때 저더러 전화하지 말라고 할 수 없다. 그런데 신기한 방법이 하나 있는데, 오늘 나의 사정과 교회 형편을 말하면 된다. 요즘 오가는데 시간과 돈이 드는 거리라, 교회를 좀 가까운 곳으로 옮길까 하다 근처 상가나 자리를 찾다 얼추 그럼 또 천에서 2천 정도의 비용이 더 들어야 할 것 같아서 마음뿐이었다. 그런 이야기를 누구에게 하기 어려운데… 저에게 하면 그러냐며 더는 연락이 없다. 이 나이쯤 살면서 보니까 사람 관계, 이런 이야기로 서로 어려워하다 소원해지는 게 자연스럽다. 하물며 교회 사정도 선뜻 누구에게 말하지 못하는 이유다.
구제란 이처럼 어려운 일인데 오늘 본문은 할 수 있는 최선에 하나를 더하라고 한다. ‘일곱에게나 여덟에게 나눠줄지어다 무슨 재앙이 땅에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함이니라.’ 하심이 그런 의미다. 손에 쥐고 나중 일로 염두에 두고 있은들 언제 어떤 일이 있을지, 하나님이 오라, 하시면 언제든 떠나야 하는 게 인생이란 사실을 상기시킨다. 그러므로 ‘일곱에게나 여덟에게’는 구제의 대상을 ‘일곱’ 즉 성경의 완전수로 할 수 있는 최선보다, ‘여덟’은 하나 더하여 주님만 바라고 행하라는 말씀이다. 덧없는 세상에서 허무와 회의는 순식간의 일이다. 그런 가운데,
그가 재물을 흩어
빈궁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구히 있고
그의 뿔이 영광 중에 들리리로다
악인은 이를 보고 한탄하여
이를 갈면서 소멸되리니
악인들의 욕망은 사라지리로다
(시 112:9-10).
어느 가까운 훗날에는 이처럼 뚜렷하게 드러날 것이다. 그러므로 완전수 ‘일곱’을 능가하여 그 충족을 뛰어넘어 한 사람 더해서까지, 여덟… 이에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마 5:42).” 하신 말씀을 염두에 두고 최소한 가판에서 물건을 살 때 더하지는 못할망정 깎지 말고 사라고 아내에게 자주 말한다. 이는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48).” 하심을 마음에 두고 사는 일이다. 하여 예수님처럼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눅 10:37).”
세상이 아무리 어떠하다 해도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벧전 1:17).” 그저 대기업, 힘 있는 자, 다수의 논리에 기생하며 사는 세상이라 해도 이를 모두 두시는 까닭은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벧후 3:7).” 그러므로 저들은 저들의 일을 하는 것일 테니, 이를 보면서 우린 더욱 주를 바라며 심판을 염두에 두고 근신하는 것이었다.
여호와여 도우소서 경건한 자가 끊어지며
충실한 자들이 인생 중에 없어지나이다
그들이 이웃에게 각기 거짓을 말함이여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으로 말하는도다
(시 12:1-2).
세상은 항상 불가해한 일투성이나 우린 오직 주를 바람으로,
여호와의 말씀에 가련한 자들의 눌림과
궁핍한 자들의 탄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제 일어나 그를 그가 원하는
안전한 지대에 두리라 하시도다
(5).
이에,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
(6).
그러므로
여호와여 그들을 지키사
이 세대로부터 영원까지 보존하시리이다
비열함이 인생 중에 높임을 받는 때에
악인들이 곳곳에서 날뛰는도다
(7-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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