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 뜻과 내 양심을 단련하소서

하현. 2025. 12. 5. 04:44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

렘 5:1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 흔들리지 아니하고 여호와를 의지하였사오니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양심을 단련하소서

시 26:1-2

 

 

악은 옮는다. 아이가 밖에서 욕을 먼저 배우듯 욕을 나쁜 말이라고 가르치지 않으면 무분별하게 옮긴다. 실제 적은 내부에 있다. 본문은 유다가 북이스라엘의 타락을 답습한 데 대한 경고다. 오죽하니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1).” 하며 의인 한 사람을 찾아오라고 하실까? 그만큼 우리의 악함은 순식간에 퍼지는 균 같다. 성경은 이를 정의하기를,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

 

다 함께 치우쳐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다. 서로가 옳다고 하지만 저마다의 생각은 그릇되어서 오늘 시편 다윗의 고백이 곧 간구가 된다.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

흔들리지 아니하고 여호와를 의지하였사오니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

(시 26:1).

 

곧 직접적으로 하나님 앞에 서고 주를 경외함은 주를 의식하며 사는 것으로, 모든 것을 주 앞에 돌린다. 그리하여,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양심을 단련하소서

(2).

 

하는 그와 같은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보내야 한다. 보면 아차, 하는 순간에 훅, 간다. 요즘은 온갖 개인방송도 언론의 자유를 운운하며 헛소리를 지껄여도 법적으로 보호를 받는 세상이라, 오늘 여기 유다의 멸망 현장을 환상으로 보는 예레미야의 비탄이 우리 성도들의 자세를 일깨운다. 그 참상을 기록하여 “슬프고 아프다 내 마음속이 아프고 내 마음이 답답하여 잠잠할 수 없으니 이는 나의 심령이 나팔 소리와 전쟁의 경보를 들음이로다 패망에 패망이 연속하여 온 땅이 탈취를 당하니 나의 장막과 휘장은 갑자기 파멸되도다(렘 4:19-20).”

 

선지자로서 예레미야는 죄악된 사회의 참상과 사람들의 무덤덤한 현실을 탄식하여, “내가 저 깃발을 보며 나팔 소리 듣기를 어느 때까지 할꼬 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21-22).” 하심은 하나님의 심정으로 옮겨진다. 하여,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길 이 온 땅이 황폐할 것이나 내가 진멸하지는 아니할 것이며 이로 말미암아 땅이 슬퍼할 것이며 위의 하늘이 어두울 것이라 내가 이미 말하였으며 작정하였고 후회하지 아니하였은즉 또한 거기서 돌이키지 아니하리라 하셨음이로다(27-28).” 그런 가운데서도 주의 긍휼하심을 찾게 되는 것이다.

 

우리 믿는 자들의 보편적인은 타락은 결과적으로 심판이 불가피하다. 예루살렘으로 대표되는 유다에서 단 한 사람의 의인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타락하였음을 탄식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기까지 의인 열 사람을 찾지 못해 그리 되었던 것처럼… 여기서도 베드로의 증거로 롯과 그의 처, 두 딸을 포함한 가족을 제외하면 다섯 손가락으로 꼽기도 어려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심지어 사위 되는 자들도 하나님의 심판을 ‘농담으로’나 들었다고 하니! 그런 가운데 롯도 베드로 사도의 증거로나 저가 의인이었겠다, 하는 것이지….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이는 이 의인이 그들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함이라)(벧후 2:7-8).”

 

이를 바탕으로 할 때 우리의 고통은 무법한 자들의 세상에서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우리의 의로운 심령이 상하는 것이다. 심령이 상한다는 표현, 나는 요즘 이를 주변에서 자주 듣는다. 누가 전화했는데 나름 대형 교회라 할 수 있는 저의 교회 사모님이 공황이 와서 힘들어한다고 했다. 나도 그렇지만 어느 목사님은 갑자기 호흡이 가쁘고 식은땀이 나면서 자신의 몸이 땅속으로 꺼지는 듯한 공포에 짓눌려 병원으로 갔다. 내멋대로 살 때는 오히려 덤덤하다. 죄고 뭐고 가릴 거 없이 자유롭게(?) 신앙도 있다하고 세상도 사랑하며 살 때는 태연했다. 그저 그러려니 하고 의연해할 때는 죄가 죄로 여겨지지 않는다. 그럴 때는 그저 그런가보다 한다.

 

흔히 예민하다는 둥 괜한 염려와 두려움으로 그렇다는 둥 하는 소릴 하는데, 나 역시 아무렇지 않을 때는 세상과 잘 지낼 때이다. 내 곁의 안 믿는 자들이 대체로 늘 그러려니 하였다. 별로 심각하지 않다. 오늘 말씀도 그런 시각으로 읽을 때면 너무 예민한 것 같다. 그냥 그러려니 할 일인데 그걸 너무 유난스럽게 그러는가싶다. “여호와여 주의 눈이 진리를 찾지 아니하시나이까? 주께서 그들을 치셨을지라도 그들이 아픈 줄을 알지 못하며 그들을 멸하셨을지라도 그들이 징계를 받지 아니하고 그들의 얼굴을 바위보다 굳게 하여 돌아오기를 싫어하므로(3).” 그런 자들은 오히려 당당하고 굳건하다.

 

이에 “내가 말하기를 이 무리는 비천하고 어리석은 것뿐이라 여호와의 길, 자기 하나님의 법을 알지 못하니 내가 지도자들에게 가서 그들에게 말하리라 그들은 여호와의 길, 자기 하나님의 법을 안다 하였더니 그들도 일제히 멍에를 꺾고 결박을 끊은지라(4-5).” 예전에 글방에서 교회로 예배를 시작하고 1년쯤 되었을까? 같이 성경공부도 하고 학습과 세례를 받은 아이였다. 그 엄마는 어느 교회 성도였는데 이를 축하하며 화분도 보내었다. 그런데 아이가 점점 신앙 안에서 믿음으로 살려고 할 때, 그러는 줄 알았는데 스스로는 갈등이 많았던가보다. 대학에 진학하고 신앙을 지키는 일이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 지내는 데 있어 걸림이 되었다. 아이는 장문의 문자를 보내고는 교회를 나오지 않았다.

 

그 내용은 우리가 모두 짐작할 것이다. 예루살렘에서 단 한 사람의 의인도 찾아볼 수 없었다는 오늘 본문의 지적이 과장은 아니다. 다들 그런 가운데서 잘만 어울려 산다. 섬기는 교회 사모님이 공황이 왔다는 말을 하면서 의아한 듯 이해할 수 없다는 투의 친구의 말이 나는 오히려 듣기 힘들었다. 이를 앞서 롯에 대하여 베드로 사도의 표현과 같이 ‘이는 이 의인이 그들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함이라’ 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어떨까? 들은 것으로만 내가 그 교회의 사정을 옮겨 적기는 조심스럽다. 앞에 서는 목회자보다 뒤에서 이를 보다 객관적이고 포괄적으로 관찰하는 사모라는 입장이 벙어리 냉가슴 앓는 것 같다. 이를 나는 어릴 때부터 어머니를 보면서 느꼈다. 다소 무시하고 함부로 대하는 이들도 흔하다. 보면 그러는 이들이 교회 장로이거나 권세 잡은 자들이다. 저들의 홀대가 일반성도들에게도 그 영향을 미친다.

 

유다는 비록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기는 하였으나 그것은 위선적이었다. 3-6절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선민의 보편적 타락을 지적하신데 대해 예레미야는 선민이 허물이 많고, 반역이 심하여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한다. “내가 지도자들에게 가서 그들에게 말하리라 그들은 여호와의 길, 자기 하나님의 법을 안다 하였더니 그들도 일제히 멍에를 꺾고 결박을 끊은지라(5).” 하는 이 한 구절의 말씀이 이를 대변한다. 저들은 배은망덕하고 방탕하여 “그들은 두루 다니는 살진 수말 같이 각기 이웃의 아내를 따르며 소리지르는도다(8).” 발정 난 짐승 같을 뿐이다. 즉 하나님의 은혜를 악으로 갚는 유다의 배은망덕을 잘 부각시켜주는 표현이겠다.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은혜를 많은 자들이 대체로 자기 멋대로 갈 길을 간다. 처음부터 그러려니 하였던 아이들에 대해서는 안타까움도 덜하다. 함께 시작할 때 훗날에 이 교회의 기둥이 되어 누구는 장로로 권사로 누구는 심지어 주의 종으로 여길 정도로 믿음 안에서 잘 자랐다. 좋은 대학에 가서 누구는 어디 공대, 무슨 기독교 재단의 대학, 서울대 다음의 서열로 각각 주의 은혜로 함께 감사하며 그 좋은 대학에 들어간 것으로 다 같이 감사하기도 하였다. 그땐 몰랐다. 우리 영혼이 얼마나 미약한지를, 자칫 소홀했을 때 금세 병충해에 취약한 식물처럼 연약했던 것을 말이다. 순간이었고 삽시간에 병들었다. 영혼이 상하는 것은 한순간이다.

 

그렇게 누구는 안 믿는 ‘좋은 상대’를 만나 결혼했다. 연이어 아이도 셋을 낳고 잘 사는 줄 알았다. 비록 거리가 멀어서 교회로 오지는 못해도 간간히 연락을 하고 가까운 곳에서 신앙을 지켜 사는 줄 알았다. 세월은 금세 흘러 저가 마흔 줄이 되었고 신랑의 강압적인 위세에 교회를 떠난 지 오래고 신앙도 버린 지 오래였다. 나는 지금 누구를 생각하며 글을 쓰지만 이런 경우의 영혼들이 허다하다. 그야말로 예루살렘에서 단 한 사람의 의인도 찾을 길이 없을 정도다. 유다는 하나님께서 열방 중에서 택하여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선민이다. 그 자손들로 유일하게 하나님에 대하여 아는 자들이다. 예루살렘은 정의를 행하고 진리를 찾아 행하는 의인들의 도시여야 했다. 그러나 한 영혼의 타락으로 순식간에 이방 민족과 다를 게 없어졌다.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빌 2:15-16).”

 

사실 이와 같은 신앙으로 살려면 세상과 거리를 둬야 한다. 저들과는 다른 각도로 세상을 보고 살아야 한다. 같은 방식으로 돈을 추구하고 사람들로부터 인정 받고자하면 답은 하나뿐이다. 어느 아이의 마지막 장문의 문자처럼 이러저러 해서 교회 오는 게 싫고 부담스럽고 말씀은 거슬린다. 자신이 왜 양심에 꺼려하며 살아야 하는지를 모르겠다며 아이는 소심하고 대범하게 떠났다. 문자를 하고 전화를 해서 한 번 만났으면 했는데 그 뒤로 아이는 증발 상태다. 지금은 얼추 서른 중반이거나 마흔은 되었겠다. 뭘 하고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 알 수 없지만 종종 그 애 생각이 나는 것은 우리가 신앙을 등지는 표본이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좋았다가 하나님과 가까워질수록 교회가 부담되고 세상이 더 자유로운 듯하다. 누구 말처럼 안 믿는 사람들이 더 평안히 잘 사는 것 같다. 거기에 대해 뭐라 말하기가 어렵다.

 

곧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고후 2:16).” 우리는 할 수 없다. 다만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17).” 이를 우리가 순순히 지켜 산다는 일, 그리하여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15)” 이는 나에게서 나는 냄새가 아니라 내 안의 그리스도의 것이기를.

 

잠든 아내가 문자를 남겼다. 길이 미끄러우니까 조심히 운전하라면서도 눈 많이 오면 가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창밖을 보니 길이 멀쩡하고 차들이 뜨문뜨문 지나갔다. 새벽 두 시, 여느 때처럼 눈을 뜨고 세수를 하고 옷을 입고 운전을 하여 교회로 왔다. 추워지면서 교회에서 자는 것은 어려워졌고, 어차피 집에서도 일찍 잠드는 습관으로 초저녁에 잔다. 늘 내 자신에게 독려하고 추슬러 다시 마음을 다잡는 것은 이 시간을 사수하는 일이다. 이른 새벽시간,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서 말씀 앞에 오롯이 앉는 일. 이처럼 읽고 쓸 때 내 삶의 경험이나 일기나 일상의 것들이 말씀으로 살아나서 같이 움직이듯 누가 생각나고 어떤 일이 떠오를 때의 느낌은 놀랍다.

 

오늘 본문의 의인 하나 찾을 수 없는 예루살렘이 오늘 사회이었다가 사람들의 행태로 여겨졌다가 교회의 실상이었다가 내 안의 어떤 근심과 염려로 실은 나의 모습이었다가…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24, 26).” 하여 나로서는, 나는 절대 어떤 아이처럼 교회가 부담스럽고 말씀이 거북하여 떠날 리 없다고 장담할 수 없다. 누가 우울증으로, 혹은 공황으로 힘들어하는 것을 보면서 저들의 신앙과 그 믿음과는 상관없이 우리가 얼마나 연약하고 부족한가를 되새기게 된다.

 

설마 저들이 누구만 못해서 그 영혼이 힘들어할까?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히 12:11).” 주가 더하시는 것으로 더 큰 은혜의 자리로 나아갈 기회다. 태풍이 일어 죽을 고비를 넘기고 있을 때 더 빨리 그 바다를 건널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물 위로 걸어오시는 예수를 만날 수 있었다. 하여 믿음으로 그 거센 물 살 위를 걸어보는 기적도 맛보았다. 비록 우리의 약함으로 또 금세 거센 물속으로 빠졌으나 주가 함께 계시니,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12-13).”

 

그러니 부디, ‘날자! 우울한 영혼이여!’ 누가 우울증으로 힘들어할 때 나는 그것까지도 은혜인 것을 알기를. 누가 내게 당신은 왜 십 수 년이 지나도 낫지를 않는가? 하고 조롱 섞인 의미로 물을 때도 개의치 않는 것은, 이를 통하여 주가 더하시는 은혜가 더 크기 때문이다. 모든 게 주의 뜻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믿음으로다. 내가 사랑하는 성경으로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하여 나는 낫기를 바라는 기도보다 이런 상황으로 주가 더하시고자 하는 은혜로 감사에 감사가 넘쳐나기를…. 딸애가 신부입장 때 아빠 손을 잡고 들어가고 싶다고 했을 때, 갑자기 생각이 많아지고 부끄러움인지 회피본능인지 모르겠으나 이런저런 궁리를 그 상황을 피하고 싶다가도 딸애의 마음을 생각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한다. 나는 예전부터 회피주의자였음을 인정한다. 나름 평화주의자로 보이기도 해서 사람들과 두루두루 잘 지내는 편이었다. 불편한 자리나 부끄러운 일은 피했다. 한 번도 아이 졸업식이나 어떤 행사에 가지 않았다. 혼자 생각은 아이들을 위해서… 하는 마음으로였는데 실은 내가 피하며 살았다. 이것이 불신앙이었음을 회개한다. 나를 부정하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죄악된 모습이었음을 인정한다. 그런 자를 심지어 하나님은 설교자로 세우셨으니… 하나님의 은혜는 무궁하시다.

 

막내 동생이 다음 주일에 우리 교회로 와서 같이 예배를 드리기로 했다. 세 번째 주일에 아버지가 오실 때 오라고 했더니, 형 설교를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며 앞서 두 번째 주일에 오겠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나야말로 동굴 속에 있는 자인가? 누가 새로 오는 것도 어려워하고 그 앞에서 말씀을 전하는 일조차 그러고 보니 없었던 것 같다. 늘 같은 동선에서 같은 사람들로 같은 일에서 어긋나지 않게, 안전하게(?) 살고자 했던 것도 같고…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고전 3:18, 23).”

 

하여 나는 어쩌면 오늘 여기 ‘의인 하나 없는 예루살렘’이 나의 황량한 마음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게 한다.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빌 2:4).” 내게 맡기시는 한 영혼 한 영혼이라 하면서 정작 나는 꼭꼭 숨어있는 것은 아니었는지…. “너희는 그 성벽에 올라가 무너뜨리되 다 무너뜨리지 말고 그 가지만 꺾어 버리라 여호와의 것이 아님이니라(렘 5:10).” 내가 나를 무너뜨리고 꺾어버려야 할 가지는 무엇인지를 생각하다, “어리석고 지각이 없으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이여 이를 들을지어다(21).” 하여 내가 전하여야 할 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가 나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내 앞에서 떨지 아니하겠느냐 내가 모래를 두어 바다의 한계를 삼되 그것으로 영원한 한계를 삼고 지나치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파도가 거세게 이나 그것을 이기지 못하며 뛰노나 그것을 넘지 못하느니라(22).”

 

경계를 두어 나를 지키셨던 주께서 오늘 이르시기를, “내가 이 일들에 대하여 벌하지 아니하겠으며 내 마음이 이같은 나라에 보복하지 아니하겠느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 땅에 무섭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29-30).” 부디 나로 거짓을 전하지 않고 ‘자기 권력’으로 어찌 살아보려 하지 않기를,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31).” 그러므로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1).” 다급한 심정으로 주 앞에 엎드려,

 

주의 인자하심이 내 목전에 있나이다

내가 주의 진리 중에 행하여

허망한 사람과 같이 앉지 아니하였사오니

간사한 자와 동행하지도 아니하리이다

(시 26:3-4).

 

그리하여,

 

나는 나의 완전함에 행하오리니

나를 속량하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발이 평탄한 데에 섰사오니

무리 가운데에서 여호와를 송축하리이다

(11-1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