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하현. 2025. 12. 6. 04:55

 

땅이여 들으라 내가 이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리니 이것이 그들의 생각의 결과라 그들이 내 말을 듣지 아니하며 내 율법을 거절하였음이니라

렘 6:19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시 27:1, 4

 

 

하나님이 나를 모른다 하실까 두렵다. 나는 주를 안다고, 믿었다고 하지만 하나님은 나로 악한 종아 물러가라, 하실까봐 겁난다. 때는 이르러,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2-23).”

 

종종 우리의 믿음이 얼마나 부질없는가 하는 생각을 한다. 정작 믿음이란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이와 같은 말씀으로 안도한다. 그것은 우리가 신념을 자칫 믿음으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신념이란 게 선동과 책동에 의해 군중심리로도 오락가락하는 것이어서 현실은 거짓 정보의 시대로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마 24:4-5).” 하심도 오늘을 두고 하신 말씀이다.

 

꾸준히 ‘댓글부대’가 암약하고 거짓 선동으로 정의를 부르짖는다. 부정선거를 주장하고 종북세력을 운운하는 데 있어 많은 이들이 호응하고 이를 재확산시키는 것이 놀랍기도 하다. 물론 사실일 수 있다. 그래서 시스템을 점검하고 자신들 진영에서 감독을 세우고 수작업으로 개표도 하고 별의 별 증명을 다한들? 한 번 뿌려진 의심의 씨앗은 발아하여 뭘 해도 그리 여겨져서 의심에 의심을 낳는다. 서로 진영이 바뀌어 정권을 잡는다 해도 서로 이로운 쪽으로 재확인하고 다시 점화하여 끝이 없다.

 

그러니 사람과 사람 사이의 주장과 정보는 사람들을 미혹하고, 몽매한 대중은 휩쓸리기 마련이다. 이에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6).” 곧 이와 같은 현상이 점점 더 우리의 믿음을 위협할 것이다. 그리하여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7).” 문제는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8).”

 

결국 우리가 붙들 것은 무엇일까? 그 기준이 명확하여 흔들리지 않을 것은 대체 무엇일까? 오늘 말씀 가운데서도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않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지는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그들을 벌하리니 그 때에 그들이 거꾸러지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6:14-15).”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아찔하다. 거짓 선동과 획책은 지난한 역사 속에서 언제나 준동하였다. 그로 인하여 사람들은 흔들렸다. 여전히 오늘도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하는 말에 다수가 모인다.

 

그러니 결국은 뻔하다. “풀무불을 맹렬히 불면 그 불에 납이 살라져서 단련하는 자의 일이 헛되게 되느니라 이와 같이 악한 자가 제거되지 아니하나니 사람들이 그들을 내버린 은이라 부르게 될 것은 여호와께서 그들을 버렸음이라(29-30).” 후에는 버려질 것이다. 나는 너를 모른다, 하실 것이다. 죄악으로 마비되었던 유대인들은 장차 임할 재앙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들을 일깨우기 위하여 곧 재앙이 임박한 것을 알려야 하는데 서로가 그저 '평강하다, 괜찮다, 다 그런 것이다' 하는 식으로 안이할 뿐이다.

 

오늘 본문은 우리의 장래의 사실을 영적으로 관망하게 한다. 영은 장래의 일을 현실과 같이 취급한다. 장래의 일에 대하여 무관심하게 하는 것은 육이다. 오늘 본문은 “베냐민 자손들아 예루살렘 가운데로부터 피난하라 드고아에서 나팔을 불고 벧학게렘에서 깃발을 들라 재앙과 큰 파멸이 북방에서 엿보아 옴이니라(1).” 하고 경고의 말씀이 울렸다. ‘북방의 적’이 예루살렘을 포위하여 공격하려 한다. 베냐민 지파는 예레미야가 소속한 지파이다. 그의 고향 아나돗으로 예루살렘에서 북동쪽으로 6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적의 침략이 임박함에 따라 예레미야는 경고의 나팔을 울릴 것을 촉구한다. 무장하고 침략자들을 맞아 싸우라고 한다. 자신이 속한 베냐민 자손들이 호명된 것은 예루살렘이 베냐민 지파의 영역에 속했기 때문이다. 드고아는 아모스 선지자의 고향으로서 베들레헴에서 남쪽으로 약 9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다. 벧학게렘은 예루살렘에서 베들레헴에 이르는 도상에 위치해 있다. 여기서 깃발을 들라는 것은 봉홧불을 올리라고 하는 것이다.

 

이에 덧붙여 “아름답고 우아한 시온의 딸을 내가 멸절하리니 목자들이 그 양 떼를 몰고 와서 주위에 자기 장막을 치고 각기 그 처소에서 먹이리로다(2-3).” 시온의 딸, 아름답고 우아한 시온이 멸할까 경고한다. 예루살렘을 ‘하나님의 딸 시온’으로 비유하여 이처럼 아름답고 고귀한 존재로 여겨왔다. 이제 그들에게 수치와 불명예가 뒤따를 것을 경고한다. ‘목자들이 그 양 떼를 몰고 와서 주위에 장막을 치던 곳이다.’ 그런 곳이 여호와로부터 심판받게 될 예루살렘이다. 곧 군대를 거느리고 진군해오는 적군을 ‘목자들의 목축지’로 묘사하고 있다. 그들은 이곳을 지배하며 자기 군사들을 먹이게 될 것이다.

 

4장 5-6절에서 “너희는 유다에 선포하며 예루살렘에 공포하여 이르기를 이 땅에서 나팔을 불라 하며 또 크게 외쳐 이르기를 너희는 모이라 우리가 견고한 성으로 들어가자 하고 시온을 향하여 깃발을 세우라, 도피하라, 지체하지 말라, 내가 북방에서 재난과 큰 멸망을 가져오리라.” 하는 경고의 말씀이 있었다. 점점 더 견뎌내기 어렵고, 반목과 불화가 현실적인 적대감으로 바뀔 것을 우리는 이미 경험하고 있다. 이는 현재 우리 사회의 문제만이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극우화현상은 심화하여 백인우월주의나 혈통주의, 자유수호를 외치는 자국주의가 팽배해지면서 벌어지는 일들이다. 이미 모든 정보는 홍수처럼 밀려와 사람들을 휩쓸고 있다.

 

어제도 산책을 하고 추위를 피해 카페에 들러 커피를 한 잔 하는데 옆자리 노인 둘이 각각 자신들의 핸드폰으로 동영상을 크게 틀고 보면서 뭐라 열띤 토론(?), 울분을 토하고 있었다. 저들 목소리가 워낙 커서 아내와 나는 슬그머니 잔을 들고 밖으로 나왔지만 점점 더 사람들은 개인방송에 의존하고 자신들 성향에 따라 이를 선택한다. 그럼 핸드폰은 자동으로 알고리즘이 형성되어 계속 그런 쪽으로의 유도하며 그와 같은 주제의 방송이나 개인방송을 유도한다. 마치 개미지옥에 갇힌 사람들 같다. 선동과 책동이 돈벌이 수단이 되고 상상 이상으로 돈벌이가 되는데, 그럼 그럴수록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언변과 충격적 화면으로 짜깁기하여 사람들을 속이기도 한다. 특히 노인들이 그렇다고만은 할 수 없다. 자신들의 처지와 상황에 맞게 이를 지지하고 그 흐름에 편승하는 것은 연령을 초월한다.

 

결국 오늘의 이 모든 현상은 ‘하나님의 위탁을 받은 재앙이다.’ 죄인을 추격할 때 이 모든 것은 그럴 듯하다. 오늘 성경은 ‘베냐민 자손’으로 한정하여 경보를 내리고, 저들 주민의 안전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면 무엇이든 다 행하라고 명한다. 드고아는 예루살렘 북방으로 나팔을 불어 그 성의 주민들로 하여금 궐기하여 경계에 임하도록 하고 있다. 벧학게렘은 ‘포도원의 집’이란 뜻으로 예루살렘과 드고아 사이의 언덕에 위치하였다. 거기서 일명 봉홧불을 올려야 한다. 깃발을 들라는 것이다. 재앙이 ‘북방에서’ 엿보아 오기 때문이다. 완강히 저항할 태세를 갖추어야 한다. 그럴 수 있도록 신호하는 것이다.

 

이 말씀은 반어적이다. ‘스스로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가장 좋다고 생각되는 방법을 취해 보라. 그러나 모든 것이 헛수고가 될 것이다. 최선을 다 해도 그 결과는 멸망밖에 남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심판에 거역하려는 것은 모두 헛일이기 때문이다.’ 공격의 대상은 ‘시온의 딸’이다. 시온은 아름답다(2). 이 여인은 온갖 좋은 것과 부드러운 것으로 양육되었다. 유순하고 연약하여 그 발바닥으로 땅을 밟아 보지도 않았다.

 

“또 너희 중에 온유하고 연약한 부녀 곧 온유하고 연약하여 자기 발바닥으로 땅을 밟아 보지도 아니하던 자라도 자기 품의 남편과 자기 자녀를 미운 눈으로 바라보며 자기 다리 사이에서 나온 태와 자기가 낳은 어린 자식을 남몰래 먹으리니 이는 네 적군이 네 생명을 에워싸고 맹렬히 쳐서 곤란하게 하므로 아무것도 얻지 못함이리라(신 28:56-57).”

 

곧 이 여인은 원수에게 저항할 능력이 없다. 전쟁하는 자들은 고생을 견디는 능력이 월등하다. 그러나 늘 주의 보호하심으로 살았던 예루살렘은 필요한 인내심이 부족하다. 고난을 감당하기 힘들다. 상대적으로 ‘바벨론의 딸’은 그 장수들과 군대로 목자들과 양에 비유되어 예루살렘을 점령할 것이다. 병력과 군대가 질서 있게 밀고 들어오는 양떼 같다. 목자를 따르듯 병졸들은 무수하다. 그 지휘관의 명령 하에 움직인다. 상대적으로 ‘시온의 딸’은 집에 거하면서 구애받는 유약한 딸이다. 여기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곧 하나님은 자기 자신의 소유였던 성지와 거룩한 도성조차 멸망시키기 위해 갈대아인들에게 어떤 명령을 내리신다. “너희는 그를 칠 준비를 하라 일어나라 우리가 정오에 올라가자 아하 아깝다 날이 기울어 저녁 그늘이 길었구나(4).” 여기서 ‘너희는 그를 치기를 준비하라’고 명령하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그는 모든 무리를 관할하시는 ‘만군의 여호와’시다. 하나님은 죄악된 백성을 공격하기 위해 “일어나라 우리가 밤에 올라가서 그 요새들을 헐자 하도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하노라 너희는 나무를 베어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목책을 만들라 이는 벌 받을 성이라 그 중에는 오직 포학한 것뿐이니라(5-6).” 하실 때, 이를 보면서 악한 날에는 악한 자들을 들어 우리 곧 하나님의 자녀들을 징계하신다.

 

그리하여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히 12:8).” 하시는 말씀으로도 우리가 이를 당하는 이유가 분명해진다. 곧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1:32).” 오늘 본문의 이 기이한 현상을 이해할 수 있는 키워드이다. 우리로 세상과 같이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징계를 더하시기도 한다. 이를 통하여 죄를 깨닫고 회개하기를, 돌이켜 주의 이름을 부르며 주의 도우심으로 나아오기를….

 

그런데 이를 가로막는 것이 거짓 선동이었다. “예루살렘아 너는 훈계를 받으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 마음이 너를 싫어하고 너를 황폐하게 하여 주민이 없는 땅으로 만들리라(8).” 하심인데 이는 매우 비극적이며 두려운 일인데도 “내가 그 땅 주민에게 내 손을 펼 것인즉 그들의 집과 밭과 아내가 타인의 소유로 이전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12).” 도대체 어찌 된 일인지 사람들이 듣지를 않는다. 아무리 경고해도 ‘에이, 설마’ 한다. “이는 그들이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탐욕을 부리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13).” 먼저는 탐욕 때문이다. 보면 다 자신들의 이익만을 우선하느라,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14).”

 

하는 말과 온갖 거짓 정보에 속아 넘어간다. “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않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지는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그들을 벌하리니 그 때에 그들이 거꾸러지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15).” 마치 오늘 날의 선동가나 그것들에 부화뇌동하는 교회나 다중의 쏠림현상 같다. 이리저리 우르르 몰려다니는 안개 같다.

 

“이는 벌 받을 성이라” 하고 말씀하시는 그 심정은 어떠하실까? 마침 오늘 우리 사회의 계엄과 내란과 그로 인한 온갖 거짓과 책동과 이권다툼을 보고 일컫는 듯하다. ‘이 성읍은 진노의 벌을 받고 하나님의 공의로 벌 받을 성이다.’ 그 형벌의 시기가 바로 이 때다. 죄악의 길에서 태평하게 안심하고 있는 자들에게는 틀림없이 그 결국은 “그들이 엎드러지는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그들을 벌하리니 그 때에 그들이 거꾸러지리라.” 하심인데 이는 분명한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이 그들을 치기로 준비하라고 말씀하셨다. 갈대아인들의 전쟁 결의가 하나님의 의향에 의해 동원되었다. 곧 오늘의 악함과 거짓과 조직적인 조작 행위들이 실상은 하나님이 이 시대에 필요로 하심이다. 이로써 우리 믿는 자들, ‘시온의 딸’ 같은 우리들이 고초를 겪는다.

 

“내가 그를 보내어 경건하지 아니한 나라를 치게 하며 내가 그에게 명령하여 나를 노하게 한 백성을 쳐서 탈취하며 노략하게 하며 또 그들을 길거리의 진흙 같이 짓밟게 하려 하거니와 그의 뜻은 이같지 아니하며 그의 마음의 생각도 이같지 아니하고 다만 그의 마음은 허다한 나라를 파괴하며 멸절하려 하는도다(사 10:6-7).”

 

고로 오늘 이 악한 날에는 악한 자들이 기승을 부리며 암약한다. 하나님의 마음이 떠날 때 그곳은 황무하다. 주민이 없고 폐허가 된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마 23:38).” 하심인데 그러기까지 얼마나 많은 선지자와 말씀과 참고 또 기다리심이 오래었는지 우리는 익히 잘 안다. 나는 나의 젊은 날들을 돌아볼 때 이와 같은 사실 앞에서 유구무언이다. 뭐라 변명할 게 없다. 주의 긍휼과 은총이 아니면 오늘의 나는 나로 이처럼 주 앞에 서지 못했다. 차마 떠올리기도 힘든 죄악의 현장에서도 하나님은 나를 보호하시며 기다리셨다. 주의 인자하심이 나를 살렸다. 죄는 하나님의 진노를 쌓는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롬 2:4-5).”

 

그러므로 나는 안도하고, 염치없지만 감사하는 것은 내가 한 게 너무 없다. 아이들을 양육하고 교육하는 부모로서도 엉터리였고, 주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세상과 짝지어 살던 날들이 고스란히 기억에 있다. 눈물로써 갚을 길 없어 이 몸 바친다는 찬송처럼, 이제 나의 남은 날들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하시는 말씀 앞에 엎드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시 27:1).

 

하는 오늘 시편의 찬송과 함께 구하는 것은,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4).

 

나는 그래서 울었다. 뒤늦게 목사안수를 받으면서 더는 나는 죽었고 주가 사셨으니, 나는 내 것이 아니고 주가 나의 모든 것이 되어 주시를. 그리하여 더러는 누가 나더러 뭐라도 하라 할 때에 나는 다만 말씀으로, 기도로, 내게 함께 하게 하신 한 영혼으로 그 상한 심령을 주께로 인도할 수 있기를. 마지막으로 세미나를 하며 집회 중에 나는 그렇듯 기도하며 목 놓아 울었다. 죽어 마땅한 나였으므로 더는 내가 사는 게 아니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으로 나의 남은 생은 주의 것이기를…. 그러할 때에,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시고

내 원수를 생각하셔서 평탄한 길로 나를 인도하소서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11, 1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