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 마음이 그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하현. 2025. 12. 7. 04:41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둑의 소굴로 보이느냐 보라 나 곧 내가 그것을 보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 7:11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이시니 내 마음이 그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그를 찬송하리로다

시 28:7

 

 

하나님은 거짓을 싫어하신다. 가증스러운 것을 못 견뎌하신다. 오늘 본문은 이를 지적하고 있다. 하여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보라 너희가 무익한 거짓말을 의존하는도다(7-8).” 이것이 어찌된 일일까? “자식들은 나무를 줍고 아버지들은 불을 피우며 부녀들은 가루를 반죽하여 하늘의 여왕을 위하여 과자를 만들며 그들이 또 다른 신들에게 전제를 부음으로 나의 노를 일으키느니라(18).”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이 나를 격노하게 함이냐 자기 얼굴에 부끄러움을 자취함이 아니냐(19).”

 

오늘 우리가 우리의 신앙을 저버리는 것도 모자라서 교회를, 믿는 자들의 공동체를 훼손하는 데 있어 세상과 교회를 희석하고 융합하여 혼합주의로 병들게 한다. 하여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유다 자손이 나의 눈 앞에 악을 행하여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집에 그들의 가증한 것을 두어 집을 더럽혔으며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 도벳 사당을 건축하고 그들의 자녀들을 불에 살랐나니 내가 명령하지 아니하였고 내 마음에 생각하지도 아니한 일이니라(30-31).” 

 

하여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 도벳 사당을 건축하였고, 성전의 악행 이외에도 온갖 더러운 행위들이 있었다. ‘힌놈의 아들 골짜기’란 곳은 예루살렘 남쪽에 위치해 있다. 그들은 거기에 ‘도벳’이란 사당을 건축하였다. 이 ‘도벳’이란 이름은 ‘태우는 곳’을 의미하는 아람어에서 유래한다. 이곳에서는 사람을 제물로 바쳐 태워 죽인 바 있다. 아하스와 므낫세 통치 기간에 그런 일이 있었다. “이스라엘의 여러 왕의 길로 행하며 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의 가증한 일을 따라 자기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며 또 산당들과 작은 산 위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왕하 16:3-4).”

 

이처럼 사람을 제물로 바쳐 불에 태우는 끔찍한 관행은 몰렉 신에 대한 제사와 관련이 있다. “너는 결단코 자녀를 몰렉에게 주어 불로 통과하게 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 18:21).” 그럼에도 여전하여서 “예루살렘 집들과 유다 왕들의 집들이 그 집 위에서 하늘의 만상에 분향하고 다른 신들에게 전제를 부음으로 더러워졌은즉 도벳 땅처럼 되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렘 19:13).” 오늘 본문에서도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날이 이르면 이 곳을 도벳이라 하거나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라 말하지 아니하고 죽임의 골짜기라 말하리니 이는 도벳에 자리가 없을 만큼 매장했기 때문이니라(7:32).”

 

이 얼마나 끔찍하고 음산한 이야기인가? 결국 오늘에 이르러는 위선적인 예배와 그 결과에 대한 경고이다. 먼저는 백성들을 설득하여 회개시키기 위한 설교이다. 이 설교를 선포하라고 선지자에게 내려진 명령이다. “너는 여호와의 집 문에 서서 이 말을 선포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예배하러 이 문으로 들어가는 유다 사람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이 곳에 살게 하리라(2-3).” 이것은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이다(1).

 

이 말씀을 선포해야 할 장소는 여호와의 집 문 앞에서이다. 이 문은 성전의 바깥뜰이나 백성의 뜰로 나가기 위해서는 통과해야 할 장소이다. 이곳에서 말씀을 전한다는 것은 제사장들에게 모욕감을 주는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저들을 두려워해서 주저하지 않게 하셨다. 직접적이고 실질적으로 제사장들 면전에서 이와 같이 선포하게 하셨다. 선포해야 할 대상은 여호와께 경배하러 이 문으로 들어가는 유다인이다. 이 시기는 삼 대 절기 중 하나였다. 절기 때는 전국 방방곡곡에서 남자들이 하나님의 집 뜰로 와서 여호와 앞에 헌신하도록 되어 있다. 그때 저들은 빈손으로 나아오지 않게끔 되어 있다. 이에 자기들의 특권을 의지하지 말라는 경고를 전달하기에 적당한 시기였다.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이라 해도 불신자가 들어야 하는 말씀과 같은 설교가 필요하다. 곧 심판은 예외가 없다. 죄악도 같다. 우리가 저들과 다른 것은 노아가 당대에 은혜를 받은 것과 같다. 우리가 은혜로 오늘 주를 나의 구주로 믿는다. 결코 저들보다 좀 나은 어떤 의와 선으로 얻어지는 은혜가 아니다. 하여 ‘영으로 주를 예배’하려고 주 앞에 나올 때 말씀은 선포된다. 이는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빌 3:3).”

 

곧 우리의 모임은 어떤 주체에 의한 광장이 아니다. 선동의 자리가 아니다. 설교를 선동의 수단을 쓰는 모습이 요즘 우리 사회에서, 거리에서 자주 들린다. 군중심리로 저들이 소리치는 외침은 공허할 따름이다. 설교 자체의 범위는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다. 그리스도인으로 하나님을 존중하고 경외해야 할 의무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받으러 온 자들에게 세례요한은 먼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하였다. 이는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 3:8, 11-12).”

 

그러므로 우리 스스로 믿는다는 감정과 느낌으로 그와 같은 충동을 의지해서는 안 된다. 말세의 때에 믿음을 보지 않으신다고 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눅 18:8).” 이는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눅 3:8).” 하는 선포로 이어진다. 회개에 합당한 일이라 하면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곧 우리가 주를 인정함으로 경외하고 경외함으로 우리의 우상 숭배 일체를 포기하는 일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우상 숭배보다 우리 안에 무의식적으로 자리 잡고 있는, 하나님보다 우선하거나 같이하는 모든 것이 우상이고 이를 신봉하는 것이 숭배다. 돈이나 가족이 우선이 되겠고, 자기 일이나 어떤 관계를 우선하는 일도 그러하다. 흔히 그럴 수 있지, 하고 스스로 허용하는 모든 것에 우상이 깃든다. 뿐만 아니라 형식주의와 거룩주의도 그러하다. 이는 모두 지나치게 의로운 자로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나 ‘남들을 따라 하는’ 모든 것이 그럴 수 있다.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은 회개하여 우리 몸에 밴 생활 태도와 습관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하나님께 돌아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도 그들의 평안을 회복시키시는 일이다. 그 평화를 공고히 하려면 주신 바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여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하신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이 곳에 살게 하리라(렘 7:3).” 우리가 사는 날 동안, 그 길에서 우리의 행위가 얼마나 많은 오류와 실수가 존재했는지, 그런 가운데 죄를 인정하지 못하고 사는 게 얼마나 많은가를… 돌이켜 주 앞에 자복하는 용기와 승복하는 결단이 필요하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3년 반 동안 예수님과 동행하면서도 얼마나 저들의 자신들의 모난 성경과 편협한 판단과 완고함으로 주를 따르고 섬겼던가? 수제자 베드로는 번번이 주께 혼나면서도 나대다가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하는 이 놀라운 고백 뒤에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23).” 이것이 우리의 실상이다.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였다.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마 20:20-21).” 그러니 우리들 속내도 같은 것이라, “여짜오되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막 10:37).” 할 때에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지 못함이었다. 그런 가운데 결국 제자들 가운데 하나는 자신의 신념과 맞지 않아서 예수를 팔았고, 예수가 붙잡히시자 모두가 뿔뿔이 흩어져 옛 생활로 돌아갔다. 아,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요 11:27).”

 

하는 이와 같은 믿음이 귀하고 복되나 이것은 결코 우리의 신념도 판단에 따른 의지나 결단도 아닌 것이다. 우리의 회개가 선행되고 성령이 이와 같이 함께 하실 때, 십자가의 보혈과 부활하심으로의 사실이 총체적으로 이루어져 우리의 궁극적인 믿음이 된다. 믿음은 실상이 있고 이것은 우리 안의 증거가 된다. 우리가 온전히 믿음으로 따를 때 그 심중에서 거짓은 물러간다.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보라 너희가 무익한 거짓말을 의존하는도다(렘 7:4, 8).”

 

그러므로 바울은 성전의 의미를 우리 몸으로 가져왔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이는 곧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녀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고전 6:15).” 하면서 우리가 일상을 살면서 그 자체가 성전에서의 예배인 것을 분명하게 전하였다. 그러므로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19).” 이는 우리의 어떤 노력, 경건주의나 거룩주의로 스스로 애씀으로 된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20).”

 

어제는 모처럼 딸애와 산책을 하고 도넛과 커피를 사서 돌아왔다. 그러는 동안 옆에서 재잘거리듯 결혼준비에 따른 이야기와 신혼여행지에 대한 이야기 등을 설명하거나 알려주었다. 나야 거의 들어도 모르지만 나란히 앉아 피부과를 다녀온 이야기를 할 때 딸애가 팔을 걷어서 보여주는데 아직도 애기 때 그대로여서 울컥하였다. 내 눈에는 여전히 재잘거리는 아이만 같은데 어느새 서른다섯이 되면서 결혼을 한다고 하니 코끝이 찡해서 혼났다. 내가 못할 것 같아서 그러는지 자기랑 같이 신부입장을 해야 한다는 둥 어쩌고 하면서 수다를 떠는 모습에서 나는 자꾸 딸애 어릴 때 그 모습 그대로여서 신기하였다. 그 이름의 뜻과 같이 하나님을 전하는 자로 살기를, 그 삶이 오늘까지 이르러 은혜의 증거인 것을, 나는 속으로 되새기며 감사할 뿐이었다.

 

오늘 말씀에서의 거짓된 삶과 참된 삶의 차이는 간단하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모든 삶 가운데서 하나님이 인도하셨고 함께 하셨음을 생활 그 자체로 드러내는 일. 하나님을 나타내고 증거 하는 삶이란 곧 자기기만을 믿음이라 여기고 사는 게 아니라 오직 주를 신뢰하고 인정함으로 그 삶의 여정이 곧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나타낼 수 있는 것, 그리하여 곁에 있는 모든 이들이 이를 보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알게 하는 것.

 

“그 날에 네가 내게 범죄한 모든 행위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것은 그 때에 내가 네 가운데서 교만하여 자랑하는 자들을 제거하여 네가 나의 성산에서 다시는 교만하지 않게 할 것임이라(습 3:11).” 하신 것과 같이 주 앞에 투명하고 정직한 삶으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17).” 이를 딸애의 오늘을 보면서 주 앞에 감사하게 된다. 자주 울컥, 하여 큰일인데 다들 또 그러려니 해주어서 다행이기도 하다. 나는 이제 병적으로 감사하다. 돌아보면 모든 게 감사하지 않은 게 없다. 이것도 병이라면 나는 기꺼이 환자이다.

 

C. S. 루이스의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서 사탄인 저는 성도들을 ‘환자’라 칭하고, 예수를 ‘원수’라 하는데 나는 그러한 표현이 작가의 깊은 성찰과 묵상에서 나온 것을 인정한다. 저들에게 우리는 환자가 맞다. 저들에게 예수는 원수인 것도 맞다. 그러나 이런 주장이 얼마나 경박하고 쓸모없는 것인가를 깨우쳐 준다. 만약 여호와의 전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자기 죄에 대한 변명에서 벗어날 수 있다. 자기주장이나 기만으로 신앙이라 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우리가 그의 자녀이면 우리도 거룩하다. 따로 어떤 조건이 붙지 않는다. 다만 이를 알면서 나는 병적으로 울컥거리며 감사할 것들뿐이다. 모두가 아등바등 산다고 사느라 죽지 못해 산다고들 하는 세상에서 나는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태평하다. 어느 순간부터 다들 그러려니 하는 것도 신기하다.

 

이 작은 공간에서 하나님의 교회를 이루어가고 있는 것도, 비록 아무런 성과도 어떤 이룩한 것도 없이 이런 말 하기는 민망스러우나 나로 하여금 이 앞에 앉아 말씀을 묵상하고 설교를 하게 하심이 그저 감격스럽다. 오직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순종뿐이다. “오직 내가 이것을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내가 명령한 모든 길로 걸어가라 그리하면 복을 받으리라(렘 7:23).” 하신 말씀만 붙든다. 그 뒤에 이어지는 우리의 허물과 실수를 주 앞에 아룀으로, “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니라(레 26:12).” 하신 것으로 됐다. 이를 붙들 뿐이다.

 

세상이 아무리 어떻고 교회들이 어쩌니 해도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31:33).” 나는 아이를 보고, 나의 일생을 보고, 오늘을 보고, 내일을 상상하면서도 “내 처소가 그들 가운데에 있을 것이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겔 37:27).” 하여 이처럼 주 앞에 나온다. 내가 할 수 있는, 해야 하는, 주가 주시는 능력으로….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계 21:7).”

 

이에 궁극적으로는,

 

내가 주의 지성소를 향하여

나의 손을 들고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시 28:2).

 

 

여호와를 찬송함이여

내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심이로다

(6).

 

그러므로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이시니

내 마음이 그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그를 찬송하리로다

여호와는 그들의 힘이시요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의 구원의 요새이시로다

(7-8).

 

그리하여,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며 주의 산업에 복을 주시고

또 그들의 목자가 되시어 영원토록 그들을 인도하소서

(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