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 9:23-24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이는 잠잠하지 아니하고 내 영광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심이니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영원히 감사하리이다
시 30:11-12
우리가 믿는 신앙은 하나님이 우릴 찾아오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기 위해 산 속으로 들어가거나 은둔의 생활을 하는 그런 종교가 아니다. 우리가 믿고 우리의 의지에 따라 하나님을 섬기고 주를 바라는 게 아니라, 이를 불가항력적인 은혜라 하여 “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4-6).” 하고 분명히 하신다. 곧 오늘 내가 믿는 자로 사는 것은 자유의지에 따른 게 아니다.
이를 이사야서는 확실히 한다.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사 65:1).” 하고 진술하였는데,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 들은 그 대상이 이방인이거나 하나님을 멀리 떠난 자들을 가리킨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직접 ‘물음을 받았으며’, ‘찾아냄이 되었으며’ 하신다. 이는 수동태로 저들, 곧 우리 자신이 물은 게 아니고, 찾은 게 아니다. 하나님이 그리 물음이 되었고, 찾아냄이 되셨다. 다시 말하면 ‘물음을 받았다, 찾아냄이 되었다’는 것은 ‘물음과 찾음’을 ‘당하였다’는 것이다. 곧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인간이 하나님을 찾는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찾으시는 종교임을 분명히 한다.
또한 하나님이 이방인도 부르신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이를 바울은 직접 인용하여 설명한 바 있다. “이사야는 매우 담대하여 내가 나를 찾지 아니한 자들에게 찾은 바 되고 내게 묻지 아니한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말하였고(롬 10:20)” 이어서 이사야의 “내가 종일 손을 펴서 자기 생각을 따라 옳지 않은 길을 걸어가는 패역한 백성들을 불렀나니(65:2).” 하신 것을 바울은 받아서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르되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였느니라(롬 10:21).” 하고 오늘의 관계를 정확히 밝힌다.
곧 우리가 <옳지 않은 길을 걸어가는 패역한 백성들>로 사는 데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이를 이사야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곧 동산에서 제사하며 벽돌 위에서 분향하여 내 앞에서 항상 내 노를 일으키는 백성이라(65:3).” 정작 하나님이 물음을 당하고, 찾음을 당하는 그 대상은 ‘항상 내 노를 일으키는 백성’들로 주의 자녀이며 권속들을 지칭한다. 그런 그들의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 노하시는가?
첫째, ‘곧 동산에서 제사하며’ 하시는데, 이는 이방의 우상 숭배를 뜻한다. 이방인들은 주로 수풀 속에서 제사 의식을 가졌다. 실제 우리의 무속적인 사고나 그 행위도 자연 속에서 신비로운 어떤 기운을 찾고 의지하며 두려움의 대상으로 섬겼다. 마을마다 솟대를 세우거나 오래된 나무를 신령하게 여겼다. 그래서 선왕당(仙王當)을 짓고 성황신(城隍神)을 모신다고 했다. 성황신은 서낭신이라 하여 마을과 토지를 지켜준다고 믿었다.
둘째, ‘벽돌 위에서 분향하여’라 하였는데, 이는 벽돌 위에 미신적 주문이나 형상 등을 새기고 그 앞에 기도하였다. 가령 절이나 무당집에 가면 벽마다 온갖 잡신의 형상이 그려져 있고, 형형색색의 분칠을 하여 그 앞에 분향(焚香)하였다. 향을 피우고 예불을 올리는 의식의 일종을 뜻한다.
셋째, ‘내 앞에서 항상 내 노를 일으키는 백성이라’ 하시면서, 그것도 한 번 그런 게 아니라 ‘계속적으로’ 그렇듯 하나님을 거역하였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것으로 내 질투를 일으키며 허무한 것으로 내 진노를 일으켰으니 나도 백성이 아닌 자로 그들에게 시기가 나게 하며 어리석은 민족으로 그들의 분노를 일으키리로다(신 32:21).” 하고 하나님은 하나님이 택하신 ‘이스라엘’을 향해 그 뜻을 분명히 하셨다.
이에 지혜는 말하길, “내가 불렀으나 너희가 듣기 싫어하였고 내가 손을 폈으나 돌아보는 자가 없었고 도리어 나의 모든 교훈을 멸시하며 나의 책망을 받지 아니하였은즉 너희가 재앙을 만날 때에 내가 웃을 것이며 너희에게 두려움이 임할 때에 내가 비웃으리라(잠 1:24-26).” 한 것도 하나님이 늘, 항상, 먼저 찾아와주시고 용서를 거듭하시기나 이를 마치 대수롭지 않은 듯 여기는 것이다.
이를 오늘 본문으로 가져오면 ‘거짓과 속임’으로 나타낸다. “네가 사는 곳이 속이는 일 가운데 있도다 그들은 속이는 일로 말미암아 나를 알기를 싫어하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6).” 속인다는 것은 진실을 은폐하는 것으로 가릴 게 있고 숨길 게 많을 때 거듭하여 거짓은 진실처럼 여겨지게 된다.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내 딸 백성을 어떻게 처치할꼬 그들을 녹이고 연단하리라(7).” 하심으로 오늘 우리가 살면서 이런저런 겪는 일의 여러 어려움의 출처가 명확해진다.
바울은 이를 명확히 설교하였다.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1:32).” 이를 좀 더 단도직입적으로 하면 죽여서라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세상과 같이 멸망당하는 것을 막으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히 12:10-11).”
다시 말해서 오늘의 여러 어려움이 실은 우리의 판단과 자기 결정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우리로 하나님을 만나고 찾게끔 선으로 바꾸시는 것이다. 가령 야곱이 형 에서를 속여 장자의 명분을 가지고 아버지의 이삭의 축복을 받은 것처럼. 그로 인하여 밧단 아람 라반 삼촌의 집으로 도망가 레아와 라헬을 위시하여 네 명의 아내와 열두 명의 아들을 얻은 것처럼. 하나님은 이와 같은 야곱의 선택을 선으로 바꾸심으로 약속의 민족, 이스라엘을 형성하신 것처럼….
오늘 본문은 “내가 이 일들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벌하지 아니하겠으며 내 마음이 이런 나라에 보복하지 않겠느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9).” 하심은 죄는 죄로 남아 우리의 가는 길에 걸림이 되게 하나 그것으로 주를 바라며 찾는 계기도 되는 것이어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그들이 내가 그들의 앞에 세운 나의 율법을 버리고 내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며 그대로 행하지 아니하고 그 마음의 완악함을 따라 그 조상들이 자기에게 가르친 바알들을 따랐음이라(13-14).” 하시며 그 죄악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밝혀주고 계신다. 곧 우리 성도들이 죄악된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는 궁극적으로 선한 일을 행하도록 하기 위하심이다.
그렇다면 죄를 깨달아야 한다. 죄인임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된다. 세상은 악하기 그지없다. 그런 세상에서 우리들을, “내가 광야에서 나그네가 머무를 곳을 얻는다면 내 백성을 떠나 가리니 그들은 다 간음하는 자요 반역한 자의 무리가 됨이로다(2).” 고대 근동에서는 여관이나 유숙하는 집이 거의 없었다. 다만 왕래하여 오가는 대상들이 유숙하는 공공장소가 더러 있었다. 나그네들은 보통 여기서 유숙하였다. 그곳에는 가구나 음식 같은 것이 갖추어져 있지 않았다. 대부분 지붕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사막의 짐승들이 출몰하면 막아줄 경계 정도만 간신히 갖추었다. 예레미야는 이처럼 불편한 곳이라도 있으면 거기로 피신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 백성에게 내릴 참혹한 광경’을 목격하지 않아도 되겠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한탄하는 것이다.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죽임을 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울리로다(1).” 하나님은 그러나 예레미야의 소망을 들어주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오히려 예레미야로 하여금 악한 예루살렘 백성들의 한 가운데 살게 하셨다. 더불어 살아가면서 그 심령의 고통은 물론 육체적인 고통도 함께 받게 하셨다. 결국 우리는 악인으로 인하여, 다시 말해서 죄악된 세상으로 인하여 더불어 고통을 당하면서 그 심령이 상하기도 한다. 이 땅에서 보면 저는 우울하였고 불안하였으며 심지어는 공황에 시달리는 것이라 여겨진다. 울고 싶고 도망쳐 어디 혼자 숨고 싶은 그런 심정이었다.
내가 아는 분들 가운데 믿음으로 그 사명을 다하며 사는 이들이 공황이나 불안, 우울을 호소하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물론 개인의 어떠한 질고로 인하여 그와 같은 증상이 파생되었지만 궁극적으로는 주의 길을 가다 그러한 경우가 수두룩하다. 어느 목사의 사모는 어디 선교지로 떠났다가 채 1년도 못 돼 돌아오면서 빈손으로 모든 생활을 다시 시작해야 했다. 자식도 많고 당장에 먹고 살 길은 물론 숙소도 없이 되돌아오게 된 경우이다. 그런 결정과 결과가 무엇인가는 차치하고 당면한 현실에서도 사역을 감당해야 했던 목사와는 달리 사모는 결국 공황이 왔고 스스로도 억지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속수무책이 되었다.
또한 누구는 열심을 다해 교회에 충성하고 자신들의 신앙을 지키며 주 앞에서 성실하게 산다고 살았는데 이런저런 일로 우울증이 와서 뭘 하려 할 때마다 급 불안으로 몸이 땅 속에 가라앉는 것처럼 무겁고 슬퍼진다. 나는 예전처럼 저들의 원인을 분석하지 않는다. 다만 지금의 현상에서 공통적인 것은 자신들의 문제가 아니라, 악한 세상으로 인해 그 심령이 상한 것이라고 본다. 이를 베드로는 롯을 통해 진술하면서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 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이는 이 의인이 그들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함이라)(벧후 2:7-8).”
즉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함이라’는 진단을 내린 바 있다. 곧 오늘 예레미야의 눈물로 그 의미는 더욱 뚜렷해진다. 아이러니하지만 하나님은 이로써 예레미야로 하여금 선을 행하도록 하기 위해, 악한 예루살렘 백성들 중에 살게 하셨다! 하여 선지자로서 그에게 알게 하신다. “네가 사는 곳이 속이는 일 가운데 있도다 그들은 속이는 일로 말미암아 나를 알기를 싫어하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6).” 아, 이 비극적인 현실 속에서 우리는 무엇으로 선을 이룰 수 있을까? 악한 세상을 떠나면 악으로 인해 고통당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선을 행할 기회는 없다.
이를 바울 사도의 깨달음으로 듣는다면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이는 우리 모든 믿는 자들이 공통적으로 겪고 고백하게 되는 실상이다.
누구는 자신들의 능력으로 적당히 잘 살 수 있다. 학력도 재산도 적당하여서 남들처럼 살자고 들면 소위 상위권으로 남부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주가 저들을 붙드셨고, 그것은 난해한 질병으로 그 원인도 불분명한 가운데 고꾸라지게 하셨다. 엎드려 주만 바라다가 기독교 대안학교를 시작하게 되었고, 그야말로 제 몸 하나 건사하기 힘든 가운데서 하나님의 학교를 운영하게 하신 것이다. 그러니 저들은 주 앞에 엎드린다. 모든 일과가 끝나면 기도실에 엎드려 지친 몸을 주 앞에 쏟으며 기도로 말씀으로 버틴다. 그야말로 하루하루 버텨야 한다. 마치 오늘 본문의 예레미야 선지자를 보는 듯하다. 더러 이상한 학부형과 아이들, 교사들로 언제 어떤 돌방상황이 닥칠지 모르는 가운데… 그 심령이 상하여 주를 바란다.
이에 예수님은 요구하신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마 5:14-15).” 이를 우리의 사명으로 부과하셨는데 그에 따른 것으로,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11-12).” 오히려 오늘의 이 고통과 어려움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신다. 뿐만 아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16).”
이것이 오늘 악에 빠진 예루살렘에서 고통당하는 예레미야의 현실이었고, 우리의 삶이었다. 이는 거짓과 오욕의 세상을 사는 동안 “의인의 수고는 생명에 이르고 악인의 소득은 죄에 이르느니라(잠 10:16).” 이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며,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시 73:28).
고로 오늘 우리의 이 죄악된 세상 가운데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으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렘 9:23).” 모두가 자기 잘난 맛에 살고 가진 것으로 만족하여 쾌락을 즐기는 세상에서,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24).”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자랑하리니,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거룩함을 기억하며 감사하라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시 30:4-5).
그러므로 구하오니,
여호와여 들으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를 돕는 자가 되소서 하였나이다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10-11).
이런저런 어려운 사정으로 저마다 주의 이름을 부를 때 주는 영광을 받으신다. 우리가 주를 아는 것으로 주는 기쁨을 삼으신다. 곧
이는 잠잠하지 아니하고
내 영광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심이니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영원히 감사하리이다
(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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