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언약은 내가 너희 조상들을 쇠풀무 애굽 땅에서 이끌어내던 날에 그들에게 명령한 것이라 곧 내가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순종하고 나의 모든 명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또 너희 조상들에게 한 맹세는 그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리라 한 언약을 이루리라 한 것인데 오늘이 그것을 증언하느니라 하라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여 이르되 아멘 여호와여 하였노라
렘 11:4-5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 같이 되지 말지어다 그것들은 재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가지 아니하리로다
시 32:1
가끔은 옛날을 생각한다. 예전에는 그 시절을 그리워하였다면 이제는 그 모든 날들이 은혜였음을 인정하게 된다. 아주 어릴 적, 뭘 모르고 예수를 믿은 것 같지만 그때마다 주는 나를 상대하시면서 일일이 내 삶에 관여하셨다. 아마도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이거나 저학년 때였다. 나는 그 여름성경학교 내내 천국이나 성경의 이야기가 믿어지지 않아 두려워했다. 믿음이 없이는 천국에 갈 수 없고 그렇다면 지옥에 간다는 소린데… 어린 것이 한동안 그 일로 고민했던 것 같다.
그러다 당시 주일학교 선생님이었으면서 고등학생이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어디 신학교 교수이면서 목사가 된 이에게 심각하게 그런 마음을 털어놓았다. 그때 그는 나를 앉혀놓고 마치 기특하다는 듯 지옥을 무서워한다는 것은 천국에 들어갈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정작 지옥에 가는 사람들은 지옥을 무서워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어린 나는 어렴풋이나마 내가 가지는 두려움도 믿음의 마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렇듯 여러 편의 기억들이 떠오르는데 그때마다 하나님은 네 곁에 ‘하나님의 사람들’을 두셨고 시의적절하게 내가 누구인지 알게 하셨다.
이것이 오늘에 와서는 증거이다. 오늘 말씀 가운데 오늘이 증거라고 하시는 말씀이 크게 다가오는 이유다. “내가 또 너희 조상들에게 한 맹세는 그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리라 한 언약을 이루리라 한 것인데 ‘오늘이 그것을 증언하느니라’ 하라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여 이르되 아멘 여호와여 하였노라(5).” 오늘 말씀의 증언은 ‘옛 언약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예레미야는 주의 말씀에 고의로 불순종하는 유다인들에 대한 기소장을 작성하는 듯 오늘 본문을 기록하고 있다.
먼저 그는 영장을 제시하듯 오늘 말씀을 시작한다.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이라 이르시되 너희는 이 언약의 말을 듣고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말하라(1-2).” 지난 해 내내 특검의 내란수사나 그에 따른 법률용어를 뉴스로 듣다보니 영장이나 기소장이니 불구속이니 하는 따위를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오늘 예레미야는 자기 백성을 ‘기소’하기 싫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말씀을 유다인에게 고하라고 명령하셨다. ‘너희는 이것을 고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하신 말씀은 그가 자기의 모든 종 곧 선지자들에게 명령하신 것과 동일하다.
선지자들 중 누구도 율법으로 주신 말씀과 다르게 외치지 않았다. 선지자들은 그 율법을 의뢰하여 백성들을 가르쳐야 했다. ‘이 언약의 말씀을 들으라’고 하듯 ‘너희는 성경에 비추어 보고 그것을 의지하여 판단 받으라’고 해야 한다. 아내와 산책을 하면 짧은 성경 한 구절씩을 암송한다. 내게 그것을 원했고 어제는 나로 돌이켜 강권하실 때 두렵고 답답한 가운데서 자주 읊조리던 말씀을 여러 번 따라하며 암기하게 하였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
우리가 걸으면서 이와 같이 말씀을 한 구절씩 되뇌며 암송하기까지 아내는 무릎이 아프면서 나와 보폭이 같아졌고, 안 아플 때는 생각도 하지 않았던 ‘혹시 드러누워 더는 꼼짝 못할 때 성경을 어떻게, 어디를 읽어야 하나?’ 하고 생각하다 요구하였다. 덕분에 나는 종종 혼자 읊조리곤 하던 말씀을 한 구절씩 따라하게 하고 걷는 동안 이를 외울 수 있게 하는데,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하는 말씀을 외우기 쉽게 그 상황을 설명하기도 한다.
이와 같이 예레미야는 유다의 성읍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말씀을 선포한다. 이는 모두에게 관련이 있어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책망을 위한 것이든, 확신을 주기 위한 것이든, 선지자들은 그렇듯 시대마다 외친 모든 말씀으로 하나님의 언약을 상기시켰다. 이는 말씀에 근거하였고 그것과 일치하였다. 그러므로 “이 언약은 내가 너희 조상들을 쇠풀무 애굽 땅에서 이끌어내던 날에 그들에게 명령한 것이라 곧 내가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순종하고 나의 모든 명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라(4).”
비록 그 시대를 살지 않았어도 그때의 일은 들어서 알고 있는 터에, “너희는 내 목소리를 순종하고 나의 모든 명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라” 하는 언약이 자신들에게도 유효하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다. 나는 늘 이 성경을 오늘 나를 위한 기록으로 묵상한다. 수천 년 전의 이야기나 말씀으로 듣고 말면 남의 이야기일 뿐이다. 그러나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6-17).” 곧 오늘의 ‘나를 위한 것’이다.
당장 오늘이 증언이 되지 않는 말씀이라면 그 시대적 역사적 배경을 달달 외워 빈틈없이 안다고 해서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가령 이순신 장군이 몇 년 무슨 해에 태어나서 어떻게 자라, 어떤 업적으로 기리기리 역사에 남은 인물인들 그게 어떻다는 것인가? 성경의 아브라함이 그랬다고 뭘?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고 뭐? 저들은 이미 죽었고 그 이야기는 옛날이야기인데 그것이 어떻다는 것인가? 정작 그들의 이야기가 어떻다 한들, 그것으로 오늘의 내가 다윗으로, 아브라함으로 주께 합하고 믿음으로 사는 게 중요하다. 곧 저들의 이야기는 오늘의 내 이야기이고, 이렇게 글로 작성하는 내 이야기가 읽는 누군가의 이야기가 되고, 우리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이야기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 이 이야기는 그들, 유다인들이 저들에게 향하신 특혜의 약정서를 펼치고, 그 계약서의 취지를 망각하고 사는 것을 깨우쳐야 했다. 앞서 자신들이 태어나기 전의 이야기가 오늘을 사는 자신들의 이야기로 그 효력이 있는 것이다. 이에 “내가 또 너희 조상들에게 한 맹세는 그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리라 한 언약을 이루리라 한 것인데 오늘이 그것을 증언하느니라 하라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여 이르되 아멘 여호와여 하였노라(5).” 오늘이 그것을 증언하다는 것은 지금을 사는 그들을 상기시켜 촉구하는 것이 있음이다.
그래서 먼저 ‘너희는 나의 목소리를 청종하라’ 하신다.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순종한다는 의미다. 선조인 저들 조상이 살았던 애굽은 ‘쇠풀무’와 같았다. “이 언약은 내가 너희 조상들을 쇠풀무 애굽 땅에서 이끌어내던 날에 그들에게 명령한 것이라 곧 내가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순종하고 나의 모든 명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라(4).” 이는 그만큼 비참했던 노예 생활을 빗대어서 하는 표현이다. 쇠를 녹이는 용광로와 같이 저들에게 애굽에서의 종노릇하던 시절은 화덕 속의 고통 같았다. 노예 생활을 하던 그들을 하나님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권능으로 이끌어 내셨다.
나에게도 돌이켜 신대원을 하게 된 전과 후가 다르다. 이 길로 이끄시기까지 하나님은 내버려두셨고, 그 이유는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기 싫어해서 자처하는 생활이었다. 바울 사도의 표현처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나는 그렇게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사람들 속에서 기를 쓰고 인정받고 싶었다(롬 1:21-22).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사랑을 갈구하고, 그러느라 속수무책으로 방조하였던 나날이 비참할 정도로 세상을 추구하며 살았다. 그렇듯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23).”
그 시절 나는 그게 좋았고, 좋은 줄 알았다. 영혼을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쾌락을 위해, 이익을 위해, 어디에서 인정받기 위해… 더러운 거짓과 부끄러움도 뒤로 하고 열심이었다. 다음 날 종종 밀려드는 수치스러움을 외면하면서 같은 일을 반복하는 나날이었다. 그만큼 불신앙은 심각한 것이며, 배은망덕한 것이다. 강권하심으로 억지로 끌려온 셈이지만 지금에 와서 그때의 실상을 떠올릴 때면 풀부가 맞다. 고통과 수치가 씻을 수 없는 부끄러움으로 기억된다. 가령 어디 단체서 일할 때 그 비굴하고 비참하였던 삶을 씻을 수 없다. 현재도 활동 중인 단체라 거명할 수는 없지만… 당시 정식으로 출근하고 2년 반 만에 그만두고 혼자 강릉으로 운전하면서 울었던 기억이 난다.
사는 게 다 그렇지! 할 때, 오늘 말씀은 왜들 그러고 살고 있냐고 묻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바른 방법이란 다름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순종을 통해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 되시고,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이 긴밀한 관계를 팽개치고 스스로 비참하게 살면서, 사는 게 다 그렇다고 한탄하는 게 어리석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약속하신 ‘그때의 말씀’은 언제나, 오늘 우리에게도 유효하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 목소리를 순종하고 나의 모든 명령을 따라 행하라(4).” 하신 것과 “내가 너희 조상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까지 간절히 경계하며 끊임없이 경계하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순종하라(7).” 하심은 지금 나에게도 동일하다.
이는 나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시려고 주가 강제로 이끄실 때, 그때 나는 징계를 받는 것이라 여겼던 것과 같다. 그렇듯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1:32).” 순식간에 나를 고꾸라뜨리시고, 모든 것을 빼앗고, 아들을 필리핀으로, 부모님은 미국으로… 내가 의지하거나 마음을 둘 것을 일체 차단하시듯 막으시면서 동시다발적으로 나를 신대원으로 처넣으셨다. 나에게 신대원을 분기점이다. 앞서 10년 전 신학부를 기이한 손길로 졸업하게 하신 때와는 사뭇 다르다. 그때는 좋게 타이르신 것이면 신대원은 강제하신 것이다. 당시 나로서는 목사가 되겠다고 하는 자체가 미친 짓이었다. 그래서도 가까웠던 사이일수록 저마다 반대하거나 어처구니없어 했다.
그렇듯 오늘 유다인들로 애굽을 섬기던 일에서 건져내셨던 것을 상기시키신다. 그때는 완전히 종살이하던 때였다. 그런 가운데서 저들을 구하신 것과 그들로 하나님만을 섬기게 하신 것은 하나이다. 섬기는 일은 완전한 자유를 의미한다. “우리가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받고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눅 1:74-75).” 이를 오늘의 내가 증언할 수 있다. 어디서 돈벌이도 없고, 목회라고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미약하고 미비하여 송구할 따름이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나는 어느 때보다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하다. 이것은 하나님 나 사이의 관계를 맺는 조건이다. 나의 큰 명예와 특권이 되었다. ‘그리하면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하심이 이루어진 것을 안다. ‘나는 너희를 내 소유로 인정할 것이며 너희는 나를 너희 것으로 불러도 좋다.’ 하시는 말씀의 증거가 된다.
그럼에도 이를 거절한다면 피할 수 없는 재앙은 전적으로 내 탓이다. 우리가 자처한 일이다. 오늘 말씀은 “그들이 내 말 듣기를 거절한 자기들의 선조의 죄악으로 돌아가서 다른 신들을 따라 섬겼은즉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이 내가 그들의 조상들과 맺은 언약을 깨뜨렸도다(10).” 이를 분명히 하고,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이와 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리니 그들이 피할 수 없을 것이라 그들이 내게 부르짖을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할 것인즉(11).” 누가 과연 하나님을 원망할 수 있겠나? 끝내 판결이 내려지면 그 선고는 집행될 것이다.
그때는 스스로도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우리 자신이 너무 약한 존재였음을 비로소 알게 된다. 멀쩡하던 시절에는 이런 경고가 와 닿지 않았다. 누가 뭐라 한들 아랑곳하지 않았다. 언제나 청춘으로 자신은 늘 괜찮을 줄 알았다. 요즘 아내는 무릎이 아파서 치료를 받고, 수술을 하네 마네 결정을 해야 하는데, 그러다보니 느릿느릿 따라 걸으면서 종종 자신의 처지를 실질적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사람은 참 신기하다. 아흔이 넘어 거동이 불편한 가운데서도 나의 장모는 아직도 5년, 10년은 더 살 줄 알고 이래저래 놓지 못하고 사는 게 많다. 거동이 어려우니 살이 너무 쪄서 어제는 겨울 오리털을 한 벌 사드렸는데 더는 맞지도 않는 전에 입던 옷을 잘 두라고 성화였다.
우린 그야말로 닥치기 전까지도… 노아의 방주 문이 닫히기까지, 소돔성에 불덩이가 떨어지기까지 다들 저마다 ‘농담으로 듣는다.’ 그러니 갈 데까지 가야 하는 것으로, “그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고 각각 그 악한 마음의 완악한 대로 행하였으므로 내가 그들에게 행하라 명령하였어도 그들이 행하지 아니한 이 언약의 모든 규정대로 그들에게 이루게 하였느니라 하라(8).” 그렇게 섬기는 우상도 놓아주지 않는 것이다.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주민이 그 분향하는 신들에게 가서 부르짖을지라도 그 신들이 그 고난 가운데에서 절대로 그들을 구원하지 못하리라(12).”
“가서 너희가 택한 신들에게 부르짖어 너희의 환난 때에 그들이 너희를 구원하게 하라… 혹시 내가 원수를 자극하여 그들의 원수가 잘못 생각할까 걱정하였으니 원수들이 말하기를 우리의 수단이 높으며 여호와가 이 모든 것을 행함이 아니라 할까 염려함이라 그들은 모략이 없는 민족이라 그들 중에 분별력이 없도다(삿 10:14, 신 32:27-28).”
결국은 갈 데까지 가야 한다는 게 이와 같이 끝 간 데 없이 이어지다 결국은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롯의 처를 기억하라(눅 17:32).” 그 자리에서 더는 무얼 하겠나?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마 25:30).” 억울할 뿐이다. 돌이켜 후회하고 잘못을 뉘우치고 인정하는 일이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진영논리를 떠나 요즘 우리 사회를 보면 극명하다. 결국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눅 13:28).” 이와 같은 결국은 결국이 닥치기 전까지는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 영역인 듯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회개할 줄 알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일은 복의 복 중에 가장 귀한 복이었다.
하여,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 32:1-2).
이 땅에서 천년만년 떵떵거리며 사는 게 복이 아니었다. 그래봐야 더욱 여실히 깨닫게 될 것은,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셀라)
(4).
그러므로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셀라)
(5).
진정한 복이란 잘못을 인정하고 주의 은총 아래 사는 것이다.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두르시리이다 (셀라)
내가 네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8-9).
그러므로 부디 나의 완고함을 꺾으시고,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 같이 되지 말지어다 그것들은
재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가지 아니하리로다
(9).
그리하여,
악인에게는 많은 슬픔이 있으나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에게는 인자하심이 두르리로다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
(10-1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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