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는 우리의 도움과 방패시로다

하현. 2025. 12. 12. 04:25

 

그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면 내가 반드시 그 나라를 뽑으리라 뽑아 멸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 12:17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들이 마땅히 할 바로다… 우리 영혼이 여호와를 바람이여 그는 우리의 도움과 방패시로다

시 33:1, 20

 

 

저마다의 어떤 어려움이 주를 바라게 한다. 이는 마치 꾸지람이나 징계와 같아서 돌이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주께로 돌이키게 한다. 이스라엘이 애굽에 있던 것도, 출애굽 후 결국 다시 바벨론의 포로가 되는 것도 모두가 저들의 죄로 인함이었고 우상숭배의 습성을 고치게 하려 하심이었다.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어려움으로 주를 더 멀리하고 세상을 의지하기도 한다. 이내 돌이키지 못하고 ‘롯의 처’와 같은 결말을 맞는 경우도 있다.

 

오늘 본문에서 시작은 더 큰 고난에 대한 경고다. 예레미야는 선지자로서 주께 이해가 안 되어 여쭈었다. “내가 주께 질문하옵나니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반역한 자가 다 평안함은 무슨 까닭이니이까?” 분명히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여호와여 내가 주와 변론할 때에는 주께서 의로우시니이다” 하고 이를 전제로 하여 물었다(1). 이는 시편 73편의 시인도 같은 의혹으로 미끄러지고 넘어질 뻔도 하였다.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시 73:2-3).

 

저 역시 하나님의 선하심을 전제로 한 것이다.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1).

 

우리는 살면서 때로 이와 같은 모순에 의문이 든다. 이상할 정도로 악하고 죄의 길로 가는 자들이 잘 되고 형통할 때 놀란다. 이에 예레미야는 이를 궁금해 하는 것이다. “주께서 그들을 심으시므로 그들이 뿌리가 박히고 장성하여 열매를 맺었거늘 그들의 입은 주께 가까우나 그들의 마음은 머니이다(렘 12:2).” 곧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과 자기의 영혼 사이에 있었던 일이 무엇인지, 자기를 공격해 오는 시험은 무엇인지? 자기가 그 시험을 어떻게 극복하였는지? 이에 대하여 하나님의 공평하신 판결에 의문을 제기한다.

 

이는 하나님과 변론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를 통해 하시고자 하는 일의 의미를 바로 알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의 이와 같은 의문과 회의를 하나님은 마다하지 않으신다. 그 관계는 매우 분명하여서 사실은 우리가 되묻고 따질 수 있는 그런 위치가 아님을 성경은 밝힌다. “질그릇 조각 중 한 조각 같은 자가 자기를 지으신 이와 더불어 다툴진대 화 있을진저 진흙이 토기장이에게 너는 무엇을 만드느냐 또는 네가 만든 것이 그는 손이 없다 말할 수 있겠느냐(사 45:9).”

 

하여,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일들이 크시오니

이를 즐거워하는 자들이 다 기리는도다

(시 111:2).

 

우리는 우리 자신을 지으신 자와 다툴 수 없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이러한 변론을 허용하시고 묻게 하신다. 어떤 친구의 형편에 대해서는 늘 안타까움뿐이다. 혼자이고 몸이 불편하고 사람들이 동정한다. 그게 싫어서 스스로 열심히 살아서 자기 분야에서 인정받는 금세공기술자가 되었다. 기형적인 몸으로 혼자 살다 허리 디스크통증으로 결국 큰 수술을 했다. 심장에도 이상이 있을 것 같다는 소견에 검사를 마치고 결과를 들어야 한다. 그러는 동안 2년 반이 넘도록 교회를 안 다녔다. 주일에도 예배를 멈춘 지 오래였다. 나는 이를 염두고 두고 말하는데 저는 오늘의 형편을 두고 말하려고 한다.

 

누구에게는두 아들이 있는데 하나는 전처의 자식으로 스물대여섯 살이 되었는데 은둔형외톨이가 되어 게임에 빠졌다. 몸은 비대해지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작은 아들은 현처에게서 낳아서 늦둥이라 좋아했는데 지능이 떨어지고, 강박과 조울증을 보여서 학교에서는 병원진단과 장애판정을 요구하는데 이를 인정하기가 어렵다. 누구는 심한 우울증으로 일상이 어려울 지경이다.

 

당장 곁에 있는 몇몇의 면면만 봐도 그렇고… 저마다의 어려움이 어둠처럼 저들을 감싸고 있다. 그런 가운데서 누구는 신앙으로 더욱 주를 바라고 누구는 그러하여 교회를 떠났다. 삶은 마치 당장의 현실이 명명백백하고 확연하게 선을 그은 듯 불행을 드리운다. ‘여호와여! 내가 주와 변론할 때에 주는 외로우시니이다.’ 오늘 예레미야의 첫 마디이다. 그러면서 저의 의문은 ‘악인의 형통에 대하여’ 이해할 수 없어서, 그 악인의 형통함으로 생기는 유혹에 대하여 스스로 무장시키듯 주께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안 믿고 멋대로 사는 사람들이 오히려 잘산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저들은 오래지 않아 잘도 해결하며 사는 것 같다. 그렇듯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 그러므로 교만이

그들의 목걸이요 강포가 그들의 옷이며

살찜으로 그들의 눈이 솟아나며

그들의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많으며

그들은 능욕하며 악하게 말하며

높은 데서 거만하게 말하며

그들의 입은 하늘에 두고

그들의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시 73:4-9).

 

당장 우리 사회의 표면에도 그러하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며 주의 길을 가려는 자들이 오히려 고난을 당할 때에 마음은 어려워진다. 우리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의미에 대해 다 알 수는 없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이 의로우시다’는 기본 전제에서 출발하여 하나님께 묻는다.

 

주의 의는 하나님의 산들과 같고

주의 심판은 큰 바다와 같으니이다

 

여호와여 주는

사람과 짐승을 구하여 주시나이다

구름과 흑암이 그를 둘렀고

의와 공평이 그의 보좌의 기초로다

(시 36:6, 97:2).

 

이와 같은 전제 아래서 우리가 겪는 개개의 어려움으로 주의 섭리를 이해하기 힘들다. 오늘은 아내를 데리고 다른 병원에 들러 무릎 자기공명영상을 찍고 다시 진단을 받기로 했다. 딸애 결혼을 앞두고 수술을 해야 하면 빨리하는 게 낫다는 판단에서다. 점심께 같이 산책을 할 때면 어느 순간부터 아내의 걸음이 나보다 느려졌다. 나는 먼저 걷다 멈추고 뒤를 보면서 긴 한숨을 쉰다. 차라리 내가 힘들 때는 몰랐다. 안타까움으로 속상한데 화가 났다. 그렇게 걷고 카페라떼 한 잔 들고 돌아오는 게 일이 되었다.

 

하나님의 섭리 곧 어떤 이유에 대해 그 뜻이 불분명하더라도 ‘여호와는 의로우시다. 오늘 예레미야는 이를 먼저 분명히 한다. 하나님이 무슨 생각으로, 어떤 일을 이루시든지 하나님은 선하시고 정당하시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과 사람에게 패역하게 행하는 이들이 안락하며 잘 사는 모습이 더러는 화가 난다. 저런 사람들도 잘 사는데, 하는 마음으로는 하나님께 대한 서운함과 서러움이 먼저 든다. 오늘 우리를 이곳에 두시고 이 일을 감당하게 하신 이가 하나님이시지 않은가?

 

주께서 주의 손으로 뭇 백성을 내쫓으시고

우리 조상들을 이 땅에 뿌리 박게 하시며

주께서 다른 민족들은 고달프게 하시고

우리 조상들은 번성하게 하셨나이다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민족들을 쫓아내시고 그것을 심으셨나이다

(시 44:2, 80:8).

 

그렇듯 오늘 우리들도 주가 옮겨 심으신 것 같은데, 이러한 모든 것이 우리로 이해가 되길 원한다. 비록 우리 역시 하나님께 패역하게 행하였었고 죄악 중에 살았으나 주가 돌이키신 것일 텐데, 그렇다면 어떤 위로를 받아야 할까?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아시고 나를 보시며 내 마음이 주를 향하여 어떠함을 감찰하시오니 양을 잡으려고 끌어냄과 같이 그들을 끌어내시되 죽일 날을 위하여 그들을 구별하옵소서(렘 12:3).”

 

우리의 위로가 된 것은 하나님이 우리로 성실하게 하신 데 따른 증거이지 않나?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 2:8).” 하여 오전에 누구와의 통화에서 나는 저의 일상을 뒤로 하고 그런 가운데서도 주를 바라고 의지하여 주의 뜻 안에서 온전하기를. 앞으로 몇 개월은 교회로 가기가 어렵다고 하니 그럼 줌으로는 화상으로라도 예배에 참여하기를 권하였는데… 그러는 게 쉽지가 않다. 들으려하지 않는다. 공통된 모습인 것 같다. 아이엄마는 기어이 아이의 장애판정을 거부한다. 그러는 동안 아이는 점점 더 이 사회에서 설 자리를 잃는다.

 

누구에게는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말을 하는데 그게 그렇게 전달되기가 어렵다. 누구에게는 오늘의 형편 가운데서도 주를 인정하는 것으로 주신 어려움, 우울증으로도 주를 바라자고 하는데 허공의 메아리처럼 울릴 뿐이다. 나 또한 나의 고통은 그렇다 치고, 아내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괜히 화부터 난다. 속상한데 짜증이 난다. 그래서도 차라리 내가 아파야 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있는데, 그저 안쓰럽고 속상함으로는 답이 없다. 고난은 우리로 우리의 실상을 보게 한다. 그리고 선택의 기로에 세운다. 더욱 주의 선하심에 의뢰할 것인지, 내가 할 수 있는 수단으로 어떤 방법을 찾아 나설지….

 

“이스라엘은 완강한 암소처럼 완강하니 이제 여호와께서 어린 양을 넓은 들에서 먹임 같이 그들을 먹이시겠느냐 에브라임이 우상과 연합하였으니 버려두라(호 4:16-17).”

 

우리의 태도가 정작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훼방한다. 이는 자기의 교만과 불의의 양을 채우는 일이다. 기어이 완강함으로 ‘버려두라’ 하실 뿐이다. 오늘 말씀은 “내가 내 집을 버리며 내 소유를 내던져 내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을 그 원수의 손에 넘겼나니 내 소유가 숲속의 사자 같이 되어서 나를 향하여 그 소리를 내므로 내가 그를 미워하였음이로라(렘 12:7-8).” 곧 내가 의지하고 내가 적당하다고 여겼던 것이 오히려 나를 공격한다. 이는 “많은 목자가 내 포도원을 헐며 내 몫을 짓밟아서 내가 기뻐하는 땅을 황무지로 만들었도다(10).” 스스로들 판단하고 의지하여 그릇된 결정으로 나를 거북하게 여긴다.

 

같이 줌으로라도 예배하자, 하고 말하다가 그만두었다. 누구에게는 아이를 병원에 데려가고 아이가 다니는 교회에 그래도 같이 다니시라 하는데 거절한다. 감정적으로든지 육신적으로든지 고통 중에 있으면서도 오히려 완고하여서 그로 인하여 수난을 당하지 않도록 기도하게 된다. 나는 더욱 일찍 잠들었다 일찍 눈을 뜨고 교회로 온다. 오늘은 새벽 두 시, 나는 이처럼 묵상글을 쓰다 자주 고개를 숙인다. 주님, 하고 부르면 괜히 눈물이 핑, 돈다. 정작 우리의 어리석음은 그럴수록 주를 외면하려 한다. 아니면 허깨비를 믿듯 자신의 요구만 빈다. 부디 “그의 더러운 것이 그의 옷깃에 묻어 있으나 그의 나중을 생각하지 아니함이여 그러므로 놀랍도록 낮아져도 그를 위로할 자가 없도다 여호와여 원수가 스스로 큰 체하오니 나의 환난을 감찰하소서(애 1:9).” 정작 우리의 원수가 우리 자신이었다.

 

오늘 말씀이 두렵고 크게 들린다. “내가 내 집을 버리며 내 소유를 내던져 내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을 그 원수의 손에 넘겼나니 내 소유가 숲속의 사자 같이 되어서 나를 향하여 그 소리를 내므로 내가 그를 미워하였음이로라(렘 12:7-8).” 하나님이 작심하실 때 우린 감당할 수 없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부터 하나님이 내던져버리실 때, 하나님도 속상하시다. “내 소유가 내게 대하여는 무늬 있는 매가 아니냐 매들이 그것을 에워싸지 아니하느냐 너희는 가서 들짐승들을 모아다가 그것을 삼키게 하라(9).” 하나님께서는 맹수와 매를 불러 하나님의 백성들을 먹이로 삼으라고 하실 때…. 관영한 죄악에 대하여 우리는 정말 돌이킬 수 없는 것일까?

 

“그들이 이를 황폐하게 하였으므로 그 황무지가 나를 향하여 슬퍼하는도다 온 땅이 황폐함은 이를 마음에 두는 자가 없음이로다(11).”

 

모든 불행은 하나님의 노여우심에서 유래한다. 삼키는 것은 여호와의 칼이다. “파괴하는 자들이 광야의 모든 벗은 산 위에 이르렀고 여호와의 칼이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삼키니 모든 육체가 평안하지 못하도다(12).” 방법은 돌이켜 주의 도우심을 바라며 주 앞에 회개하고 하나님의 노하심에 용서를 구해야 한다. 고난의 목적은 이처럼 단순하다. 돌이켜 우리로 주를 온전히 바라게 하시려고, 그간 내가 고집하고 옳다고 여기던 것으로 더는 완강하지 않도록, 애굽을 쇠풀무로 바벨론을 징계의 칼로 사용하신다. 모든 고난은 간절히 주를 바람으로 복이 된다. 이는 결국 ‘주의 열성’이다.

 

“여호와여 주의 손이 높이 들릴지라도 그들이 보지 아니하오나 백성을 위하시는 주의 열성을 보면 부끄러워할 것이라 불이 주의 대적들을 사르리이다(사 26:11).”

 

하여 나는 늘 어디가 아프거나 힘들거나 남모르는 고통으로 끙, 하고 돌아누우면서 주의 긍휼하심을 구한다.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기만을 바란다. 주의 은총이 아니면 우린 누구도 감당할 수 없다. 세상이 악한 가운데 더욱 잘 되는 것 같지만, 궁극적으로는 ‘심판과 자비’를 알게 한다. 고로 “그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면 내가 반드시 그 나라를 뽑으리라 뽑아 멸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17).” 하심에 두려워 떨면서,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들이 마땅히 할 바로다

(시 33:1).

 

하는 찬송으로 주 앞에 선다.

 

여호와의 말씀은 정직하며

그가 행하시는 일은 다 진실하시도다

그는 공의와 정의를 사랑하심이여

세상에는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충만하도다

(4-5).

 

그러므로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12).

 

고난에서 우린 무엇이 진정한 복인지를 알게 된다. 세상이 아무리 어떻다 해도,

 

많은 군대로 구원 얻은 왕이 없으며

용사가 힘이 세어도 스스로 구원하지 못하는도다

구원하는 데에 군마는 헛되며

군대가 많다 하여도 능히 구하지 못하는도다

(16-17).

 

오직,

 

여호와는 그를 경외하는 자 곧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살피사

그들의 영혼을 사망에서 건지시며

그들이 굶주릴 때에 그들을 살리시는도다

(18-19).

 

이 간단명료한 진리 앞에서,

 

우리 영혼이 여호와를 바람이여

그는 우리의 도움과 방패시로다

우리 마음이 그를 즐거워함이여

우리가 그의 성호를 의지하였기 때문이로다

여호와여 우리가 주께 바라는 대로

주의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베푸소서

(20-22).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의 구원을 기뻐하리로다  (0) 2025.12.14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0) 2025.12.13
복이 있도다  (0) 2025.12.11
나를 인도하시고 지도하소서  (0) 2025.12.10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0) 2025.1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