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를 강하게 할 것이요 너에게 복을 받게 할 것이며 내가 진실로 네 원수로 재앙과 환난의 때에 네게 간구하게 하리라
렘 15:11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사람들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피하나이다
시 36:7
유다에 대한 심판이 확증되었음에도 불구하고(1-9), 주의 긍휼하심은 한이 없으시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를 강하게 할 것이요 너에게 복을 받게 할 것이며 내가 진실로 네 원수로 재앙과 환난의 때에 네게 간구하게 하리라(11).” 우리로 ‘간구하게 하리라’ 하심으로 주의 인자하심이 어떠한가,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서 ‘간구하게’의 히브리어는 ‘만나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물론 누구를 만난다는 것은 좋은 의미일 수도 있고 나쁜 의미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본 구절의 해석은 달라진다.
먼저는 하나님이 선대하시겠다는 의미로 읽힌다. 가령 앞으로 진행되는 내용에서 “사령관 느부사라단이 예루살렘과 유다의 포로를 바벨론으로 옮기는 중에 예레미야도 잡혀 사슬로 결박되어 가다가 라마에서 풀려난 후에 말씀이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40:1).” 이와 같이 잡힌 데서 풀려나게 하시고 저로 만나주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다. 하여 이 구절의 말씀은 예레미야 개인에게 향하신 말씀으로, 앞뒤 내용과는 달리 그 차이가 드러난다.
곧 같은 상황에서 어떤 역경에 놓였을 때 유다를 향하여는 모세와 사무엘이 온다 해도 이 백성에게 마음을 두지 않으시겠다고 하였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모세와 사무엘이 내 앞에 섰다 할지라도 내 마음은 이 백성을 향할 수 없나니 그들을 내 앞에서 쫓아 내보내라(1).” 그렇듯 ‘모세와 사무엘’과 같이 중보가 섰다 해도 하나님이 유다를 외면하시겠다는 것이다. 실제 모세는 백성들을 위해 탄원하였다.
“모세가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구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애굽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가 자기의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는 악한 의도로 인도해 내었다고 말하게 하시려 하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출 32:11-12).”
또한,
“모세가 여호와께 여짜오되 애굽인 중에서 주의 능력으로 이 백성을 인도하여 내셨거늘 그리하시면 그들이 듣고 이 땅 거주민에게 전하리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백성 중에 계심을 그들도 들었으니 곧 주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보이시며 주의 구름이 그들 위에 섰으며 주께서 낮에는 구름 기둥 가운데에서, 밤에는 불 기둥 가운데에서 그들 앞에 행하시는 것이니이다(민 14:13-14).
이와 같은 기도는 사무엘도 같다.
“사무엘이 젖 먹는 어린 양 하나를 가져다가 온전한 번제를 여호와께 드리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응답하셨더라(삼상 7:9).”
곧 저들이 나서 다시 또 유다를 위해 기도한다 해도 하나님이 이를 듣지 않으시겠다는 것이다. 그들의 죄악이 워낙에 뿌리가 깊고, 도저히 돌이킬 수 없는 것이어서 하나님의 심판은 불가피하다. 예레미야에게 있어 ‘모세와 사무엘’에 대한 언급은 대단히 의미심장하다. 즉 이 두 선지자들에게서 그의 사역의 모형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 우리의 역할과 그 사명도 같다. 누가 기도를 부탁하면서 그 내용을 적어 보낸다. 나는 듣거나 읽고 그에 따른 위로와 격려를 전한 뒤에 주께 아뢴다. 그런데 늘 엇비슷한 내용으로 그 삶이 고달프다. 몇 년째 같다.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한데, 저는 마치 암 진단을 받고 진통제만 찾는 꼴이다. 스스로의 문제 너머에서 회개할 생각을 못한다. 문제 해결만 원한다. 그럴 때 오늘 이 말씀처럼 유다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와 달리,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를 강하게 할 것이요 너에게 복을 받게 할 것이며 내가 진실로 네 원수로 재앙과 환난의 때에 네게 간구하게 하리라(11).” 하시는 말씀이다.
바로 그 앞에 저의 탄식과는 다르다. “내게 재앙이로다 나의 어머니여 어머니께서 나를 온 세계에 다투는 자와 싸우는 자를 만날 자로 낳으셨도다 내가 꾸어 주지도 아니하였고 사람이 내게 꾸이지도 아니하였건마는 다 나를 저주하는도다(10).” 깊은 절망감 속에서 부르짖는 내용으로, 오히려 유다로부터 핍박받는 것에 대해 불안과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이러한 한탄은 고통 중에 욥의 경우도 그러했다. “이는 내 모태의 문을 닫지 아니하여 내 눈으로 환난을 보게 하였음이로구나(욥 3:10).” 이와 같이 태어난 날을 한탄하며, 차라리 사명을 포기하고 싶은 심정을 그대로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예레미야는 마치 자신이 고리대금업자와 같은 취급을 받는 것에 대해 하소연하였다.
그때에 예레미야는 여호와 하나님의 위로와 확증의 약속을 듣는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를 강하게 할 것이요 너에게 복을 받게 할 것이며 내가 진실로 네 원수로 재앙과 환난의 때에 네게 간구하게 하리라(11).” 이처럼 하나님은 진노 가운데서도 개별적으로 사도와 선지자와 같이 사역자를 보호하신다. 지지하시고 후대하신다. 이에 오늘 시편의 고백도 같은 의미로 다가온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사람들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피하나이다
(시 36:7).
실상은 죄악 중에 모두가 어려움을 호소할 때도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보호하심을 받는다. 동시에 패역한 백성에게 대한 하나님의 노여움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선지자는 그러한 백성들을 위해 기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오히려 그러한 사역자를 향해 질시하고 원망한다. 그런 가운데 선지자의 기도에도 하나님의 심판은 진행될 것이고 이는 철회될 수 없다는 것을 확실히 한다. 그것은 먼저 므낫세 때문이다.
그가 예루살렘에서 행한 일 때문이었다. “이 일이 유다에 임함은 곧 여호와의 말씀대로 그들을 자기 앞에서 물리치고자 하심이니 이는 므낫세의 지은 모든 죄 때문이며 또 그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려 그의 피가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였음이라 여호와께서 사하시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시니라(왕하 24:3-4).” 저로 인하여 우상 숭배가 팽배해졌고, 그가 흘린 무죄한 자의 피가 넘쳐났다. 하나님은 선지자의 중보기도에도 이를 용서하시기를 즐겨하지 않으셨다.
므낫세는 히스기야의 아들이다. 히스기야는 다윗 다음으로 역대 어느 왕보다 훌륭한 통치로 하나님을 경외하였다. 그러다 때가 되어 죽을 때 아뢰어 연장하게 된 15년 동안 앞선 인생의 주를 경외함을 잃고 교만하였으며 므낫세를 낳았다. 결국 그때 낳은 아들 므낫세로 인하여 ‘예루살렘의 마지막 멸망에서’ 하나님께서는 그 땅 위에서 백성들을 세상 곳곳으로 흩으셨다. “유다 왕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가 예루살렘에 행한 것으로 말미암아 내가 그들을 세계 여러 민족 가운데에 흩으리라(렘 15:4).”
결국 죄에 따른 결과는 무거우며, 이에 회개와 용서의 긍휼하심이 없으면 심판을 피할 길 없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조만간 어딘가에서 내려질 것이고, 엎드러질 것이다. 잠시 유예되는 것은 용서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유다는 그렇듯 개선의 여지가 없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나를 버렸고 내게서 물러갔으므로 네게로 내 손을 펴서 너를 멸하였노니 이는 내가 뜻을 돌이키기에 지쳤음이로다(6).” 이는 매우 두려운 말씀으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우리는 익히 잘 알고 있다.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사 65:1).”
어제 같이 나누었던 말씀이다. 여기서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는 하나님을 멀리 떠난 백성들을 가리킨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물음을 받았으며’, ‘찾아냄이 되었으며’, 이는 수동태로 우리 자신이 묻거나 찾은 게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물음이 되셨고, 찾아냄이 되셨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스스로 우리에게 ‘물음과 찾음을 당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 4:19).” 하는 말씀으로 함축된다.
그런 가운데 오늘 말씀은 하나님의 진노가 어떠하신지를 알게 한다. 곧 ‘너희는 나를 버렸고 네게 대한 봉사와 의무를 버렸다. 너는 내게서 물러갔고 상반된 길로 되돌아갔다.’ 결국 이와 같이 회개하지 않음으로, ‘그들은 그 길에서 돌이키지 않았다.’ 매번 매순간 저들이 곁길에서 돌이켜 주를 찾을 때마다 주는 항상 먼저 달려와 주셨다. 나는 누구의 기도 부탁의 내용에 이러한 사실을 전달한 바 있다. 회개가 필요하고 주일을 지키고 예배를 다시 회복해야 한다고도 알렸다. 그런데 결국 그런 말에는 귀담아 듣지 않고 그때마다 당장의 문제만 놓고 해결을 요구한다.
오늘 본문은 그래서 더 무섭게 읽힌다. 곧 ‘내 마음이 그들을 향할 수 없노라.’ 하심인데, “그들이 만일 네게 말하기를 우리가 어디로 나아가리요 하거든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죽을 자는 죽음으로 나아가고 칼을 받을 자는 칼로 나아가고 기근을 당할 자는 기근으로 나아가고 포로 될 자는 포로 됨으로 나아갈지니라 하셨다 하라(2).” 곧 다 정해진 길로 갈 것인데,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그들을 네 가지로 벌하리니 곧 죽이는 칼과 찢는 개와 삼켜 멸하는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으로 할 것이며(3).” 이는 확정적이다. 그 원인은 앞에서 밝힌 바,
“유다 왕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가 예루살렘에 행한 것으로 말미암아 내가 그들을 세계 여러 민족 가운데에 흩으리라(4).”
그러니 한 명의 권세 잡은 자로 인하여 백성들의 죄악이 널뛰듯 하여 같이 사망의 골짜기로 떨어지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께 대해 뿌리 깊은 혐오감을 품고 있었다. 그런 자들에게 거룩하신 하나님은 끝없이 용서와 또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더하셨다. 그럼에도 결국 극도로 보기 싫고 역겨운 죄악에서 저들은 떠나지 못했다. 그리하여 ‘나는 그들로 인해 더 이상 괴로움을 당하지 않겠노라.’ 하시는 것이다. 더는 그들을 위한 어떤 중보의 기도도 들으려고 하지 않으신다(1). 설령 그게 ‘모세나 사무엘’이라 해도 말이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약 5:17-18).”
곧 오늘 우리가 성도의 삶을 사는 데는 그 맡은 바, 사역의 길이 있다. 그 가운데 우리의 기도가 중요하다. 나는 이 중보기도의 혜택을 누구보다 확실하게 인정하는 사람이다. 내가 그릇 되이 살고 있을 때 나의 모친과 누이의 기도는 물론이고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생각지도 못한 사람들의 한결같은 기도가 있었다. 가끔 회상하지만 여수 애양원에 있는 병원에서 수술을 하고 반 년 남짓 그곳에서 생활한 적이 있다. 그곳은 나환자촌으로 손양원 목사로 유명한 애양원교회가 있다. 병실을 돌며 일반 환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말씀을 전하던 소경 장로가 있었는데 그때 처음 병실에 저가 찾아왔을 때 어머니가 저를 이끌고 기도를 부탁하였다.
당시 부친은 뒤늦은 신학으로 목사가 되었을 때이다. 먼저는 서로들 인사를 하고 사정을 알고, 그렇게 매일 병원에 들러 나 역시 알게 된 사이다. 나는 이듬해에 중학교에 들어가고 어린 게 사는 일로 힘겨워하다 3년만인가? 아프다는 핑계로 당시 완행열차를 타고 밤새 혼자서 여수 애양원 병원에 간 길이었다. 너무 이른 시간에 도착하여 닫힌 병원 대신에 교회로 들어가서 의자에 좀 누우려던 것인데, 몇 명의 성도들이 모여 새벽기도회를 하고 있었고, 돌아가며 기도를 할 때 잠결에 나는 나의 부친과 우리 교회 이름을 들었고 잠결에 정신을 차렸을 때 또렷이 내 이름이 불리며 누군가 날 위해 기도하는 것을 들었다.
지금도 소름이 돋는 것처럼 그때 만약 어렴풋이 들었다면 잘못 들었다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앞에 우리 교회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을 호명하여 주 앞에 아뢰더니 뒤이어 분명하게 내 이름 석 자가 불리며 날 위한 기도가 이어졌던 것이다. 어린 나는 놀라서 일어나 앉았고, 어슴푸레하게 창밖이 밝아오고 있던 예배당과 저만치 앞자리에 둘러앉아 꾸부정한 뒷모습으로 서너 명 혹은 예닐곱 명의 소경들, 끝나고 저들이 나올 때 늘 병실로 찾아오던 장로님의 얼굴을 알아봤다. 수줍게 인사를 하자 저는 곱은 손으로 나를 이끌고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 삶은 고구마와 달걀을 내주며 안부를 물었다.
그때 그 교회의 장면들, 장로님들과 같이 걸어내려오던 좁은 길과 그 집 내부의 쾌쾌한 냄새와 좁고 비루하였던 방안의 풍경과 벽에 박힌 못에 걸렸던 허름한 옷가지 몇 점이나 윗목에 놓인 늙은 호박이며 잡다한 집기들 사이의 개다리 밥상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때 그 시간, 하필 그렇듯 그 시각에 도착하여 우연히 들었고 보았던 기억들은 지금도 인상적으로 남아있다. 그 자리는 필연적인 만남의 자리로 우연을 가장하여 하나님이 내 기억에 새겨두셨다. 그러니까 누군가 날 위해 기도하였던, 나를 위한 중보들이 쌓여서 오늘의 나로 이 길을 가게 하는 것임을 나는 확신한다. 복이 많다, 나는.
오늘 본문에서 모세나 사무엘이 나서서 중보 한다 해도 듣지 않으시겠다는 말씀이 두렵기만 하다. 오죽하면 ‘사망할 자는 사망으로 나아가고 칼을 받을 자는 칼로 나아갈지니라.’ 하심과 같은 말씀으로 하나님의 노하심을 표현하고 있을까?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그들을 네 가지로 벌하리니 곧 죽이는 칼과 찢는 개와 삼켜 멸하는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으로 할 것이며(3).” 이와 같은 말씀에 두려움을 느낀다. 어제 같이 예배를 드리고, 내년 봄에 결혼할 아이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부디 안 믿는 가족과 아내 될 이를 위해서 기도 많이 할 것을 당부하고 또 당부하였다. 그 길이 먼만큼 아이의 신앙 여정도 어려울 거여서, 이 땅에 사는 게 전부가 아니니까 말이다.
나도 너무 먼 길을 돌아온 것처럼, “나의 고통이 계속하며 상처가 중하여 낫지 아니함은 어찌 됨이니이까 주께서는 내게 대하여 물이 말라서 속이는 시내 같으시리이까(18).” 하는 예레미야의 절규처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만일 돌아오면 내가 너를 다시 이끌어 내 앞에 세울 것이며 네가 만일 헛된 것을 버리고 귀한 것을 말한다면 너는 나의 입이 될 것이라 그들은 네게로 돌아오려니와 너는 그들에게로 돌아가지 말지니라(19).” 사는 데 있어 우리의 신앙이 자주 흔들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악인의 죄가 그의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그의 눈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빛이 없다 하니
그가 스스로 자랑하기를 자기의 죄악은 드러나지 아니하고
미워함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함이로다
(시 36:1-2).
당장은 그럴 듯하고 그렇듯 유예된 시간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심판의 때는 당도할 것이어서,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에 있고
주의 진실하심이 공중에 사무쳤으며
주의 의는 하나님의 산들과 같고
주의 심판은 큰 바다와 같으니이다
여호와여 주는 사람과 짐승을 구하여 주시나이다
(5-6).
우린 알기 때문에 주의 인자하심을 구한다. 저를 위해 저들 몰래 울기도 한다. 누군가 날 위해 기도하듯 나 역시 누구를 위해 기도해야 할 의무가 있다. 사랑에 빚진 자로 산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사람들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피하나이다
…
주를 아는 자들에게 주의 인자하심을 계속 베푸시며
마음이 정직한 자에게 주의 공의를 베푸소서
교만한 자의 발이 내게 이르지 못하게 하시며
악인들의 손이 나를 쫓아내지 못하게 하소서
(10-1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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