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하현. 2025. 12. 16. 04:44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보라 이번에 그들에게 내 손과 내 능력을 알려서 그들로 내 이름이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

렘 16:21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시 37:23-24

 

 

다들 저마다의 어려움을 안고 산다. 특히 육신의 질병으로 고초당하는 자들을 보면 생의 노고가 생생하다. 산다고 사느라 수고들이 많다. 이 땅에서의 삶은 어쩔 수 없어서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 3:18-19).” 하여 만물도 고단하다.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전 1:8).”

 

그런 가운데 지혜는 이르길 이 땅에서의 고초와 수고에 주목할 것을 권하였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하는 것이 마음에 유익하기 때문이니라(7:2-3).” 그러나 오늘 말씀은 이 또한 모든 것이 허무함을 일깨운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초상집에 들어가지 말라 가서 통곡하지 말며 그들을 위하여 애곡하지 말라 내가 이 백성에게서 나의 평강을 빼앗으며 인자와 사랑을 제함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는 잔칫집에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앉아 먹거나 마시지 말라(렘 16:5, 8).”

 

이처럼 말씀하시는 까닭은 “내가 이 백성에게서 나의 평강을 빼앗으며 인자와 사랑을 제함이라.” 하신다. 곧 오늘의 여러 고초가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주의 인자와 사랑이 거둬짐이다. 그런 가운데 오늘 시편의 목소리는 그런 가운데서도 주를 의뢰함으로 잠잠함으로 참고 기다리라고 하신다.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 거리로 삼을지어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시 37:3, 7).

 

곧 우리가 오늘을 사는 동안 이런저런 어려움을 겪겠으나 이에 대하여 오늘 말씀은 우리의 자세를 바로 잡게 하신다. 곧 성령으로 말씀이 임하셨다. “너는 이 땅에서 아내를 맞이하지 말며 자녀를 두지 말지니라(렘 16:2).” 곧 환난이 오겠기 때문이다. 하여 바울 사도도 이르기를 “내 생각에는 이것이 좋으니 곧 임박한 환난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고전 7:26).” 이는 환난 중에 천국에 더 집중하는 자들로 살라는 것이다. 세상에 대한 애착을 버리고,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그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29-31).”

 

세상은 지극히 일시적이고 단회적인 것으로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상대적으로 낡아지는 것과 새로워지는 것에 대하여 되새기게 된다. 멀지 않은 장래의 일이다. 개인적으로는 각자가 나이 들면서 생겨나는 몸의 질고로 이를 안다. 이는 생대적인 것이 아니다. 나이가 들면서 하루 자고 나면 거뜬하던 것들이 며칠씩 오래간다. 또는 벌써 누가 어떤 질병이나 고초를 겪는 것을 보면서 아직 나이가 어린데, 하는 말은 가당치않다.

 

임할 환난은 다 다르고 어떠한지 누구도 짐작할 수 없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회개를 하게 되며 주를 찾음으로 그동안의 생활을 돌아보게 된다. 함부로 살았던 날들에 대한 후회도 밀려든다. “내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덮어쓰고 주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하기를 결심하고 내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며 자복하여 이르기를 크시고 두려워할 주 하나님,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를 위하여 언약을 지키시고 그에게 인자를 베푸시는 이시여(단 9:3-4).” 하고 주를 바라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 임하는 환난을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데, 죽은 사람을 위해 조상(弔喪)하지 말 것과 그들의 죽음이 아까울 것이 없다는 것과 이는 우리의 죄악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많은 죽음을 비참하다고 하는데 그러지 말 것은 죽음 이상으로 무서운 죄악이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심은 ‘내가 이 백성에게서 나의 평강을 빼앗으며’ 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을 듣게 한다. 많은 낙천주의적 선지자들은 우리의 장래가 평강하다고 하였다.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렘 6:14).”

 

여느 종교와 같이 교회마다 행복을 외치고 이 땅에서의 희락으로 천국을 가늠하려 하였다. 그러느라 죄에 대해 무뎌졌고, 세간에 오르내리는 어느 종교집단은 차치하고 많은 대형교회들도 정치화되어 진영논리에 매몰되기도 하였다. 누구를 초청하고 지지하고 심지어는 주의 전에 태극기를 달고 애국을 강조하는 볼썽사나운 모습도 나타났다. 그러면서 이 모든 집단적 도취는 허상의 평강을 추구하여서 어느 정치인을 혹은 그 집단을 지지하는 데까지 이른 것이다. 누가 난감해하기를 곁에서 안 믿는 가족들이 점점 더 교회를 혐오하고 길거리의 집단화된 극우세력으로 동일시한다는 것이다. 나는 저의 말을 들을 때면 속상하다.

 

결국 그것, 평강을 주가 ‘빼앗으리라’고 하신다. 하여 “내가 이 백성에게서 나의 평강을 빼앗으며 인자와 사랑을 제함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5).” 하시는 오늘 말씀이 두렵고도 뼈아프다. 솔직히 우리는 우리의 죄로 평강을 누릴 자격이 없었다. 다만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긍휼하심으로 평강을 누릴 수 있었다. 이를 당연한 권리인 것처럼 행세한 것이 교회이다. 주의 사랑이 마땅하다는 듯 그 믿음은 우리를 우월주의자로 만들었다. 세계적으로 개신교의 극우적 성향은 대체로 이러하다.

 

우리가 환난을 겪으면서 누구는 비로소 주를 바라며 주 앞에 엎드리고 누구는 더욱 더 집단화하여 사람으로 똘똘 뭉친다. 오늘 본문은 이에 잔치 집에도 가지 말 것을 알리신다. “너는 잔칫집에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앉아 먹거나 마시지 말라(8).” 이것은 앞의 초상집과 대조적인 듯하지만 같다. 실제로 장례문화가 점점 더 극적으로 된다. 한쪽은 엄숙하고 슬퍼하나 한쪽은 산 자들이 위로하며 음식을 나누고 떡을 떼는 연회장 같다.

 

기뻐하는 신랑의 소리와 신부의 소리가 울려 퍼지는 잔치와 슬픔으로 일그러지는 초상집과… 이에 대하여 지혜는 우리로 둘 다 치르되 어느 곳으로도 지나치지 말고 이 모든 것에 자유하라고 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는 모두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전 7:13).” 평강을 빼앗거나 부어주시거나 이는 전적으로 주의 주권 아래의 일이다. 그러므로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14).”

 

우리가 알 수 없는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연구하고 탐구하는 일은 어리석다. “내 허무한 날을 사는 동안 내가 그 모든 일을 살펴 보았더니 자기의 의로움에도 불구하고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자기의 악행에도 불구하고 장수하는 악인이 있으니(15).” 다만 우리는 주어진 상황에서 주를 바랄 뿐이어서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우매한 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고 하느냐(16-17).” 이를 오늘 말씀으로는 초상하지도 잔치하지도 말 것은 이 모든 게 이 땅의 죄악 중에는 무엇이 유익하겠나? 하여 우리는주를 경외함으로 이 모든 것에서 자유할 수 있다.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18).”

 

그러므로 우리는 질문한다. “네가 이 모든 말로 백성에게 말할 때에 그들이 네게 묻기를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모든 큰 재앙을 선포하심은 어찌 됨이며 우리의 죄악은 무엇이며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범한 죄는 무엇이냐 하거든(렘 16:10).” 곧 누구라도 환난이 오면 어찌 이런 일이? 하고 자신을 되돌아보고 주의 뜻에 주목하게 되는데, “너는 그들에게 대답하기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 조상들이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따라서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고 나를 버려 내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였음이라(11).” 곧 우리의 죄악은 말씀을 버리고 남들처럼, 조상 때부터 그리했던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범하는 죄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말씀을 가지고 우리에게 경고하신다. 이를 듣거나 안 듣거나 무시하거나… 이는 다 저마다의 선택이겠지만, 교만과 원망 모두 자기 몫이다. 회개하지 않는 자는 오롯이 자신이 지고 살아야 한다. 끝내 자기 죄악을 절실히 느끼지 못하는 자는 기어이 그 결국도 자신의 선택으로이다. 이는 하나님 앞에서 교만한 것으로 하나님을 원망할 수 없다. 오늘도 아직 우리가 살아서 이런저런 어려움으로 환난을 당할 때, 회개하기만 하면 ‘그 선조의 죄 값’을 받지 않을 것이다.

 

“그 때에 그들이 말하기를 다시는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들의 이가 시다 하지 아니하겠고 신 포도를 먹는 자마다 그의 이가 신 것 같이 누구나 자기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으리라(31:29-30).”

 

그럼에도 여전히 관행으로 관습과 물려받은 유산으로 여겨 이 땅의 윤리와 도덕을 운운하며 죄를 죄로 인정하지 않을 때가 문제다. 그것은 이제 각 나라의 문화라는 이름으로 무분별하게 포용하고 수용하면서 흡수되고 전파한다. 이스라엘이나 모압이나, 가나안 족속으로 여리고 성의 여인이거나 예루살렘의 여인이거나… 중요한 것은 저이 안에 주를 경외하는 마음이 주 앞에 간절하여서 가나안 여인 다말이거나, 여리고 성의 기생 라합이거나, 모압 땅의 룻이거나… 그런 중에 숫자에도 들지 못하던 여자였다 해도 주를 경외함으로 간절하여서 주를 온전하게 바랐다면, 광야에서 하나님을 거역하다 죽어간 수만 명의 이스라엘 선민보다 낫다.

 

결국은 한 영혼을 위함이다. 오늘 우리의 어려움이 우리로 주 앞에 간절하게 한다면 그것으로 복이었다. “내 생각에는 이것이 좋으니 곧 임박한 환난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네가 아내에게 매였느냐 놓이기를 구하지 말며 아내에게서 놓였느냐 아내를 구하지 말라 그러나 장가 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요 처녀가 시집 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로되 이런 이들은 육신에 고난이 있으리니 나는 너희를 아끼노라(고전 7:26-28).” 이에 담긴 바울사도의 설교 주제를 짐작하게 된다. 죄는 아닐지라도, ‘아니로되 이런 이들은 육신에 고난이 있으리니’ 삶이란 그런 것이다. ‘나는 너희를 아끼노라.’ 그러므로 오늘 주제는 같다.

 

무엇을 하든지 주를 위하여 하라는 것,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 초상을 치르며 슬퍼하든지, 잔치를 하며 즐거워하든지 주를 위하여 할 것인데, 실제 우리의 본질은 악하여서 “음식은 배를 위하여 있고 배는 음식을 위하여 있으나 하나님은 이것저것을 다 폐하시리라.” 이를 아니라 할 수 없지만 “몸은 음란을 위하여 있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여 있으며 주는 몸을 위하여 계시느니라.” 하시는 말씀의 원리에 주목해야 한다(고전 6:13).

 

종종 나는 강조하기도 하고, 느끼기도 하지만 ‘우리 스스로는 그렇게 강하지 않다.’ 자신을 자부하는 사람을 경계하는 이유다. 더욱이 자신이 믿는 믿음을 신념으로 환원하여 세상에서의 정의구현을 외치며 자칭 애국주의로 자국중심의 극우기독교인들을 심히 경계한다. 한국이 망하고 미국이 망한다 한들? 천국이 무너지고 하나님의 뜻이 파괴되는 일이겠나? 스스로 악을 척결하려 히틀러의 죽음을 위해 모든 주의 사역을 그것에 걸었던 본 회퍼 목사는 결국 자신이 먼저 죽고 얼마 뒤에 히틀러가 죽었다.

 

우리나라의 상황에서 교회가 갈리고 그로 인하여 교단이 갈리고 교회가 갈라서는 것을 보면서 마음을 다잡는다. 이 나라에서든지, 우리 개인의 삶에서든지, 우리는 모두 이 땅에 잠시 머물다 가는 것일 뿐…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사회에서 어느 한 쪽으로 기울어져 그쪽에만 주가 있고 진리가 있는 듯 신념으로 신앙을 삼는 것에 경계한다. 아내가 아프면서 육신의 본질을 놓고 새삼스러웠다. 내가 아플 때야 늘 아픈 게 일이라 참고 견딤으로 이것도 사명이라고 여겼다. 어제도 아내를 다른 병원으로 데려가 진료를 받고 결국 다음 주 월요일에 무릎 ‘반달연골봉합술’을 하기로 했다. 별 거 아닐 수 있으나 고통을 호소하고 절뚝거리는 아내의 모습이 생경하여 그런가? 언제까지나 무쇠처럼 건강할 줄 알았던 모습에서 나는 새삼 놀라웠다.

 

대기번호를 들고 기다릴 때, 아내는 산책 때마다 같이 외우던 몇 구절의 말씀을 암송하다 까먹고 그 부분을 되풀이해서 물어보았다. 병원에서의 대기실은 곧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을 연상하게 한다. 떨리고 두려운 일이다. 이는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것으로, 아내는 내 손을 꼭 잡고 더듬거리며 성경을 암송했고 나는 공연히 숙연한 마음으로 생각이 많아졌다. 돌아와 아흔 넘은 장모가 걱정어린 눈으로 일정을 설명할 때 듣는데 그 또한 가늠할 길 없는 마음이라 아련하였다. 결국 우리는 저마다 홀로 주 앞에 세워질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1:8).”

 

결국은 주의 인자하심과 긍휼하심으로, 하나님의 능력에 따라 서야 한다. 그러니 서로가 집단을 이뤄 의기투합한다고 될 일도 아니어서 나이 여든에 누구는 하혈을 하고 응급실에 가고, 아직 쉰도 안 된 나이에 누구는 암으로 먼저 세상을 떠나기도 한다. 분명한 것은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진다는 것. 하면 우리의 속사람은 어떠한지? 날로 새로워지는지? 또는 주를 멀리 떠나 있는지?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시 37:7).

 

세상을 보고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말 것은, 초상집에서나 잔치집에서나 결국은 이 땅에 잠시 머무는 동안의 일이라…….

 

잠시 후에는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 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의인의 적은 소유가 악인의 풍부함보다 낫도다

악인의 팔은 부러지나

의인은 여호와께서 붙드시는도다

(10, 16-17).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23-24).

 

하여,

 

여호와를 바라고 그의 도를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땅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라

악인이 끊어질 때에 네가 똑똑히 보리로다

 

온전한 사람을 살피고 정직한 자를 볼지어다

모든 화평한 자의 미래는 평안이로다

(34, 37).

 

이 모든 결국은,

 

의인들의 구원은 여호와로부터 오나니

그는 환난 때에 그들의 요새이시로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도와 건지시되 악인들에게서 건져

구원하심은 그를 의지한 까닭이로다

(39-4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