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나를 도우소서 주 나의 구원이시여

하현. 2025. 12. 17. 04:21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 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렘 17:7-8

 

여호와여 나를 버리지 마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멀리하지 마소서 속히 나를 도우소서 주 나의 구원이시여

시 38:21-22

 

 

우리 곁에 상한 영혼으로 힘겨워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이는 현대에 들어 생겨나는 게 아니라 이미 성경의 여러 진술과 상황들이 이를 보도하고 있다. 오늘도 그 사실은 문맥적으로 표현되고 있어서,

 

우울증,

 

내가 피곤하고 심히 상하였으매

마음이 불안하여 신음하나이다

(시 38:8).

 

불안증,

 

내 심장이 뛰고 내 기력이 쇠하여

내 눈의 빛도 나를 떠났나이다

(10).

 

공황장애,

 

내가 사랑하는 자와 내 친구들이

내 상처를 멀리하고 내 친척들도 멀리 섰나이다

내 생명을 찾는 자가 올무를 놓고

나를 해하려는 자가 괴악한 일을 말하여

종일토록 음모를 꾸미오나

나는 못 듣는 자 같이 듣지 아니하고

말 못하는 자 같이 입을 열지 아니하오니

나는 듣지 못하는 자 같아서

내 입에는 반박할 말이 없나이다

(11-14).

 

이러한 모든 심증(心症) 곧 ‘마음의 증세’는 실제 우리의 삶의 질을 떨어뜨린다. 멀쩡하던 이가 심한 우울과 공포를 못 이겨 집 밖으로 나오지를 못한다. 이제 초등학교 3학년 어린 나이에 조울증이라니, 아이는 혼자 들떠서 떠들고 신나 말이 빨라지고 횡설수설하다 어느 순간 급 우울하여서 울고 싶을 정도로 감정이 널뛴다. 누군 갑자기 대인기피증을 호소하며 사람을 만나면 말을 못하고 눈을 마주칠 수 없이 심장이 뛰고 호흡이 가빠진다. 기껏 공인중계사를 땄는데 무용지물이 되었다. 결국 누구는 자기 세계에 갇히듯 망상과 자아도취에 빠져 맹목적으로 사랑하거나 적대시하여 상대를 괴롭힌다.

 

내 곁의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그 원인을 묻기 전에 스스로를 인정하는 데 있어 죄를 고하고 용서를 비는, 하나님을 인정하는 데서 대화를 풀어보려 한다. 그러나 저들의 공통점은 자신 위주의 판단과 자기 하고 싶은 말에 도취된 자들 같다. 누가 뭐라 이르는 말에 귀 닫고 눈을 감아서 같이 기도하고 뭐라 말씀으로 권면하여도 소용이 없는 듯하다. 이를 오늘 본문은 우리의 ‘부패한 마음’에서 그 원인을 파악하고 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9-10).”

 

그리하여,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의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마침내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11).”

 

결국은 이러한 인생의 결말로 곁의 모두가 지쳐 떠나기까지, 자신도 자신에게마저 뭘 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속수무책으로 방치된다. 그저 그 안에 원망과 서러움만 가득하여 “그들이 네게 묻기를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모든 큰 재앙을 선포하심은 어찌 됨이며 우리의 죄악은 무엇이며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범한 죄는 무엇이냐(16:10).” 알 수 없는 자기애로 자기 죄를 고할 길이 막혔다. 다만 이구동성으로 억울함을 호소하듯,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마 7:22).”

 

어느 누구도 자발적으로 용서를 구할 길이 없다. 잘못을 인정하지 못한다. 회개도 능력이라, 주의 권능으로가 아니면 아무도 자신이 죄인인 것을 인정하지 못한다. 일련의 내란재판을 보면서도 이를 알 수 있다. 뻔한 거짓말로 당장 처한 상황을 벗어나려고만 한다. 그러다 어떤 증거가 나오면 그에 따른 변명으로 급급하다. 누구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결백을 주장하는데, 그 정도이면 죄를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현실의 지옥을 보는 것 같다. 이를 변호하는 이들도 덩달아서 그 족쇄에 같이 묶인다. 말이 더해질수록 저들의 망상은 현실이 되고 그 현실은 자기 세계에 갇히게 되는 형국이다.

 

사실과 죄과가 완전히 입증되었는데도 억울함뿐이다. 죄는 너무 명백하여 부인할 수 없는데 우리 영혼이 악하고 병들어서 변명으로만 일관하는 것이다. 그 다음 단계로는 남을 탓한다. 제도 때문이고 나아가 나라 전체가 병들었다며 탓한다. 자신들만 옳다고 한다. 그런 가운데 죄는 무죄를 주장하다 억울하게 남은 세월마저 허송세월로 보낸다. 죄는 하나님의 전지(全知)하심과  자신의 양심에 기록되어 있는 기록을 외면한다. 죄는 세상에 드러나 확연하고 명백한데 당사자만 인정하지 못한다. 이를 오늘 본문은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유다의 죄는 금강석 끝 철필로 기록되되 그들의 마음 판과 그들의 제단 뿔에 새겨졌거늘 그들의 자녀가 높은 언덕 위 푸른 나무 곁에 있는 그 제단들과 아세라들을 생각하도다(17:1-2).” 그만큼 우리의 죄는 하나님 앞에서 극히 지울 수 없다. ‘금강석 끝 철필로 기록되었다. 우리의 마음 판과 제단 뿔에 새겨졌다.’ 그런데도 시치미 떼고 거짓으로 일관하다 그 자체로 자신만의 세계가 되었다. 그렇게 ‘곳간에 봉해져서 결코 잊힐 수 없는 기록으로 남았다.’ “이것이 내게 쌓여 있고 내 곳간에 봉하여 있지 아니한가(신 32:34).”

 

죄의 본질은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지 못하는 데서 부풀려져 확대된다. ‘금강석 끝 철필로 기록되었는데도’ 모른다, 그게 아니다, 하면서 억울함을 호소한다. 이는 세월이 아무리 자나도 마멸되지 않을 것이다. 요즘 나는 내란재판을 보면서 45년 전의 군부독재의 계엄에 따른 기록이 저들이 죽었는데도 생생하게 기록된 것을 보며 치를 떤다. 곧 오늘 우리가 모두 죽어도 우리 다음 세대들이 이와 같은 기록을 보고 있을 것이라, 욥의 말대로 영영히 돌에 새겨져 있을 것인데 두렵지 않을까? 상대적으로 “나의 말이 곧 기록되었으면, 책에 씌어졌으면, 철필과 납으로 영원히 돌에 새겨졌으면 좋겠노라(욥 19:23-24).”

 

우리의 죄는 그것이 사함을 받을 때까지 유효하다. 용서는 우리의 변명과 억울한 심정으로 하는 게 아니다. 죄는 회개로만 인정되고 우리 앞에 있어 늘 하나님 앞에 놓여진다. 우리의 죄는 우리의 마음판에는 새겨져 있다. 양심은 이를 호소한다. 마음에 새겨진 것은 일시적으로도 은폐되거나 봉쇄될 수 없다. 그 양심이 남몰래 자신을 찌르는데도 자신은 한사코 부정하고 부인함으로 사실처럼 인식한다. 그것은 새겨져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다. 이 땅이 멸망하기까지 후손들의 입에 회자되고, 영원한 영벌의 땅에서도 저들끼리 모여 앉아 억울함으로 이를 갈고 슬피 울 것이다.

 

이로써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간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살지 않는 땅에 살리라(6).” 하심인데 이는 명백히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5a).” 하고 단정하였다. 곧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5b).” 하는 데 따른 장차 있을 보응이다. 오늘은 아직도 입이 살아서 툴툴거리고 억울해하고, 덩달아서 저를 지지하여 자기들 세계에 갇힌 듯 거리에서, 조그만 방송부스 안에서 자기들끼리 꽥꽥거린다. 사는 게 지옥이다. 그 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상대적으로 우리는 마음 판에 호소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 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7-8).” 한쪽은 여전히 자기 양심의 가책을 인정하지 않는 반면 우리는 주의 긍휼하심으로 양심의 죄책 없이 평안하다. 주가 주시는 기쁨으로 평안하다.

 

누구는 심각한 우울과 자살충동으로 시달리면서도 ‘샘물과 같은 보혈은 주님의 은혜라’ 하고 노래하였던 <윌리엄 쿠퍼>, 저는 “봄비가 올 때에 여호와 곧 구름을 일게 하시는 여호와께 비를 구하라 무리에게 소낙비를 내려서 밭의 채소를 각 사람에게 주시리라(슥 10:1).” 하는 말씀으로 자신을 다잡았다.

 

또한 누구는 한꺼번에 모두 잃고도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편하다’ 하고 노래하였던 <호레이쇼 스패포드>는 열병으로 아들을 잃고, 이듬해 시카고 대화재로 모든 가산을 잃고, 아내와 네 딸을 유럽으로 보낸 여객선은 대서양에서 범선과 충돌하여 난파되었다. 당시 딸들의 나이는 열한 살, 아홉 살, 다섯 살, 두 살이었다. 저를 붙든 말씀은 “너는 달려가서 그를 맞아 이르기를 너는 평안하냐 네 남편이 평안하냐 아이가 평안하냐 하라 하였더니 여인이 대답하되 평안하다(왕하 4:26).” 하는 것으로 그런 가운데서도 주시는 평안으로 승리하였다.

 

상대적으로 오늘 여기 본문의 유다는 자기들의 아비들이 시치미 떼고 얼버무리던 그 진실을 말할 것이다. 자녀들은 자기들이 어릴 때 그들의 부모가 데리고 갔던 우상의 제단들과 아세라들을 생각한다. “그들의 자녀가 높은 언덕 위 푸른 나무 곁에 있는 그 제단들과 아세라들을 생각하도다(2).” 이 얼마나 끔찍하고 잔인한 역사인가? 그들은 번번이 아주 허물없이 기꺼운 마음으로 우상을 섬기게 되었다. 그리하여 “들에 있는 나의 산아 네 온 영토의 죄로 말미암아 내가 네 재산과 네 모든 보물과 산당들로 노략을 당하게 하리니(3).” 자기들이 회개한다거나 보다 선한 마음을 품게 되었더라면 어땠을까? 죄는 무덤덤하게 계승되어 발전하여 악이 부정을 부르고, 부정은 죄를 짓는 더 확실한 명분을 찾는다.

 

그렇듯 죄는 전가되어 ‘우리 마음속에 새겨져 있다.’ 이것을 원죄라 하든지 유전인자하든지, 문화라 하든지 조상 때부터 내려오는 풍습이라 하든지, 우리 안에 각인 된 죄 된 마음은 우상에 대한 애착을 버리지 못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나 채찍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꿈쩍도 않는 굳어진 양심은 죄로 단련되어서 그들의 단 뿔에 기록되어 있어도, 자심들의 이름이 우상 앞에 내어준 바 되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오히려 밧줄로 묶듯 자신을 제단 뿔에 동였다. 즉 ‘자녀들, 후손들의 기억에 각인되었다.’ 그럼에도 문제의식이 없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 49:15).”

 

이에 마땅할 것을, 하나님을 수치스럽게 하는 데 조금도 두려움이 없다. 결국 그 죄는 우리의 위안을 앗아간다. 서서히 중지시켜 하나님께서 주신 평안을 잃는다. 이내,

 

누가 주의 노여움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의 진노의 두려움을 알리이까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시 90:11-12).

 

우리는 오늘을 살며 이 모든 현실을 교훈으로, 성경의 말씀이 누누이 강조하시는 바, 죄의 실상을 두려워함으로 주를 더욱 경외함으로 구한다. 사람을 의지할 게 못 된다는 사실로, “이제 네가 너를 위하여 저 상한 갈대 지팡이 애굽을 의뢰하도다 사람이 그것을 의지하면 그의 손에 찔려 들어갈지라 애굽의 왕 바로는 그에게 의뢰하는 모든 자에게 이와 같으니라(왕하 18:21).” 재판정에서 피고인은 모든 죄와 그 원인을 부하들과 국회나 국민들 때문으로 돌린다. 이를 따르고 믿었던 이들로서는 ‘손에 찔려’서야 깨닫기는 할까?

 

“보라 네가 애굽을 믿는도다 그것은 상한 갈대 지팡이와 같은 것이라 사람이 그것을 의지하면 손이 찔리리니 애굽 왕 바로는 그를 믿는 모든 자에게 이와 같으니라(사 36:6).” 여전히 주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세상을 의지하는 자들에게, 죄는 ‘사람을 믿으면 결국 그 인간의 지혜와 능력, 인자와 성실’로 거짓됨을 뼛속 깊이 느끼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에 따라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우리가 주를 앙망하오니 주는 아침마다 우리의 팔이 되시며 환난 때에 우리의 구원이 되소서(33:2).” 하고 아뢰게 된다.

 

오늘 우리의 심신미약 상태는 상대적으로 죄를 인정함으로 독이 아니라 득이 될 수 있다. 이로써 주를 찬송하게 된다. C. S. 루이스(1898-1963)의 <고통의 문제>에서 밝힌 ‘고통은 영웅을 만들어 내는 기회를 제공한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의 아름다운 신앙고백과 시편의 놀라운 찬송이 이를 증거한다. 결국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잃고 육체가 된 것도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창 6:3).” 그리하여 하나님과 떨어지게 된 것도 “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히 3:12).” 궁극적으로는 죄 때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될 때,

 

주의 진노로 말미암아

내 살에 성한 곳이 없사오며

나의 죄로 말미암아 내 뼈에 평안함이 없나이다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내가 감당할 수 없나이다

(시 38:3-4).

 

곧 오늘 우리의 고통, 정신적으로든지 육체적으로든지 이 모든 어려움으로 우리는 비로소 주를 찬송하게 된다.

 

내 허리에 열기가 가득하고

내 살에 성한 곳이 없나이다

내가 피곤하고 심히 상하였으매

마음이 불안하여 신음하나이다

주여 나의 모든 소원이 주 앞에 있사오며

나의 탄식이 주 앞에 감추이지 아니하나이다

(7-9).

 

아이러니하게도 그러므로,

 

여호와여 내가 주를 바랐사오니

내 주 하나님이 내게 응답하시리이다

내가 말하기를 두렵건대

그들이 나 때문에 기뻐하며 내가 실족할 때에

나를 향하여 스스로 교만할까 하였나이다

(15-16).

 

그러므로

 

내가 넘어지게 되었고

나의 근심이 항상 내 앞에 있사오니

내 죄악을 아뢰고

내 죄를 슬퍼함이니이다

(17-18).

 

내가 죄 때문에 슬퍼하여 주의 이름을 부르며 슬퍼할 때,

 

여호와여 나를 버리지 마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멀리하지 마소서

속히 나를 도우소서 주 나의 구원이시여

(21-2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