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가 하는 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렘 18:6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시 39:7
우리로 주 앞에 기도하게 하시려고 주는 오늘도 일하신다. 이는 우리 영혼이 천국을 사모함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다. 이때에 닥치는 어려움은 필연적이다. 예레미야는 이를 고한다. 저에게 닥친 위협적인 현실은, “그들이 말하기를 오라 우리가 꾀를 내어 예레미야를 치자 제사장에게서 율법이, 지혜로운 자에게서 책략이, 선지자에게서 말씀이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니 오라 우리가 혀로 그를 치고 그의 어떤 말에도 주의하지 말자 하나이다(18).”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기도다. “여호와여 나를 돌아보사 나와 더불어 다투는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 보옵소서(19).”
때는 여호야김 왕의 통치 기간 중이다. 그 어느 때, 어쩌면 그의 통치 삼 년 이내의 때이다. ‘너는 일어나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라.’ 하시는 말씀을 받는다. 당시에 토기는 많은 수요가 있었다. 토기를 소재로 하는 이 예화는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으로, 피조물인 인간을 다루심을 보여준다.’ 각 인생은 하나님이 그 쓰임에 따라서 원하시는 대로 만들어 가심을 ‘토기장이의 손’에 비유하고 있다. 바울은 우리가 각자의 은사를 이와 같이 흙으로 빚은 질그릇에 받았다고 강조하였다. 그만큼 우린 깨지기 쉽고 또한 토기장이의 손에 의해 지음 받았다는 것이다.
이를 알 때 오늘의 기도가 나온다.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나를
모든 죄에서 건지시며 우매한 자에게서
욕을 당하지 아니하게 하소서
내가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아니함은
주께서 이를 행하신 까닭이니이다
(시 39:7-9).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인정하게 된다. 더하여서 주의 인자하심과 공평하심을 알게 된다. 이를 위해 예레미야 선지로 토기장이의 집으로 보내셨다. 당신은 말씀을 전하는 데 있어 이처럼 설교 주제를 직접적인 영감으로 받게 하셨다. 이에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자 하는 자들은 하나님이 지정하시는 것들을 관찰하게 된다. 그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곳으로 보내심을 받아야 한다. 예레미야는 하늘에서 보인 것을 거스르지 않았다. 곧 오늘도 이와 같아서 우리의 현실이 곧 소재다. 각자의 이야기 속에 하나님이 나타내시고자 하는 뜻이 내포되었다. 그러므로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행 26:19).”
하심과 같이 오늘 예레미야도 “너는 일어나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라 내가 거기에서 내 말을 네게 들려 주리라 하시기로(2).” 하는 말씀에 따라, “내가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서 본즉 그가 녹로로 일을 하는데(3)” 하고 그때의 상황을 설명한다. ‘녹로’는 돌 두 개를 가지고, 즉 수직으로 된 굴대 위에 두 개의 돌로 된 바퀴가 놓여 있는 장치를 말한다. 밑의 바퀴를 발로 돌리면 위의 바퀴도 돌아가는데, 이때 토기장이는 이 위 바퀴에서 점토를 빚어 그릇을 만들었다. 토기장이는 자기가 필요에 따라 흙으로 빚은 그릇을 만들었다.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터지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좋은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4).”곧 토기장이의 손에서 그릇이 터지거나 이겨지면 그 즉시 그것으로 다른 형태의 것을 만들 수 있었다.
또한 그것이 귀히 쓰는 그릇이 되기에 합당치 않으면 토기장이는 자기 의견에 선한대로 천한 그릇이 되게 할 것이었다. 예레미야는 토기장이가 어떻게 일하는지 눈여겨보고 있었다. 그때에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가 하는 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6).” 곧 오늘 우리의 쓰임은 주가 원하시는 바, 어느 자리에서 어떤 역할로 언제, 어떻게 쓰일지는 쓰시는 이의 마음에 따른 것이다. 이를
“내가 여러 선지자에게 말하였고 이상을 많이 보였으며 선지자들을 통하여 비유를 베풀었노라(호 12:10).”
하신 것처럼 오늘 우리는 성경을 통해 그 어떤 시기보다 더욱 더 폭넓고 다양하게 들을 수 있고 볼 수 있다. 곧 성경의 시대를 살면서 이를 은혜의 때라 할 수 있는 것은 당대에 그때마다 활동하게 하신 선지자들이 있었으나 우리는 이를 총체적으로 보고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곧 ‘하나님의 일’을 지금 우리보다 한 눈에 보고 살았던 세대가 또 있을까? 예레미야는 토기장이의 일하는 모습을 직접 보고, 하나님이 그에게 전하게 하시는 말씀을 들었다.
먼저는 하나님께 모든 권세와 능력이 있음을 알게 하셨다. 이 권세는 다툴 이가 없고 능력은 항거할 수 없다. 하나님은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열국과 열방을 형성하시고 우리 곁에 조성하셨다. “내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뽑거나 부수거나 멸하려 할 때에(7).” 이는 주의 권한으로 “만일 내가 말한 그 민족이 그의 악에서 돌이키면 내가 그에게 내리기로 생각하였던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겠고 내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건설하거나 심으려 할 때에 만일 그들이 나 보기에 악한 것을 행하여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면 내가 그에게 유익하게 하리라고 한 복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리라(8-10).” 하시는 것도 이 모든 역사의 주인이 하나님이신 것을 새삼 우리로 알게 하신다.
오늘 우리 사회의 일련의 사태를 보면서 그것으로 드러나게 되는 그동안 실체를 바로 알 수 없던 이단과 사이비 종교의 내부를 만천하에 공개하신다. 저들의 이권다툼을 보게 하시고 이를 위해 전방위적으로 정치와 유착하여 금품을 살포하고 후원금을 명목으로 자신들의 사업을 확장하려던 것을 보게 된다. 이를 통해 물으시는 것이다. ‘이 토기장이의 하는 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저가 귀히 쓸 그릇과 천히 쓸 그릇을 임의로 만들었듯이… 이를 들어 바울도 설교하였던 것이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롬 9:21).”
이는 토기장이의 비유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강조한다.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15-16).” 이에 대해 쓰임을 받는 그릇으로 어찌 주인에게 반문할 수 있겠나? 하물며 애굽을 노예로 부리던 바로까지도,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하심은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17-18).”
온전히 이를 묵상할 수 있다면 오늘 나의 이 자리가 귀하다. 내가 임의로 얻은 게 아니다. 나의 어떤 노력으로 이루어낸 역할도 아니다. 주가 그리 사용하심으로 그리 되게 하신 결과다. 이에 학부 때도 신대원 때도 하나님은 나로 하여금 아무 것도 하지 않게 하셨다. 기억에 남는 상황 가운데 하나는 같이 공부하던 동기 전도사는 매학기 때마다 등록금을 벌기 위해 이런저런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한 학기를 휴학하고 쉬면서 필요한 등록금을 마련하기도 해야 했다. 그때 그런 소식을 들을 때면 나는 송구하고 늘 빚지는 마음이었다. 말도 안 되게 나는 그때마다 누군가의 손길로 공부할 수 있었고, 한 번도 내가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학기를 휴학하지 않아도 되었다.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19-20).” 하고 이어지는 바울 사도의 설교에서 나는 송구하고 감사할 따름이다. 그리하여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19).” 나로 오늘 이 자리에 있게 하심으로 나는 잠잠히 따를 뿐이다. 한 영혼으로 씨름하는 일이란 그 자체로 내게 과분하다. 누가 뭐라든지 말이다.
친구네 교회는 모 교회에서 독립하여 자립에 성공하였다. 어느 학교에서 예배를 드리고 교회로 그 학교를 사용하는데, 1년에 몇 천 만원의 사용료를 낸다고 하였다. 요즘 숨 가쁘게 성경공부를 하고 기본적으로 그런 과정을 겪은 이로 안수집사나 장로를 세워서 당회를 구성하려는 듯하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런저런 이야기를 듣다보면 격세지감을 느끼는데, 그러면서 그게 또 서로의 맡기신 사명이 다른 것을 인정하게 된다.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23-24).”
하여 오늘 나로 이처럼 말씀 앞에 세우시고 전하는 자로 또한 교회를 지키는 자로 삼으신 것으로 감격한다. 곧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어서 그가 원하는 대로 그릇이 되듯 너희는 내 손에 있으니라.’ 하심을 나는 그렇게 듣는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가 하는 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렘 18:6).” 하나님은 우리에 대해 절대적 소유권자이시다. 하나님은 우리에 대한 채무자가 아니시다. 하나님은 우리에 대해 책임자시다. 우리는 우리의 일에 대하여 책임을 질 필요가 없고 변명할 필요도 없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하시는 말씀 앞에서 저절로 아멘, 하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신이 원하시는 대로 사용하시고 바꾸신다. 우리의 운명도 하나님의 손에 있다. 하나님과 다투려 해봐야 쓸데없는 짓이다.
본문에서 이를 열국에 대한 모든 소유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알리신다. ‘그는 만국을 커지게도 하시고 다시 멸하기도 하시며 열국으로 광대하게도 하시고 다시 사로잡히게도 하신다.’ 고난 중에도 이를 욥은 알고 있었다. “민족들을 커지게도 하시고 다시 멸하기도 하시며 민족들을 널리 퍼지게도 하시고 다시 끌려가게도 하시며 만민의 우두머리들의 총명을 빼앗으시고 그들을 길 없는 거친 들에서 방황하게 하시며 빛 없이 캄캄한 데를 더듬게 하시며 취한 사람 같이 비틀거리게 하시느니라(욥 12:23-25).”
이에,
여호와께서는 강이 변하여 광야가 되게 하시며
샘이 변하여 마른 땅이 되게 하시며
그 주민의 악으로 말미암아 옥토가 변하여
염전이 되게 하시며 또 광야가 변하여 못이 되게 하시며
마른 땅이 변하여 샘물이 되게 하시고
주린 자들로 말미암아 거기에 살게 하사
그들이 거주할 성읍을 준비하게 하시고
밭에 파종하며 포도원을 재배하여
풍성한 소출을 거두게 하시며
또 복을 주사 그들이 크게 번성하게 하시고
그의 가축이 감소하지 아니하게 하실지라도
다시 압박과 재난과 우환을 통하여
그들의 수를 줄이시며 낮추시는도다
(시 107:33-39).
이를 욥기서에서 엘리후의 증언으로 들으면, “주께서 침묵하신다고 누가 그를 정죄하며 그가 얼굴을 가리신다면 누가 그를 뵈올 수 있으랴 그는 민족에게나 인류에게나 동일하시니 이는 경건하지 못한 자가 권세를 잡아 백성을 옭아매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욥 34:29-30).” 곧 ‘하나님께는 열방을 다 닦아낼 수 있는, 물통의 한 방울 물까지도 훅 불어버릴 수 있고, 이를 저울의 적은 티끌 같게 여기신다.’ “보라 그에게는 열방이 통의 한 방울 물과 같고 저울의 작은 티끌 같으며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으리니 레바논은 땔감에도 부족하겠고 그 짐승들은 번제에도 부족할 것이라(사 40:15-16).”
하나님은 결국 어떤 자로부터도 자기의 영광을 손상 받지 않으실 분이다. 만일 우리가 믿는 자들로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그들 때문에라도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일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누린다. 야곱의 꾀로 축복을 가로챘을 때도 하나님은 저로 이스라엘을 삼아 선민을 이루게 하셨다. 그의 넷째 아들 유다가 며느리 다말에게서 얻은 아들로 다윗의 계보를 잇고 메시야의 족보에 오르게 하셨다. 성경의 모든 초점은 사람의 실수나 허물이 아니라 그것으로 하나님이 이루어 가시는 영광의 의다. 나의 생에서 나는 이를 개인적으로 고백할 수 있다.
오늘의 나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의 기념물이다. 악에서 되찾아온 전리품 같다. 돌아보면 죽어 마땅하였을 죄악에 대하여도 하나님은 일체 용서와 긍휼하심으로 사하셨다. 그렇게 “거만한 자는 지혜를 구하여도 얻지 못하거니와 명철한 자는 지식 얻기가 쉬우니라(잠 16:4).” 이를 알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우리를 흙에서 지으셨다. “나와 그대가 하나님 앞에서 동일하니 나도 흙으로 지으심을 입었은즉 내 위엄으로는 그대를 두렵게 하지 못하고 내 손으로는 그대를 누르지 못하느니라(욥 33:6-7).”
그러므로 우리는 아직도 하나님 손에 들려있는 진흙과 같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으며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가 없사오니 이는 주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숨기시며 우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소멸되게 하셨음이니이다 그러나 여호와여, 이제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사 64:7-8).” 하여서 “자기의 계획을 여호와께 깊이 숨기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의 일을 어두운 데에서 행하며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보랴 누가 우리를 알랴 하니… 질그릇 조각 중 한 조각 같은 자가 자기를 지으신 이와 더불어 다툴진대 화 있을진저 진흙이 토기장이에게 너는 무엇을 만드느냐 또는 네가 만든 것이 그는 손이 없다 말할 수 있겠느냐(29:15, 45:9).”
이상과 같이 이사야와 예레미야, 바울의 설교에서 오늘도 나로 하여금 이 주어진 시간과 여건과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인정하게 한다. 하나님의 오른손은 높으시지만 그는 높은 손으로 이 모든 상황과 여건을 다스리신다.
주의 팔에 능력이 있사오며
주의 손은 강하고 주의 오른손은 높이 들리우셨나이다
의와 공의가 주의 보좌의 기초라
인자함과 진실함이 주 앞에 있나이다진 않으신다
(시 89:13-14).
그러므로 오늘도 주 앞에 엎드려서,
내가 말하기를 나의 행위를 조심하여
내 혀로 범죄하지 아니하리니
악인이 내 앞에 있을 때에 내가 내 입에
재갈을 먹이리라 하였도다
(39:1).
이는,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이다 (셀라)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로 소란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거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5-6).
그리하여 오늘도,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나를 모든 죄에서 건지시며 우매한 자에게서
욕을 당하지 아니하게 하소서
(7-8).
할 때에,
주는 나를 용서하사 내가 떠나 없어지기 전에
나의 건강을 회복시키소서
(1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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