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 앞에 세우시나이다

하현. 2025. 12. 20. 04:21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여호와께 노래하라 너희는 여호와를 찬양하라 가난한 자의 생명을 행악자의 손에서 구원하셨음이니라

렘 20:9, 13

 

주께서 나를 온전한 중에 붙드시고 영원히 주 앞에 세우시나이다

시 41:12

 

 

주의 뜻에 따라 살거나 주를 전하는 일에 있어, 언제나 형통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와 같이 신앙을 지킴으로 불이익을 겪는 경우도 있고 가까웠던 이가 멀어지는 경우는 흔하다. 서로 일상적인 이야기나 적당한 타인으로 친절한 정도에서는 이웃이었다가 그 영혼을 놓고 주의 이름으로 다가가면 사이가 멀어지는 것이다. 가령 늘 가까이 있고 그 아이 때문에도 인천으로 옮겨온 이유인데, 적당한 거리에서 그저 아이 일로만 저이 말을 듣고 뭐라 의견을 나눌 때는 좋았다. 그러다 그 일의 근본이랄 수 있는 본인의 일과 그 신앙에 따른 동참을 권면하였다가 머쓱해졌다.

 

아주 고약했던 경우는 어떤 아이가 자해를 되풀이 하여 어렵게 가까워졌다. 마음을 열고 글도 쓰고 자기 이야기도 하게 되었다. 그렇게 같이 예배도 드릴 것이라고 아이는 원했으나 느닷없이 아이엄마가 거절했다. 저이도 숱하게 왔고 여러 번 자신과 그 가족사까지 이야기하며 기도까지 부탁하다, 정작 아이가 같이 예배를 드리며 주일을 지키겠다고 마음을 열었는데 말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여서 ‘아이 문제’로만 대하기를 원했다. 신앙이나 종교로(?)는 싫다는 것이다. 저이도 모 교회를 나갔고 아이가 다니지 않아 걱정을 하던 이가 그러니까 사뭇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그때 했던 말이 보낼 거면 ‘제대로 된 교회’로 보내겠다는 거였다.

 

그때 나는 깊은 상처를 받았다. 믿는다고 하는 이들의 마음에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다. 다소 이율배반적인 이와 같은 느낌이나 경우는 수도 없이 많았다. 나는 의기소침하였고 내심 마음이 어려워서 오늘 선지자 예레미야의 심정으로 아뢴 적도 많았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고 나는 여러 번 전에 다니던 교회에서 평범한(?) 성도로 어울리며 교사나 집사로 참여할 생각을 했다. 그러니까 ‘말씀을 선포하는 자’로는 그만하고자 했다.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9).” 하는 심정이 같다.

 

그런저런 일로 마음을 닫고 더는 내가 나서지 않게 된 경우는 여럿 있다. 무어라 권하고 같이 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오히려 상처가 되는 것을 회피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다소 고질적인 나의 기질 때문이기도 하다. 과잉감정이입으로 누구의 어떤 문제로 내가 더 힘들다. 그러니 마음을 쓴다고 쓰다 정작 상대가 내 말을 별로 귀히 여기지 않는 것 같을 때는 상처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알게 된 것이 ‘적당한 거리’다. 모든 관계에는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의 거리두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더는 가까이 갈 수도 멀어질 수도 없는, 어떤 공백으로 내가 짊어지고 가라앉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할 만큼 하다 안 되면, 묻은 먼지도 털어내는 심정으로 ‘잊힐 용기’가 필요하다.

 

그럼 또 다른 관계가 찾아왔다. 그때는 다시 주 앞에 아뢴다. “여호와께 노래하라 너희는 여호와를 찬양하라 가난한 자의 생명을 행악자의 손에서 구원하셨음이니라(13).” 즉 그때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해야 하는 일’을 명확히 구분하는 게 지혜였다. 주께 아뢰고 주가 더는 허락하지 않으시는 일에서는 버려진다 해도 손을 떼야 한다. 또한 주께 아뢰고 내가 골병이 들 것 같아도 ‘해야 하는 일’에 대해서는 순종해야 한다. 이를 구별하기 위해서는 내가 항상 말씀으로 기준을 삼고 내 안의 영이 나로 하여금 더하시는 마음에 냉철해야 한다. 마음은 늘 허깨비 같아서 들썩거리기 일쑤지만 그래서도 이와 같은 마음을 들고 주의 말씀 앞에 내려놓아야 한다. 그리하면,

 

주께서 나를 온전한 중에 붙드시고

영원히 주 앞에 세우시나이다

(시 41:12).

 

하는 오늘 시편의 고백이 내 것이 되었다. 오늘 여기 “임멜의 아들 제사장 바스훌은 여호와의 성전의 총감독이라 그가 예레미야의 이 일 예언함을 들은지라(1).” 높은 지휘의 바스훌이 등장한다. 예레미야에 대해 바스훌의 부당한 반감과 노여움이 드러났다. “이에 바스훌이 선지자 예레미야를 때리고 여호와의 성전에 있는 베냐민 문 위층에 목에 씌우는 나무 고랑으로 채워 두었더니(2).” 바스훌은 예레미야와 같은 제사장이었다. 그는 예레미야를 보호해야 했다. 예레미야는 자신의 반열에 속했고 똑같이 제사장이다. 더욱이 그는 ‘여호와의 집 제사장’이었다.

 

그러나 바스훌은 여호와의 사역자로서 제사장들의 이익을 도모해야 하는 직분이었음에도 말씀을 전하는 예레미야를 박해하는 자가 되었다. 그는 임멜의 아들이다. 즉 제사장들 중 열여섯 번째 반차에 속한다. “열다섯째는 빌가요 열여섯째는 임멜이요(대상 24:14).” 즉 임멜은 열여섯 번째 반열의 조상이고, 스가랴는 아비야 반열에 속했다고 하는데(눅 1:5), 아비야는 여덟 번째 반열로 예레미야의 계보다(대상 24:10). 오늘 본문은 바스훌이 누구인지, 어떤 자인지를 먼저 소개한다. 그렇게 따지면 예레미야는 다섯 번째 반차에 속한 계대의 인물이다. 그런 가운데 바스훌은 ‘성전의 총감독’이었다. 자기가 대표하고 있는 반차의 봉직 기간 동안에만 성전의 총감독 노릇을 했다. 아니면 그는 대제사장 바로 밑의 부대제사장이었든지 했을 책임자이다.

 

그런 가운데 저는 권세를 이용하여 예레미야의 경고와 예언을 적대시했다. 곧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저는 정면으로 도전한 셈이다. 하나님의 제사장들 사이에서 악의가 드러났다. 바스훌이 예레미야를 칠 기회를 얻으려는 악의적인 목적으로 도벳 골짜기에 가서 그의 예언을 들었다는 소리다. 아니면 예레미야와 함께 도벳 골짜기로 간 여러 제사장의 어른 중 하나였다. 예레미야가 도벳에서 여호와의 집 뜰로 돌아왔을 때 바스훌이 그의 전한 말을 이유로, “이에 바스훌이 선지자 예레미야를 때리고 여호와의 성전에 있는 베냐민 문 위층에 목에 씌우는 나무 고랑으로 채워 두었더니” 하는 실상이 벌어졌다.

 

‘예레미야가 이 일 예언함을 들었다.’ 곧 예레미야가 이런 일들을 예언하는 것을 듣고 참을 수가 없었다. 특히 자기가 총감독으로 있는 여호와의 집 뜰에서 예레미야가 감히 자기 허락도 없이 설교를 했다는 것에 바스훌은 견딜 수 없었다. 믿는 자들로서 서로는 각자의 옳고 그름으로 오히려 안 믿는 자들보다 폭력적이기도 한다. 교회 안에서 권력을 남용하여 담임 목회자니 부역자니 하는 것으로 따지면 일이 더 복잡하다. 그런 일은 너무 흔히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스훌은 격분하여 예레미야를 때리고 가뒀다. 안 믿는 자들로부터 당하는 공격보다 더욱 충격이 크다.

 

신약시대에도 대제사장이 바울을 치라고 명령했던 것과 같이 예레미야를 망신시키려는 목적이 있다. 자신의 권위를 높이려는 뜻도 있었겠다. 흔히 믿는 자들로 서로를 공격하는 경우는 자신의 뜻이 더 옳다고 여길 때이다. 그와 같이 ‘농부들은 종종 종들을 때렸다.’ “농부들이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거늘(마 21:35)” 각자의 신분에 따라서도 그럴 수 있고, 상대보다 자신이 옳다 여기는 생각으로 그럴 수도 있다. 문제는 같은 신분으로 그럴 수 있다는 게, 그래서 더 무서운 것 같다.

 

문득 바울 사도의 증거가 돋보이듯 생각난다.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고전 4:12-13).” 그럴 때 물론 심리적으로 위축되고 상처를 입어서,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파멸과 멸망을 선포하므로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 거리가 됨이니이다(8).” 굳이 듣기 싫어하고 해봐야 듣지도 않을 것인데 이를 전해야 해서,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고 돌아앉아 혼자 시무룩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9).”

 

이는 숙명 같다. 목사로서 말씀을 전하고 위로하고 선포하는 일에서도 그렇지만 믿는 자로서 그 믿음을 지키는 일은 바보 같아서, “나는 무리의 비방과 사방이 두려워함을 들었나이다 그들이 이르기를 고소하라 우리도 고소하리라 하오며 내 친한 벗도 다 내가 실족하기를 기다리며 그가 혹시 유혹을 받게 되면 우리가 그를 이기어 우리 원수를 갚자 하나이다(10).” 사실 참 어려운 게 신앙적으로 권면하는 일이다. 저마다 하소연을 하고 자기 말을 들어주기만을 원한다. 말(言)이 고픈 것은 그 영혼이 허기져서 그렇다. 그저 그럴 때 그렇구나, 하고 들어주는 것만을 바라는데… 이 일은 ‘친절한 타인’으로 하면 된다. 우리에게는 대안이 있고,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도 안다. 하지만 열에 아홉은 답을 원하는 게 아니다. 그냥 문제만 늘어놓기를 원한다. 실상은 해결할 마음이 없다.

 

얼마 전 환갑이 훌쩍 넘어 글쓰기를 하겠다는 이가 왔다. 두어 달 같이 하려 할 때 저는 말이 고파서 오는 거였다. 그것을 글로 쓰시라, 해도 못하겠고 같이 신앙으로 해결하자 해도 싫어했다. 그냥 자기 말만 하고 싶은 것이다. 일주일에 한 번 서너 시간을 이 말 했다 저 말 했다 하다 뭐라 권하려고 들자 그만두었다. 듣기는 싫어하고 자기만 말하고 싶은 게 사람 본심이다. 그런 거 보면 듣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들음은 권세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그러니 이 일이 쉬울 리 없고 우리가 한다고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억지로라도 붙이시고 맡기시는 일이 있다. 가령 어제 아내는 토요일마다 봐주는 아이 둘에 대해 어찌해야 하나, 수술을 앞두고 우리는 이 핑계로 그만두기로 했다.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서로 이혼을 했고, 어린 두 아이는 공부할 애들도 아니고, 작은 애는 조울증 증세로 약을 먹는데 그 상태가 심각하고 큰 애는 거짓말에 능청스럽기까지 해서 아내는 늘 힘들어했다. 그래서도 토요일에 두 아이 수업 때 같이 있었다. 그럼 좀 어려워도 하고 눈치를 보는 듯해서 그것만으로도 수월하다고 해서였다. 실은 두 애 다 갈만한 학원이 없었다. 받아주지도 않지만 보내면 잠만 자다 온다고, 아내처럼 들들 볶으면서 억지로라도 몇 시간씩 가르치지를 않는다. 그러니 녹초가 되어서 이참에 수술 핑계로 그만둘 요령이었는데 수술 후에 아이 둘이 방학하고 우리 집으로라도 데려온다고 하니….

 

오늘 예레미야는 그런 심정에서 주 앞에 못하겠다고 하소연하는 것이다. 바스훌은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예레미야가 예언한 멸망을 방지할 심산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예레미야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예레미야는 ‘나라는 멸망할 것이다’ 하고 선언한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너로 너와 네 모든 친구에게 두려움이 되게 하리니 그들이 그들의 원수들의 칼에 엎드러질 것이요 네 눈은 그것을 볼 것이며 내가 온 유다를 바벨론 왕의 손에 넘기리니 그가 그들을 사로잡아 바벨론으로 옮겨 칼로 죽이리라(4).”

 

말씀을 곧이곧대로 전달하기란 큰 용기가 필요하다. 에둘러 말하거나 듣기 좋게 전할 수 있는 것은 지혜이기보다 더러는 회피에 가까운 듯하다. 누가 몇 년째 같은 고통을 호소하며 기도를 부탁한다. 나는 저의 사연을 들을 때마다 잃어버린 주일과 예배, 곧 그 신앙을 먼저 재정비해야 한다고 말한다. 저는 늘 그럴 거야, 하는 식으로 ‘나중에’ 하는 단서로 우선순위를 바꾼다. 그러니 백날 뭐라 한들 소용이 없다. 그저 기도만 해달라는 소린데, 것도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 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7).”

 

결국은 주가 이기신다. 나는 두 손을 든다. 그러니 하소연을 하든지 푸념을 늘어놓든지, 주 앞에서 할 일이다. 사람 붙들고 말해봐야 오히려 하나마나하고 안 하니만 못한 게 된다. 그걸로 뭐라 입바른 위로는 들을지 모르겠지만 듣다보면 세상적으로 이래저래 잘 될 거라는 막연한 소리거나 싱거운 답일 뿐이다. 그런 가운데 주께만 죽는 소릴 한다. “그러하오나 여호와는 두려운 용사 같으시며 나와 함께 하시므로 나를 박해하는 자들이 넘어지고 이기지 못할 것이오며 그들은 지혜롭게 행하지 못하므로 큰 치욕을 당하오리니 그 치욕은 길이 잊지 못할 것이니이다(11).”

 

결국 이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일을 본다. “의인을 시험하사 그 폐부와 심장을 보시는 만군의 여호와여 나의 사정을 주께 아뢰었사온즉 주께서 그들에게 보복하심을 나에게 보게 하옵소서(12).” 사람을 보거나 나의 어떤 기대나 소망으로는 감당이 안 된다. 나도 나를 못 이기면서 누굴 이기려고 싸우겠나? 나도 나를 돌이키지 못하면서 내가 누굴 돌이키려 들겠나? 하는 수 없다. 주께 맡김으로 나는 다만 주께 책임을 돌린다. “여호와께 노래하라 너희는 여호와를 찬양하라 가난한 자의 생명을 행악자의 손에서 구원하셨음이니라(13).” 그렇게 아뢰고 또 행할 뿐이다. 죽는 소릴 할 때는 주께만 하는 것으로,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나와서 고생과 슬픔을 보며 나의 날을 부끄러움으로 보내는고 하니라(18).”

 

어렵다, 나 하나 주 앞에서 바로 살기 어려운데 하물며 누굴… 나는 할 수 없으니 주가 행하시기를. 일련의 상황과 그 여파로 생기는 일들까지도 주가 그리 행하심을 앎으로 주가 또한 이루실 뜻을 따라 잠잠하기를.

 

내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나를 고치소서 하였나이다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4, 9).

 

사람을 보고는 할 수 없으니,

 

그러하오나 주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고 나를 일으키사

내가 그들에게 보응하게 하소서 이로써

내 원수가 나를 이기지 못하오니

주께서 나를 기뻐하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10-11).

 

그러므로

 

주께서 나를 온전한 중에 붙드시고

영원히 주 앞에 세우시나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영원부터 영원까지 송축할지로다 아멘 아멘

(12-1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