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

하현. 2025. 12. 22. 05:47

 

땅이여, 땅이여, 땅이여, 여호와의 말을 들을지니라

렘 22:29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

시 43:3

 

 

우리는 적당하고 평안할 때는 안일하다. 안일함으로 주의 음성을 뒤로 하고 사는 데 급급하다. 오늘 말씀이 그런 나를 불러 세우신다. “네가 평안할 때에 내가 네게 말하였으나 네 말이 나는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나니 네가 어려서부터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함이 네 습관이라(21).” 그럴 때면 마치 하나님은 ‘나, 여기 있다!’ 하고 내게 알리시듯 어떤 어려움을 보내신다. 모든 문제는 느닷없고 난감하여 우리들로 하여금 속수무책이게 한다. 쉽게 해결할 수 있는 것으로는 어려워하지 않는다. 그런 게 문제가 아니라 어찌할 수 없는 게 문제다. 이를 통하여 “네가 어려서부터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함이 네 습관이라.” 하시는 데서 나의 몸에 밴 습관을 돌아본다.

 

오늘 말씀은 여호야김 왕 앞에서 설교하는 내용이다. 앞에 21장에서는 시드기야 왕이 예레미야에게 제사장들을 보낸 것을 보았다. 오늘은 예레미야가 여호야김 왕의 집에 직접 가서 말씀을 전하는 내용을 듣게 된다. ‘유다 왕이여!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니라.’ 하고 고한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는 유다 왕의 집에 내려가서 거기에서 이 말을 선언하여 이르기를 다윗의 왕위에 앉은 유다 왕이여 너와 네 신하와 이 문들로 들어오는 네 백성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니라(1-2).”

 

여호와의 말씀이 계신 곳에 자기들의 다스리는 권세가 있다. 이를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유다 왕은 ‘다윗의 위에 앉은 자’로 호칭된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을 추구하는 자’이다. 오늘 우리들, 성도라 하면 누구나 다윗이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추구하는 자들이다. 유다 왕은 하나님이 다윗과 맺은 언약을 따라 다윗의 권위와 권세를 가진 자들이다. 그러해야 한다. 그러므로 유다 왕은 하나님이 다윗에게 하신 약속의 혜택을 입으려 하고 그러려면 다윗이 보여 준 선례를 따라야 한다. 다윗과 같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내가 또 내 마음에 합한 목자들을 너희에게 주리니 그들이 지식과 명철로 너희를 양육하리라(3:15).”

 

곧 우리는 모두 말씀의 대상이 되고 있어 오늘도 이와 같은 말씀 앞에 세우심을 받는다. 그렇듯 예레미야는 먼저 자신이 가서 전해야 하는 말씀을 받는다. “이르기를 다윗의 왕위에 앉은 유다 왕이여 너와 네 신하와 이 문들로 들어오는 네 백성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니라(22:2).” 하시고,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요구하시는 의무가 무엇이며 선이 무엇인지를 그들에게 말해야 한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정의와 공의를 행하여 탈취 당한 자를 압박하는 자의 손에서 건지고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거나 학대하지 말며 이 곳에서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3).” 먼저 살펴야 할 것은 두 가지이다. 첫째, 내가 가진 권세로 행할 수 있는 선이면 무엇이든 행해야 한다. 곧 피해를 입고 있는 자들을 수호하기 위해 정의를 행하고, 탈취당한 자를 압박하는 자의 손에서 건져야 했다. 이것은 우리가 행할 수 있는 자리에서 행해야 할 의무다.

 

가난한 자와 고아를 위하여 판단하며

곤란한 자와 빈궁한 자에게 공의를 베풀지며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구원하여

악인들의 손에서 건질지니라 하시는도다

(시 82:3-4).

 

곧 우리가 사역자로 사는 일 뿐 아니라, 성도로 사는 일에는 이와 같은 의무가 따른다. 그 두 번째로는 권세를 가지고 해를 끼치거나 압제하거나 학대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이는 단순하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에서 뿐 아니라, 자신을 돌아보아 주신 건강과 젊음과 물질을 가지고서 행하는 모든 일이 포함된다. 그런데 세상에서 법과 정의를 빙자하여 남을 압제하고 학대하는 일은 죄악이다. 저마다 그 입장과 위치가 서로 다른데 은연중에 우리는 ‘을’이 되었다가 ‘갑’이 되기도 한다. 곧 남에게는 엄격하고 자신에게 관대하는 자는 널렸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보다 약한 자들, 나로 돌아보게 하신 이들을 각별히 돌아보시며 이들을 하나님의 책임 하에 두고 우리들로 돌아보게 하시는 것이다.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음이라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출 22:21-22).” 그러므로 선행이란 어떤 특별한 이벤트가 아니라 일상에서 소소한 일들 가운데 우러나는 것이어야 한다.

 

이를 이행할 때, “너희가 참으로 이 말을 준행하면 다윗의 왕위에 앉을 왕들과 신하들과 백성이 병거와 말을 타고 이 집 문으로 들어오게 되리라(4).” 하심으로 완전한 평온을 누리고 그 위세를 떨치며 살아가게 될 것이라 하신다. “다윗의 왕위에 앉아 있는 왕들과 고관들이 병거와 말을 타고 이 성문으로 들어오되 그들과 유다 모든 백성과 예루살렘 주민들이 함께 그리할 것이요 이 성은 영원히 있을 것이며(17:25).” 하신 말씀은 누누이 강조하시는 바이었다.

 

동시에 왕족이라 해도, 권세 잡은 것으로 불의를 고집하면 그 일족이 멸문지화(滅門之禍)를 입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신다. “그러나 너희가 이 말을 듣지 아니하면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노니 이 집이 황폐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5).” 이를 권세를 잡기 전에는 귀 담아 듣다가 정작 권좌에 오르면 달라진다. 그처럼 권력은 중독성이 강해서 자칫 마음이 해이할 때면 금세 부패하기 마련이다. 이를 두고 하나님은 하나님보다 더 큰 것으로 맹세하실 수 없음으로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노니” 하심인데,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 하셨더니 그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히 6:13-15).”

 

죄는 비천한 사람이나 시정잡배의 집에만 머무는 게 아니다. 오히려 권세를 가진 자의 묵인과 암묵적인 방조가 더 강하게 작동하여 자신뿐 아니라 곁의 모두를 파멸시킨다. 곧 왕 앞에서 전하기를 그의 악이 그 자신은 말할 것도 없고 나라와 예루살렘 온 백성에 대해서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리라는 것을 설명해야 했다. “여호와께서 유다 왕의 집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네가 내게 길르앗 같고 레바논의 머리이나 내가 반드시 너로 광야와 주민이 없는 성읍을 만들 것이라(6).” 이 일을 행하심은 “그들이 대답하기는 이는 그들이 자기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을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긴 까닭이라 하셨다 할지니라(9).”

 

곧 우리는 다른 사람, 세상과 다른 존재인 것을 항상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한다. 이를 절실하게 느낀 것은… 어제는 성탄 주일로 아버지가 오셔서 말씀을 전하셨다. 성찬예식도 함께 하였다. 매월 셋째 주일로 아버지께 강단을 내드리는데, 말씀을 전하시는 중에 휘청하시며 어지러움을 호소하였다. 잠시 자리에 앉았다가 더는 말씀을 전하기 어려워서 뒤에 마련된 간이침대에 눕고, 나머지는 내가 전하였다. 두려움과 동시에 어떤 불안이 엄습하였다. 아버지가 준비하신 설교원고로 마저 정리하고, 같이 찬송을 부르며 ‘떡과 잔’을 나누고 예배를 마쳤다. 그 사이 아버지는 잠깐 잠이 드셨는지 꼼짝도 않는데 발을 건드리자 어, 하고 놀라서 일어나셨다. 어떻게 예배는 잘 드렸는지를 먼저 물었다.

 

응급실로든 뭘 어떻게 해야 하나 싶었는데, 마치 씻은 듯 괜찮다며 원래 상태로 돌아왔다. 나는 여전히 가슴이 울렁거리는데 어머니는 뒤에서 ‘기도가 이루어지는 줄 알았다’며 깊은 마음을 표현하였다. 항상 두 분이 기도하기를 아버지는 말씀을 전하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것이고, 어머니는 기도하다 잠들 듯 주의 품으로 안기는 것이었다. 나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몇 차례 더 괜찮은지 묻고 평소대로 식사를 하고 가평으로 가셨다. 일련의 상황이 주는 교훈이 컸다. 종종 우리는 낭만적으로 그러한 꿈을 꾸지만 곧 말씀 전하다, 기도하다, 잠들 듯 고요하게 주님 나라로 갈 수 있기를…. 바로 앞에 아버지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의외로 나는 덤덤하였다. 설교가 중단되고 이를 이어서 맡은 뒤 성찬식까지 거행하는 동안 생각보다 마음이 평안하였다.

 

우리의 여러 복 가운데 하나님 앞에 가는 그 날의 상황이 복되기를 기도한다. 나이가 이쯤 되니까 그와 같은 기도가 참 귀한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날 때는 의식 없이 왔으나 갈 때는 주를 바라며 주께 받은 은혜를 의식하며 감사함으로 찬송하고 갈 수 있기를…. 오늘 말씀이 이를 각성하게 하신다.

 

곧 ‘내가 너 파멸할 자를 준비하리라.’ 하심도, 우리를 ‘성별하여 거룩하게 만든다.’고 하심도 모두 주의 주권 아래의 일이라, ‘내가 그들을 이 직분에 임명해서 사용하리라.’ 하심도 파멸이 계획될 때 파멸자도 준비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두려워할 줄 알게 된다. 하나님께서 멸망을 계획하실 때 또한 구원의 손길도 펼치시는 것을, “내가 너를 파멸할 자를 준비하리니 그들이 각기 손에 무기를 가지고 네 아름다운 백향목을 찍어 불에 던지리라(7).” 그러므로 “너희는 죽은 자를 위하여 울지 말며 그를 위하여 애통하지 말고 잡혀 간 자를 위하여 슬피 울라 그는 다시 돌아와 그 고국을 보지 못할 것임이라(10).”

 

우리의 날을 우리로도 알지 못하게 하심으로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셨다. 어제 성탄절 주일 예배로 드리면서 있었던 상황이 여러 갈래로 의미를 부여하는 하루였다. 평소처럼 귀가하여 무사한 목소리를 확인하면서 서로가 웃음으로 대화를 나눌 때, 언젠가 누구는 세상 이편에서 누구는 세상 저편에서 서로의 안부를 주 안에서 확신하면서 감사와 찬송을 올리게 될 것이다. 하여 오늘은 ‘죽은 자를 위해 울지 말고 산 자를 위해 울어야 한다.’

 

“너희는 죽은 자를 위하여 울지 말며 그를 위하여 애통하지 말고 잡혀 간 자를 위하여 슬피 울라.”

 

이는 오늘을 사는 자로서 받아야 하는 명령이다. 죽은 자는 영원한 안식으로 하나님의 품에서 평안할 것임을.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유다의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에게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무리가 그를 위하여 슬프다 내 형제여, 슬프다 내 자매여 하며 통곡하지 아니할 것이며 그를 위하여 슬프다 주여 슬프다 그 영광이여 하며 통곡하지도 아니할 것이라(18).” 하고 전하실 때 이와 같은 말씀으로 우리가 듣고 나의 이 한 날을 돌아보게 된다. 그러할 때 오늘 시편의 음성은 한결같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시 43:5).

 

어제 아침, 주일 예배 전에 묵상하며 사모하였던 말씀이 일련의 상황을 겪고 난 뒤에 다시 되새기듯 묵상하니 새롭다.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4).

 

살면서 오늘을 사는 동안에 우리는 허황되이 천국을 사모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이 땅에서의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천국은 결코 낭만적이거나 몽환적인 꿈의 나라가 아니다. 지극히 현실이며 여전히 계속 되는 오늘 이 한 날의 연장이다. 그렇다면 분명히 어머니도 놀라서 가슴을 졸였을 텐데, 강단 뒤에 누웠다가 본래대로 회복하여 괜찮다고 일어나 나오는 아버지에게 기도가 이루어지는 줄 알았다고 건네는 말에서 모든 의미는 함축된다. 우리는 기도할 뿐이다. 무엇을 구하고 바라든지, 주의 뜻이 이루어질 것이다.

 

오늘은 아내가 무릎연골수술을 한다. 오전 일찍 입원과 동시에 여러 검사 후에 오후께 수술이라, 새벽에 일어나 오늘은 거실에 앉아 이처럼 말씀을 묵상하고 글을 쓴다. 까만 새벽길에 차들이 벌써 줄지어 다닌다. 월요일 아침이라, 마음도 부산하다. 아내는 겨우 3-4일 혹은 일주일 병원에 입원하는 것뿐인데, 화장실 청소에 어머니 아침저녁으로 드실 약과 각각 드려야 할 영양제나 음료를 여러 번 내게 일러주었다. 그 마음이 불안해서 그런지 청소기며 세탁기를 여러 번 돌리면서 야단을 떨었다. 그런 모습에서도, 우린 저마다 무엇에 대비하며 산다는 것이 새삼 천국을 두고 생각하게 하였다.

 

더러 우리가 나태할 때 성도를 이방의 입으로 교훈하기도 하신다. “선장이 그에게 가서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아니하게 하시리라 하니라(욘 1:6).” 곧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할 때 저의 다급함이 우리로 하나님을 찾게도 하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도 예레미야는, ‘장차 이방인들이 유대 민족의 죄악을 지적하게 될 것이라’ 경고하는 것이다. 세상이 교회를 교훈하는 시대다. 이방인의 말로 ‘자기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을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긴 연고라’ 하는 지적을 들을 것이라는 데서 수치를 느껴야 하는데….

 

“여러 민족들이 이 성읍으로 지나가며 서로 말하기를 여호와가 이 큰 성읍에 이같이 행함은 어찌 됨인고 하겠고 그들이 대답하기는 이는 그들이 자기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을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긴 까닭이라 하셨다 할지니라(8-9).”

 

오늘 이 말씀은 뼈아프다. 누가 내게 마치 화를 내듯 ‘나는 교회를 극혐한다’면서 아스팔트 위에서, 또는 뉴스를 오르내리며 전해지는 보도를 통해 저로서는 그리 생각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결국 이와 같은 현상은, “네가 평안할 때에 내가 네게 말하였으나 네 말이 나는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나니 네가 어려서부터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함이 네 습관이라(21).” 이것으로 오늘의 나는 어떠한가? 되돌아보아야 한다. 그러라고 예레미야는 외친다.

 

“땅이여, 땅이여, 땅이여, 여호와의 말을 들을지니라(29).”

 

오늘도 이처럼 말씀이 생활을 지적하고, 일련의 상황 속에서 말씀을 되새기며… 우선은 경고를 들어야 한다. “여호와께서 너를 배에 싣고 전에 네게 말씀하여 이르시기를 네가 다시는 그 길을 보지 아니하리라 하시던 그 길로 너를 애굽으로 끌어 가실 것이라 거기서 너희가 너희 몸을 적군에게 남녀 종으로 팔려 하나 너희를 살 자가 없으리라(신 28:68).” 오늘도 우리는 알 수 없는 날을 살면서 무엇을 의뢰하고 의지할 것인가? 그저 당장의 이로움은 공상에 불과하다. “부자의 재물은 그의 견고한 성이요 가난한 자의 궁핍은 그의 멸망이니라(잠 10:15).” 그럼 우린 무얼 바라고 붙들며 살 것인지,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약 5:7-8).”

 

세상이 어떠하든지, 현실이 아무리 어떻다 해도,

 

의인이 나를 칠지라도 은혜로 여기며

책망할지라도 머리의 기름 같이 여겨서

내 머리가 이를 거절하지 아니할지라

그들의 재난 중에도 내가 항상 기도하리로다

그들의 재판관들이 바위 곁에 내려 던져졌도다

내 말이 달므로 무리가 들으리로다

(시 141:5-6).

 

하여 오늘도 주 앞에 엎드려,

 

하나님이여 나를 판단하시되

경건하지 아니한 나라에 대하여

내 송사를 변호하시며

간사하고 불의한 자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43:1)

 

주 앞에 고할 때,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3-4).

 

그리하여,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