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었노라 너는 이 백성에게 전하라 하셨느니라
렘 21:8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시 42:5
우리는 늘 두 갈래로 나뉘는 길 앞에 선다. 너는 어느 쪽이냐? 하고 묻는 것 같은 순간들이 모여 인생을 이룬다. 어떤 곤경이나 어려움이 왔을 때는 더욱 그 질문은 뚜렷하게 들린다. 일련의 사태를 보면서 청탁이나 매관매직이나 하는 따위의 사건에서 주는 자나 받는 자나 동일한 길 위에 섰을 것이다. 예수님은 이르시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눅 13:24).” 당장은 그 문이 넓고 수월하여 복인 줄로 알지만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하리니(29).”
한 번 닫힌 후에는 열 자가 없어서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25)” 언제나 우리는 저마다의 두 길 위에 서서 선택해야 한다. 이때에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하심은 늘 그 문이 열린 것이 아니요,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더라(30).” 당장의 현상은 결과가 아님을 알게 하신다.
그러므로 오늘 시편으로 먼저 나의 영혼에게 전하기를,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시 42:11).
오늘의 현실이 어떠하든지, 당장은 어렵고 힘들다 해도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오늘도 산다. 여러 현상과 문제가 위협적으로 짓누를 때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할 수 있게 하시는 이의 손길을 바란다. 이런저런 생각이나 오늘의 현실을 생각하면 곤핍하나 주가 나와 함께 하심으로 나아간다. 오늘 본문은 그리하여 묻는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었노라 너는 이 백성에게 전하라 하셨느니라(렘 21:8).” 더러는 힘들고 어려워서 또한 감당할 수 없어서 힘에 부칠 때면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시 42:5).”
때는 시드기야 왕이 주전 588년에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으로부터 침략을 받았다. 이에 당황하여 예레미야를 부른다. 그는 본래 느부갓네살에 의해 옹립되었으나 반바벨론파의 득세로 애굽, 암몬, 두로, 모압, 시돈 등의 주변국과 동맹을 맺음으로 바벨론에 반란을 꾀하였다. “그가 사절을 애굽에 보내 말과 군대를 구함으로 바벨론 왕을 배반하였으니 형통하겠느냐 이런 일을 행한 자가 피하겠느냐 언약을 배반하고야 피하겠느냐(겔 17:15).”
막상 상황이 이렇듯 다급해지자 그는 자신이 투옥시켰던 예레미야에게 사람을 보냈다.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말씀이 임하니라 시드기야 왕이 말기야의 아들 바스훌과 제사장 마아세야의 아들 스바냐를 예레미야에게 보내니라(렘 21:1).” 이는 앞서 20장 초반에 언급된 임멜의 아들 바스훌과 다른 사람으로 동명이인이다. 이곳의 바스훌은 더욱 더 악랄하게 예레미야를 반대하는 사람으로 훗날에 예레미야를 반역죄로 처형하려 하였다. “그들이 줄로 예레미야를 구덩이에서 끌어낸지라 예레미야가 시위대 뜰에 머무니라(38:13).” 이때 시드기야는 이를 허용하였다. “시드기야 왕이 이르되 보라 그가 너희 손 안에 있느니라 왕은 조금도 너희를 거스를 수 없느니라 하는지라(5).”
그런 그들이 오늘은 다급하여 예레미야에게 찾아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우리를 치니 청컨대 너는 우리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라 여호와께서 혹시 그의 모든 기적으로 우리를 도와 행하시면 그가 우리를 떠나리라 하니(21:2).” 이 한 구절에 저들의 악함이 그대로 담겨있다. 우선은 다급하여 예레미야 곧 여호와 하나님을 찾는 이유가 분명하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우리를 치니’ 그러므로 요구하는데, ‘청컨대 너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해달라는 것이다. ‘여호와께 간구하라.’ 그러면서도 그냥 그러면 좋겠다는 식이다. ‘여호와께서 혹시 그의 모든 기적으로 우리를 도와 행하시면 그가 우리를 떠나리라’ 하니, ‘혹시’, ‘기적으로’, ‘우리를 도와 행하시면’…
이는 믿음으로 주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당장을 모면하고자 하는 것으로 굳이 어떤 신이어도 상관없다는 것이다. 더러 기도를 부탁할 때 저마다 어떤 어려움을 놓고 그 문제가 해결되길 바라는데, 가끔씩은 기분이 상한다. 이유는 문제만 해결할 수 있다면 굳이 하나님이 아니어도 된다는 투로 들려서 말이다.
여기서 ‘간구하라’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생각과 뜻, 곧 주의 섭리를 찾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목적은 당면한 문제를 해결 받고자 하는, 다분히 기복적인 마음으로다. 시드기야는 앞서 주전 701년에 예루살렘이 산헤립과 앗수르 군대에 의해 포위당했던 사건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때 히스기야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뢰하고 그의 신하들에게 일체의 함구령을 내려서 저들의 조롱과 위협을 뒤로 하고, 먼저는 히스기야 자신이 왕으로서 성전에 들어갔고, 이사야 선지자에게 사람을 보내 기도하기를 부탁하였다.
“히스기야 왕이 듣고 자기의 옷을 찢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여호와의 전으로 갔고 왕궁 맡은 자 엘리아김과 서기관 셉나와 제사장 중 어른들도 굵은 베 옷을 입으니라 왕이 그들을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에게로 보내매… 그런즉 바라건대 당신은 이 남아 있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하시더이다 하니라(사 37:1-2, 4b).”
같은 상황에서 오늘의 시드시야와 앞선 히스기야의 선택이 같은 것 같지만 다르다. 본문에서 시드기야는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전갈을 보냈다. 선지자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일러도 그의 앞에서 겸비치 않았던 왕이다. “그의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고 선지자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일러도 그 앞에서 겸손하지 아니하였으며(대하 36:12).” 그는 필요에 따라 겸손을 위장했지만 결코 겸손하지는 않았다. 자신을 낮추는 듯 했지만 선지자의 충고를 받아들이거나 권고를 받을 정도로 겸비한 자는 아니었다. 곧 당장의 문제를 모면하는 게 우선이었다.
본문의 내용을 보면서 오늘 우리의 신앙을 돌아보게 된다. 다급하고 간절하게 주를 찾을 수 있는 기회는 복이다. 믿는 자들이 고통 중에도 고난을 복으로 아는 까닭은 그리하여 주 앞에 간절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를 더욱 신뢰하고 의지하기 때문이다. 물론 당장의 문제로 그것이 해결되기를 바라지만 나아가 주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더욱 갈망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원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하지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삼상 2:30).”
이와 같은 말씀,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 하신 데 따른 오늘 우리의 자세를 돌아본다. 또한 “너를 괴롭히던 자의 자손이 몸을 굽혀 네게 나아오며 너를 멸시하던 모든 자가 네 발 아래에 엎드려 너를 일컬어 여호와의 성읍이라,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의 시온이라 하리라(사 60:14).” 즉 우리는 오늘의 이 모습이 전부가 아니다.
바울은 이를 강조하였다.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8-10).”
정말로 그러하지 아니한가? 나는 개인적으로 이를 항상 경험하면서 산다. 다들 어렵다, 죽겠다, 살기 힘들다 하면서 기를 쓰고 사는데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하는 찬송과 같이 나는 가진 것도 없으면서 평안히 흘러간다. 어제도 딸애와 아내와 같이 동네를 한 바퀴 돌고 차를 한 잔 하면서 이런저런 당면한 현실을 두고 말하는데, 나는 그저 모든 게 다 감사하였다. 앞에 앉은 딸애를 보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주가 함께 하시고 다스리셨던 그 모든 일들이 새로웠다. 갓난아이 때 천식이라며 종합병원 응급실에서 호흡이 급한 아이를 두고 전전긍긍할 때부터 모든 게 다 무난하였다. 기적처럼 천식은 사라졌고 곱게 자라 시집을 간다.
단돈 얼마라도 부모로서 도움을 줄 것도 없는데, 졸업 후에 언제 그렇게 모았는지 그 돈으로 다 준비하고도 남는다. 가만히 생각에 잠기다 보면 저절로 감사의 눈물만 난다. 늘 기도 제목은 믿는 아이와 믿는 가정을 바랐는데 이루어주셨고, 결혼할 아이 또한 믿음 안에서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이어서 나는 더 바랄 게 없다. 아내와 둘이 이것저것 준비할 것이나 일정을 말하는 동안 나는 가만히 감회가 새로울 따름이었다. 단적으로도 그러하고 나의 모든 일생이 그러하다. 남들이 보기에는 별 볼 일 없겠으나 나만큼 주의 은혜로 산 자는 없을 듯하다. 그때마다 두 갈래의 길 위에 놓일 때면 주 앞에 얼른 승복하는 것이 복이었다. 회개하고 돌이켜 주를 의뢰함이 은혜이다.
시드기야를 비롯하여 그 주변 인물들의 선택에서 보면 역설적으로 예레미야의 모습이 선명해진다. 자기들을 위해 하나님의 의사를 구하려는 요청, ‘우리를 위하여’, ‘오늘 이 문제 해결을 위해’ 누구라도 기도를 부탁할 수 있지만 나는 저에게 돌이켜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할 것을 부탁한다. 은혜의 지시는 죄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그러나 말 그대로 하나님의 은혜로만 이를 받아들일 수 있다. 자주 연락이 오는 누구의 어떤 어려움에 대하여 몇 년째 같은 내용과 권면으로 지겨울 지경인데, 나는 기도하면서 저로 이 일이 주를 찾게 하기를 그때마다 간구한다.
그럼에도 항상 기도의 목적은 대부분, “바라건대 이번만 나의 죄를 용서하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구하여 이 죽음만은 내게서 떠나게 하라(출 10:17).” 하는 바로와 같은 심사로 구한다. 그렇듯 물에 빠진 사람 건져주면 보따리 내놓으라는 격이라, 참 신앙으로의 기도와 간구는 아무나의 것은 아닌 듯하다. 앞서도 비교하였듯이 시드기야의 기도요청과 히스기야의 기도요청은 같은 듯하나 다르다. 그럴 때 나타나는 응답도 확연히 다르다.
“이러므로 히스기야 왕이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와 더불어 하늘을 향하여 부르짖어 기도하였더니 여호와께서 한 천사를 보내어 앗수르 왕의 진영에서 모든 큰 용사와 대장과 지휘관들을 멸하신지라 앗수르 왕이 낯이 뜨거워 그의 고국으로 돌아갔더니 그의 신의 전에 들어갔을 때에 그의 몸에서 난 자들이 거기서 칼로 죽였더라(대하 32:20-21).” 여기서 주목하게 되는 단어는 ‘더불어’ 기도하였다는 것이다. 히스기야 당시는 왕이나 백성이 전체적으로 개선하고 경건히 지내었다.
오늘 여기 시드기야는 모두가 부패하였고 타락한 상태 그대로 당장에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우리를 치니 청컨대 너는 우리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라 여호와께서 혹시 그의 모든 기적으로 우리를 도와 행하시면 그가 우리를 떠나리라 하니(렘 21:2).” 같은 듯 다른 점은 미묘한 듯하나 그 차이는 크다. 그러자 선지자 예레미야는 저들이 원하는 기도나 위로의 말로 구하여 왕에게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님의 드신 손을 분명히 보여 알게 하였다. “내가 든 손과 강한 팔 곧 진노와 분노와 대노로 친히 너희를 칠 것이며 내가 또 사람이나 짐승이나 이 성에 있는 것을 다 치리니 그들이 큰 전염병에 죽으리라 하셨다 하라(5-6).” 하실 때 사실 그와 같은 말씀을 선포하기란 목숨을 걸고 하는 일이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 후에 내가 유다의 왕 시드기야와 그의 신하들과 백성과 및 이 성읍에서 전염병과 칼과 기근에서 남은 자를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의 손과 그들의 원수의 손과 그들의 생명을 찾는 자들의 손에 넘기리니 그가 칼날로 그들을 치되 측은히 여기지 아니하며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며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7).” 말씀은 이루어진다. 저들이 원하는 결과이든지 아니든지,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과 섭리로 일하신다. 그런 가운데,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었노라 너는 이 백성에게 전하라 하셨느니라(8).”
이때까지도 기회는 있었다. 돌이킬 수 있는 기회, 자신들의 죄악을 아뢸 수 있는 기회, 주의 긍휼하심을 바랄 수 있는 기회, 그리하여 주의 뜻을 돌이킬 수 있는 기회…. 그런 점에서 “롯의 처를 기억하라(눅 17:32).” 하신 말씀이 나는 항상 두렵다. 이를 늘 묵상함은 스스로를 예외라 여겨서는 안 된다. 천하의 바울이 신앙이 모자라고 믿음이 없어서 버림받을까 두려워했겠나?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아니다, 저는 철저하게 자신의 악함을 인정하였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롬 7:19-20).”
나 역시도 늘 먼저 염려와 근심이 나를 사로잡고 불안하게 하기 일쑤인데,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22-23).” 그러므로 날마다 두 갈래의 길 위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24).” 하고 절규하면서도 확신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25).” 내가 아니라 주가 이루신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다윗의 집이여 너는 아침마다 정의롭게 판결하여 탈취 당한 자를 압박자의 손에서 건지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의 악행 때문에 내 분노가 불 같이 일어나서 사르리니 능히 끌 자가 없으리라(렘 21:12).” 주를 사랑하면 할수록 주의 사랑을 잃을까 하여 더욱 간절하여지는 것이 사랑의 속성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 행위대로 너희를 벌할 것이요 내가 또 수풀에 불을 놓아 그 모든 주위를 사르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14).” 하시는 말씀 앞에 엎드려 나는 늘 그러한데,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하여 주옵소서, 하고 기도한다.
이는,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시 42:1-2).
늘 나의 생의 한복판에서 두 길 위해 설 때면,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었노라 너는 이 백성에게 전하라 하셨느니라(렘 21:8).” 나는 할 수 없고, 나로서는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낙심할 때,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5).
나의 영혼에게 선포해야 한다. 그리고 기도한다.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의 인자하심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의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8).
삶은 더러 잔인하여서,
내 뼈를 찌르는 칼 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내게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도다
(10).
그러할 때,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1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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