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는 마음의 비밀을 아시나이다

하현. 2025. 12. 23. 05:42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며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받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살 것이며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렘 23:5-6

 

하나님이 이를 알아내지 아니하셨으리이까 무릇 주는 마음의 비밀을 아시나이다… 일어나 우리를 도우소서 주의 인자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소서

시 44:21, 26

 

 

사는 게 사역이다. 사역은 주가 맡기신 사명이다. 사명은 부르심에 따른 보냄을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사는 게 일이라, 이 일을 순종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주를 바라는 게 복이었다. 이는 특히 곁에 아픈 사람이 있거나, 본인이 병원에 갔을 때면 여실히 드러난다. 아내가 수술을 하러 간 사이 나는 병실에서 기다렸다. 앞의 수술이 길어지면서 기다리는 시간도 늘어졌다. 마침 손위처남이 와서 같이 기다리며 이런저런 말이 오갔다. 성격 좋은 형님 덕에 병실에 있는 이들의 짧은 사연들을 들을 수 있었다.

 

병실 앞자리의 우리 또래 노인의 이야기가 길어졌다. 저는 23년 전에 뇌출혈로 반신불구가 되었다. 말이 어눌하였고 발음을 어려워하여 그런 줄 알았다. 그런 가운데서도 말하기를 좋아했다. 친정엄마를 비롯해서 모두가 교회를 다녔고, 그와 같은 과거형의 표현으로 오늘이 어떠한지 짐작이 갔다. 요즘은 집 앞의 성당에 다닌다고 하였다. 형님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자신은 조현병에 우울증에 무려 열 개 가까운 약을 먹어야 한다는 사실을 소곤거리듯 말하였다. 그런 가운데서도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았노라, 하는 소릴 하고 싶은 거였다.

 

사는 게 일이란 생각을 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일로 저마다 공평한 사명이 삶이었다. 나는 저이의 말을 들으며 문득 그런 생각을 하였고, 중요한 것은 어떻게, 왜, 사느냐 하는 목적의 문제라고 짐작하였다. 교회나 성당이나 절이나… 저이는 신(神)을 마음에 모시고 사는 게 중요하다는 소릴 하였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 말이 불 같지 아니하냐? 바위를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 하시는 오늘 말씀이 크게 들리는 듯하다(렘 23:29). 주일 날 놀란 가슴이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병원의 풍경과 사람들의 사연과 저마다의 표정이 함축하는 생의 무게가 느껴지는 하루였다. 사는 게 사역이란 생각을 하는 것도,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가리시고

우리의 고난과 압제를 잊으시나이까

우리 영혼은 진토 속에 파묻히고

우리 몸은 땅에 붙었나이다

(시 44:24-25).

 

하는 오늘 시편의 간구가 절실하게 와 닿는다. 하나님 없이 사는 삶이란 어떠한가? 언제고 주가 오라 하시면 갑자기라도 떠나야 하는 게 생이다. 아버지는 주일 날 본인이 느꼈을 두려움은 뒤로 하고 월요일에 장례식장에 다녀오셨다. 이제 일흔을 조금 바라보는 나이의 누가 돌아가셨다. 그는 아내가 목사로 사역하는 일을 외조하던 이였다. 몇 번 그 교회에 초빙되어 설교를 하시기도 했던 부친은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장례에 다녀오셨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삶이란 이와 같이 잠시 맡기신 사명이고 그런 가운데 우리에게 두신 사역이 각각 다르다.

 

오늘 본문은 태만한 목자들에 대한 경고의 말씀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위탁하신 신뢰와 책무를 요구하셨다. 그러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 목장의 양 떼를 멸하며 흩어지게 하는 목자에게 화 있으리라(1).” 곧 목자로 세움 입어 양들을 인도하며 먹이는 게 일이었을 텐데,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내 백성을 기르는 목자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가 내 양 떼를 흩으며 그것을 몰아내고 돌보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내가 너희의 악행 때문에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2).” 모으고 돌봐야 할 것을 흩으며 돌보지 않은 까닭이다.

 

양떼는 목자의 소유가 아니듯이 생은 우리의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이를 분명히 하시면서, “내 백성을 기르는 목자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가 내 양 떼를 흩으며 그것을 몰아내고 돌보지 아니하였도다.” 하심으로 하나님은 이를 ‘악행’이라 지목하셨다. 마땅히 해야 할 일에 있어 주가 주신 삶을 인정하고, 그것이 어떠하든지 주의 것으로 인정하고, 다만 맡은 자로 사는 일에 대하여… 양떼를 맡은 자로서 양 무리를 돌보는 일은 의무다. 우리가 사는 데 따른 열심은 필수이고 주의 뜻으로 사는 일은 맡은 자의 충성이 된다.

 

전날에 성탄주일로 지키고, 더하여 이번 주간에는 성탄절이 있는데 우리의 왕 되신 메시야, 곧 예수께서는 저 크고 선하신 목자로 오셨으며 우리를 돌보시고, 말일에는 일으킴을 받아 자기 교회를 복되게 하심으로 영광이 되실 것이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며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받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살 것이며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5-6).” 이 놀라운 은혜로 산다.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하심으로 성경이 축약된다. 이 한 구절로 우리의 구원은 실현되었음을 안다. 다윗 혈통으로 이상적인 왕 메시야가 오셔서 모든 소망을 실현하게 될 것이다. 예레미야의 직접적인 언급으로는 드물게 나타나는 메시야에 대한 예언이다. ‘의로운 가지’라 하심은 훗날에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하신 데서 실현되었다. 오늘 우리가 사는 데 있어 더러는 어떤 어려움으로 신음하고, 이는 마치 주께서 외면하시는 것 같이 고통스럽다 해도 우리는 삶으로 살아서 사는 일에 충성한다.

 

이를 이사야는 구체적으로 전하였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사 11:1-5).”

 

‘때가 이르리니’ 하실 때는 어떤 엄숙한 선언이 주의를 환기시키는 것 같다. 오늘 이 현실이 전부라면 이는 참으로 비참하고 어려운 일이겠으나 이와 같은 때를 통하여 주가 이루시고자 하는 본질적인 영생이 따로 예비되었음이다. 하여 본문은 이어서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받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살 것이며,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6).” 하심으로 굳건해진다. 이를 이사야 역시 전하여서,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치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 그 날에 주께서 다시 그의 손을 펴사 그의 남은 백성을 앗수르와 애굽과 바드로스와 구스와 엘람과 시날과 하맛과 바다 섬들에서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사 11:10-11).”

 

하신 것을 주의하여 보게 된다. 곧 누가 말할 때 예전에는 교회를 다녔다는 과거형 진술은 저를 위해 기도하게 하신다. 분명 “그의 손을 펴사 그의 남은 백성을 앗수르와 애굽과 바드로스와 구스와 엘람과 시날과 하맛과 바다 섬들에서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 하심이 안 믿는 가족이나 지금은 그릇 행하여 주를 떠나 살지언정 주께서 돌아오게 하시기를 위하여. 나는 어제 저이가 어째서 나와 단 둘이 남았을 때 자신이 조현이며 우울과 조울과 강박 등을 나열하여 열 개 가까운 약을 먹으며 살고 있다는 말을 했는지, 저는 더듬거리는 말과 말 사이에서 나는 시선을 모아 어느 지점을 보았다.

 

세상은 온통 크리스마스를 축제의 분위기로 한껏 들썩이게 한다. 나는 언제부턴가 부활절보다 성탄절을 더욱 숙연하게 여긴다. 하나님이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시고 33년을 사는 동안 주의 사명을 다하시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그 생의 목적을 완수하셨다.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으로 완성된 사역의 길이다. 우리의 모든 죄와 저주를 담당하심으로 우리로 해방시켜주셨다. 저는 메시야로 정의의 심판을 행하시는 의로운 왕이다.

 

그리스도는 다윗의 가지로 비유되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너와 네 앞에 앉은 네 동료들은 내 말을 들을 것이니라 이들은 예표의 사람들이라 내가 내 종 싹을 나게 하리라(슥 3:8).” 그리하여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사 11:1-2).” 저는 마른땅에 파묻혀 있는 줄기 같아서,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53:2).”

 

상대적으로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어떤 결과나 그 생의 결실을 두고 평가하기 쉬운데, 그렇게 따지면 예수는 젊은 몽상가로 죽은 순교자일 뿐이다. 누구는 자신이 살아온 날들을 두고 억울함을 호소한다. 내가 어떻게 살았는데, 하는 식으로 시작되는 저의 말은 자신의 열심을 두고 스스로 이루어온 생을 자부한다. 그래서도 억울하다. 어제 같은 병실의 저이는 그렇듯 자신을 두고 23년 동안 계속해서 어떻게 재활을 하였는지, 혼자서 두 아들을 어떻게 키웠는지… 그의 가슴에 말이 되어 편히 나오지 못하는 사연들로 답답하다는 듯 입술만 실룩거리며 말을 더듬으며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스스로 옳다 하는 것에 대하여,

 

스스로 거룩하게 구별하며 스스로 정결하게 하고 동산에 들어가서 그 가운데에 있는 자를 따라 돼지고기와 가증한 물건과 쥐를 먹는 자가 다 함께 망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사 66:17).”

 

여기서 주목할 것은 ‘스스로’에 대해서이다. 이를 지혜자는 말하길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우매한 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고 하느냐(전 7:16-17).” 반복하여 ‘지나치게’를 강조함이 같은 의미다. 하나님 앞에서의 ‘의와 악’의 구분은 명료하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데서 겸손도 순종도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에서의 ‘어떤 결과’, ‘저마다의 성과’를 두고 스스로 자부한다. 지나치게 열심을 다한다. 그에 따른 보상으로의 천국을 꿈꾸거나 하나님의 은혜를 바란다. 하나님은 그런 우리로 ‘가증하다’고 하신다. 이는 마치 “동산에 들어가서 그 가운데에 있는 자를 따라 돼지고기와 가증한 물건과 쥐를 먹는 자가 다 함께 망하리라.” 하심으로 동일시하신다.

 

하여,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마 7:22).”이는 같은 의미로 자기 임의로 열심을 다해 살았노라고 한들, 저마다 믿는다고 하면서 최선을 다해 살았다고 한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21).” 하시는 말씀에서 오래 머물고는 한다.

 

내 친구 아무개의 장인은 장로로 그 일생이 주의 의를 이루는 것이었다. 소위 강남에 빌딩도 있고 나름은 부자로 살았으나 실상은 그 이유가 선교사로 일생을 살다 들어온 이들이 정착할 수 있는 발판이 되는 거였다. 그렇게 얻은 강원도 어느 일대의 땅에 자신의 전부를 들여 집들을 짓고 마을을 형성하였다. 들은 바, 목적은 선교사들이 그렇게 돌아와 터를 잡고 각자의 사명으로 노년에 힘을 모아서 ‘치유 마을’을 구성하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자기 생의 전부를 바쳐 남은 사역의 숙원으로 삼았는데… 사람은 늘 생각 같이 선하지 못하다. 어처구니없는 사실이지만 선교사들끼리 어떤 불화가 생겼고, 서로 고소를 하는 데 이르러 꿈꾸던 마을은 완성할 수 없었다.

 

오히려 모든 것을 쏟아 부었던 이는 빈털터리가 되어 두 손 들고 물러났는데, 내가 주목하는 것은 그것까지도 주를 인정하는 것이었다. 내가 듣고 이해한 바로는 그렇다. 물론 그 과정에서 겪어야 했을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고, 그런 가운데 아내도 잃고 혼자되었으나 그 모든 것을 주의 뜻으로 여겨 순응하는 것이다. 내가 종종 찬송을 부르다 그 가사의 사연을 묵상하며 눈물짓는 것은 어떻게 같은 사람으로 살면서 사는 동안에 저마다 그 끔찍한 일을 겪고도 ‘평안해’ 하며 찬송하고, ‘샘물과 같은 은혜’로 찬송할 수 있는지! 가족을 잃고, 평생을 신경쇠약으로 자살충동으로 시달리면서, 노예 상인에서 돌이키고, 폐병에 걸린 젊은 선교사를 간병하다 딸을 잃고…. 차마 상상도 하기 싫은 고난과 고통 중에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5).”

 

이와 같은 현상을 우리는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나는 두려운 마음으로 존경한다. 저마다의 어려움과 고통으로 신음하면서도 주를 의뢰함으로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하는 고백이 어찌 모두의 것이 될 수 있겠나? 일생의 모은 전 재산이 어처구니없이 흩어지거나 갑자기 건강을 잃거나 자식을 잃고도 그런 가운데서 주를 의뢰함이란, 그리하여 살아서 생을 다하는 것으로 사역이었다. 주가 맡기신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 아무리 “이 땅에 간음하는 자가 가득하도다 저주로 말미암아 땅이 슬퍼하며 광야의 초장들이 마르나니 그들의 행위가 악하고 힘쓰는 것이 정직하지 못함이로다(렘 23:10).”

 

우리는, 믿는 자들로 우린 모두 맡기신 자로 사는 것일 텐데,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선지자와 제사장이 다 사악한지라 내가 내 집에서도 그들의 악을 발견하였노라(11).” 우리는 주 앞에 아뢴다. 나의 죄를 고하고 연약함을 고하여 주의 도우심을 바라면서 주신 한 날을 수고하는 것이다. 어떠하든지 오늘의 현실을 보고 낙심하기보다 낙심까지도 그것으로 주를 바라게 하려 하심인 것을… 주일에 나는 아버지의 급작스런 상황으로 평소보다 안정제를 더 먹어야 했다. 어제는 아내의 수술로 마음 졸이며 역시 또 안정제를 더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병원으로 갔다가 교회로 갔다가… 다만 그러면서도 주를 바라는 것으로 나의 일이다. 한 날의 수고로 족하였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는 가까운 데에 있는 하나님이요 먼 데에 있는 하나님은 아니냐(23).” 어떠하든지 주가 가까운 데나 먼 데나 함께 계신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신을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24).” 그러므로 오늘도 시편으로 찬송하고 기도하면서,

 

우리가 주를 의지하여 우리 대적을 누르고

우리를 치러 일어나는 자를 주의 이름으로 밟으리이다

나는 내 활을 의지하지 아니할 것이라

내 칼이 나를 구원하지 못하리이다

(시 44:5-6).

 

나의 열심과 나의 성실과 스스로의 거룩과 정결로가 아니라,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임하였으나

우리가 주를 잊지 아니하며

주의 언약을 어기지 아니하였나이다

 

하나님이 이를 알아내지 아니하셨으리이까

무릇 주는 마음의 비밀을 아시나이다

(17, 21).

 

그러므로 우리의 수고와 노력으로가 아니라, 주의 인자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 영혼은 진토 속에 파묻히고

우리 몸은 땅에 붙었나이다

일어나 우리를 도우소서

주의 인자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소서

(25-2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