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하시매 내가 대답하되 무화과이온데 그 좋은 무화과는 극히 좋고 그 나쁜 것은 아주 나빠서 먹을 수 없게 나쁘니이다 하니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이 곳에서 옮겨 갈대아인의 땅에 이르게 한 유다 포로를 이 좋은 무화과 같이 잘 돌볼 것이라
렘 24:3-5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원하며 주의 나라의 규는 공평한 규이니이다
시 45:6
오늘의 이 모든 형편과 사정은 주의 것이다. 어느 것도 주가 아니시면 이루어질 수 없는 것들이다.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눅 12:7).” 하신 말씀으로도 증명이 된다. 때로는 지겨울 정도로 힘에 겨워, 이 한 몸 건사하고 사는 것도 일이라. 이것도 일이라면 사명이고 사역이려니 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다윗이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나 성을 빠져나갈 때 듣도 보도 못한 인물 시므이가 나와 조롱하고 욕하고 흙을 뿌릴 때도, 그 일이 하나님으로부터 그리하게 하심인 것을 인정하였던 다윗처럼,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삼하 16:10).” 이와 같이 주를 인정함으로 산다. 살아서 사는 날 동안에 주를 인정함으로 주의 영광이 된다. 우울증으로 힘겨워하다 공황발작까지 오면서 지쳐 있는 영혼을 위해, 나는 통증을 가라앉히기 위해 어깨와 무릎에 주사를 맞고 나오면서 기도하였다. 아픈 것도 일이라, 이 또한 주가 다 아심으로 주의 이름을 부를 뿐이다.
오늘 본문은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가 또 다른 자에게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통해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마치 바울 사도의 설교에서처럼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다.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고후 2:15-16).” 오늘 나의 형편과 사정을 두고 누구는 목사가 되어 그 처지가 덕이 안 된다고 하지만 그래서도 주를 바라는 것이라, 누구에게는 처량하고 한심한 냄새로 누구에게는 그런 가운데 주를 바라는 복된 냄새로, 그리하여 이어지는 바울의 설교처럼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14).”
본문의 배경은 주전 597년에 하나님의 백성들인 유다 백성들 가운데 바벨론으로 옮겨진 자들에 관해서이다. 당시 저들은 유다의 지도층이었으며 핵심 인사들이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유다 왕 여호야김의 아들 여고냐와 유다 고관들과 목공들과 철공들을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옮긴 후에” 예레미야에게 환상을 보여주신다. “여호와께서 여호와의 성전 앞에 놓인 무화과 두 광주리를 내게 보이셨는데(렘 24:1)” 이런 상황(왕하 24:14-17)에서 저들의 처지나 그 형편이 어떻게 보였겠나? 이방인들의 눈에는 물론 믿는 자들의 눈에도 이와 같은 일이 조롱과 비난거리였을 것은 뻔하다.
그런데 하나님은 “한 광주리에는 처음 익은 듯한 극히 좋은 무화과가 있고 한 광주리에는 나빠서 먹을 수 없는 극히 나쁜 무화과가 있더라(2).” 이 둘을 보이시며 예레미야에게 물으신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하시매 내가 대답하되 무화과이온데 그 좋은 무화과는 극히 좋고 그 나쁜 것은 아주 나빠서 먹을 수 없게 나쁘니이다 하니(3).” 이에 대하여 하나님의 의도는 분명하였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이 곳에서 옮겨 갈대아인의 땅에 이르게 한 유다 포로를 이 좋은 무화과 같이 잘 돌볼 것이라(5).”
그러니까 지금의 처지나 상황으로 결정되는 게 아니다. 오늘의 일로 우리가 비관해서는 안 되고 낙심해서도 안 된다. 나는 가끔 ‘억장이 무너질 정도로 슬픈 이야기’를 보거나 읽는다.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여 눈물을 흘리며 슬퍼한다. 나의 이야기는 그런 가운데 늘 새 힘을 얻었다. 어릴 때 아주 철딱서니 없이 어릴 때도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나는 그 슬픔을 딛고 서는 법을 배웠다. 시골 여기에서 서울로 전학을 왔던 초등학교 5학년 때 성북구 소재 학교에서는 나를 거부하고 어디 특수학교를 제안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런 나를 교무실 복도에 그대로 두고 집으로 갔다. 선생들은 난감한 표정으로 서로 자기 반에 받는 것을 꺼려했다. 결국 복도에 서서 한나절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는데, 결국은 학년주임이 뭐라고 궁싯거리며 자신의 반으로 데려갔다.
그때 나도 어느 아이의 표현처럼 짐짝이 된 것 같은 슬픈 감정이 들었다. 이런 감정을 제대로 알지도 표현도 못할 나이였고, 그와 상관없이 우리 집은 너무 가난했다. 사택이 없어 교회 건물 2층에 가건물을 짓고 우리 여섯 식구에 어느 권사님 가족들까지 열 명이 살았다. 생각해보면 어디 거지소굴 같이 종이박스나 베니어판으로 두르고 비닐을 동여맨 몰골의 살림이었다. 누가 보면 건물 옥상에 허드레 짐을 쌓아놓은 듯했을 것이다. 6학년이 되면서 한 장애아동이 계단에서 구르는 사고가 있었고, 학교에는 장학사가 나오고 한바탕 난리가 났다. 궁여지책으로 모든 장애아동을 1층으로 반 편성을 새로 하게 했다. 6학년은 15반까지 있었는데 여자 15반이 하나 1층에 있었다. 결국 우리 남자애 4명은 여자애들 60명이 있는 반으로 재편되었다. 우리끼리 싫다고 해도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그때마다 선생들은 날카로운 목소리로 그럼 특수학교로 전학들을 가라고 윽박질렀다.
1년 반 남짓 하였을 그때의 기억은 수모와 모멸감으로 점철된다. 그때 나는 둔재였고, 읽기와 쓰기도 안 되는 지능이 떨어지는 아이로 평가되었다. 그리고 졸업식 날 나는 여수 애양원의 병원에서 다리와 팔을 교정하는 큰 수술을 몇 차례 받았다. 그곳은 나환자들의 변형된 신체를 일부 교정하는 외국인 설립의 병원이었다. 그곳 나환자촌 교회에서 소경된 장로님들을 만난 것이고 그 가운데 한 이는 유난히 나를 보살폈고 어린 나는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저 역시 어느 순간 자신이 나병인 것을 알게 되고 군사정권시절이라 강제수용되어 소록도로 끌려갔다가 한참동안 양성 치료 후 음성나환자촌으로 배정되어 온 것이다. 그러는 동안 가족들도 떠났고 친구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끌려올 당시 저는 대학을 다니던 꿈이 많은 청년이었다.
나병으로 인해 몸은 뒤틀어져 변형되었고 눈알은 빠져 아예 봉사가 된 뒤였다. 그런 이들이 예닐곱 명 둘러앉아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성경 테이프를 틀어놓고 듣는 일밖에 없었다. 저야말로 여러 차례 자살을 시도하였고 그때마다 하나님은 저의 죽음조차 막으셨다. 사는 게 지옥이라는 말, 저가 하나님을 사랑하기까지 그의 지옥은 끔찍한 현실로 내몰아서 죽지 못해 사는 형국으로 나날을 버텨야 했다. 그때 할 수 있는 일이란 성경을 암송하는 거였다. 저이가 주축이 되어 같은 소경들이 모여앉아 따로 성경암송을 실시했고 저를 비롯하여 모두가 성경 66권을 통으로 암송하는 사람들이었다. 저들의 일과는 기도하고 묵상하여 둘러앉아 성경을 서로 암송하는 거였다. 그나마 스스로 거동이 가능한 이가 병원으로 돌면서 환우들을 돌보고 성경으로 위로하다 나의 부모와 만났다.
그와의 인연이 내게는 복의 복이다. 내가 재활을 하는 동안 저는 병원으로 내려와 나를 휠체어에 태우고 예배당으로 갔다. 그럴 때면 앞을 못 보는 저이는 나의 말을 따라 앞으로 옆으로 이동해야 했는데 가끔은 짓궂게 일부러 더 언덕배기로 안내를 하기도 했다. 애양원 교회는 앞서 손양원 목사가 개척하여 세운 곳으로 유명하다. 특별한 일 없는 날에는 어린 내게 자신의 젊을 때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나의 푸념이나 넋두리를 들어주기도 했다. 어린 것이 나 역시도 죽고 싶어 하는 마음으로 살아내고 있었고, 사느라 사는 게 지겨워서 죽을 지경이기도 했다. 그럼 나보다 더했을 이가 곱은 손으로 내 어깨를 토닥여주었고, 저의 휑한 눈에서도 눈물은 흘러나왔다.
이러한 처지였을까? 오늘 본문은 그야말로 사는 게 지옥 같은 날들이었다. 바벨론에 의해 유다는 궤멸하였고 고위직이나 쓸모있는 자들은 포로로 끌려간 것이라, 대부분은 예레미야가 전하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거부하였다. 누가 들으려 하였겠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이 곳에서 옮겨 갈대아인의 땅에 이르게 한 유다 포로를 이 좋은 무화과 같이 잘 돌볼 것이라(5).” 하시는 말에 어떤 위로를 얻을 수 있을까? 병 주고 약 주는 것도 아니고, “내가 그들을 돌아보아 좋게 하여 다시 이 땅으로 인도하여 세우고 헐지 아니하며 심고 뽑지 아니하겠고 내가 여호와인 줄 아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어서 그들이 전심으로 내게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6-7).”
나는 더러 성경을 곱게 보지 못한다. 그럴 거였으면 출애굽을 시키지 말았어야지, 광야 40년의 혹독한 삶이라니! 약속의 땅 가나안이 거저 얻어지는 것이라지만 날마다 전쟁이라 그 고단함은 또 어땠을지 뻔하다. 물론 승리의 삶으로 주가 행하셨으나 그럴 때마다 못 견디고 다른 수단을 찾아 이웃나라 우상을 숭배하고, 저들의 문화로 보다 합리적인 신앙으로 하나님을 바라는 것에 대해 하나님은 일체 이를 용납하지 않으셨다. 그런 점에서 독재자 같고, 고약하기 이를 데 없는 통치자 아니신가? 현실은 혹독하고 처한 상황은 나병에, 격리에, 소경에… 우울에, 불안과 고통뿐인 것 같은데 그런 상황 속에서 주를 바라게 하심이니! 본문에서도 막상 예레미야의 예언이 성취되는 것을 경험하자 많은 이들이 뉘우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끝내,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유다의 왕 시드기야와 그 고관들과 예루살렘의 남은 자로서 이 땅에 남아 있는 자와 애굽 땅에 사는 자들을 나빠서 먹을 수 없는 이 나쁜 무화과 같이 버리되 세상 모든 나라 가운데 흩어서 그들에게 환난을 당하게 할 것이며 또 그들에게 내가 쫓아 보낼 모든 곳에서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며 말 거리가 되게 하며 조롱과 저주를 받게 할 것이며 내가 칼과 기근과 전염병을 그들 가운데 보내 그들이 내가 그들과 그들의 조상들에게 준 땅에서 멸절하기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시니라(8-10).”
반면에 끝까지 유다 땅에 남아 있던 자들은 예레미야에 대한 적대감을 버리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는 이 기간(주전 597-586년) 사이에 심각한 고초를 겪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받아들이고 순종하며 순응하는 사람과 끝내 거역하고 거부하며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는 사람의 차이는 크다. 오늘 본문은 여호와께서 포로로 이미 붙잡혀 간 자들에게 자비와 은총을 베풀고자 하심을 보여주신다. 실은 그게 관점이다. 그들은 비록 죄를 범했을지라도 여호와의 자비를 구하며 회개하였고,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선한 존재들로 보신다는 것이다. 곧 주는 징계하시되 이는 정죄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1:32).”
어릴 때 소경 장로들을 비롯하여 내 곁에 포진돼 있던 믿음의 사람들은 이와 같은 말씀의 증인들이다. 당장은 그 신세가 말이 아니나 저들은 비로소 회개에 이르렀고, 주만을 바랐으며, 남은 생을 온전하게 주와 함께 하였다. 이들에게 회개하는 심령을 주시려고, 그리하여 “내가 여호와인 줄 아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어서 그들이 전심으로 내게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7).” 이는 오늘도 다르지 않다. 나는 나의 연약한 육신과 비루한 형편을 사랑하게 된 것은,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나이게 이 한 구절의 말씀이 내 것이 되기까지, 그리하여 이제는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하는 각오와 고백으로 살 게 된 것으로도 충만하다. 먼저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원하여졌을 때 하나님은 이와 같은 충격을 사용하신다. 하여 “이는 우리가 전에 왕에게 아뢰기를 우리 하나님의 손은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 선을 베푸시고 자기를 배반하는 모든 자에게는 권능과 진노를 내리신다 하였으므로 길에서 적군을 막고 우리를 도울 보병과 마병을 왕에게 구하기를 부끄러워 하였음이라(에스라 8:22).”
하여서,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5-6).”
이에 우리는 그동안 어떤 열매를 맺으며 살고 있었는지를 돌아보게 하신다.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포도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눅 13:6-7).” 오늘도 나의 이 한 생명이 연장되는 것은 주의 은혜로 열매 맺기를 기다리심이다. 이는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요 15:2).”
그러므로 오늘의 고난은 장차 받을 영광을 소망하게 한다.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 일련의 사정과 상황으로 주를 더욱 바라고 사랑하는 계기가 된다면 이는 복이다. 은혜이고 은총이다. 나의 약한 데서 주의 온전하심이 거하신다. 나로 오늘도 이처럼 말씀 앞에 앉게 하시는 것은 주가 더하시는 고통으로다. 주사를 맞고 돌아와 곤히 잠들었다가 이른 새벽에 눈을 뜨고 성전으로 나아왔다. 끙, 하는 신음과 함께 아멘, 하는 찬송도 드려진다. 그러므로 나의 왕 되신 주를 찬양한다.
오늘의 고난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남은 자’인 것을 알게 된다. 그렇게 나의 소경 장로님은 저 천국에서 오늘도 날 위해 기도하실 것이다. 내가 그릇된 길로 행할 때도 늘 내 곁에서 기도하던 이들의 기도가 오늘의 나로 주 앞에 앉게 하는 힘의 원천이다. 오늘도 주가 이루시는 한 날로 살아드리면서,
내 마음이 좋은 말로 왕을 위하여 지은 것을 말하리니
내 혀는 글솜씨가 뛰어난 서기관의 붓끝과 같도다
왕은 사람들보다 아름다워 은혜를 입술에 머금으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왕에게 영원히 복을 주시도다
(시 45:1-2).
나의 왕 되신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며,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원하며
주의 나라의 규는 공평한 규이니이다
(6).
그리하여
내가 왕의 이름을 만세에 기억하게 하리니
그러므로 만민이 왕을 영원히 찬송하리로다
(1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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