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하현. 2025. 12. 25. 04:15

 

그가 이르시기를 너희는 각자의 악한 길과 악행을 버리고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 여호와가 너희와 너희 조상들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준 그 땅에 살리라

렘 25:5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시 46:1

 

 

어지간해서 고집을 꺾을 수 없다. 자기 생각이 옳다고 여기는 것을 놓지 않는다. 무릇 23년 동안 하나님이 선지자의 입을 통해 ‘돌아오라’ 전하고 권하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는 “유다의 왕 아몬의 아들 요시야 왕 열셋째 해부터 오늘까지 이십삼 년 동안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기로 내가 너희에게 꾸준히 일렀으나 너희가 순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3)” 그럼에도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종 선지자를 너희에게 끊임없이 보내셨으나 너희가 순종하지 아니하였으며 귀를 기울여 듣지도 아니하였도다(4).”

 

결국 우리의 고집은 우상을 섬김과 같다. 나의 억울함 또는 서러움을 안고서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찬송할 수 없다. 그런 가운데 드러나는 우리의 고집은 우울과 불안으로 나타나고 망상과 허상의 늪을 허우적거린다. 하여 ‘만일 ~하였더라면’ 하는 식의 가정법적인 논리에 갇히고 만다. 당장 예수님이 오셨는데도 마리아도 마르다도 같은 주장으로 서러움을 호소했다. 오라비 나사로가 죽은 뒤,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요 11:21).” 또한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32).”

 

이와 같이 우리 안에는 어떤 서러움, 그 노여움으로 인한 원망과 분함과 억울함과 후회가 뒤섞여 공황을 일으키거나 우울을 동반하여 의욕을 상실하게도 한다. 요즘 아내가 수술 후 병원에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힘이 없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인데 말 수도 줄고 내가 가면 자꾸 혼자 있게 가라고 한다. 아침에 라떼를 한 잔 사다주고 주위를 살피기 전에 아내는 벌써 가라고 재촉하였다. 오후에 들른다고 해도 싫다면서 대꾸도 잘 안 하려 든다. 막상 임의로 움직일 수 없는 몸과 그 처지가 한심한 모양이다. 그러다 불쌍하다며 나더러 어떻게 살았냐는 둥 새삼 나의 처지를 두고 자기가 서러워한다. 성탄절 지나고 금요일에 퇴원하게 되면서 기분은 더 까부라지는 것 같았다.

 

기분, 우리의 감정이란 참으로 가볍다. 그동안의 것으로 만족함이 없다. 좋았든지 싫었든지 할 수 있었고, 하고 싶은 것을 추구하였으면 그만인데 그 결과를 두고 자책과 원망과 후회가 뒤섞이는 것이다. 아들은 이번에도 무슨 시험이 안 된 모양이다. 미안한 어투로 알리는데 나는 괜찮다고 해도 그 기분이 괜찮을 리 없다. 같이 점심을 먹고 반찬거리가 없어서 시장에 같이 가자고 말했다. 3년을 가까이 살면서도 아들은 동네 저편의 재래시장에를 한 번도 나가본 적이 없었다. 혼자 들고 오기 힘들다면서 나는 마지못해 가방을 둘러매자 무심히 아들이 따라나섰다. 아내와 늘 걷던 산책길이면서 나의 하루치 운동이기도 한 걸음으로 아들과 같이 걸었다. 시장에서 마늘짱아치와 깻잎무침과 멸치볶음과 콩자반을 사서 돌아왔다.

 

늘 부산스럽고 말이 많아 극성이다 싶었는데 아내가 없으니까 집안에 텅 빈 것처럼 휑했다. 아흔 살 장모는 모두가 같이 돌보는 셈이 되었다. 새벽에 교회에 나왔다가 오전에 들어가면 푸른주스와 갑상선약을 드리고 어머니 방에서 간이변기를 가져다 비우고 씻어둔다. 그러는 동안 아들은 아침을 차린다. 특별한 일 없으면 손위처남이 이른 점심께 모시고 도서관에 갔다가 오후께 모시고 온다. 딸애가 퇴근하고 마른변기를 방에 들여놓고 요실금 약과 두유와 물을 챙겨다 놓는다. 이 모든 일을 아내가 혼자 다 했다. 어제는 아들이 빨래와 청소기를 돌리고 저녁으로 떡만둣국을 해주었다. 겨우 며칠째 이러는 것으로 아내의 빈자리가 크다. 모두가 부산한 것 같다. 아내의 침울함이 신경 쓰인다. 이렇게 우리에게 더하시는 삶을 산다는 일, 그런 가운데 주를 바라고 의지하며 사는 일이란 결코 우리 의지로나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주는 언제나 또 기다리시며 새로운 기회를 연장하신다. “너희는 다른 신을 따라다니며 섬기거나 경배하지 말며 너희 손으로 만든 것으로써 나의 노여움을 일으키지 말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를 해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나 너희가 내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고 너희 손으로 만든 것으로써 나의 노여움을 일으켜 스스로 해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6-7).” 우리의 삶이란 잃고 난 뒤에야 비로소 깨닫는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충고를 되새겨 듣게 된다. 때는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 사 년의 일이다.

 

여호야김 통치 제 4년, 주전 605년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해이다. 이 해에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갈그미스 전투에서 애굽을 물리쳤다(왕하 24:1, 7). 그 여세를 몰아 유다까지 침입함으로 유다는 포로로 잡혀가는 수난을 겪게 된다(단 1:1-5). 이러한 수난이 유다의 끝없는 불순종과 완악함으로 인한 것임을, 하나님의 인내하심이 막바지에 달했음을 오늘 본문은 여실히 강조하고 있다. 이때 선지자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 말씀을 전했다.

 

“선지자 예레미야가 유다의 모든 백성과 예루살렘의 모든 주민에게 말하여 이르되(렘 25:2)” 모든 사람과 관련된 일을 모든 사람에게 주지시켜야 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렇다고 개별적인 일을 개별적으로 전하다고 해서 쉽게 또 수긍하려 들지도 않는다. 본디 우리의 속성은 자기 잘난 맛에 산다. 스스로 옳고 자기만 어렵고 힘들다고 여기는 법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러한 우리 모두의 면면을 꿰뚫고 들어온다. 먼저 예레미야는 유다 왕의 집으로 보내심을 받았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는 유다 왕의 집에 내려가서 거기에서 이 말을 선언하여(22:1)” 그때 왕이 이 말씀을 들었으면 이런 사태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다. 모든 백성이 예배를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오는 절기 중 한 때였다. 그런 때라야 백성에게 말씀을 전할 수 있었다. 백성은 기꺼이 하나님의 교훈을 경청하고 그 훈계를 받았어야 한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롬 1:19, 21).”

 

하나님을 모르고 안 믿는다면 모를까,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께 맡기지 못함으로 생기는 모든 감정의 변화나 현실의 뒤섞임은 개인으로서는 물론 가정과 교회에 그 여파가 끼친다. 유다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고 감사하지 않고 허망하고 미련한 것으로 그 마음이 채워져 우상을 섬겼다. 우상은 하나님을 빙자하면서 하나님보다 우선하는 우리의 소중함이다. 자신의 위상이거나 가치관이기도 하다. 자식이나 가족이거나 이념과 신념이 될 때도 있다. 문제는 하나님은 하나님대로 모신다고 하면서 자신의 의와 선을 동시에 추구하는 것이다. 그것을 마치 하나님의 뜻으로 합리화시키면서 말이다. 믿는 자들 가운데 누구보다 잔인하고 포악한 군주가 많았던 것도 그 때문이다. 마치 저들의 신앙이 저들로 그래도 된다는 면제부를 주었던 셈이다.

 

오늘 본문의 이 예언의 시기는 여호야김 4년 곧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 원년의 일이다. 다니엘서에 나타나는 대로 “유다 왕 여호야김이 다스린 지 삼 년이 되는 해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을 에워쌌더니(단 1:1)”, 느부갓네살이 단독으로 통치하기 시작한 때이다. 그는 얼마 전까지 그의 아비와 공동으로 통치를 했었다. 유다의 여호야김 3년 말경이다. 그러나 여호야김 4년은 느부갓네살 원년이 채 끝나기 전에 시작되었다. 기민하고 호방하고 호전적인 느부갓네살은 세계의 지배자를 자청하였다. 하나님은 그 시점에 그런 자를 들어, 느부갓네살이 하나님의 종이라는 것을 알리시며 그를 이 일, 곧 유다를 치시는 데 사용하셨다.

 

이렇게 하시는 것은 느부갓네살의 위력이 열방을 공포에 떨게 하면서 하나님의 권능과 섭리가 오해되고 비난받는 일이 없도록 한다. 즉 하나님이 악을 동원하신 게 아니라 그와 같은 악함으로도 선을 이루시는 줄을 알게 하려 하심이다. 앞날에 이스라엘이 바로의 통치 아래 있던 애굽에서도 바로를 종이라 부르시며, 저의 악행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신 것과 같다. 곧 느부갓네살이 세계의 폭군이 되는 것으로 이는 하나님이 그리 하신 게 아니라, 그리 됨을 두신 것이다.

 

바울의 설교에서 이해하면, 우리의 불순종에도 같은 원리로 내버려두심은 하나님의 선을 이루신다. 곧 우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롬 1:22)” 그리 된 것은 앞서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21)” 그리하여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26).” 오늘의 이 모든 악독은 하나님이 악을 만드시거나 조성하신 게 아님을 분명히 한다. 다만 우리의 그와 같은 죄악으로도 하나님은 선을 이루심으로 홀로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

 

하나님은 느부갓네살을 이용하여 저로 악하게 하신 게 아니라, 본래 저의 악함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려하셨을 따름이다. 이 일은 매우 복잡한 진리 같지만 단순하다. 가령 하나님은 야곱을 태중에서부터 큰 자로 삼으셨음을 분명히 밝히셨는데도, 모친 리브가는 스스로 안달이 나서 장자의 축복을 가로챘다. 야곱은 이에 동조하였고 이삭은 무능하였고 묵인하였다. 그로 인하여 밧단아람으로 라반의 집에 기숙하며 가족을 이루는 데 있어서도 야곱은 라헬을 사랑했고 이로 인해 무려 20년의 세월을 그곳에서 보냈다. 그런 가운데서 12명의 아들을 낳았고 이를 통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구성하셨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자하심을 더할 뿐이다. 그런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심으로 말이다.

 

본문은 그 민족들로 회개시키기 위해 하나님은 무던히 돌이킬 것을 요구하시고 기회를 더하셨음을 밝힌다. 우린 어떤 일에 하나님을 탓할 때가 있고, 억울해하기도 하지만 실상은 자신이 자초한 일이다. 하나님은 그때마다 이런저런 모양과 입과 현실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리셨다. 그러나 저마다 한 번 기운 마음으로 믿음과 신앙은 내세우지만 실제 우리의 순종은 거짓될 때가 많다. 그런 가운데 오늘도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노력’ 그 인자하심과 오래 참으심을 더욱 드러낼 뿐이다. 그것으로 우리의 죄는 가중될 뿐이고, 하나님의 처사는 합당하고 온전하심이 드러난다.

 

먼저 예레미야는 23년 간 꾸준히 설교하였다. 그는 요시야 13년에 시작하여 약 19년 동안을 예언했고, 그 다음 여호아하스를 거쳐 여호야김 치세 4년까지 통산 23년을 똑같은 말로 설교했다. 여기서 우리가 얼마나 긴 시간을 은혜로 살았는지 알게 한다. 나는 이를 다 늦어서야 깨달았다. 중1 때 세례를 받으며 서원할 때 우리 또래 모두는 성령을 체험하였다. 어린 것들이 뭘 안다고 그렇듯 죄를 회개하고 주의 은혜에 감사하며 꺼이꺼이 울었던지, 내 기억으로는 어른 성도들이 나서서 다독였던 것 같다.

 

그것도 잠시 뿐, 나는 학창시절을 지나 대학을 가면서 문학을 운운하며 곁길로 들어섰다. 문학과 예술이 갖는 자유분방함은 한 마디로 성경과 멀고 하나님을 회피하게 하였다. 그렇게 얼추 20년의 세월은 지난 것 같다. 내 멋대로 살면서 자기합리화로 빠져들었다. 함부로 살았고 그러는 동안 하나님을 뒤로 하였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은혜는 꾸준하셨다. 자주 밝혔듯이 10년 주기로 기회가 있었던 것 같다. 87학번이니까, 내가 다시 97년에 신학부를 하게 된 것도 순전히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이뤄졌다. 누가 학비 일체와 생활비까지 지원하면서 등을 떠민 셈이니까, 나는 지금도 그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 나를 후원할 아무런 관계도 이유도 없었던 사이라 더더욱 그렇다.

 

그러다 다시 포기하고 09학번으로 신대원에 들어간 것이니까, 이때도 몇 번을 그만 둘 생각으로 끌려갔는지 모른다. 신대원 3년을 다니는 동안 매학기마다 나는 핑계를 찾아 휴학을 할 거였다. 그 대표적인 게 등록금이 안 되면 관두는 것이다. 그런데 이 또한 거짓말처럼 전혀 일면식도 없는 이부터, 혹은 87학번 문창과 동기 중 친구가 느닷없이 내가 뒤늦게 목사가 된다는 소식에 한 학기 등록금을 보내기도 하고, 심지어는 여사친(?)으로 가끔 만나던 어디 동호회 사람이 등록금을 보내기도 하고, 나는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6학기 동안 경험했다…. 그래서 불안과 우울을 핑계로 목사고사 두 번째 낙방 후에 그만둘 거였는데 그때는 누구의 죽음을 곁에서 지키게 하시고, 그러는 동안 50일의 동행으로 함께 성경공부를 하게 하셨고, 저의 임종을 지키게 하시며 나의 자아를 죽이셨다.

 

이를 풀어놓자면 끝도 없는 이야기 같지만, “포도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눅 13:7)” 하심과 같이 오늘 본문은 “유다의 왕 아몬의 아들 요시야 왕 열셋째 해부터 오늘까지 이십삼 년 동안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기로 내가 너희에게 꾸준히 일렀으나 너희가 순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렘 25:3).” 하심과 같이 나의 생에 있어서도 모든 기억의 면면에는 주의 오래 참으시고 또한 그럼에도 베푸셨던 은혜의 순간들이 물샐틈없이 나의 영혼을 지키시고 돌보셨다.

 

그리하여 오늘의 나는,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시 5:3).

 

하는 심정으로,

 

하나님이 그 성 중에 계시매 성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46:5).

 

오늘도 일찌감치 눈을 뜨고 교회로 나와 이처럼 말씀 앞에 앉혔다. 주가 나를 이끄시니 나는 이제 가만히 그의 손길을 의지한다. 어디가 어떻게 아프고 힘들든지, 상황과 형편이 어떠하든지, 내가 할 수 있는 그러나 해야 할 일을 두고 주 앞에서 묵묵히…. 이를 우리 주님은 얼마나 바라시는지 이제는 안다. “너는 그들에게 말하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겔 33:11).”

 

그러므로 하루씩 산다. 살아서 이틀이 되고 또 하루가 더해지는 날 동안에 주의 이름을 부르며, 한결같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나는 산다. 자주 돌아보아 악한 길과 악행을 버리고, 수시로 생겨나는 내 안의 우상 숭배를 타파하며, ‘너희는 각기 악한 길에서 돌이키라’ 하심을 말씀으로 비추어 인정한다. 우리의 악한 길이란, 스스로 거룩하고 스스로 정결하려는 마음 때문이다. 더러는 말씀으로 말미암아 떠나는 마음이기도 하다. 아이러니하지만 믿음이 좋고 신앙이 훌륭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교회 정치에 자기 신념을 불태우고, 이웃사랑을 운운하여 성경과 먼 길을 서슴지 않는다. 나는 늘 아무 것도 아니지만 주가 이루시는 주의 은혜의 증거가 된다. 증인이 되어 이 말씀을 전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셀라)

(시 46:1-3).

 

세상이 뒤집어지고 내 몰골이 말이 아니게 비루해진다 해도,

 

하나님이 그 성 중에 계시매 성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5).

 

이 한 사명을 붙들고도 산다. 나의 일과란 이 새벽을 지키며 말씀을 묵상하고 글로 쓰고, 설교원고를 일주일 내내 다듬고 또 묵상하는 게 전부지만,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

(10-1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