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즉 너희는 너희 길과 행위를 고치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선언하신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시리라
렘 26:13
찬송하라 하나님을 찬송하라 찬송하라 우리 왕을 찬송하라 하나님은 온 땅의 왕이심이라 지혜의 시로 찬송할지어다
시 47:6-7
말씀을 전해야 하고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하는 일은 성도의 기본자세이겠다. 말씀이 없으면 우리는 기준을 잃는 게 된다. 무엇을 판단하고 결정할 때 그에 앞서 말씀을 묵상하고 주의 뜻을 바라는 일은 중요하다. 성경의 여러 인물들은 그와 같은 말씀의 증인들이다. 우리 또한 그러하여 말씀에 대한 증인으로 살아야 한다. 하여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심지어 허다한 믿음의 사람들과 경주한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1-2).”
때로는 이 길이 외로운 듯하여도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말씀으로 순종한다. 말씀만으로 씨름하여 산다. 교회가 아무리 어떠하다 해도 말씀에 따라 살고 하는 성도들과 목사들이 많다. 오늘 본문은 이에 따라 선지자의 사명을 다하는 예레미야의 모습을 보여준다. 듣는 이들이 모두 저를 죽이고자 할 때도 저는 다윗과 같이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자신에게 맡기신 말씀을 증거하여 저들 앞에 섰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는 여호와의 성전 뜰에 서서 유다 모든 성읍에서 여호와의 성전에 와서 예배하는 자에게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게 한 모든 말을 전하되 한 마디도 감하지 말라(2).” 하심에 따른 증거였다.
성경의 뜻 곧 하나님의 의지는 자명하다. “그들이 듣고 혹시 각각 그 악한 길에서 돌아오리라 그리하면 내가 그들의 악행으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려 하던 뜻을 돌이키리라(3).” 요시야 시대부터 예루살렘 함락 직후까지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나님의 선민으로 저들의 죄악상이 그대로 드러난다. 이에 상응하는 필연적 심판과 무조건적 은혜에 의한 구원을 제시한다. 이는 계속 이어지듯 52장에 이르러 결국 유다가 멸망하기까지 거듭된다. 예루살렘이 함락되기 전후의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연속적으로 이러한 갈등은 되풀이 된다. 앞서 25장까지 다양한 측면에서 선민에 대한 심판과 그에 따른 원인과 결과를 강조하였다.
이어서 오늘부터 45장까지는 예레미야의 전기 형식으로 예언을 다루고 있다. 먼저 33장까지는 바벨론의 1차 침공(주전 605년) 전후부터 바벨론의 4차 침공(주전 588년) 이전까지의 주요 사건과 예언을 중심으로 기록하였다. 이 예언의 말씀은 거짓 예언을 상대하면서 대립하고 갈등한다. 결국은 심판에 따른 선민의 회복에 대한 약속을 다루고 있다. 34-45장까지는 바벨론의 에루살렘 함락(주전 586년) 직전과 그 후의 주요 사건을 언급하고 예언한다. 때는 유다의 18대 왕 여호야김(주전 609-598년)이 유다를 다스리기 시작한 때임을 밝히고 있다. “유다의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이 다스리기 시작한 때에 여호와께로부터 이 말씀이 임하여 이르시되(1).”
이에 따른 교훈은 극명하다. 진실로 회개하는 자에게 구원의 문은 언제든지 열려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짓 선지자의 말을 듣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것을 간곡히 권한다. 이는 불가능한 일 같지만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도 요나의 설교를 듣고 돌이켜 회개할 때 하나님은 심판을 미루셨다. 요나는 스스로 판단하여 악한 성에 말씀을 전하는 것을 피하려고 다시스로 도망치다 붙들려오기도 했다. 하물며 유다의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이 다스리기 시작한 데 따른 말씀으로 여호와께로 돌아오라는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향하신 말씀의 핵심은 간단하다. “그들이 듣고 혹시 각각 그 악한 길에서 돌아오리라 그리하면 내가 그들의 악행으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려 하던 뜻을 돌이키리라(3).” 하심인데,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은 악을 행하는 자는 악을 악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련의 사건으로 보기 드문 재판정의 실황중계 모습에서 내란재판을 보면서 각각의 피고인들과 저들 변호인들의 주장으로도 알 수 있다. 계엄은 했으나 계몽을 위한 것으로 이는 재판의 요건이 되지 않는다는 논리다. 잘못은 했으나 그와 같은 잘못이 잘못이 아니라는 것인데, 악이란 그렇듯 ‘다 그래! 너 때문이야!’ 하는 식의 논리로 접근하면 전할 수 있는 자도, 그 말을 들을 이유도 모두 사라진다.
오늘 여기 여호야김은 유다 제 18대 왕으로 11년 동안 통치하였다. 예레미야의 성전 설교는 주전 608년에 선포되었다. 여호야김 시대의 유다는 아주 극심한 죄악에 빠져 있었다. 여호야김 재위 4년에 하나님께서는 유다를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을 통해 멸하고 유다 백성들로 70년 동안 바벨론 포로로 끌려갈 것을 선언하셨다(25장). 그러한 결정이 내려지기 전까지 하나님은 수없이 선지자를 세웠고, 회개할 기회를 주셨고 이를 촉구하셨다. 회개가 그만큼 어렵다. 그냥 누구라도 언제든지 용서해주세요, 잘못했습니다, 할 수 있는 그런 문제가 아니다.
우리의 현실로도 보면 그 당사자들은 하나 같이 억울함을 호소하고 어느 누구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사람이 없다. 다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늘어놓고 나름의 변명과 핑계로 일관하며 무죄를 주장한다. 이에 예수님은 우리 속의 이와 같은 자기변명에 대하여 ‘성령을 훼방하는 죄’로 용서할 수 없는 것임을 강조하셨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마 12:31-32).” 성령을 훼방함이란 '내 안의 주의 영이 운행하심'을 거절하는 일이다!
곧 우리 안에는 하나님을 알만한 양심(알만한 지식)이 있고, 자신의 죄를 인정할 수 있는 최소한의 양심도 있다. 그러나 더하여서 자신을 변호하고 변명하여 억울해하는 앙심도 있어서 더 크고 빨리 앞선다. 가령 처음 사람 아담이 그 결정적인 순간에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 3:12).” 여기서 자신이 잘못했음을 인정하고 주께 용서를 구하는 말 한 마디가 없었다. 그렇다고 저가 앞서 그와 유사한 잘못을 저지르며 살던 사람도 아니다. 저는 엄연히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음 받은 그대로, 그야말로 무공해 청정지구의 에덴에서 여태 죄 없이 살았다. 그런 가운데 그와 같이 ‘탓’을 하며 자연스럽게 죄를 돌리려 하는 것이 기이하다.
이는 그 형상이 ‘그 땅의 흙’으로 지음 받은 까닭이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이것이 우리 몸을 이루고 있는 땅의 형질이다. 타락한 천사들로 인하여 앞서 공중에 권세 잡은 자들이 땅을 그처럼 만들어놓았다. 하지만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곧 저들 악한 영들 또한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서는 별 것 아니다(1:2). 그렇게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27).” 저들에게도 분명히 이르셨다. 충만하라, 정복하라, 다스리라.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28).”
곧 그 땅의 형질인 자신을 비롯하여 우리는 이 세상 모든 “땅에 충만하라”는 사명을 받았다. 즉 땅이 충만하여 오히려 우리를 다스리게 해서는 안 된다. 하여 “땅을 정복하라” 하셨다. 이는 곧이어 나오는 다스림의 원리로 땅을 지배해야 한다.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곧 오늘 우리의 기분과 감정은 물론 그 형질의 모든 기질은 땅의 형질이다. 우린 누구나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깊음 같은 감정에 쌓여 산다. 이를 정복하고 다스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 아침에 눈을 뜨면 우리는 말씀으로 먼저 자신에게 선포해야 한다. 말씀이 선포되지 않으면 우리는 땅의 형질을 따라 내 안의 온갖 염려와 근심이 눈뜨기 무섭게 아우성친다. 눈을 뜨고 핸드폰을 먼저 들고 주식을 살피거나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에 열중하는 습관이 무서운 것이다.
땅의 형질로 이루어진 우리 자신에게 먼저 말씀이 선포되어야 하는 이유는,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롬 7:15).” 즉 나의 영혼이 원하는 것보다 몸이 원하고 감정이 찾는 것에 먼저 나를 내어주면, 천하의 바울도 어림 없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16-17).” 이와 같이 죄란 예외가 없다. 육신을 입고 사실 때 예수님도 새벽 미명에 홀로 주 앞에 먼저 자신을 세우셨다. 죄 없으신 이도 그러함은 세상이 악함으로, 시편의 세계는 ‘새벽을 깨우리라’고 다짐하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18).”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잘못 만드셨거나 그 땅,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깊음을 그대로 땅에 두신 이의 잘못이 아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알려면 상대적으로 이를 거역하는 요소들이 있음을 알아야 하고, 이에 ‘하나님이 운행하심으로’ 우리는 충만하여 정복하고 다스릴 수 있었다. 그렇게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 2:7).” 하여 우리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스스로 누구도 자신을 다스리거나 정복하여, 이길 수 없는 존재임을 인정하게 하신다.
모든 죄가 드러나는데도 피고인석의 죄인들은 억울함을 호소하고 자신들은 그렇게 잘못한 게 없다고 일관한다. 서로를 탓하여 자기 죄를 저에게 돌린다. 이는 내남없이 똑같다.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 3:12-13).” 이와 같은 죄의 원리는 그리하여 하나님을 갈망하게 한다.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3-24).”
우린 할 수 없다. 나는 할 수 없음을 인정하게 되면서 이처럼 말씀으로 죽기 살기 한다. 그렇게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아니면 우리는 무엇으로 살 것인가? 자기감정에 도취되어 살면 영락없이 우울과 충동으로 지배당한다. 소위 범불안증이라 하는데 나는 이와 같은 모호한 병명을 안고, 내 의지와 상관없이 몸의 반응으로 힘겨울 때가 있다. 이를 조절하느라 안정제와 가슴 두근거림을 달래며 산다. 이를 누가 말하듯 믿음으로 이겨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기도 했는데,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하여 나는 이제 나의 약함이 나로 주를 의지하게 하고, 이와 같이 말씀으로 전념하게 하여, 할 수 있는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해야 하는 ‘사명으로’ 하루씩 나의 영혼의 보폭을 뗀다. 이를 성경의 원리로 이해하면, 만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지 않으면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로 운행하심이 절실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이 내 안에 운행함으로 나의 약함은 나로 하여금 주의 함께 하심을 간절히 사모하게 된다. 곧 나의 고질적인 육신의 고통과 마음의 어려움이 나로 하여금 내 안의 하나님의 운행을 더욱 간절하게 바라게 한다.
하루씩만 살자,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 6:34).” 하심으로 산다. 이 말씀의 숨은 뜻은 ‘내일이 한다’는 것이다. 이 표현의 주격은 내일이다. 내일‘이’ 할 때의 주격 조사 ‘이’는 내일의 주체가 내가 아니라 내일이다. 내일의 소유자는 하나님이시다. 그럼 당연히 하나님이 하신다는 소리다. 고로 내가 뭘 해야 한다는 강박이 무의미하다. 하여 내가 사랑하게 된 말씀은,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면, 오늘 내 모습이 개떡 같아도, 실패자요 낙오자와 같다 해도 그런 나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으로 나는 안심한다.
어제는 잠시 아내와 이런 이야기를 했다. 늘 텐션이 높고 활달한 성격으로 진취적으로 살던 아내는 당장 스스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 처지로 휠체어를 의지해야 하는 이 현실을 악몽처럼 생각하였다. 그래서 한 달 반 남짓 후부터는 딛을 수 있다고 하니 이참에 좀 쉬라고 위로해도 침울하였다. 내가 아니면 안 될 거 같고, 내가 뭐라도 돼야 할 것 같을 때… 상대적으로 내가 주격이 되면서 죄는 무뎌지고 말씀은 멀어진다.
오늘 여기 유다의 실정이 그러했다. 왕은 왕대로, 고관들과 백성들도, 다른 선지자나 제사장들도 “유다의 고관들이 이 말을 듣고 왕궁에서 여호와의 성전으로 올라가 여호와의 성전 새 대문의 입구에 앉으매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고관들과 모든 백성에게 말하여 이르되 이 사람은 죽는 것이 합당하니 너희 귀로 들음 같이 이 성에 관하여 예언하였음이라(10-11).” 오늘 이 예언의 말씀에 저를 죽이고자 모의하였다. 그런 가운데도 주를 경외하는 몇 사람이 있어서,
“그러자 그 지방의 장로 중 몇 사람이 일어나 백성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기를(17)”
하여, “유다의 왕 히스기야 시대에 모레셋 사람 미가가 유다의 모든 백성에게 예언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시온은 밭 같이 경작지가 될 것이며 예루살렘은 돌 무더기가 되며 이 성전의 산은 산당의 숲과 같이 되리라 하였으나 유다의 왕 히스기야와 모든 유다가 그를 죽였느냐 히스기야가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선언한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지 아니하셨느냐 우리가 이같이 하면 우리의 생명을 스스로 심히 해롭게 하는 것이니라(18-19).” 실제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듣고 돌이켜 회개했을 때,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선언한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지 아니하셨느냐?” 하고 나섰다. 그렇게 “사반의 아들 아히감의 손이 예레미야를 도와 주어 그를 백성의 손에 내어 주지 아니하여 죽이지 못하게 하니라(24).”
그러니 보면 들을 사람은 듣고 주의 뜻에 돌이킬 자는 돌이킨다. 다수가 어떠하다 하고, 모두가 자기주장에 함몰되어 별 볼 일 없는 이와 같은 말에 귀 기울이지 않을 때도 “몇 사람이 일어나” 복음의 남은 자들로 산다. 대체로 내 주변은 심적으로나 육적으로 상한 영혼들이 포진되어 있어서, 심지어는 아내 곁의 환자는 23년 뇌출혈로 내내 병원을 전전긍긍하며 반신불구로 살다, 이번에는 집안 거실에서 넘어져 어깨뼈가 산산조각나서 입원을 했다는데 하필 또 조현병에 우울과 불안까지 있어서 사는 게 사는 게 아닌 듯하여 안타까웠다. 그런 와중에 복음을 전하고 교회로 권하였으나 모르겠다. 모두가 다들 어디 아프고, 힘들고 고단한 현실을 산다. 누구는 성탄절에도 출근했다며 사는 게 지겹다고 하소연이었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셀라)
(시 32:5).
먼저는 회개가 필요하다. 그러할 때 하나님은 기꺼움으로 우리의 아룀과 호소를 들으시며 용서하실 준비가 되어 있으시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사 1:18).” 그러므로 “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말이 하나도 다시 더디지 아니할지니 내가 한 말이 이루어지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겔 18:28).” 주의 말씀은 이루어질 것을 알고, 믿고, 순종함으로 감사함을 알게 된다. 오늘의 모든 상황과 여건은 교훈니다. 이 훈계의 말씀의 실전을 살면서 주를 바랄 때,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고전 10:11).”
오늘도 이와 같은 말씀으로 증거를 삼아 나로 말씀 가운데 선포하게하시니,
너희 만민들아 손바닥을 치고
즐거운 소리로 하나님께 외칠지어다
지존하신 여호와는 두려우시고
온 땅에 큰 왕이 되심이로다
(시 47:1-2).
나는 지금 무얼 무엇하는 것인가?
하나님께서 즐거운 함성중에 올라가심이여
여호와께서 나팔 소리 중에 올라가시도다
(12).
오직 주를 찬송함으로, “그런즉 너희는 너희 길과 행위를 고치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선언하신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시리라(렘 26:13).” 하심을 다시 한 번 되새기며,
찬송하라 하나님을 찬송하라 찬송하라
우리 왕을 찬송하라
하나님은 온 땅의 왕이심이라
지혜의 시로 찬송할지어다
(6-7).
하여,
하나님이 뭇 백성을 다스리시며
하나님이 그의 거룩한 보좌에 앉으셨도다
… 세상의 모든 방패는 하나님의 것임이여
그는 높임을 받으시리로다
(8-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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