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을 섬기지 아니하며 그 목으로 바벨론의 왕의 멍에를 메지 아니하는 백성과 나라는 내가 그들이 멸망하기까지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그 민족을 벌하리라
렘 27:8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우리 하나님의 성, 거룩한 산에서 극진히 찬양 받으시리로다
시 48:1
하나님이 낯설 때가 있다. 나의 하나님 같지 않을 때가 있다. 내가 아는 하나님이 아닌 줄 알겠다. 때는 ‘여호야김이 즉위한 지 오래지 않아서이다.’ 26장 1절의 연대와 비슷하다. “유다의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이 다스리기 시작한 때에 여호와께로부터 이 말씀이 임하여 이르시되” 여호야김은 시드기야를 가리킨다. 본문의 사건은 시드기야가 왕위에 오른 후 주전 597년 포로 사건을 전제한다.
중요한 것은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내게 말씀하시되 너는 줄과 멍에를 만들어 네 목에 걸고 유다의 왕 시드기야를 보러 예루살렘에 온 사신들의 손에도 그것을 주어 에돔의 왕과 모압의 왕과 암몬 자손의 왕과 두로의 왕과 시돈의 왕에게 보내며(2-3).” 하심은 상징적인 행위로, 멍에를 그 상징물로 하여 목에 걸고 예레미야는 유다의 왕 시드기야를 보러 예루살렘에 온 사신들의 손에도 그것을 주어 에돔의 왕과 모압의 왕과 암몬 자손의 왕과 두로의 왕과 시돈의 왕에게 보내라고 하심을 들었다. 이는 말씀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것이다. 즉 다른 민족들도 갈대아인들의 지배하에 놓일 것임을 의미한다.
이곳에 온 사신들은 반바벨론 동맹을 결성하기 위해 시드기야와 의논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온 특사들이다. 이들이 유다의 수도에 모였다는 사실은 유다 왕 시드기야(여호야김)가 반바벨론 음모의 주동자가 되었음을 뜻한다. 이러한 연유에서 느부갓네살은 예루살렘을 정복 후 시드기야에게 가혹한 처벌을 내렸다. 이런 일이 있기 1년 전의 일이다. 주전 593년경이다. 바벨론 국내에서 반란과 소요 사태가 있었다. 시드기야를 포함한 느부갓네살의 여러 봉신국들은 이 틈을 타서 반란을 일으키고자 했다. 그러나 그들의 의논과 모의는 무위로 끝났다(588년, 겔 17:1-21).
그런 가운데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되” 하며 예레미야가 이들에게 전한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을 섬기지 아니하며 그 목으로 바벨론의 왕의 멍에를 메지 아니하는 백성과 나라는 내가 그들이 멸망하기까지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그 민족을 벌하리라(8).” 이와 같은 명령에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우리는 더러 은혜를 너무 흔하게 여긴다. 사소한 듯 받는다. 하나님의 사랑은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마치 호의를 특권으로 여기는 부류 같다. 하긴 사람의 심리가 그렇기는 하다. 아이들을 가르칠 때도 너무 싸게 교육비를 받거나 무료로 하면 오히려 가벼이 여긴다.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라 생각한다. 비싸야 좋은 줄 안다. 한참 글방을 할 때 나는 이러한 심리를 알고 다른 곳보다 교육비를 비싸게 했다. 수업 시간도 야박하게 끊었다. 희한한 것은 그래야 더 성의껏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그리 여기는 것이다. 마치 자신들의 전유물인 것처럼, 그래도 되는 줄 알고 함부로 굴었던 이스라엘과 같이 우리의 신앙도 그래서 개떡 같다. 스스로 믿고 스스로 천국 가는 줄 안다. 천국 가는 것으로 됐다는 식으로 교회를 다니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에 따른 오늘 본문은 그래서 더욱 낯설다. 더욱이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여호와의 성전과 유다의 왕의 궁전과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그 기구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것들이 바벨론으로 옮겨지고 내가 이것을 돌보는 날까지 거기에 있을 것이니라 그 후에 내가 그것을 올려 와 이 곳에 그것들을 되돌려 두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21-22).”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죄로 물든 것을 용인하지 않으신다. 세상과 함께 정죄 당함을 허락하지 않으신다. 하여 죽여서라도 이를 막으신다.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1:32).” 여기서 바벨론은 임시적일 뿐이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본때를 보이시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창조주로서의 위엄과 권능을 나타내신다. “나는 내 큰 능력과 나의 쳐든 팔로 땅과 지상에 있는 사람과 짐승들을 만들고 내가 보기에 옳은 사람에게 그것을 주었노라(렘 27:5).”
‘나의 쳐든 팔로’ 하실 때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보호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이와 같이 표현하시곤 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내며 그들의 노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여러 큰 심판들로써 너희를 속량하여(출 6:6).” 하나님의 ‘편 팔’로 속량하심을, “어떤 신이 와서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전쟁과 강한 손과 편 팔과 크게 두려운 일로 한 민족을 다른 민족에게서 인도하여 낸 일이 있느냐 이는 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의 목전에서 행하신 일이라(신4:34).” 곧 이와 같이 사랑하심인데,
강한 손과 펴신 팔로
인도하여 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12).
여기까지 인도하시고 사랑하시기까지 얼마나 주의 백성들은 그 사랑을 소중하고 감사하게 여기며 살았는지를… 잃고 난 후에 안다. 어제 아내를 퇴원시키고, 당분간은 집안에서도 휠체어로 생활하게 되었다. 수술한 다리를 딛지 말라는 것인데 그러자니 다른 쪽 다리 역시 무리가 가서 말이다. 며칠 병원에 갇혀 있다 집으로 와서는 마치 신난 아이처럼 이것저것 정리하고 평소대로 생활하려니까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소중함에 대하여 쓸 수 없게 되자 알 것 같았다. 더욱이 화장실을 가거나 샤워를 할 때 혼자 끙끙거리며 힘겨워했다.
오늘 본문을 이해하는 데 있어 이러한 우리 일상이 와 닿는 것 같다. 결국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 중 일부를 이미 주전 597년에 포로로 잡혀가게 하셨다. 여호와의 권능은 이와 같이 광대하시다. 우리가 다소 의아한 것은 마땅하다고 누리며 가치 없이 받던 것을 돌이키게 하신다. 그들이 포로로 잡혀가는 것조차 여호와의 뜻에 따른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과 권능은 온 세계에 미친다. 이러한 의아함은 자신들을 돌아보게 한다.
심지어 ‘내 종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손에 주고’ 하실 때는 서러움과 함께 두려움도 생긴다. 여기서 ‘내 종’이라 하심은 여러 의미로 이해된다. 선지자를 부르실 때,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내 온 집에 충성함이라(민 12:7).” 또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을 일컬을 때, “맹인이 누구냐 내 종이 아니냐 누가 내가 보내는 내 사자 같이 못 듣는 자겠느냐 누가 내게 충성된 자 같이 맹인이겠느냐 누가 여호와의 종 같이 맹인이겠느냐(사 42:19).”
또한 이스라엘의 ‘남은 자’에 대해서도 “그러나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내가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내가 땅 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땅 모퉁이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하여 버리지 아니하였다 하였노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8-10).”
하며 위로 하실 때도 우리를 종이라 하심인데, 이방인에 대하여도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욥 1:8).” 뿐만 아니라 메시야를 가리켜서도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사 42:1).” 곧 다윗 왕가의 계승자에게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스알디엘의 아들 내 종 스룹바벨아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너를 세우고 너를 인장으로 삼으리니 이는 내가 너를 택하였음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니라(학 2:23).”
이와 같이 하나님은 누구를 지칭하여 종이라 하실 때 그 표현은 포괄적이면서도 구체적이고 지시적이었다. 오늘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을 가리켜 하나님이 종으로 묘사하심은 저가 ‘여호와를 잘 섬겼다’는 뜻이 아니다. 단지 이것은 하나님이 그를 선택하여 작정하신 뜻을 성취하시는 도구로 삼으신 것이다. 열방의 운명을 통제하고 다스리시는 데 있어, 저들이 하나님의 뜻을 복종하든지 않든지 상관없이 결국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데 있어 저를 들어 사용하신다. 바사 왕 고레스도 그러했고, 앞서 애굽의 바로 왕도 그러했다. 곧 종이라 지칭하신다고 해서 모두 선지자나 왕이나 메시아와 같은 권위를 갖는 것이 아니다.
일시적으로 필요에 의해 사용하시는 데서도, 7절에서 나타나는 의미처럼 바벨론 자체도 결국 멸망할 것을 암시되고 있다. “모든 나라가 그와 그의 아들과 손자를 그 땅의 기한이 이르기까지 섬기리라 또한 많은 나라들과 큰 왕들이 그 자신을 섬기리라(7).” 즉 우리와 같이 영원한 대상이 아니라, 정한 기한 동안의 종이다. 하여 ‘열방이 그와 그 아들과 손자를 섬기리라’ 하심인데, 느부갓네살의 후계자는 그의 아들 에윌므로닥이었다. “유다 왕 여호야긴이 사로잡혀 간 지 삼십칠 년 곧 바벨론의 에윌므로닥 왕의 즉위 원년 열두째 달 스물다섯째 날 그가 유다의 여호야긴 왕의 머리를 들어 주었고 감옥에서 풀어 주었더라(52:31).”
에윌므로닥은 자기 아들에게 곧 느부갓네살의 손자에게 왕위를 계승시키지 못하였다. 쿠데타가 일어난 때문인지 에윌므로닥의 처남인 네르갈사레셀(주전 560-556)이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그렇다면 이 구절은 문자적으로 이해하기보다, 다만 이곳에 언급되고 있는 열방들이 오랫동안 바벨론 지배하에 놓이게 될 것임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곧 이 땅의 역사에 개입하시고 주관하심으로 “느부갓네살을 섬기지 아니하는 국민이나 …벌하리라(27:8).”
오늘 선지자 예레미야의 충고를 거부한다는 것은 여호와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과 동일하다. 유다 백성들로서는 하나님의 징벌이 하필 이방 세력에 의해 임하게 된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우리가 보기에게 의아한 결정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느부갓네살을 들어 유다와 열방들까지 징계하시는 모습을 통해, 우리는 역사의 진정한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섭리를 목도할 수 있다. 곧 악은 악한 날을 위하여 쓰임을 받는다. 사탄도 사탄의 역할을 두고 생겨난 것들이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악을 창조하셨거나 조성하셨다는 것이 아니다. 소위 자유의지라 하여 저들이 그와 같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거역하여 죄에 든 것이다. 궁극적으로 악은 선을 이루려 하심이다.
예레미야의 선임이랄 수 있는 이사야 선지자는 앗수르가 여호와의 목적을 달성시키고 난 다음 그들의 임무가 끝날 것이라고 설교하였었다. “앗수르 사람은 화 있을진저 그는 내 진노의 막대기요 그 손의 몽둥이는 내 분노라 내가 그를 보내어 경건하지 아니한 나라를 치게 하며 내가 그에게 명령하여 나를 노하게 한 백성을 쳐서 탈취하며 노략하게 하며 또 그들을 길거리의 진흙 같이 짓밟게 하려 하거니와 그의 뜻은 이같지 아니하며 그의 마음의 생각도 이같지 아니하고 다만 그의 마음은 허다한 나라를 파괴하며 멸절하려 하는도다(사 10:5-7).”
예레미야도 이와 같이 바벨론의 임무를 엄격하게 한정시켰다. 즉 느부갓네살은 여호와의 종이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여호와가 그를 필요로 하는 한 그는 그 요구에 저항할 수가 없었다. 오늘 일련의 사태나 그의 결과를 보면서도 알 수 있다. 느닷없는 계엄과 그로 인한 대통령 궐위와 곧 이는 새로운 국정을 보면서 당사자였던 저들 부부가 큰일을 했다는 생각도 든다. 가끔은 고맙다는 생각도 드는 것이 아니면 여전히 저의 임기는 계속되고 드러나는 불의했던 현상은 암암리에 계속 자행되었을 테니까, 이와 같은 사회적 혼란과 역사적 사실 앞에서도 하나님의 개입과 그의 준엄하심을 알게 된다.
우리가 인정하든 안 하든 하나님은 역사하시고 주관하신다.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나 외에는 신이 없도다 나는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빼앗을 자가 없도다(신 32:39).” 그리하여 “땅의 모든 끝이여 내게로 돌이켜 구원을 받으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사 45:22).” 이와 같은 징계의 손길이 우리로 회개하고 돌이켜 하나님을 바라게 한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히 12:11).”
그러므로
여호와여 주로부터 징벌을 받으며
주의 법으로 교훈하심을 받는 자가 복이 있나니
이런 사람에게는 환난의 날을 피하게 하사
악인을 위하여 구덩이를 팔 때까지 평안을 주시리이다
(시 94:12-13).
궁극적으로 이 모든 역사와 그의 작정은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4-6).” 하시는 말씀으로 귀결된다. 그러한 말씀은 그저 말로 그치는 게 아니라 현실이 되고 우리가 당면하여 살아내야 하는 삶이 된다. 오늘을 살면서 이를 느끼고, 누리고, 주를 인정하는 것으로 복이다.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살전 1:5).”
새로운 사건사고를 보면서 또는 오늘 나의 일상에서 주를 바라게 하심으로 다양한 변화가 쉼 없다. 결국 하나님은 누구도 관여할 수 없는 하나님의 권리를 행사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신다. 이를 위하여 악한 날에는 악인들에게 세상을 맡기신다. 오늘 여기 느부갓네살에게 유다를 넘기셨음이 선포된다. 우리가 아는 세상은 최상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온전하신 세상을 소망하게 한다. 하여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3, 5, 9).”
장차 우리가 들어갈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과 함께 기뻐하며 안식하기까지, 하여 주를 찬송하게 하시려고 오늘도 우리의 생활 가운데 아주 작은 일부분까지도 주는 다스리신다. 하여,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우리 하나님의 성,
거룩한 산에서 극진히 찬양 받으시리로다
터가 높고 아름다워 온 세계가 즐거워함이여
큰 왕의 성 곧 북방에 있는 시온 산이 그러하도다
하나님이 그 여러 궁중에서 자기를 요새로 알리셨도다
(시 48:1-3).
이를 알기까지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하는 주제를 놓고 일주일 내내 설교원고를 다듬으며 묵상하였다. 그렇게 해서 여섯 가지 대답을 찾을 수 있었는데, 이사야 66장에서 이사야서를 정리하면서 얻은 것이다. 첫째, 마음이 가난하고 통회하는 심령으로 살아야 한다(1-4).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었으므로 그들이 생겼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2).”
둘째, ‘말씀으로 말미암아 떠나는 자들’에게 말씀을 전하며 살아야 한다(5-9).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떠는 자들아 그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르시되 너희 형제가 너희를 미워하며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쫓아내며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영광을 나타내사 너희 기쁨을 우리에게 보이시기를 원하노라 하였으나 그들은 수치를 당하리라 하셨느니라(5).” 셋째,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기쁨이 있음을 증명하며 살아야 한다(10-14):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들이여 다 그 성읍과 함께 기뻐하라 다 그 성읍과 함께 즐거워하라 그 성을 위하여 슬퍼하는 자들이여 다 그 성의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성과 함께 기뻐하라(10).”
넷째, ‘스스로 거룩하고 스스로 정결하고자 할 때’를 주의하며 살아야 한다(15-17). “스스로 거룩하게 구별하며 스스로 정결하게 하고 동산에 들어가서 그 가운데에 있는 자를 따라 돼지고기와 가증한 물건과 쥐를 먹는 자가 다 함께 망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17).” 다섯째, 주가 다 아신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살아야 한다(18-21). “내가 그들의 행위와 사상을 아노라 때가 이르면 뭇 나라와 언어가 다른 민족들을 모으리니 그들이 와서 나의 영광을 볼 것이며(18).” 여섯째, 새 하늘과 새 땅이 항상 우리 앞에 있음을 확신하며 본향을 향하여 살아야 한다(22-24). “내가 지을 새 하늘과 새 땅이 내 앞에 항상 있는 것 같이 너희 자손과 너희 이름이 항상 있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22).”
오늘도 시편으로 주 앞에 아룀은,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의 전 가운데에서
주의 인자하심을 생각하였나이다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과 같이 찬송도 땅 끝까지 미쳤으며
주의 오른손에는 정의가 충만하였나이다
(9-10).
그리하여,
이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그가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
(1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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