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228 주일
이사야 66장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 66:18 내가 그들의 행위와 사상을 아노라 때가 이르면 뭇 나라와 언어가 다른 민족들을 모으리니 그들이 와서 나의 영광을 볼 것이며
사 66:19 내가 그들 가운데에서 징조를 세워서 그들 가운데에서 도피한 자를 여러 나라 곧 다시스와 뿔과 활을 당기는 룻과 및 두발과 야완과 또 나의 명성을 듣지도 못하고 나의 영광을 보지도 못한 먼 섬들로 보내리니 그들이 나의 영광을 뭇 나라에 전파하리라
사 66:20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자손이 예물을 깨끗한 그릇에 담아 여호와의 집에 드림 같이 그들이 너희 모든 형제를 뭇 나라에서 나의 성산 예루살렘으로 말과 수레와 교자와 노새와 낙타에 태워다가 여호와께 예물로 드릴 것이요
사 66:21 나는 그 가운데에서 택하여 제사장과 레위인을 삼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들어가는 말
삶이 사역이다. 사역은 주가 맡기신 사명이다. 사명은 부르심에 따른 보내심이다. 그러므로 사는 게 일이라면 이 일에 순응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주를 바라는 게 복이다. 이에 오늘 본문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는 표현이 11번 이상 반복되어 나온다. 곧 우리 삶에 순응은 말씀으로 가능하다. 말씀을 듣고, 들음으로 믿고, 믿음으로 순종한다. 우리는 힘들고 지칠 때 주께 아뢴다. “우리의 고난과 압제를 잊으시나이까 우리 영혼은 진토 속에 파묻히고 우리 몸은 땅에 붙었나이다(시 44:24-25).”
하나님 없이 사는 삶이란 어떠할까? 언제고 주가 오라 하시면 갑자기 떠나야 하는 게 생이라면… 그동안 우리는 이사야서를 중심으로 성경을 관통하는 문제를 짚었다. 한 마디로 죄가 문제다. 은혜의 시대를 살면서 우리는 죄의 문제에서는 해결되었다. 그러나 죄악의 문제는 여전하다. 이에 다윗의 계대를 잇는 “유다의 죄는 금강석 끝 철필로 기록되되 그들의 마음 판과 그들의 제단 뿔에 새겨졌거늘 그들의 자녀가 높은 언덕 위 푸른 나무 곁에 있는 그 제단들과 아세라들을 생각하도다(렘 17:1-2).” 하심과 같이 오늘에도 여전히 문제다.
우리의 죄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완전히 해결되었고, 믿음으로 이미 승리하였다. 그러나 죄악성은 여전하여 ‘금강석 끝 철필로 기록된 것 같이 우리의 마음 판과 제단 뿔에 새겨졌다.’ 그래서 바울은 절규하였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왜 그러는 것일까?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23).” 그러므로 그 뿌리는 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20).”
본문이해
- 스스로 거룩하게 구별하며, 스스로 정결하게 향하는 자에게
이사야서는 우리의 죄의 근본적인 문제를 심층적으로 다루었다. 우리가 이제 이사야서를 마치면서 주목할 것은 ‘스스로의 거룩과 스스로의 정결’로는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마 7:22).” 저마다 스스로의 거룩과 정결을 주장하지만 주는 그런 자에게 악하다고 하신다.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23).”
오늘 본문에서도 이들을 ‘가증하다’고 하신다. “스스로 거룩하게 구별하며 스스로 정결하게 하고 동산에 들어가서 그 가운데에 있는 자를 따라 돼지 고기와 가증한 물건과 쥐를 먹는 자가 다 함께 망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사 66:17).” 다 필요 없다, 저가 나라를 구했든지, 교회를 세웠든지,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었든지, 그것으로 의를 삼아 주의 자녀라 할 수 없다. 하여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3).”
하면 길은 하나뿐이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이 명료한 진리 앞에 우리는 당황스럽다.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하심은 이사야서에서 누누이 밝히는 바, 66장의 대장정을 마치면서 결론은 역시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는 데서 답을 듣고자 한다.
- 이사야가 전하여주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며
이사야에 대해서는 열왕기하서 19-20장에 13번이나 언급되고 있다. 열왕기하 18-20장에서 이사야서의 37-39장과 같은 입장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그만큼 이사야는 성경의 완성도를 입증하는 성경의 저자이다. 이사야는 왕족이었다. ‘유대 전승’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는 웃시야 왕의 동생으로 기록되었다. 그는 히스기야 때 궁정에서 생활했다.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하고, 남유다 왕국만 남은 시대에 이사야는 사역했다. 웃시야 왕 통치 말년에 사역을 시작하여,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왕 시대에 거쳐 무려 60년 동안이나 사역을 감당했다.
‘유대 전승’에 따르면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 왕의 핍박으로 이사야는 ‘톱질로 죽임을 당했다.’ 히브리서에 보면 성경의 여러 증인들, 곧 믿음의 영웅들 가운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11:37).” 하는 데서 ‘톱으로 켜는 순교를 당한’ 인물이 이사야이다. 이사야는 유대와 예루살렘을 향해 말씀을 전하였다. 멸망한 북이스라엘과 바벨론 제국과 다메섹을 향해서도 예언한다. 뿐만 아니라 주변국들에 대해서도 경고하였다. 이사야의 증거는 넓고도 깊다.
웃시야와 요담과 히스기야 때는 표면적으로 좋았으나 아하스 왕이 다스리던 시대부터는 달랐다. 그는 악하여 그가 다스리던 16년 동안은 나라 전체는 우상숭배를 일삼았다. 이때 이사야가 전하는 ‘여호와의 말씀’은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것이다. 아주 단순한 진리인데 이를 호소하면서 저의 생은 고통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그들을 위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들이 흩어질지라도 먼 훗날 ‘바사 왕 고레스’라는 인물을 들어 여호와 하나님은 ‘남은 자’를 모으실 것이라 예언하였다.
- 하나님의 구원과 통치에 대하여
이사야의 주제는 ‘하나님의 공의와 은혜’이다. 죄로 관통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이사야의 전언에 귀를 기울였다. 이사야는 이를 전하는 데 있어 ‘거룩하신 하나님’이란 표현을 26번, ‘심판’이란 단어를 52번, ‘위로’라는 말을 18번, ‘구원’이란 표현은 26번 언급했다. 특히 53장에서부터는 ‘고난 받는 종’에 관하여 <예수님의 구원 사역>을 예언하였다. 특히 53장은 신약에서 무려 65번이나 인용될 정도로 귀하게 쓰였다. 이사야서의 내용을 요약하면 <하나님은 유일한 구원자이시며 지존하신 통치자이시다>라는 것이다.
이사야서는 성경 권수와 같이 66장으로 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그 구성과 내용은 39장까지 구약 성경을 축약하고, ‘이스라엘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과 회개’가 강조되었다. 후반부인 40장에서부터 66장까지는 신양 성경 27권을 그대로 축약한 듯 <구원과 소망>, <용서와 회복>이 주된 내용으로 기록되었다. 이렇듯 39장까지는 구약을 40장 이후는 신약의 내용을 요약하고 있다. 많은 성경학자들은 이사야를 문학적으로 셰익스피어에 비유하고, 신학적으로 구약의 바울이라 소개하기도 한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이사야서 66장이 1,292절로 구성되었는데, 성경 66권이 1,189장으로 되었다. 신약에서 472번이나 이사야서의 내용을 인용하고 있는 것도 놀랍다.
중요한 것은 이사야서가 ‘죄의 본질’에 대해 심도 있게 논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해결하는 유일한 길은 구원자, 메시야, 만왕의 왕 곧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에 임하시는 것이라 하겠다. 이를 위하여 우리가 할 일은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주의 이름을 부를 때 주가 구원을 이루신다는 것이다. 곧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 10:13).” 또한 놀라운 사실은 수만금을 주어도 이를 결코 인정하지 않는 자들이 세상에 가득하다는 것이다. 예레미야는 인간의 죄가 ‘금강석 끝 철필로 기록되었다’고 하였는데, 상대적으로 “나의 말이 곧 기록되었으면, 책에 씌어졌으면, 철필과 납으로 영원히 돌에 새겨졌으면 좋겠노라(욥 19:23-24).” 하고 성도는 믿음을 확신한다는 것이다.
- 살아서 사는 동안에 주를 찬송하는 삶에 대하여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하나님 없이 사는 일이란,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간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살지 않는 땅에 살리라(렘 17:6).” 그렇듯 황폐하여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5b).” 저주의 삶을 사는 꼴이다. 그런 가운데 저마다의 삶이 사역이다. 사느라 산다지만 누구는 지옥에서 천국을 살고, 누구는 천국에서도 지옥을 산다. 그리하여 “가옥에 가옥을 이으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 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에서 홀로 거주하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사 5:8).” 곧 남부러울 것 없는 부와 명예를 얻고도 사는 게 지겨워서 지옥을 산다.
반대로 지옥인데도 천국을 사는 경우는, 심각한 우울과 자살충동으로 시달리면서도 <샘물과 같은 보혈은 주님의 은혜라> 하는 찬송을 지은 ‘윌리엄 쿠퍼’가 대표적이다. 저를 붙든 것은 “봄비가 올 때에 여호와 곧 구름을 일게 하시는 여호와께 비를 구하라 무리에게 소낙비를 내려서 밭의 채소를 각 사람에게 주시리라(슥 10:1).” 하는 말씀에서 자신을 다잡았다.
또는 가족을 모두 잃고도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편하다> 하고 노래하였던 ‘호레이쇼 스패포드’는 열병으로 앞서 아들을 잃었고, 이듬해에 시카고 대화재로 모든 가산을 잃었다. 어쩔 수 없이 아내와 네 딸을 유럽으로 먼저 보냈던 여객선이 대서양 한가운데서 범선과 충돌하여 열한 살, 아홉 살, 다섯 살, 두 살 된 딸들을 모두 잃었다. 그런 저가 붙든 말씀은 “너는 달려가서 그를 맞아 이르기를 너는 평안하냐 네 남편이 평안하냐 아이가 평안하냐 하라 하였더니 여인이 대답하되 평안하다(왕하 4:26).” 하는 것이었다. 곧 저는 현대판 욥과 같았으나 그런 가운데서도 주가 주시는 평안을 구함으로 극한 슬픔을 승리로 찬송할 수 있었다.
이처럼 주신 삶은 사는 것이다. 자살이 극한 선택으로 하나님의 섭리에 배치되는 이유는 주어진 삶을 삶으로, 살아서 생을 다하는 것만으로 모든 생명은 사명을 완주한다. 그런 가운데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 것인가?> 하는 톨스토이식으로 질문을 던지면서, 오늘 본문을 통해 이사야의 ‘여섯 가지 답변’>을 찾아보았다.
※ 성도는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한 이사야의 여섯 가지 답변
첫째, 마음이 가난하고 통회하는 심령으로 살아야 한다(1-4):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었으므로 그들이 생겼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2).”
하나님은 만물과 사람을 지으셨고(창조), 우리의 모든 현실을 이루셨다(조성). 이를 다스리시며(통치) 우리는 그의 세계에서 산다. 창조하시고, 조성하시며, 통치하시는 가운데 세상은 가증하여 ‘하나님이 두신 유혹’과 ‘말씀으로 말미암아 떠나는 자들’이 늘고 있다. 아이러니하지만 그러하다. 이는 우리를 걸려 넘어지게 하심인데, 걸려 넘어져 멈춤으로 돌아보게 하심이다. 이를 돌이켜 우리는 “심령이 가난한 자”라 하고 저들에게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또한 “애통하는 자”로서 우리의 복은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하는 대상이 되었다(마 5:3-4). 이로써 ‘하나님이 두신 유혹’을 이겨낼 수 있다.
둘째, ‘말씀으로 말미암아 떠나는 자들’에게 말씀을 전하며 살아야 한다(5-9):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떠는 자들아 그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르시되 너희 형제가 너희를 미워하며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쫓아내며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영광을 나타내사 너희 기쁨을 우리에게 보이시기를 원하노라 하였으나 그들은 수치를 당하리라 하셨느니라(5).”
소위 교회를 다니다 안 다닌다는 사람들이 주위에 많다. 나름 교회에서 여러 상처를 받은 자들이다. 하지만 실은 ‘말씀으로 말미암아 떠나는 자들’이 되었다. 바울은 이를 두고 ‘그 마음에 하나님 모시기를 싫어해서’라고 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롬 1:21).” 실상은 말씀으로 살려할 때 말씀은 세상을 거스르고, 세상은 말씀을 거스른다. 하여 나름들 중간지대를 두어서 ‘문화’라는 이름으로 교회가 세속화되고 세상은 교회를 흉내 낸다.
셋째,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기쁨이 있음을 증명하며 살아야 한다(10-14):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들이여 다 그 성읍과 함께 기뻐하라 다 그 성읍과 함께 즐거워하라 그 성을 위하여 슬퍼하는 자들이여 다 그 성의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성과 함께 기뻐하라(10).”
‘예루살렘’은 여러 의미로 함축된다. ‘하나님의 도성’으로 장차 우리가 들어갈 천성을 가리키고, 오늘은 우리의 교회이기도 하다. 또한 우리 개개인의 성도들을 일컫는다. 늘 말하지만 성경은 함축적인 언어로 쓰였다. 그저 사전적으로나 지시적으로 읽으면 안 된다. 가령 아브라함은 실제 역사 속의 인물로 우리의 믿음의 조상이지만 동시에 ‘오늘 우리가 아브라함이다.’ 곧 내가 속한 곳에서 우리는 믿음의 조상이 되어야 한다. 그렇듯 나의 모든 형편을 사랑하는 자로 살면서 우리는 ‘그 성과 함께 기뻐하라’ 하심을 실현하는 아브라함이고, 다윗이다.
넷째, ‘스스로 거룩하고 스스로 정결하고자 할 때’를 주의하며 살아야 한다(15-17): “스스로 거룩하게 구별하며 스스로 정결하게 하고 동산에 들어가서 그 가운데에 있는 자를 따라 돼지고기와 가증한 물건과 쥐를 먹는 자가 다 함께 망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17).”
사실 재림 주 하나님은 두렵다. 재림은 곧 이 세상의 멸망을 뜻한다. 천국을 사모하는 일은 동시에 죽음을 바라는 일이다. 누구는 두려워하고 우리는 평안히 바란다. 그러므로 ‘스스로’ 거룩할 수도 정결할 수 없음을 우리는 안다. ‘스스로’의 의미는 자신의 판단과 기준으로 ‘그 가운데에 있는 자를 따라’ 사는 자들이다. 하여 세상적인 가치기준으로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우매한 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고 하느냐(전 7:16-17).” 하심도 곧 우리의 열심이 말씀을 거스르고 스스로 거룩하거나 정결하고자 한다. 하여 자아도취에 빠져서 하나님을 중심에 두기보다 ‘스스로’를 위하는 열심이다.
다섯째, 주가 다 아신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살아야 한다(18-21): “내가 그들의 행위와 사상을 아노라 때가 이르면 뭇 나라와 언어가 다른 민족들을 모으리니 그들이 와서 나의 영광을 볼 것이며(18).”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신다. 우리로 이를 알게 하시려고 우리들 가운데 징조를 세우시고, 도피한 자를 오히려 사방으로 흩으신다. 그렇게 해서 ‘나의 영광-하나님의 영광을 뭇 나라에 전파하게 하셨다.’ 주를 아는 자들이 주께 나아와 예물로 드릴 것이다. 하나님은 그 가운데서 택하여 ‘제사장’과 ‘레위인’을 삼으셨다. 곧 만민을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오늘 우리들도 주의 자녀 되게 하셨다.
여섯째, 새 하늘과 새 땅이 항상 우리 앞에 있음을 확신하며 본향을 향하여 살아야 한다(22-24): “내가 지을 새 하늘과 새 땅이 내 앞에 항상 있는 것 같이 너희 자손과 너희 이름이 항상 있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22).”
이 땅의 삶으로 생의 전부가 아니다. 그럼 믿는 자들만 불쌍하다. 복음을 모르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 더 잘 사는 것은 당연하다. 시편 73편의 고백도 그런 의미다. 그러나 저들에게 복음은 사망의 냄새다. 우리의 믿음은 어리석음의 결과로 비춰진다. 그러나 우리는 주 앞에서 예배한다. 그럴 수 있는 것은 이 땅 너머의 새 하늘과 새 땅을 항상 내 앞에 두고 살기 때문이다. 가까운 훗날에 패역한 자들은 볼 것이다. 자신들은 죽었으나 영원히 죽지 않고 영벌 가운데서 ‘벌레가 죽지 아니하며, 그 불이 꺼지지 아니하여, 모든 혈육에게 가증함이 되리라.’ 하심을 알게 될 것이다.
나오는 말
우리는 가증스러운 예배를 벗어버려야 한다(1-4). 하나님은 성전보다 은혜로운 심령을 사랑하신다(1-2). 건물만 크고 화려하며 사람들의 숫자만 비대한 것을 원치 않으신다. 하나님은 제사보다 상한심령을 사랑하신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 51:17).” 점점 더 말씀보다 온갖 이벤트를 중시하는 교회들에 대하여, “내가 불러도 너희가 대답하지 아니하며 내가 말하여도 듣지 아니하고 나의 눈에 악을 행하였으며 내가 즐겨하지 아니하는 일을 택하였음이니라(사 65:12).”
그런 가운데 더욱 교회의 위로와 확산이 필요하다는 게 아이러니하다(5-14). 우리는 현재의 고통이 장래의 충만한 기쁨으로 바뀔 것을 알아야 한다(10-11). 기뻐하라 부르시는 이가 기뻐할 만한 일과 마음을 주실 것이다(12-14). 그러므로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느 8:10).” 이에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심판과 자비가 대비를 이룬다(15-24).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남은 자들’과 ‘흩어진 자들’을 모으실 것이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열방을 향하여 기치를 세우시고 이스라엘의 쫓긴 자들을 모으시며 땅 사방에서 유다의 흩어진 자들을 모으시리니(11:12).”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히 12:22-2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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