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하지 못함이여

하현. 2025. 12. 28. 04:17

 

선지자 예레미야가 말하니라 아멘, 여호와는 이같이 하옵소서 여호와께서 네가 예언한 말대로 이루사 여호와의 성전 기구와 모든 포로를 바벨론에서 이 곳으로 되돌려 오시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너는 내가 네 귀와 모든 백성의 귀에 이르는 이 말을 잘 들으라 나와 너 이전의 선지자들이 예로부터 많은 땅들과 큰 나라들에 대하여 전쟁과 재앙과 전염병을 예언하였느니라 평화를 예언하는 선지자는 그 예언자의 말이 응한 후에야 그가 진실로 여호와께서 보내신 선지자로 인정 받게 되리라

렘 28:6-9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하지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이것이 바로 어리석은 자들의 길이며 그들의 말을 기뻐하는 자들의 종말이로다 (셀라)

시 49:12-13

 

 

좋은 말, 흔히 듣고 싶은 말만 해주는 것에 대하여 이는 거짓말보다 나쁘다. 저들이 평화를 말하나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전하지는 못하였다. 이를 두고 예레미야는 거짓 선지자 하나냐에게 “나와 너 이전의 선지자들이 예로부터 많은 땅들과 큰 나라들에 대하여 전쟁과 재앙과 전염병을 예언하였느니라(8).” 하면서 그러나 “평화를 예언하는 선지자는 그 예언자의 말이 응한 후에야 그가 진실로 여호와께서 보내신 선지자로 인정 받게 되리라(9).” 곧 사람들이 듣고 싶은 말을 전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타내시고자 하는 뜻을 온전히 전할 수 있는 것이 진실이다. 이를 오늘 시편은 명료하게 진술한다.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시 49:20).

 

곧 사람이 사람다울 수 있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달아 주의 뜻으로 사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으셨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사람이 생령이 되게 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 1:27, 2:7).” 그러므로 오늘 시인의 고백과 예레미야 본문의 정황은 같은 의미로 주어진다.

 

곧 거짓과 참이 공존한다. 선지자들 사이의 투쟁도 그러하다. ‘시드기야가 즉위한지 오래지 않은 해 곧 4년’에 일어난 일이다. 아직 정상적인 지배가 이루어지지 않던 시기이다. 왜냐하면 이 기간 동안 시드기야는 바벨론 왕의 지배 아래서 통치하였기 때문이다. 반면 그의 통치 후반기라 볼 수 있는 잔여기간 동안 시드기야는 바벨론 왕에게 반기를 들고 독자적으로 통치를 하였다. 시드기야는 4년 동안에 바벨론에 간 일이 있었다. “유다의 시드기야 왕 제사년에 마세야의 손자 네리야의 아들 스라야가 그 왕과 함께 바벨론으로 갈 때에 선지자 예레미야가 그에게 말씀을 명령하니 스라야는 병참감이더라(51:59).”

 

역사의 굴레 속에 이러한 현상으로 헛된 희망이 생겨났다. 곧 이 사실로 백성들은 왕이 가서 협약을 맺음으로 전쟁이 끝나지나 않을까 하는 바람이었다. 이에 거짓 선지자들이 난무하였고 이와 같은 허황된 꿈을 부채질하였다. 특히 제사장으로 기브온 출신인 하나냐가 대표적으로 이와 같은 희망으로 백성들이 듣고자 하는 좋은 말로 전하였던 대표적인 인물이다. 하나냐가 공개적으로 발표한 예언은 ‘여호와의 집에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제사장들과 모든 백성이 모인’ 집회에서 하였다.

 

“그 해 곧 유다 왕 시드기야가 다스리기 시작한 지 사 년 다섯째 달 기브온앗술의 아들 선지자 하나냐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제사장들과 모든 백성이 보는 앞에서 내게 말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일러 말씀하시기를 내가 바벨론의 왕의 멍에를 꺾었느니라(1-2).”

 

모인 사람들은 하늘에서의 전언을 기다렸다. 이 예언을 하면서 하나냐는 예레미야를 쳐다보았다. 특히 예레미야에게 말하고 있었다. 곧 예레미야에 대한 정면 도전이다. 그의 예언은 바벨론 왕의 세력이 끝장날 것이라는 것,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한 무력의 세력들이 신속히 끝장날 것이라는 것, 이를 통하여 앞으로 ‘두 해가 차기 전에’ 성전의 기구들이 환원될 것이요, 여고냐와 그와 함께 사로잡혀 갔던 모든 포로들이 돌아올 것이라고 하였다. 이 같은 말을 사람들을 간절히 기대하고 있었다.

 

대조적으로 예레미야는 바벨론 왕의 멍에가 더욱 강하게 그들을 압박할 것이라 했다. 빼앗긴 기구들과 포로들은 70년이 지나기 전에는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고도 하였다. 물론 예레미야도 하나냐의 예언과 같이 되길 마란다. “선지자 예레미야가 말하니라 아멘, 여호와는 이같이 하옵소서 여호와께서 네가 예언한 말대로 이루사 여호와의 성전 기구와 모든 포로를 바벨론에서 이 곳으로 되돌려 오시기를 원하노라(6).” 그러나 이는 정확한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신들의 희망인 것을 있는 그대로 전하여야 했다.

 

거짓과 참의 경계는 때로 달콤하거나 쓰다. 분명히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해 메시지를 보이신다. 그 차이가 거짓인가, 참인가, 하는 데서 갈린다. 이는 얼마나 엄청난 것인가 하면 거짓 선지자 하나냐의 예언에는 ‘영혼도 생명도 없고 엄위도, 고상함도 결여되어 있다.’ 하나님의 선지자들의 강론에는 신적인 권위가 있다. 경건이 살아 있다. 그러나 거짓에는 경건의 모양만 있다. 곧 저들에게는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5).”

 

또한 하나님께서 언제나 그들과 함께 하시리라는 영적인 긍휼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없다. “내가 그들을 돌아보아 좋게 하여 다시 이 땅으로 인도하여 세우고 헐지 아니하며 심고 뽑지 아니하겠 내가 여호와인 줄 아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어서 그들이 전심으로 내게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렘 24:6-7).” 하심이 본뜻이다. 그러기까지 하나냐는 2년 남았다 하고 예레미야는 70년이 걸린다고 하였다. 듣기 좋은 말은 언제나 지금 당장, 빠른 결과를 요구한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2:12).”

 

성도의 덕목은 인내다. 기다림은 산 증거이다. 다시 더하면 회개와 순종이 없는 축복은 신기루와 같이 허상뿐이다. 당장은 듣기 좋고 입에 달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진실이 아니다. 그러므로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대하 7:14).” 이것이 선행될 때 주의 참 뜻을 알고자 하는 마음도 열린다. 하여,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잠 28:13).”

 

우리가 자기 입으로 죄를 고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은 그 결과와 상관없이 진정한 반성이고 회개이다. 그리하여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사 55:7).” 이는 사실 성령의 능력으로나 가능하다. 회개는 그러하다. 참된 진실은 사람이 스스로 취할 수 없다. 일련의 우리 사회 현상을 볼 때 어느 누구 잘못을 인정하고 진정으로 용서를 구하는 자가 없다. 권력형 비리에서부터 개인의 사욕에 따른 잘못에 이르기까지 그만큼 증거가 나와도 누구 하나 이를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결국 사람의 바람이나 희망으로는 하나님의 종이 될 수 없다. 사도들은 이에 단호하였다.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행 4:19).”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나 들을 때나 입과 귀가 모두 정직하여야 하는데 한 사람도 없다. 이에 시인의 개탄스러운 마음으로 고백한다.

 

각기 물러가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한 사람도 없도다

(시 53:3).

 

본래 그런 것인가? 그만큼 우리는 교만하였고 이에 귀를 막음으로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오늘 날 교회의 치리가 사라진 것은 그 때문이다. 누구도 바른 소릴 좋아하지 않는다. 저마다 자기 말만하려 하고 들으려 하지 않으며, 옳은 말은 싫어하고 입바른 소리만 듣고 싶어 한다. 그렇듯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엡 6:6-7).” 이를 교회에서조차 실현하기란 쉽지 않다. 저마다 교회도 자기 좋을 대로 다니는 시대라,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 1:10).”

 

그러므로 우린 선택해야 한다. 물론 예레미야도 하나냐의 예언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랐다. 예레미야도 그의 조국을 사랑하였다. 진심으로 조국의 평화를 갈망했다. 하여 “아멘, 여호와는 이같이 하옵소서. 여호와께서 네 예언대로 이루시기를” 하고 바랐다(5-6). 누군들 좋은 소리 희망적인 말을 싫어하겠나? 그럼에도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기를 바라는 예수님의 마음 같이(마 26:39), 우리도 물론 우리의 간구와 바람은 있으나 주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게 중요하다. 예레미야는 물론 자주 그의 백성을 위하여 기도한 바 있다. “여호와여 나를 돌아보사 나와 더불어 다투는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 보옵소서 어찌 악으로 선을 갚으리이까마는 그들이 나의 생명을 해하려고 구덩이를 팠나이다 내가 주의 분노를 그들에게서 돌이키려 하고 주의 앞에 서서 그들을 위하여 유익한 말을 한 것을 기억하옵소서(18:19-20).”

 

거짓 선지자들은 평화를 약속하여 사람의 비위를 맞추고자 하지만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백성들에게 약속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강조한다. 여기서 예레미야는 역사적 사례를 들어 하나냐의 예언이 거짓됨을 입증한다. “나와 너 이전의 선지자들이 예로부터 많은 땅들과 큰 나라들에 대하여 전쟁과 재앙과 전염병을 예언하였느니라(8).” 아합이 미가를 모함하였듯이 거짓 선지자들은 예레미야를 중상하였다. 그 이유는 예레미야가 유다에 관하여 좋은 일은 예언하지 않고 나쁜 일만 예언한다고 여겼다. 정작 자신들의 잘못을 돌아보려 하지는 않았다.

 

결국 거짓에는 하나님의 저주가 따른다. “선지자 하나냐가 선지자 예레미야의 목에서 멍에를 빼앗아 꺾고 모든 백성 앞에서 하나냐가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이 년 안에 모든 민족의 목에서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의 멍에를 이와 같이 꺾어 버리리라 하셨느니라 하매 선지자 예레미야가 자기의 길을 가니라(10-11).” 하고 그럴듯하게 연출하고 설명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풀려난 예레미야에게 가서 전하라 하신다. “너는 가서 하나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네가 나무 멍에들을 꺾었으나 그 대신 쇠 멍에들을 만들었느니라(13).”

 

실상은 거짓으로 가는 길이 더 유하고 넓고 호응을 얻는 데 유리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갈 1:6-7).” 보면 각종 이벤트나 어떤 만족함을 위한 선행이나 의를 추구하는 데서 사람들은 종교적인 의미를 둔다. 그렇듯 거짓을 고집하고 논쟁하는 일은 무의미하다.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게으르게 행하고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살후 3:6).” 그러므로 바울은 바라였다.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5).”

 

하나님의 징계를 거절하는 것은 세상의 정죄를 자초하는 일이 된다. 그럼에도 외형적인 부흥과 보이는 형통함으로 기뻐하는데,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히 12:4-5).” 부디 그러하여 내게 책망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온전하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야 할 것이다. 상대적으로 예레미야는 조용히 자기 길을 갔다.

 

“모든 백성 앞에서 하나냐가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이 년 안에 모든 민족의 목에서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의 멍에를 이와 같이 꺾어 버리리라 하셨느니라 하매 선지자 예레미야가 자기의 길을 가니라(렘 28:11).”

 

듣지 않는 이와는 그 어떤 논쟁도 무의미하다. 욕을 당했다고 해서 갚으려 하면 같아진다. 하나냐와 겨루려 하지 않고 예레미야가 그의 길을 간 것은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는 하나님께서 직접적이고 순간적인 답변을 그를 위하여 제공해 주실 때까지 기꺼운 마음으로 기다리려는 것이었다. 이를 시편도 같이 갖는 마음이다.

 

나는 못 듣는 자 같이 듣지 아니하고

말 못하는 자 같이 입을 열지 아니하오니

나는 듣지 못하는 자 같아서

내 입에는 반박할 말이 없나이다

(시 38:13-14).

 

곧 우리의 불화는 자기주장이 서로 부딪쳐서 싸움이 된다. 그럴 거 없다. 주가 하실 때까지 우리는 다만 물러나서 그의 행하심을 기다릴 뿐이다. 곧 우리 입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이 내리시는 것으로 확신한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전할 수 있는 진리가 아니면 진리가 아니다. 하여 하나님은 “너는 가서 하나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네가 나무 멍에들을 꺾었으나 그 대신 쇠 멍에들을 만들었느니라(13).” 하실 때,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쇠 멍에로 이 모든 나라의 목에 메워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을 섬기게 하였으니 그들이 그를 섬기리라 내가 들짐승도 그에게 주었느니라 하라(14).”

 

다들 원하지 않는 사실이겠으나 곧 초래할 현실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냐의 죄목은 백성을 속이고 하나님을 대적한 것이다. “…하나냐여 들으라 여호와께서 너를 보내지 아니하셨거늘 네가 이 백성에게 거짓을 믿게 하는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너를 지면에서 제하리니 네가 여호와께 패역한 말을 하였음이라 네가 금년에 죽으리라 하셨느니라 하더니(15-16).” 그 결과는 확연하였다. “선지자 하나냐가 그 해 일곱째 달에 죽었더라(17).” 아는 것보다 행하는 것으로 주를 바라는 것이라,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마 7:26-27).”

 

당장 적당할 때는 모른다. 아무래도 상관없을 것 같아도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8-9).” 하여 오늘도 감사한 마음으로 두려움과 함께 근신하는 마음으로 말씀 앞에 선다. 이를 전한다. 내가 듣는다.

 

뭇 백성들아 이를 들으라

세상의 거민들아 모두 귀를 기울이라

(시 49:1).

 

이에,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부유함을 자랑하는 자는

아무도 자기의 형제를 구원하지 못하며

그를 위한 속전을 하나님께 바치지도 못할 것은

그들의 생명을 속량하는 값이 너무 엄청나서

영원히 마련하지 못할 것임이니라

(7-8).

 

우린 그 누구도 누구의 영혼을 구할 수 없다. 저의 생명을 속량할 수 없다. 마치 내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마음에서 저마다 ‘너를 위하여’ 하는 심적인 폭력을 행사하곤 하는데, 그 값이 너무 엄청나다. 영원히 마련하지 못할 것이다. 성경의 이치다. 결국,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하지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이것이 바로 어리석은 자들의 길이며

그들의 말을 기뻐하는 자들의 종말이로다 (셀라)

(12-13).

 

이에,

 

사람이 치부하여 그의 집의 영광이 더할 때에

너는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그가 죽으매 가져가는 것이 없고

그의 영광이 그를 따라 내려가지 못함이로다

(16-17).

 

사람의 결국은,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2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