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분명히 나의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그들을 이 땅에 심으리라

하현. 2026. 1. 1. 04:16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는 영원한 언약을 그들에게 세우고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 나를 떠나지 않게 하고 내가 기쁨으로 그들에게 복을 주되 분명히 나의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그들을 이 땅에 심으리라

렘 32:40-41

 

하나님이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는 자와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각기 물러가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한 사람도 없도다

시 53:2-3

 

 

선지자 예레미야가 갇혔다. 하나님은 저로 예언하게 하셨고 예언한 이유로 갇힌 것이다. “유다 왕 시드기야는 갈대아인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반드시 바벨론 왕의 손에 넘겨진 바 되리니 입이 입을 대하여 말하고 눈이 서로 볼 것이며 그가 시드기야를 바벨론으로 끌어 가리니 시드기야는 내가 돌볼 때까지 거기에 있으리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가 갈대아인과 싸울지라도 승리하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더니 유다 왕 시드기야가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같이 예언하였느냐 하고 그를 가두었음이었더라(4-5).”

 

그렇게 갇혀 있는 그에게 땅을 구매하게 하셨다. “보라 네 숙부 살룸의 아들 하나멜이 네게 와서 말하기를 너는 아나돗에 있는 내 밭을 사라 이 기업을 무를 권리가 네게 있느니라 하리라 하시더니(7).” 그리고 그 땅은 갈대아인에 의해 빼앗기고 불태워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보라 내가 이 성을 갈대아인의 손과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의 손에 넘길 것인즉 그가 차지할 것이라 이 성을 치는 갈대아인이 와서 이 성읍에 불을 놓아 성과 집 곧 그 지붕에서 바알에게 분향하며 다른 신들에게 전제를 드려 나를 격노하게 한 집들을 사르리니(28-29).”

 

그럴 거면서 하나님은 알리셨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너는 이 증서 곧 봉인하고 봉인하지 않은 매매 증서를 가지고 토기에 담아 오랫동안 보존하게 하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사람이 이 땅에서 집과 밭과 포도원을 다시 사게 되리라 하셨다 하니라(14-15).” 이 모든 일들이 실은 유다의 앞날이며 그에 따른 이유가 있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집에 자기들의 가증한 물건들을 세워서 그 집을 더럽게 하며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에 바알의 산당을 건축하였으며 자기들의 아들들과 딸들을 몰렉 앞으로 지나가게 하였느니라 그들이 이런 가증한 일을 행하여 유다로 범죄하게 한 것은 내가 명령한 것도 아니요 내 마음에 둔 것도 아니니라(34-35).”

 

그렇게 하여 예루살렘의 운명을 예레미야의 경우로 축소하여 알리시고 이를 전하게 하신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말하는 바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말미암아 바벨론 왕의 손에 넘긴 바 되었다 하는 이 성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36).”

 

더러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몸소 체험한다. 몸이 아프거나 하던 일이 뒤엎어져서 그때서야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다. 오늘 본문은 유다와 예루살렘의 멸망이 가까웠음을 알게 한다. 하나님의 심판은 점차로 그들에게 임하였다. 백성들은 물론 시드시야 왕은 이에 따른 하나님이 심판을 듣고도 회개하지 않는다.

 

시드기야 왕이 다스린 지 10년에 발생하였다. 바벨론은 예루살렘을 침략하고 잠시 후면 예루살렘을 정복하게 될 것이다. 그런 가운데 유다는 항복을 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성을 지킬 것을 결의하고 있는 것이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의 앞날을 예언하였다. 이를 듣고 돌이킬 생각은 없고 오히려 그러한 예언을 한 선지자를 가두었다. “유다 왕 시드기야는 갈대아인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반드시 바벨론 왕의 손에 넘겨진 바 되리니 입이 입을 대하여 말하고 눈이 서로 볼 것이며 그가 시드기야를 바벨론으로 끌어 가리니 시드기야는 내가 돌볼 때까지 거기에 있으리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가 갈대아인과 싸울지라도 승리하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더니 유다 왕 시드기야가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같이 예언하였느냐 하고 그를 가두었음이었더라(4-5).”

 

이를 보면서 회개는 결코 누구나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게 아님을 알 수 있다. 곧 회개도 은사이다. 돌이켜 주를 따를 수 있는 것도 은혜이다. 이와 같은 불가항력적인 은혜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이는 “입이 입을 대하여 말하고 눈이 서로 볼 것이며(4).” 하여 결국은 시드기야가 바벨론으로 끌려가면서야 알게 될까? 하나님은 시드기야의 생명을 ‘거기서 거두어 가시겠다’고 하신다. “그가 시드기야를 바벨론으로 끌어 가리니 시드기야는 내가 돌볼 때까지 거기에 있으리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5).”

 

이와 같은 결정이 있기까지 회개할 수 있는 기회와 선지자를 통한 말씀을 계속 전달하시고 기다리셨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는 가서 유다의 시드기야 왕에게 아뢰어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보라 내가 이 성을 바벨론 왕의 손에 넘기리니 그가 이 성을 불사를 것이라 네가 그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반드시 사로잡혀 그의 손에 넘겨져서 네 눈은 바벨론 왕의 눈을 볼 것이며 그의 입은 네 입을 마주 대하여 말할 것이요 너는 바벨론으로 가리라(34:2-3).”

 

오히려 이러한 소식을 전하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왕궁 뜰에 갇혔다. 시드기야는 그의 예언 때문에 그를 거기에 가둔 것이다. “그 때에 바벨론 군대는 예루살렘을 에워싸고 선지자 예레미야는 유다의 왕의 궁중에 있는 시위대 뜰에 갇혔으니… 그가 시드기야를 바벨론으로 끌어 가리니 시드기야는 내가 돌볼 때까지 거기에 있으리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가 갈대아인과 싸울지라도 승리하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더니 유다 왕 시드기야가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같이 예언하였느냐 하고 그를 가두었음이었더라(2, 5).”

 

시드기야는 전처럼 ‘예레미야 앞에서 겸비치 아니하였다.’ “그의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고 선지자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일러도 그 앞에서 겸손하지 아니하였으며(대하 36:12).” 그 마음이 강퍅하여져 예레미야를 궁중 예언자로 택하지는 않았다. 전에는 주께 간구해줄 것을 구하기도 했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우리를 치니 ‘청컨대 너는 우리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라’ 여호와께서 혹시 그의 모든 기적으로 우리를 도와 행하시면 그가 우리를 떠나리라 하니(렘 21:2).” 오늘 이 한 장의 말씀으로 사람의 강퍅함이 얼마나 그의 눈과 귀를 가리는지 알게 된다. 우리가 주를 온전히 바란다는 일은 우리의 의지로는 되는 게 아님을 오늘 시인은 고백한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는 자와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각기 물러가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한 사람도 없도다

(시 53:2-3).

 

결국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 마침 이를 증명하듯 오늘 사회의 위정자들 모습이 혐오스럽다. 겉으로는 강직하고 의로운 듯하여 국회의원도 되고 장관도 되는데, 실상은 온갖 비리가 숨겨져 있고, 보좌진에게 ‘갑질’을 하고, ‘공천헌금’이라 하여 1억의 돈을 받았다고도 하고, 자녀들 일에 자신들의 권력을 동원하고, 남을 억압하고 함부로 대하는 일에는 거침이 없으면서… 겉으로 보여진 모습은 마치 정의롭고 의로운 듯 행세하였다. 면면이 그러해서 모두 그렇다는 것인지, 저들만 그렇다고 볼 수 있겠나? 하는 생각도 드는 것이다.

 

결국 우린 모두 악하다. 누구 하나 떳떳하지 못할 텐데 스스로는 자신을 정당화하고 남을 엄격히 다스리려 한다. 이는 참으로 역겹고 염치가 없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은 다 굽어 살피신다. 하늘은 하나님의 보좌가 있다. 하나님은 세상의 심판자요 왕으로 인생을 살펴보신다. 우리의 지각(知覺)은 하나님을 알 수 없다. 우리 스스로는 영적인 지각을 가질 수 없다. 그러나 이 지각이 있어야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고 이를 분별할 수 있다. 다윗은 이에 고백하였다.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시고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의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의 안목이 그들을 감찰하시도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시 11:4, 14:2).

 

앞서 오래 전에 노아 홍수 때도 그러했고(창 6:1-8),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할 때도 그러했다(창 19:1-29). 오늘에 이르러 우리들 또한 다르지 않다. 하나님께서 인생을 살피신 후 최종적으로 내리신 판단은 여전히 오늘도 같다. ‘다 치우쳤다.’ ‘없으니 하나도 없다.’ 마치 자신은 아닌 줄 아는 그 자체로 이미 우리는 시드기야와 같고 부패한 이스라엘 백성과 다르지 않다. 그런 가운데 ‘예레미야의 예언’이 듣기 싫다. 못마땅하여 저를 가둔다. 교회를 다니고 말씀을 듣고 신앙으로 산다고 하면서도 듣고 싶고 하고 싶은 것만을 추구하려는 게 본심이다.

 

그런 가운데서 예레미야는 기도한다. 찬송한다.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큰 능력과 펴신 팔로 천지를 지으셨사오니 주에게는 할 수 없는 일이 없으시니이다 주는 은혜를 천만인에게 베푸시며 아버지의 죄악을 그 후손의 품에 갚으시오니 크고 능력 있으신 하나님이시요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니이다(17-18).” 곧 우리가 자신을 알 때 비로소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총으로 감사하게 된다. ‘주께서 큰 능력과 드신 팔로 천지를 지으셨사오니’ 하고 오늘 우리가 처한 모든 상황을 인정하게 된다. 예레미야도 갇힌 자로 자신이 산 땅이 빼앗겨 잃게 되었어도 이와 같이 고백한다. 이는 하나님 앞에 불가능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주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으시니이다.’ 하는 것이 오늘을 승리하는 힘이다.

 

설교원고를 준비하면서 두 가지 사실을 먼저 깨달았다. 첫째는 사는 날 동안에 우리가 뜻하지 않은 풍파가 온다. 이는 두 길로 오는데 하나는 외적인 것이고 하나는 내적인 것이다. 외적으로는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룻 1:1a).” 그런 이유로, 내적으로는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하였는데(1b).” 하는 것이다.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그의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요 그의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니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들이더라 그들이 모압 지방에 들어가서 거기 살더니(2).”

 

삶이 고단하고 어려운 것은 모두가 다를 게 없다. 저마다 기를 쓰고 이를 방지하고 미연에 예방하려 하나 외적인 상황은 순식간의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모두가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은 아니다. 결과론적으로 모압으로 피신하였으나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그의 두 아들이 남았으며(3).” 그들도 거기서 모압 땅 이방 여인과 결혼까지 하여 살다가 “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죽고 그 여인(나오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5).” 그러니 누가 그럴 줄 알았겠나?

 

그런 가운데 또 하나는 선택의 문제다. “그 여인이 모압 지방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이에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6).” 나오미가 두 과부가 된 며느리들과 모압을 나오다, “너희는 각기 너희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8).” 하고 저들을 돌려보내려 한다. 하여 복을 빌며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허락하사 각기 남편의 집에서 위로를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그들에게 입 맞추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울며(9).” 돌려보낼 때, 하나는 떠나고 하나는 남는다.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의 시어머니에게 입 맞추되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14).”

 

이때 룻의 결의가 감동적이다.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16).” 여기서 몇 가지 결연한 의지를 보게 된다. 하나는 어머니에 대한 신의(信義)다.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백성이 될 것을 결단한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이는 이방 여인으로 모압 땅에서 하나님의 선민으로 주의 백성으로 편입되고자 하는 소망을 나타낸다. 그것을 결정적으로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하는 것으로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분명히 한다. 하여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17).” 이는 단순히 감정적인 호소가 아니었다. 굳은 결심 곧 믿음으로 이루어진 일이다. “나오미가 룻이 자기와 함께 가기로 굳게 결심함을 보고 그에게 말하기를 그치니라(18).”

 

곧 우리의 믿음은 이를 기반으로 ‘죽으면 죽으리라’ 하는 것이다. 에스더가 그러했다.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니라(에스더 4:16).” 이를 확장하여 바울은 신앙을 고백하였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곧 우리의 굳은 결심이란 믿음으로 말미암은 나의 결단과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주신 믿음의 산물이다. 그렇게 하여 나오미는 남편을 잃고 장성하였던 두 아들마저 잃고 이방 땅에서 이방 며느리 룻을 데리고 돌아왔다. “이에 그 두 사람이 베들레헴까지 갔더라 베들레헴에 이를 때에 온 성읍이 그들로 말미암아 떠들며 이르기를 이이가 나오미냐 하는지라(룻 1:19).” 그러자 나오미는 정직하게 인정한다.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20).” 본래 ‘나오미’란 이름의 의미는 감미로운자, 은혜로운 자, 사랑스러운 자란 의미다. 그런 의미의 자신을 두라 ‘마라’라 하는데, 마라는 괴로움, 쓰라림, 쓰다는 뜻을 가진다.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출 15:23).” 그렇듯 나오미가 자신을 ‘마라’라 불러달라 한 것은 그녀가 모압 땅에서 생활하는 중에 극도의 슬픔과 고통을 맛보았을 뿐 아니라, 지금도 자신의 처지가 비참하고 괴로운 상태에 머물게 되었기 때문임을 자각하는 것이다.

 

하여 이 모든 일의 주관자 또한 하나님이신 것을 알았다. ‘이는 전능자가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나오미가 특별히 하나님의 명칭을 ‘전능자’로 부르고 있음은 자신이 ‘택함 받은 백성’임에도 순종의 길로 가지 못하고 어그러진 길로 갔음으로, 축복이 아닌 심판과 저주의 길을 만났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 하니라(21).”

 

오늘 본문과 설교원고의 내용을 놓고 묵상하면서 깨닫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과 거스르는 삶의 선택으로 스스로 자처한 인생을 산다는 것이다. 곧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은,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잠 16:3).” 이게 그렇게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생을 돌아보면 확연히 드러나는 것은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9).” 모든 결과는 하나님의 것이다. 우리는 더러 실패라 하고, 또는 성공이라면서 즐거워하는데 이 또한 헛된 것은 이 땅의 결과는 제한적이고 유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씀에 따른 예레미야의 순종처럼 우리의 믿음은 순종으로 입증된다. 순종은 결과든지 성공이든지 주를 인정함으로 감사하게 한다. 곧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4:21).” 그러므로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약 2:20-22).”

 

이에,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그들은 부패하며 가증한 악을 행함이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시 53:1).

 

그러나 결국,

 

그들이 두려움이 없는 곳에서 크게 두려워하였으니

너를 대항하여 진 친 그들의 뼈를 하나님이 흩으심이라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셨으므로

네가 그들에게 수치를 당하게 하였도다

(5).

 

이는 오늘도 우릴 교훈하시며,

 

시온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줄 자 누구인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포로된 것을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며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