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형제 히브리 사람이 네게 팔려 왔거든 너희는 칠 년 되는 해에 그를 놓아 줄 것이니라 그가 육 년 동안 너를 섬겼은즉 그를 놓아 자유롭게 할지니라 하였으나 너희 선조가 내게 순종하지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였느니라
렘 34:14
나는 말하기를 만일 내게 비둘기 같이 날개가 있다면 날아가서 편히 쉬리로다 내가 멀리 날아가서 광야에 머무르리로다 (셀라) 내가 나의 피난처로 속히 가서 폭풍과 광풍을 피하리라 하였도다
시 55:6-8
유다의 시드기야 왕이 바벨론의 포로가 될 것을 예언하고 있다. 이 말씀은 예레미야가 옥에 갇히기 전에 임한 것이다. “유다 왕 시드기야는 갈대아인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반드시 바벨론 왕의 손에 넘겨진 바 되리니 입이 입을 대하여 말하고 눈이 서로 볼 것이며 그가 시드기야를 바벨론으로 끌어 가리니 시드기야는 내가 돌볼 때까지 거기에 있으리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가 갈대아인과 싸울지라도 승리하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더니 유다 왕 시드기야가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같이 예언하였느냐 하고 그를 가두었음이었더라(32:4-5).”
이 예언의 말씀이 시드기야에게 전달된 시기는 바벨론 왕이 모든 나라에서 차출한 군대들을 동원하여 예루살렘과 그 모든 성읍을 칠 때였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과 그의 모든 군대와 그의 통치하에 있는 땅의 모든 나라와 모든 백성이 예루살렘과 그 모든 성읍을 칠 때에 말씀이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34:1).” 지금까지 남아서 바벨론의 공격을 저지한 성은 ‘라기스와 아세가’였다. 그만큼 사태가 위급해졌음을 의미한다. 그런데도 시드기야는 완강히 버티고 있었고 마음은 완고하였다.
그런 가운데 갈대아인들이 각 성읍을 점령하고 불사를 것이고, 그는 사로잡혀 포로로 끌려가서 느부갓네살 왕 앞에 설 것임을 알린다. 에스겔도 예언하기를 “인자야 너는 포로의 행장을 꾸리고 낮에 그들의 목전에서 끌려가라 네가 네 처소를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을 그들이 보면 비록 반역하는 족속이라도 혹 생각이 있으리라(겔 12:3).” 그는 그 땅을 보지 못하였는데 이는 그가 눈이 뽑혔기 때문이다. 이 시드기야는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화를 자초한 것이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보이신다. “네가 칼에 죽지 아니하고 평안히 죽을 것이며 사람이 너보다 먼저 있은 네 조상들 곧 선왕들에게 분향하던 것 같이 네게 분향하며 너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슬프다 주여 하리니 이는 내가 말하였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시니라(렘 34:4-5).” 우리는 그가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였다 해도 므낫세가 그랬던 것처럼 포로로 잡혀가 있으면서 죄를 회개하였을 것을 믿는다. 그러므로 그는 사죄함을 받아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게 되었을 것이라 짐작한다. ‘그가 평화롭게 죽을 것이라’는 말씀이 그리 이해된다.
이는 곧 궁궐에서 완악한 마음으로 살다 끝내 하나님을 배역하고 죽기보다 옥에 갇혀 참회하고 살다 죽는 것이 낫다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곧 바울은 이를 설교할 때,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1:32).” 좀 더 풀어서 생각하면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죽여서라도 살리는 것으로 이 땅의 영화와 생명을 단축하여서라도 영벌에 처하는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심이다. 이에 오늘 시드기야와 므낫세는 저들의 극악무도한 죄악에서 벌을 받고 노년에 이르러 회개함으로 은총을 받았을 것을 짐작한다. 곧 오늘 본문에서 ‘너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슬프다. 주여 하리니’ 하는 부분에서 하나님은 끝내 포로로 잡혀가 회개하고 생을 마감하였을 것을 상상하게 한다.
결국 시드기야 왕은 물론 유다와 이스라엘 전체는 앗수르와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고 포로가 될 운명에 처해졌다(34:8-22). 이러한 말씀으로 볼 때 ‘진정한 회개’는 행동의 변화 이전에 마음의 변화가 우선됨을 알 수 있다. 이런 가운데 강퍅한 우리의 마음은 고통스러운 환경에서 주를 찾을 때 수반된다.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 포위된 직후 시드기야 왕과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서 언약을 체결했다. 그 언약은 히브리 민족을 노예에서 해방하는 것이다. 율법에 따라 같은 동족을 노예로 삼는 것에 대해, 부득이 그런 상황에서도 7년째 되는 해에는 그들을 해방시켜 주도록 규정하였다.
“네 동족 히브리 남자나 히브리 여자가 네게 팔렸다 하자 만일 여섯 해 동안 너를 섬겼거든 일곱째 해에 너는 그를 놓아 자유롭게 할 것이요(신 15:12).” 그러나 예루살렘이 포위된 상황에서도 시도기야 왕과 유다 백성들은 스스로 언약을 맺고 율법의 규례를 지키기로 한 것인데 이를 피상적으로 여겨 도로 잡아들여 노예로 삼았다. “이 계약에 가담한 고관들과 모든 백성이 각기 노비를 자유롭게 하고 다시는 종을 삼지 말라 함을 듣고 순복하여 놓았더니 후에 그들의 뜻이 변하여 자유를 주었던 노비를 끌어다가 복종시켜 다시 노비로 삼았더라(10-11).”
이처럼 죄는 몸에 밴 습관 같아서 중독성이 강한 것을 알게 된다. 바벨론이 애굽으로 진격하여 잠시 예루살렘에 대한 포위를 푼 사이에 다시 해방시켰던 노비들을 끌어다 노예로 삼은 것이다. 이는 마치 우리의 습관적인 죄의 반복과정과 같다. 그러므로 진정한 마음의 변화가 있어야 하고 이에 따른 행동이어야 오래간다. 분명 성경은 여호와의 마음이 상한 영혼으로 주 앞에 서는 자와 우선하심을 알게 한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시 34:18).
그러므로 행위로의 변화도 중요하지만 이는 얼마든지 가식적으로 꾸밀 수 있어서 진정한 회개는 외적인 행위의 변화로 알 수 있지만 먼저는 참회의 마음이 우선돼야 하는 것을 알게 한다. 그러므로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사 55:7).” 불의한 생각을 먼저 버려야 한다. 곧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해야 한다. “너희는 너희가 범한 모든 죄악을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할지어다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 하고 물으시며,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죽을 자가 죽는 것도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겔 18:31, 32).” 하고 증거한다.
실제 마음을 굳게 먹어야 행동도 따른다. 모압 여인 룻도 마음을 ‘굳게 결심함으로’ 낯선 이국의 땅, 이국의 백성들로 자신이 나오미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올 수 있었다. 이때 그 행동에 앞서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룻 1:16-17).” 이러한 결심이 있었음을 그의 행함이 증거한다.
다니엘과 그 친구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먼저 ‘뜻을 정하였으므로’ 포로 된 가운데서도 여호와 경외함을 행할 수 있었던 것과 같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단 1:8).” 나는 새해를 맞으면서 우선은 이처럼 ‘새벽을 깨우는 일’에 우선하여 결심을 다잡았다. 이는 단순히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습관의 문제가 아니다. 먼저는 가족들로부터 이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이제는 다들 나 때문에라도 저녁을 여섯 시 전에 먹는다. 그리고 나는 여덟 시 전에 잠자리에 드는 것을 기정사실로 인정한다.
그러기까지 우선은 스스로의 결단이다. ‘굳게 결심함’으로 가능해진다. 물론 그런 가운데서도 예외가 늘 생긴다. 그럴 때 우선순위를 분명히 해야 한다. 예수님은 이르시길,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하실 때, 우리가 잠시 여유를 갖거나 예외를 두면 언제든지 도로 습관에 쫓길 수 있음을 아신 것이다. 흔히 ‘그럴 수 있지!’ 하고 자신을 허용할 때, 마치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다급할 때와 애굽으로 잠시 물러나 포위가 느슨해졌을 때 저들은 기껏 같은 민족을 노예로 삼았다가 풀어주고는 도로 잡아다 노예로 삼은 것과 같다.
“그 때에 바벨론의 왕의 군대가 예루살렘과 유다의 남은 모든 성읍들을 쳤으니 곧 라기스와 아세가라 유다의 견고한 성읍 중에 이것들만 남았음이더라 시드기야 왕이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백성과 한 가지로 하나님 앞에서 계약을 맺고 자유를 선포한 후에 여호와께로부터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후에 그들의 뜻이 변하여 자유를 주었던 노비를 끌어다가 복종시켜 다시 노비로 삼았더라(34:7-8, 11).”
이를 통해서도 나는 나를 잘 안다. 그래서 다시 결심하고 또 작심삼일이라 하면 삼일마다 작심을 하듯 결심한다. 오늘 새벽 두 시 전에 눈을 뜨고 침대에 앉아 한참을 망설이기도 했다. 유난히 그럴 때가 있다. 어제는 뉴스를 보다 9시가 다 돼서 잠들었다. 오늘은 유난히 추운 날씨다. 침대 밖으로 몸을 내자 춥다는 생각과 도로 눕고 싶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그 사이 오만가지 생각이 쓸려 간다. 좀 더 잘까? 오늘은 아침에 일어나서 할까? 교회로 가지 말까? 그러한 마음의 동요를 박차고 화장실로 가서 찬물로 얼굴을 씻었다. 양치를 하고 나니 정신이 돌아왔다. 그런 것이다. 잠시 바벨론의 포위가 느슨해지자 금세 백성들의 마음은 풀어주었던 노예들을 다시 잡아온 것과 같다.
새해 첫 주일, 첫 예배 때 나는 설교원고로 룻의 굳게 결심함을 주제로 말씀을 준비하고 나의 마음도 다잡았다. 묵상을 글로 쓸 때 열 장을 기본으로 하여 쓰는 이유도, 이를 글로 쓰는 것 자체도 실은 나름은 굳은 결심으로 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르시길,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세상은 점점 사람 중심, 개인 중심으로 각자 저마다의 주장과 행복을 우선한다. ‘욜로족’이라 하여 자신에게 보상하고 이를 귀히 여긴다. ‘열심히 일한 당신 즐겨라’ 하는 구호가 광고카피가 아니라 실제 우리 세대의 주관이다.
서로 위로할 때도 ‘괜찮아, 그럴 수 있지, 네 잘못 아니야, 다 그래, 네가 아픈 거야!’ 하는 식으로 위로하고 격려한다. 죄를 사사로이 여기게 만든다. 교회의 치리는 사라졌고 각각의 교단도 그 교회의 교세와 목사의 권력으로 좌지우지 된다. 섣불리 이단을 이단이라고 말하지 못하고 경고하기는커녕 그 기세에 눌려 동조하며 따르기까지 한다. 정당정치는 말할 것도 없고 교회정치도 서로의 진영이 갈려서 교세확장을 우선한다. 내가 아는 누구는 어릴 때 학생회 시절 신앙의 선배였다. 당시에는 말씀을 노트에 기록하고 서로 돌려보거나 같이 묵상하기도 하였다. 당시 신학생이던 그는 후배였던 우리의 모범이었다. 새벽예배를 우선했고 늘 말씀을 묵상하고 나누기를 좋아했다.
결국 저는 일찍 목사가 되었고 요즘은 어디 중견교회를 담임하고 있다. 그런데 들리는 말이 그렇게 정치적인 인물이 되었다고 한다. 모임을 여러 개 하고 같이 어울리며 세를 넓히고 일찌감치 총무를 맡았네, 서기를 하네, 하더니 곧 총회장이 될 모양이다. 그런 걸 뭐라 하는 게 아니라 그러느라 저이가 관심 두고 어울리며 힘을 쏟는 게 무엇인지 전해들을 때는 씁쓸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같은 연배의 누구는 여전히 가난한 개척교회로 열 가정 남짓 성도들과 함께 성경공부 중심으로 날마다 모이기에 힘쓰며 오직 말씀으로 산다. 그러다 보니 누구처럼 규모 있는 교회도, 번듯한 사택도, 심지어 누군 어디에 별장 같은 수련회장소도 있다는데…. 그러면서 보면 덩달아서 정치적인 진영논리로 이쪽이냐 저쪽이냐 다투기도 한다. 그런 걸 마치 목회자의 사명인 줄 알고 성도들을 선동하고 길거리로 나가기도 한다.
‘그럴 수 있지!’ 하고 허용되는 구멍으로 도로 악습이 끼어든다. 몸에 밴 습관처럼 죄악은 몸에 잘 맞는 외투 같다. 다들 겉으로는 이상을 외치는데, 요즘 소위 무슨 장관직을 하겠다고 하는 이가 이런저런 과거의 갑질이 폭로되면서 서로가 민망하다. 누군 또 앞에서는 울먹이며 위선을 떨다 뒤로는 또 뇌물도 받고 부정한 동기로 누구를 지지하기도 하면서… 성경은 이를 분별하라고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최초의 형법, “네가 히브리 종을 사면 그는 여섯 해 동안 섬길 것이요 일곱째 해에는 몸값을 물지 않고 나가 자유인이 될 것이며(출 21:2).” 이 율법이 재정된 데는 그럴 말한 이유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영예로운 일을 이루셨다. 그들도 스스로 그 영예로 보존하게 하셨다. 다른 민족들 사이에서 다른 점이 있어야 한다. ‘다들 그런다고 우리 믿는 자들이 그래도 되는 게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애굽 같은 세상에서 이끌어 내셨다. 따로 구별하여 ‘너는 내 것이라’ 하셨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 43:1).”
이 귀한 은총으로,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 5:1).” 이 얼마나 영화롭고 존귀한 일인가? 결코 아무나의 것이 아니다. 부득이 같은 동족을 종으로 삼았다 해도 7년 되는 해에는 풀어주게 하신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런데 ‘너희 선조가 나를 듣지 아니하였다’고 하셨다. “너희 형제 히브리 사람이 네게 팔려 왔거든 너희는 칠 년 되는 해에 그를 놓아 줄 것이니라 그가 육 년 동안 너를 섬겼은즉 그를 놓아 자유롭게 할지니라 하였으나 너희 선조가 내게 순종하지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였느니라(렘 34:14).”
그리고 나아가 희년은 한 번도 지켜진 바 없다. “너희는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하게 하여 그 땅에 있는 모든 주민을 위하여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자기의 소유지로 돌아가며 각각 자기의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 그 오십 년째 해는 너희의 희년이니 너희는 파종하지 말며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며 가꾸지 아니한 포도를 거두지 말라(레 25:10-11).” 곧 사람도 종으로 삼았다가 풀어줘야 하고, 땅도 그때는 좀 쉬게 두어야 한다. 곧 “이는 희년이니 너희에게 거룩함이니라 너희는 밭의 소출을 먹으리라(12).” 그리하여 “이 희년에는 너희가 각기 자기의 소유지로 돌아갈지라(13).” 그러니 이게 참 쉽지가 않다.
궁극적으로는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기며’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정죄하지 않으시고 긍휼히 여기신 것 같이 그리하게 하심인데, 우린 날마다 자신도 모르게 자신을 속인다. 그러다 보니 스스로는 그 정도를 괜찮다고 허용한다. 하나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 우리 속에 마음은 알고 행위는 가식적이게 된다.
하여 나는 다시금 결심하기를 날마다 필요하면 또 한다. 회개는 일시적인 게 아니라 지속적이고 날마다의 전쟁 같은 것이다. 하여 바울도 그처럼 자신을 독려하며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이는 스스로 잘 알고,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롬 7:19).” 이는 어쩔 수 없는 우리의 속성으로,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20).” 이 땅에 사는 동안은 우리 안의 시드기야나 므낫세나 늘 살아서 날뛰듯 ‘다들 그러고 살아!’ 하면서 나를 넘어뜨리려 한다.
하나님이여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내가 간구할 때에 숨지 마소서
내게 굽히사 응답하소서
내가 근심으로 편하지 못하여 탄식하오니
이는 원수의 소리와 악인의 압제 때문이라
그들이 죄악을 내게 더하며
노하여 나를 핍박하나이다
(시 55:1-3).
곧 내 안의 적으로, 내 곁의 사랑하는 이들이 더 무섭다. 하여,
나를 책망하는 자는 원수가 아니라 원수일진대
내가 참았으리라 나를 대하여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나를 미워하는 자가 아니라 미워하는 자일진대
내가 그를 피하여 숨었으리라
(12).
저가 누구인가?
그는 곧 너로다 나의 동료,
나의 친구요 나의 가까운 친우로다
우리가 같이 재미있게 의논하며 무리와 함께 하여
하나님의 집 안에서 다녔도다
(13-14).
이럴 때면 어디로라도 도망가서 혼자 살고 싶을 정도이다.
나는 말하기를 만일 내게 비둘기 같이
날개가 있다면 날아가서 편히 쉬리로다
내가 멀리 날아가서 광야에 머무르리로다 (셀라)
내가 나의 피난처로 속히 가서
폭풍과 광풍을 피하리라 하였도다
(6-8).
아, 나는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하리니
여호와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리로다
(17).
주 앞에 아룀으로,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
(22).
그리하여,
하나님이여 주께서 그들로
파멸의 웅덩이에 빠지게 하시리이다
피를 흘리게 하며 속이는 자들은
그들의 날의 반도 살지 못할 것이나
나는 주를 의지하리이다
(2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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