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이 왕의 아들 여라므엘과 아스리엘의 아들 스라야와 압디엘의 아들 셀레먀에게 명령하여 서기관 바룩과 선지자 예레미야를 잡으라 하였으나 여호와께서 그들을 숨기셨더라
렘 36:26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이 재앙들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
시 57:1
바룩이 예레미야의 말을 기록한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두루마리 책으로 엮었다. 에스겔이 사역을 시작할 때 환상 중에 두루마리 책을 받았다. 그 책은 예언자를 위한 것으로 그로 하여금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게 한다. 그는 그 말씀을 받아 먹으라는 명령을 따랐다. “내가 보니 보라 한 손이 나를 향하여 펴지고 보라 그 안에 두루마리 책이 있더라 그가 그것을 내 앞에 펴시니 그 안팎에 글이 있는데 그 위에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되었더라(겔 2:9-10).” 이를 따르는 일은 양면적이다. 입에는 달다.
“또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발견한 것을 먹으라 너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하라 하시기로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를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3:1-3).”
본문에서 예레미야의 활동이 끝날 무렵 그는 두루마리 책을 준비한다. 이것은 백성들을 위한 것이다. 그들로 앞날을 알게 한다. 이를 듣고 고관들과 백성들이 각성하고 주의한다. 그러나 왕이 이를 찢어서 불태웠다.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하신 말씀은 설교의 형태로 기록되었다. 예레미야는 그의 백성에게 책망이나 경고할 때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였다. 우리가 말씀을 전할 때도 그러하다.
처음 말씀을 전파하기 시작한 요시야 13년에서부터 여호야김 통치 4년째인 현재까지 이런 사역은 계속되었다. “유다의 요시야 왕의 아들 여호야김 제사년에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말씀이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두루마리 책을 가져다가 내가 네게 말하던 날 곧 요시야의 날부터 오늘까지 이스라엘과 유다와 모든 나라에 대하여 내가 네게 일러 준 모든 말을 거기에 기록하라(렘 36:1-2).” 그 내용은 <돌이킴과 용서>에 대한 말씀이다. “유다 가문이 내가 그들에게 내리려 한 모든 재난을 듣고 각기 악한 길에서 돌이키리니 그리하면 내가 그 악과 죄를 용서하리라 하시니라(3).” 듣고 돌이키면 용서가 온다.
말씀은 전파되는 것만으로 부족하다. 기록되어야 한다. 그 말씀을 다시 접할 수 있게 하여야 한다. 나는 묵상을 글로 쓰고 설교도 원고로 작성하여 올리고, 예배 중에는 출력하여 나눠준다. 대부분 그냥 보고 놓고 가지만 최소는 나는 언제든 다시 읽고 묵상을 되새길 수 있다. 말씀을 전할 때 문제는 광범위하게 취급된다. 같은 내용이 반복되기도 한다. 심지어 같은 단어들이 반복되어 강조된다. 이제 이 말씀이 기록됨으로 말씀은 구어(口語)에서 문어(文語)로 압축되고 축약된다. 말은 흩어져 사라질 수 있어도 글은 남아서 되새길 수 있고 적용에 있어 수정도 가능하다. 이것은 이것대로 유익하여 한 부분의 말씀을 여러 각도로 되새김할 수 있다.
나는 누구에게든 필사나 묵상을 글로 쓰는 것을 권한다. 대부분은 이 일이 익숙하지 않고 또는 번거로운 게 사실이라 따르지 않는다. 그러나 유익한 점을 알면서 달라진다. 가령 나 같은 경우는 요즘처럼 어디서든 텍스화 된 문서를 블러그나 카페, 티스토리 같은 형태로 보관할 수 있어서 어제 어디서든지 다시 읽기가 용이하다. 병원에서 지루한 대기 중에,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거나 오르내릴 때, 어디서든 혼자 가만히 있을 때도 이처럼 글로 쓴 묵상을 몇 번이고 다시 볼 수 있다. 또한 같이 나눌 수 있어서 누가 같은 형태로 자신의 블러그나 카페 같은 데 올려놓으면, 요즘은 또 알림도 뜬다. 그렇듯 영적인 교제도 할 수 있다. 저의 글에 아멘, 하고 기도하거나 나 역시 동감한다.
말씀은 요약되어 다시 들을 수 있는 게 유익하다. 어릴 때 나의 부친은 전교인들로 하여금 주일 설교나 예배 때 전해지는 말씀을 각자 받아쓰게 하셨다. 저마다의 글쓰기 방식은 다르겠으나 초등학교 때는 그것으로 주일학교 교재로 사용하고 교사들 묵상 교재나 성경공부 교재로도 활용되었다. 이제는 더 원활하여 아예 설교 중계를 동영상으로 올리거나 하는 게 보편적이기는 한데… 그러한 유익을 아는 사람만 보고 듣고 읽고 쓴다. 하려고만 하면 오늘 바룩의 기록 같은 일은 수월하고 일반적이다. 물론 들을 귀가 있어야 하듯이 보려는 눈도 필요하다. 성경은 그렇게 성령의 영감을 받은 사람들의 기록이다.
하나님의 명령에 의한 것으로 기억하고 기록하여 후대인 우리 손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렸다. 그 어느 때보다 은혜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그 기록의 목적은 동일하다. “유다 가문이 내가 그들에게 내리려 한 모든 재난을 듣고 각기 악한 길에서 돌이키리니 그리하면 내가 그 악과 죄를 용서하리라 하시니라(3).” 오늘도 이와 같은 글이 개인적으로든지, 하나님이 들려주시는 말씀에 따른 기록이고 되새길 수 있는 은혜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장래가 어떠할 것을 기록으로 남겨 알게 하셨다. “네가 과연 듣지도 못하였고 알지도 못하였으며 네 귀가 옛적부터 열리지 못하였나니 이는 네가 정녕 배신하여 모태에서부터 네가 배역한 자라 불린 줄을 내가 알았음이라(사 48:8).”
읽기나 쓰기는 훈련이 필요하다. 사실은 듣기와 말하기도 다르지 않다. 서로 지내다보면 대화가 어려운 사람이 의외로 많다. 특히 들을 귀 없는 자들에 대하여는, 저들은 자기 말만 하고 싶어 한다. 주로는 어떤 문제를 가지고 오는 자들이 그렇다. 자기 말만 하고 싶어 하는 듯 했던 말 또 하고 하면서 연신 자기 말만 하고 싶어 한다. 뭐라 권하거나 상대의 말은 들을 줄 모른다. 실제 나는 그런 사람 앞에서 할 말을 잃는다. 기껏 자기 혼자 말하다 뜬금없이 내 의견을 묻는데 그래서 뭐라 몇 마디 하려하면 어느새 또 저가 떠들고 있다. 듣지 못하는 자의 입은 자신의 귀를 가로막는다. 글을 읽는 일도 습관처럼 몸에 배어야 가능하다.
내가 아는 누구는 퇴직 후에 보고 싶은 책들이라면서 일찌감치 여러 곳의 책장에 책을 모았다. 그러고는 정작 퇴직 후에도 그 책들은 여전히 새 책으로 꽂혀 있다. 읽을 시간이 없다. 평생을 바쁘게 살던 삶이 몸에 밴 것이라 하다못해 어디 동네라도 기웃거리며 나다니는 데 익숙하지 진득하니 책상에 앉아 책을 읽지 못한다. 누구라도 같이 어울려야지 혼자 있는 시간을 못 견뎌한다. 그런 가운데 요즘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방해되는 게 핸드폰이다. 심지어 저는 책장의 책을 읽기보다 검색하여 그 내용을 소개하는 글을 읽음으로 안다고 여긴다.
성경도 늘 그렇듯 접근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누구의 설교나 강해책자나 소개 글, 요약본을 읽는 데 익숙하다. 자신이 또박또박 읽거나 듣는 일에서는 서툴다. 누군 박사학위까지 있지만 성경은 늘 어렵다면서 누구의 어떤 해설이나 설교를 찾아 읽는다. 자신이 직접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그 뜻을 음미하기는 ‘어렵다.’ 저가 어렵다고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진득하니 앉아 묵상할, 들을 귀가 없다. 가령 누가 <로마서>가 다들 좋다는데 자신은 읽으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면서 그에 따른 해설이나 강해를 듣거나 읽는 것으로 대체한다. 그러면서 한 번도 제대로 끝까지 읽은 적이 없다. 또는 우리 말 성경은 표현과 해석이 애매하다며 영어 성경이니 심지어는 라틴어로 성경을 읽는 것에 우월감을 느낀다.
그러든지 어쩌든지… 들을 귀 없는 자와 진득하니 읽을 인내가 없는 자에게는 뭐라 한들 바람에 흩어지는 소리 같을 뿐이다. 그러면서도 보험 약관이나 어디 계약서는 꼼꼼하게 읽거나 모르는 것은 그 뜻을 찾아보고, 묻고, 확실히 알려고 한다. 결국은 ‘어렵다’는 것이 관심의 문제이지 난독의 문제는 아니다. 가령 내가 가장 어려워하는 것은 게임이나 무슨 앱을 설치하고 활용하는 설명서이다. 도대체 뭘 어떻게 하라는 말인지, 누가 해주고 말해주는 정도로 만족하고 산다. 게임은 특히 난해하다. 재밌는 이유를 모르겠다. 결국 관심의 문제다.
오늘 예레미야는 자신이 매인 몸이라 바룩으로 듣고 받아 적어 기록한 것을 가져다 고관들과 백성들에게 읽히게 하였다. 이 방법을 시도한 목적은 이렇게 하여 순종할까하는 바람이었다. 그들이 듣지 않을 때, 그들에게 남은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행악에 따라 보수하시는 길뿐이다. 죄의 치명적인 결과는 기어이 하나님께서 징계의 채찍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인데, 최종적으로는 이 또한 유익하다.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그러므로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히 12:10, 11).”
앞서 말씀을 전하여져 들을 수 있고, 듣고 돌이킬 수 있으면 더 좋은데… 대체로 그러기가 쉽지 않다. 아무 일도 없을 때는 듣는 말이 별로 와 닿지 않는다. 하여간 우린 일이 터지고 닥쳐서 어떤 큰 고통이 임하여서야 후회나 반성을 한다. 그때 돌이키려 할 때면 그만큼의 고통과 시간은 감수해야 한다. 그나마 그럴 수 있을 때는 그래도 다행이고,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1:32).” 기어이 안 되겠다 싶을 때는 죽여서라도 정죄함을 면하게 하신다. 섣불리 어떤 경우를 예로 들 수는 없지만 주의 자녀들로는 이를 알게 하신다.
그러므로 ‘듣고, 각기 악한 길에서 돌이킬까’ 하는 바람으로 말씀은 오늘도 들려진다. 교회는 말씀을 전하고, 죄인들이 악한 길에서 돌아오게 하는 것이 중요한 의무다. 그저 누구 푸념을 듣거나 변명을 나누는 자리가 아니다. 말씀은 선포되는 것이지 토론하자는 게 아니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자는 것도 아니다. 그런 점에서 젊은 세대나 요즘 교회들의 오해가 어떤 점인지 알 수 있다. 말씀을 숙고하고 돌이킬 수 있을 때 지혜이다. 우리는 타협할 수 없다. 하나님의 공의는 타협이 있을 수 없다. 현대인의 관점으로는 참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그렇다고 성경이 ‘꼰대’는 아니다. 무던히 참고 기다림으로 기회를 수 없이 더하신다. 가령 우리가 기도하는 일도 우리의 요구만 되풀이하다 보면 어느새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를 주목하게 된다.
예레미야가 서기관 바룩에게 명령하였다. 이는 바울이 전하는 것처럼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갈 6:11).” 하고 저는 서신을 여러 편 기록하였다. “이 편지를 기록하는 나 더디오도 주 안에서 너희에게 문안하노라(롬 16:22).” 이같이 하나님께서는 각 은사를 주셨다. 어떤 이는 달변의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달필의 은사를, 누구도 묵묵히 듣는 은사를, 누구로는 이를 따름으로 실천하는 행함의 은사를… 그러므로 교회는 조화로운 모습으로 여럿이 하나가 된다.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고전 12:21).” 그러므로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20).”
섣불리 누가 어떻다, 하고 말할 수 없지만 누구에게든지 이를 훼방하고 무시하려는 심보가 다 있다. 죄의 속성으로 우리 스스로도 감당이 안 된다. 그래서도 기도해야 한다. 들어야 하고, 가만히 좀 자신을 시간에 맡기고 그 공간에 맡겨야 한다. 그게 불안하다면 그러한 불안까지도 잠잠히 내려놓아야 한다. 이는 반복함으로 습관이 되고 유익한 습관은 품성이 되고 그의 인격이 되고 숙명이 된다. 그러므로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빌 3:1).”
우리는 하나님의 좋은 말씀을 듣는 것을 기쁘게 여겨야 한다. 읽고 쓸 수 있는 능력으로 말씀을 묵상하고 사모하고 나누어야 한다. 바룩의 두루마리 책은 그렇듯 낭독되었다. 여호야김 통치 제 4년을 지나 5년째 되는 해이다. “유다의 요시야 왕의 아들 여호야김의 제오년 구월에 예루살렘 모든 백성과 유다 성읍들에서 예루살렘에 이른 모든 백성이 여호와 앞에서 금식을 선포한지라(렘 36:9).” 저가 읽을 때 예상 외로 이를 듣는 백성들이 회개의 기회가 생겼다. 성경은 늘 강조하시길, ‘나를 들으라. 그리하여야 하나님이 너희를 들으시리라.’ 하는데,
“내 말을 들으라 그리하여야 하나님이 너희의 말을 들으시리라(삿 9:7).”
곧 자비와 은혜를 구함에 있어서 먼저 우리의 죄와 행할 바 의무에 대하여 듣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앞서도 우려한 것처럼 대부분은 듣기보다 말하기를 좋아하고, 저마다 자기 할 말만 하려들다 자리를 박차고 나간다. 이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모든 것이 되어야 한다.’ 이는 아무리 상대가 어떠하든지 그런 가운데 단 한 영혼이라도 얻을까 하여서이다. 나의 이 묵상이 글로 쓰여 최소한 내게 유익한 것은 하루 종일 수시로 읽히듯이 누구 한 사람, 그 한 영혼을 위한 것이면 된다.
가령 예배 중에 늘 내 앞에 앉는 아이는 내게 용기를 준다. 말도 지능도 이해도 어려운 경우라 해도 듣는 눈과 귀가 또렷하여 나로 더욱 정성껏 전하게 한다. 하루 열 명도 안 보는 이 글도 먼저는 나에게 유익하여서이다. 말씀으로 일상을 조명하게 한다. 나의 이야기 속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확신하게 한다. 결코 사적으로 이 글을 쓰지 않으려고 힘쓴다. 가령 누가 책을 내라는 둥 요즘은 이런 글도 광고를 붙이고, 구독수가 늘면 보상이 따른다고 하는데 나는 의식적으로 거절한다. 정말 진심으로 읽고 이해하려 댓글을 남기는 것은 개인적으로라도 답을 한다. 그런데 이것조차 요즘은 AI가 써주는 설정이 있는지, 같은 표현으로 댓글이 달리고 결국은 그것을 따라 자신의 블러그를 홍보하려는 목적이 대부분이라 삭제한다.
나는 늘 각오하듯 일체의 사적인 의사로 이 글을 쓰거나 보관하지 않는다. 이는 “계시를 따라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되 유력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갈 2:2).” 하는 바울 사도의 진심어린 각오를 본받는다. 하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8-9).”
오늘 예레미야도 이를 받아 적고 충성되이 가서 전한 바룩도 모두 죽을 각오로 하였다. 결국 “여후디가 서너 쪽을 낭독하면 왕이 면도칼로 그것을 연하여 베어 화로 불에 던져서 두루마리를 모두 태웠더라(렘 36:23).” 듣지도 않고 전해지는 것도 원치 않는 자의 소행은 폭압적이다. 그런 가운데도 “왕이 왕의 아들 여라므엘과 아스리엘의 아들 스라야와 압디엘의 아들 셀레먀에게 명령하여 서기관 바룩과 선지자 예레미야를 잡으라 하였으나 여호와께서 그들을 숨기셨더라(26).” 결국은 주가 감당하신다.
이런 일이 있었는데도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다시 다른 두루마리를 가지고 유다의 여호야김 왕이 불사른 첫 두루마리의 모든 말을 기록하고 또 유다의 여호야김 왕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네가 이 두루마리를 불사르며 말하기를 네가 어찌하여 바벨론의 왕이 반드시 와서 이 땅을 멸하고 사람과 짐승을 이 땅에서 없어지게 하리라 하는 말을 이 두루마리에 기록하였느냐 하도다(27-29).” 다시 기록하고 또 그와 같은 순종을 명하신다. “이에 예레미야가 다른 두루마리를 가져다가 네리야의 아들 서기관 바룩에게 주매 그가 유다의 여호야김 왕이 불사른 책의 모든 말을 예레미야가 전하는 대로 기록하고 그 외에도 그 같은 말을 많이 더 하였더라(32).”
오늘 우리의 이 사소한 일이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의 현장인 것을 확신하며 기도한다.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이 재앙들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
내가 지존하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
(시 57:1-2).
세상이 알지 못하는 이 놀라운 일에 있어서,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그들이 내 걸음을 막으려고 그물을 준비하였으니
내 영혼이 억울하도다 그들이 내 앞에
웅덩이를 팠으나 자기들이 그 중에 빠졌도다 (셀라)
(5-6).
그리하여,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7-8).
이에,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1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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