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가 이르되 그 무리가 왕을 그들에게 넘기지 아니하리이다 원하옵나니 내가 왕에게 아뢴 바 여호와의 목소리에 순종하소서 그리하면 왕이 복을 받아 생명을 보전하시리이다
렘 38:20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니 그의 힘으로 말미암아 내가 주를 바라리이다 나의 하나님이 그의 인자하심으로 나를 영접하시며 하나님이 나의 원수가 보응 받는 것을 내가 보게 하시리이다
시 59:9-10
주의 뜻을 전하고, 주의 뜻대로 사는 일은 참 어려운 일이다. 오늘 여기 예레마야와 같이 억울하게 잡혀 우물에 던져지는 일 같은 상황도 생긴다. 이때도 우리가 주를 온전히 바라며 찬송할 수 있다면,
나는 주의 힘을 노래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르오리니
주는 나의 요새이시며
나의 환난 날에 피난처심이니이다
나의 힘이시여 내가 주께 찬송하오리니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며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
(시 59:16-17).
현실은 녹록하지 않다. 예레미야가 구덩이에 갇혔다. 예레미야는 오늘 설교에서 전하였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이 성이 반드시 바벨론의 왕의 군대의 손에 넘어가리니 그가 차지하리라 하셨다 하는지라(3).” 그 시기가 지연된다 하여도 끝내 취하여질 것이라 전한다. 그때에 이 성은 구하지 못하더라도 백성들을 어떻게 해서라도 구하고자 하여 저들이 들으려 하지 않는 말씀을 전하였다. 이에 ‘항복하는 사람은 살리라’ 하고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이 성에 머무는 자는 칼과 기근과 전염병에 죽으리라 그러나 갈대아인에게 항복하는 자는 살리니 그는 노략물을 얻음 같이 자기의 목숨을 건지리라(2).” 안타까운 심정으로 전한다. 이는 하나님의 뜻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이는 민족적으로나 애국과 구국의 신념으로도 듣기 어렵다. 속된 말로 나라를 버리자는 소린데, 아직 그 일이 닥치기 전이라 저마다 이런 말에 동조하기는 쉽지 않다. 그런 가운데 예레미야의 설교는 ‘성을 지킬 욕심으로 성안에 머물러 있지 않도록 하라. 그것은 쓸데없는 짓이다. 갈대아인에게 가서 사태가 악화되기 전에 그들의 자비를 구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나라와 민족을 위해, 또한 예루살렘 성을 거룩히 여길 때 이와 같은 전언은 참아주기 어렵다. 오히려 항복하는 자들을 갈대아인들이 칼로 죽이지 않을 것이라니!
나름 우리의 판단은 어떤 가치를 대단한 의미로 두고 이를 사수하는 일로 신앙과 신념을 가진다. 실제 이런 설교를 들었다면 이를 하나님의 뜻으로 간주하기가 쉽지 않다.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리면,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마 24:2).” 하시며 당시 모두의 칭송을 받는 예루살렘을 향한 말씀이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하시니라(막 13:2)” 하심은 듣기 거북하였을 것이다.
오늘 예레미야의 설교도 같다. 하나님의 진노의 손길에 대항하는 것보다 참고 복종하는 것이 자신을 위하여 유익함을 전하는 것이다. 예루살렘 성이나 성전이 그 자체로 거룩할 게 무엇이겠나? 그 안에서 죄가 관영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것인데, 정작 돌이켜 회개할 생각도 없지만 이제는 목숨을 건질 수 있는 말씀에조차 한가로이 대응하는 것이다. “이에 그 고관들이 왕께 아뢰되 이 사람이 백성의 평안을 구하지 아니하고 재난을 구하오니 청하건대 이 사람을 죽이소서 그가 이같이 말하여 이 성에 남은 군사의 손과 모든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나이다(렘 38:4).” 나름 설득력이 있고 자신들 입장에서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겠다.
문제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뜻이다. 자유를 얻을 수 없다면 생명을 얻는 것으로 족히 여기고 명예심 때문에 생명을 던지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나 방백들은 예레미야에 대한 악의적인 적대감을 가졌다. 선지자로서 예레미야는 조국에 충성하였고 의무를 다하였다. 그러한 충심 때문에 오늘도 고난을 당한다. 그는 지금 왕의 덕분에 생계를 유지하고 있으나 그렇다고 입을 다물지는 않았다. 적들은 외부에 있기보다 내부에 있다. 그를 더욱 미워하여 예레미야를 시위대 뜰 우물에 가두었다. 그 이유는 ‘이 사람이 백성의 평안을 구치 아니하고 해를 구한다’는 것이다. 곧 듣고 싶은 말, 축복과 권면의 말씀보다 죄를 지적하고 회개를 권하며 심판을 예언한다. 이러한 말을 누구라도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런데 저들 방백의 주장은 예레미야의 설교가 ‘모든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한다’는 것이다. 곧 낙심시킨다고 이유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전할 때, 설교가 자신을 낙심시킨다고 생각할 때가 회개할 기회다. 돌이켜 주를 바랄 때이다. 이를 자존심 상해하면 곤란하다.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오늘 우리 사회의 정세나 세계적으로도 저마다의 지도자란 사람들의 공통점이다. 저들이 계속 완고한 명분으로 백성들을 끌어다 마치 위하는 척 한다. 사람의 순간적인 변명과 핑계는 익히 아담의 때부터 대단하다.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 3:12).”
그렇듯 회개도 은사라, 주의 영이 그 안에 계시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그런 가운데 순종에는 고난이 따른다. 자기를 포기하는 자기 십자가가 필요하다. 하여 우리의 근심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고후 7:10-11).”
그러나 어느 순간 교회의 희락주의나 기복적인 사상은 우리 영혼을 잠식했다. 어제도 산책을 하는데 누가 다가와 전도지에 사탕을 건네면서 ‘좋으신, 행복을 더하시는 하나님’을 전하였다. 행복해진다는 말도 건넸다. 그런 가운데 성경이 전하는 바는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약 4:9-10).” 정작 우릴 병들게 하는 구호 같은 증거는 ‘다 잘 될 거야! 네 잘못 아냐!’ 하는 따위의 위로다. 나 역시 종종 이런 딜레마에 빠진다.
아이의 지능이 60정도로 나왔다. 지적장애의 경계에서 또한 아이가 보이는 행동과 태도에서 학교 측은 결국 부모를 호출하였고 경계선상의 아이를 치료하며 관찰할 것을 권하였다. 아이엄마는 속상하다. 아이가 별나다는 것은 자신도 안다. 실은 재혼 후 각각 서로의 아이들을 데리고 시작한 가족이다. 자신이 낳아온 큰 아이는 두문불출 은둔형 거구가 되었다. 늘 방안에 처박혀 게임만 하고 식탐이 엄청나서 비대하다. 둘 사이에 늦둥이로 낳은 아들은 이제 중학교로 가는데 어딘가 이상하다. 모난 성격과 거친 언사는 사춘기까지 겹치면서 상대를 힘들게 한다. 아내는 못하겠다며 몇 번을 눈치를 보는데, 아이엄마는 그때마다 눈물로 호소한다. 아이를 받아주는 곳이 없다. 그러기를 벌써 7년째다. 초등학교 들어가면서 아내가 맡아온 일이라, 새삼 더는 못하겠다고 하기도 어렵다. 그렇다고 아이엄마에게 냉정해질 수도 없다. 거기에 자신도 수술 후 거동이 불편한 상태로 휠체어 생활이라, 요즘 많이 우울하다.
가정예배를 드리고 아내를 끌고 아파트 단지를 돌고, 카페라떼를 한 잔 마시면서 이런저런 말을 하였다. 축, 쳐져 있는 아내에게 뭐라 말하려 하자 듣기 싫어한다. 생각해보면 아내 한 사람이 혼자서 너무 많은 일을 맡아서 했다. 요즘은 아흔 살 장모를 아이들과 내가 서로 맡아서 누가 뭘 하고, 누가 뭘 하고, 하는 식으로 감당한다. 그래도 공부 중인 아들이 나서서 밥하고 빨래하고 집안일을 얼추 다 책임지는 편이라, 나는 그저 음식물쓰레기나 분리수거정도 쓰레기를 치우는 정도인데… 집안일이란 그야말로 말로만 듣던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일’이었다. 거기에 또 아이도 가르치고 고집이 남다른 아흔 넘은 친정엄마도 참견하고 챙겨야 하는 일이라…. 그러다 우울증 온다고 이런저런 말로 마음 강하게 먹자고 하는데, 듣기 싫다고 한다. 은행 심부름 겸 시장에도 들러야 해서 산책 삼아 혼자 걷다가 생각했다.
우리가 주의 뜻으로 산다는 일은, 주신 바 오늘의 이 모든 상황에서도 주를 바라며 무던하게 사는 것이다. 어디가 아프면 아픈 대로, 힘들면 힘든 대로, 그 또한 주가 더하시는 일이려니 하면서 주를 인정하는 마음으로,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요 6:39-40).” 하여 주께서 이르신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마 10:38).”
이에 자기 십자가란 오늘 내게 부여하신 이 모든 생활여건을 의미한다. 그런 가운데 주가 맡기신 한 날의 삶으로,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16:24).” 결국 나의 생각, 나의 판단, 나의 여건과 모든 사정을 부인하고… 즉 끝없이 일어나는 어떤 생각과 기준을 접어두고 주신 바 오늘의 상황 그대로 주를 인정하는 일. 곧 오늘 유다가 처한 현실에서 바벨론에 항복하고 저항하지 말 것을, 그래야 예루살렘 성도 자신들의 목숨도 부지할 수 있다는 말에 누군들 주의 말씀이면 따르겠나이다, 할 수 있겠나?
위의 이유로 이제 왕의 허락 하에 예레미야는 다시 토굴 속에 갇힌다. 이는 거기서 예레미야를 죽게 하려는 뜻이다. 시드기야는 예레미야가 하나님이 보내신 예언자임을 확신하였지만 그를 변호할 용기는 없다. 그는 예언자를 미워하는 무리들의 극성에 굴복하였다. “시드기야 왕이 이르되 보라 그가 너희 손 안에 있느니라 왕은 조금도 너희를 거스를 수 없느니라 하는지라(렘 38:5).” 그가 직접 가혹한 형을 내릴 수는 없었다. 여호야김이 통치할 때는 왕보다 방백들이 예언자들에게 호의적이었음을 앞서 우리는 보았다. “엘라단과 들라야와 그마랴가 왕께 두루마리를 불사르지 말도록 아뢰어도 왕이 듣지 아니하였으며 왕이 왕의 아들 여라므엘과 아스리엘의 아들 스라야와 압디엘의 아들 셀레먀에게 명령하여 서기관 바룩과 선지자 예레미야를 잡으라 하였으나 여호와께서 그들을 숨기셨더라(36:25-26).”
그러나 지금은 방백들이 더 예언자를 박해한다. 이것은 파멸이 신속히 무르익고 있다는 징조다. 왕이 만약 자신의 명예와 이익을 위한 일이었다면 방백들이 원하든 그렇지 않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왕의 위치라 설득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왕과 그의 선지자 때문이었으므로 시드기야는 이 일을 대처하는 데 비열하게 방백들의 손에 넘겼다. ‘왕은 조금도 너희를 거스를 수 없느니라’ 하고 사람들 눈치를 살핀다. 국민의 주권을 운운하면서 여론을 살피고 자신들의 자리를 보존하려 하는 오늘의 정치판도 같다.
결국 선지자 예레미야는 진흙 구덩이 우물에 갇혔다. 참혹한 현실이다. 주의 말씀을 전하였을 뿐인데, 그는 훗날에 이 날의 소회를 밝히듯 “여호와여 내가 심히 깊은 구덩이에서 주의 이름을 불렀나이다 주께서 이미 나의 음성을 들으셨사오니 이제 나의 탄식과 부르짖음에 주의 귀를 가리지 마옵소서 내가 주께 아뢴 날에 주께서 내게 가까이 하여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하셨나이다(애 3:55-57).” 곧 오늘의 이런저런 사정을 두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주의 이름을 부르는 일이다. 주께 아뢰며 주를 의지하는 길뿐이다. 어제 아내와 카페에 앉아 이런 권면을 잠깐 하였다.
우린 과연 무얼 붙들고 살아야 하는 것인가? 종종 나는 내 곁의 아픈 영혼들… 조현에 우울에 불안과 공황을 겪는 이들을 놓고 탄식할 때가 있다. 왜 늘 나는 ‘이런 사람들’만 상대해야 할까? 하는 신음소리로 주께 되묻기도 한다. 나 역시 하루 서너 번씩 안정제를 먹으면서 내 의지와 상관없는 몸의 증상과 감정에 시달리는 판국에, 자기 앞가림도 못하는 자에게 어쩌자고 이런 사람들로 씨름하게 하시는 것일까? 하고 나는 종종 주 앞에 입을 삐쭉거리며 울먹거린다. 그때면 들려주시는 말씀이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요 10:11-12).”
주가 나를 어찌 돌보시고 끝까지 사랑하시는가를, “내가 또 보고 들으매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 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으니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 큰 음성으로 이르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계 5:11-12).” 어제는 아내를 위로하다 내가 슬퍼졌다. 그런 가운데 아흔 넘은 장모나 아픈 아이엄마의 하소연을 안고 가야 하는 아내의 처지를 두고, 나는 천천히 시장으로 해서 은행에 들렀다가 마트에서 사라는 것을 주문시키고 돌아오는 내내 주님, 하고 주의 이름만 되뇌었다. 가뜩이나 딸애 결혼이 다가오면서 상견례도 해야 하고 아내는 무슨 한복도 맞춰야 하고… 어김없이 다가오는 시간으로 더 옥죄는 것 같다.
이럴 때 우리가 더 주를 바랄 것은,
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의 얼굴을 그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그가 울부짖을 때에 들으셨도다
(시 22:24).
하여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행 20:35).” 오늘 우리가 붙들고 살아야 하는 것에 대하여, 그냥 그렇게 염려와 근심으로 우울해할 것인지, 주를 온전히 바람으로 주 앞에 아뢰며 나아갈 것인지,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왕상 18:21).” 선택해야 한다.
훗날에
‘여호와여 내가 심히 깊은 구덩이에서 주의 이름을 불렀나이다. 내가 주께 아뢴 날에 주께서 내게 가까이 하여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하셨나이다.’
하는 고백으로 내 것이 되게 하시기를.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원수에게서 나를 건지시고
일어나 치려는 자에게서
나를 높이 드소서
(시 59:1).
우리가 주를 바람은,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니
그의 힘으로 말미암아 내가 주를 바라리이다
나의 하나님이 그의 인자하심으로
나를 영접하시며
하나님이 나의 원수가 보응 받는 것을
내가 보게 하시리이다
(9-10).
그리하여,
나는 주의 힘을 노래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르오리니
주는 나의 요새이시며
나의 환난 날에 피난처심이니이다
나의 힘이시여 내가 주께 찬송하오리니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며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
(16-1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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