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진실로 땅에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하리로다

하현. 2026. 1. 6. 04:48

 

시드기야 왕이 셀레먀의 아들 여후갈과 마아세야의 아들 제사장 스바냐를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보내 청하되 너는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라 하였으니 그 때에 예레미야가 갇히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 가운데 출입하는 중이었더라

렘 37:3-4

 

그 때에 사람의 말이 진실로 의인에게 갚음이 있고 진실로 땅에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하리로다

시 58:11

 

 

예루살렘이 포위당했다. 예레미야의 설교도 무시당했다. 시드기야가 고니야를 계승하여 왕위에 올랐다. 그는 그의 전임자들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한 치명적인 결과를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경고로 삼지 않고 앞서 간 다른 사람들과 같이 말씀을 무시했다. 여호와의 말씀은 이미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그와 그 신하와 그 땅 백성이 여호와께서 선지자 예레미야로 하신 말씀을 듣지 아니하였다.’ 마음이 강퍅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함을 보고도 자신에게 임하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므로 겸비해하지 않는다.

 

그런 가운데도 시드기야가 예레미야에게 기도를 요청한다. 이는 그의 안에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 마음이 있음을 엿보게 한다. 시드기야는 사자를 보내 ‘너는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라.’ 하고 전에도 부탁한 적이 있다.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말씀이 임하니라 시드기야 왕이 말기야의 아들 바스훌과 제사장 마아세야의 아들 스바냐를 예레미야에게 보내니라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우리를 치니 청컨대 너는 우리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라(21:1-2).”

 

그 중 한 사람인 스바냐는 그때와 지금에도 기용되었다. 시드기야는 기도를 부탁할 필요를 느끼고, 이런 점에서 그는 충분히 돌이킬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곧 하늘에 기업을 둔 백성과 사역자의 가치는 귀하다. 우리에게 곤경이 닥쳤을 때 우리의 선택은 기도를 무엇으로 정조준 하느냐 하는 데 있다. 기도의 가치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일이다. 그것에 자신을 맞추는 일이다. 그때에 우린 힘을 얻는다. “유다의 우두머리들이 마음속에 이르기를 예루살렘 주민이 그들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로 말미암아 힘을 얻었다 할지라(슥 12:5).”

 

고로 우린 무엇으로 사는가? 우리에게 주의 은총과 함께 간구하는 심령은 필연적이다.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슥 12:10).” 살면서 무얼 구하고 어떤 일에 애곡하고 간구할 줄 아는가, 하는 데서 삶의 지향점이 달라진다. 저마다의 간구가 다를 수 있다. 누가 기도를 부탁할 때면 모두가 자신의 요구에 따른 것이다. 여기서 시드기야는 자신을 정죄할 걸 알면서도 기도를 부탁하고 하나님의 뜻을 물은 셈이다.

 

예레미야의 기도가 자기와 백성들을 위하여 효력이 있음을 알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았고 또 예레미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지 않았다. 그는 예레미야의 훌륭한 기도를 원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자신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으로 이미 귀결된 답이 있었다. 흔히 우리의 신앙도 그와 같지 않은지? 원하는 바 그 요구는 이미 정해 놓고 하나님의 뜻보다 자신의 요구를 구하는 것에 기도라 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기도가 필요한 것은 기도하는 동안 주의 영이 우리의 심령을 감화시키실 것이다. 분명히 ‘주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 주가 함께 하신다’고 하셨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행 2:21, 롬 10:13).”

 

이를 묵상하고 또 읊조리는 것은,

 

주를 알지 아니하는 민족들과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는 나라들에게

주의 노를 쏟으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에게서

물러가지 아니하오리니 우리를 소생하게 하소서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시 79:6, 80:18).

 

곧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도 이미 은총은 부어졌다. 이를 깨닫고 돌이켜 주의 뜻을 따르는 일은 별개의 문제다. 오늘 여기 시드기야 왕도 주의 이름을 부르며 주의 뜻을 알고자 예레미야에게 기도를 부탁하였다. 그리고 저의 처우도 개선하였다. 그러면서 정작 주의 뜻을 받아들이는 데는 실패하였다. 이러한 본문을 묵상할 때면 새로운 각오가 생긴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시여 주 외에 다른 주들이 우리를 관할하였사오나 우리는 주만 의지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사 26:13).” 하는 우리의 다짐은 삶을 개선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하였느니라(딤후 2:19).”

 

잠깐 동안 애굽의 바로를 치려고 갈대아 군사들이 예루살렘 성에서 퇴진함으로 백성들은 들떴다. 당시 예레미야는 자유의 몸이었다. “그 때에 예레미야가 갇히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 가운데 출입하는 중이었더라(렘 37:4).” 이는 “너희를 도우려고 나왔던 바로의 군대는 자기 땅 애굽으로 돌아가겠고 갈대아인이 다시 와서 이 성을 쳐서 빼앗아 불사르리라(7-8).” 하는 비극적인 예언으로 돌아온다. 당시 바벨론은 시드기야의 배신을 알고 쳐들어오고, 애굽은 포위된 예루살렘을 구하기 위하여 군대를 파견하였다. 실상 바로는 여호야김 통치시에 느부갓네살에게 대패하고 재기불능의 상태에 있었다.

 

“애굽 왕이 다시는 그 나라에서 나오지 못하였으니 이는 바벨론 왕이 애굽 강에서부터 유브라데 강까지 애굽 왕에게 속한 땅을 다 점령하였음이더라(왕하 24:7).”

 

그래서 애굽군의 접근을 알고 갈대아군은 포위망을 풀었다. 아마도 이는 애굽군을 그들이 두려워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애굽군과 다른 먼 곳에서 싸우려는 작전이었다. 왜냐하면 유대의 군대가 애굽 군대와 합세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러한 정세에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이 안전해진 줄 알고 힘을 얻었다. 그들은 이제 적의 수중에서 벗어났고 폭풍은 고요해진 것으로 믿었다. 죄인들은 심판이 중단되거나 서서히 진행됨으로 오는 안정을 마치 결과로 안다.

 

일련의 내란재판에서도 보면 그렇고 더 나아가 어제그제 미국이 베네수엘라를 치면서 강국의 면모를 보여주는 데서도 느껴진다. 과연 이 시기가 얼마쯤 지속될까? 곧 그 끝이 보이는 듯하여 나는 오늘의 승리나 정막이 두렵다. 그런 가운데 예레미야의 예언이 귀에 들리는 듯하다. 곧 예루살렘은 다시 갈대아 군의 재침을 받아 파괴당할 것이다. 시드기야는 갈대아 군대가 재침하지 않도록 기도해 줄 것을 예레미야에게 요청하나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뜻이 이미 결정되었음을 알린다. 그들의 평화를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쟁론을 시작하셨고 시작하신 이상 끝장을 보실 것이다.

 

기다림은 기회다. 기회가 있다는 것은 어쨌든 복이다. 그럴 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진정으로 용서를 구한다면 어떨까? 그게 근데 그렇게 안 된다. 근시안적인 우리의 판단은 당장의 지연이나 정지가 끝인 것처럼 여긴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는 스스로 속여 말하지 말라’ 하고 강하게 경고하심이다. 스스로 속이는 자가 되어 자신을 파괴하는 것이 죄의 속성이다. 오늘의 여러 주장과 각자의 입장을 들여다보면 그 속내가 다 보이는 데서 자신은 모른다. 마치 자기 얼굴을 자기만 못 보는 아이러니한 현상 같다. 모든 주장이 한계가 있다.

 

하나님이 하신 말씀은 반드시 정한 때가 있음을 성경은 누차 강조한다. 특히 이사야는 여러 차례 경고하여,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 우리가 듣는 것을 저들에게 보여줄 수 있다면,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들의 신과 피 묻은 겉옷이 불에 섶 같이 살라지리니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9:5-6).”

 

그러므로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11:3-5).”

 

하실 때,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42:2-4).”

 

이를 오늘 우리가 앙망하여 사는 것으로 신앙이다. 할 때,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1).”

 

이에 당사자인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7-18).”

 

하여,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눅 1:37).”

 

결국 오늘 시드기야의 경우에서도 보면 믿음으로 순종이 결여된 기도는 허사요 허망한 결과일 뿐이다. 예수님과 함께 할 때 제자들은 이를 깨우쳤다.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눅 5:5-6).” 우리의 신앙이란 그런 것으로,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행할 뿐이다. 당장의 결과는 생각 같지 않다 해도, 우리는 언제나 “말씀에 의지하여” 사는 사람들이다.

 

이에,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약 1:6-7).”

 

설령 우리가 구한 것과 다른 결과로 현실이 돌아가는 것 같다해도, 정작 아브라함의 약속의 씨로 이삭 하나를 간신히(?) 얻은 게 전부다. 모세는 결국 약속의 땅 가나안을 지척에 두고 하나님이 이를 허락하지 않으심으로 단념하였다. 바울은 여러 번 기도하였으나 지금의 은혜가 네게 족하다는 말씀에서 오히려 ‘약한 데서 그리스도의 능력을 찾았다.’ 그렇듯 많은 믿음의 사람들은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히 11:39).” 그런 가운데서 어찌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었을까?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40).”

 

‘더 좋은 것’ 우리의 본향과 영원한 안식을 사모할 수 있는 게 복이다. 그러할 때 우리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란 데서 안도하고 새 힘을 얻는다. 할 때,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

그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의 소원을 이루시며

또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사 구원하시리로다

(시 145:18-19).

 

오늘 시드기야와 그 주변의 사람들을 보면서 저들의 기대와 번복과 자신들 판단으로 사는 일에 있어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는 스스로 속여 말하기를 갈대아인이 반드시 우리를 떠나리라 하지 말라 그들이 떠나지 아니하리라(렘 37:9).” 오늘 본문의 말씀이 이 현실의 여러 국면을 보게 하시면서 우리로 듣게 하신다.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고 오늘의 상황이 일시적일 뿐인 것을. 이를 직시하고 직고할 때, “예레미야가 이르되 거짓이다 나는 갈대아인에게 항복하려 하지 아니하노라 이리야가 듣지 아니하고 예레미야를 잡아 고관들에게로 끌어 가매 고관들이 노여워하여 예레미야를 때려서 서기관 요나단의 집에 가두었으니 이는 그들이 이 집을 옥으로 삼았음이더라(14-15).”

 

현실은 우릴 위협하나,

 

통치자들아 너희가 정의를 말해야 하거늘 어찌 잠잠하냐

인자들아 너희가 올바르게 판결해야 하거늘 어찌 잠잠하냐

아직도 너희가 중심에 악을 행하며

땅에서 너희 손으로 폭력을 달아 주는도다

(시 58:1-2).

 

오늘 우리가 사는 현실과 그들 개개인의 사정이 들려준다. 누가 누구를 뭐라 하기에 앞서 이를 보면서 나 자신이 주를 더욱 경외함으로 복이다. 그러므로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그들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그들의 일을 돌보시오며 주께 범죄한 주의 백성을 용서하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이제 이 곳에서 하는 기도에 눈을 드시고 귀를 기울이소서(대하 6:39-40).” 우린 기도할 뿐이라,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주께서 혹시 마음과 뜻을 돌이키시고 그 뒤에 복을 내리사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소제와 전제를 드리게 하지 아니하실는지 누가 알겠느냐(욜 2:12-14).”

 

이에 오늘에 우리의 악함을 두고 아뢴다.

 

하나님이여 그들의 입에서 이를 꺾으소서

여호와여 젊은 사자의 어금니를 꺾어 내시며

그들이 급히 흐르는 물 같이 사라지게 하시며

겨누는 화살이 꺾임 같게 하시며

소멸하여 가는 달팽이 같게 하시며 만삭 되지 못하여

출생한 아이가 햇빛을 보지 못함 같게 하소서

(6-8).

 

우리 곁의 악을 물리치심으로,

 

가시나무 불이 가마를 뜨겁게 하기 전에

생나무든지 불 붙는 나무든지

강한 바람으로 휩쓸려가게 하소서

(9).

 

우리로는 주의 도우심으로 만이 살 길이다.

 

그 때에 사람의 말이 진실로 의인에게 갚음이 있고

진실로 땅에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하리로다

(1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