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이는 네가 나를 믿었음이라

하현. 2026. 1. 8. 04:48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그 날에 너를 구원하리니 네가 그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지 아니하리라 내가 반드시 너를 구원할 것인즉 네가 칼에 죽지 아니하고 네가 노략물 같이 네 목숨을 얻을 것이니 이는 네가 나를 믿었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시더라

렘 39:17-18

 

우리를 도와 대적을 치게 하소서 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니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하게 행하리니 그는 우리의 대적을 밟으실 이심이로다

시 60:11-12

 

 

결국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이 함락되는 날까지 시위대 뜰에 머물렀다. 그런 가운데도 말씀을 계속 전하였고 백성들을 더 이상 불안하게 하지 않았다. 또 방백들도 그를 더 이상 박해하지 않았다. 그는 할 말을 다 했으므로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바벨론의 포위는 신속하게 진행되었고 성은 일격에 함락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그토록 경고하셨고 대비하게 하셨음에도, 시드기야 9년 10월 곧 깊은 겨울에 성은 느부갓네살의 손에 무너졌다. 저는 이를 흡족하게 여기며 돌아갔고 그의 장군들만 남아 진을 치고 있었다.

 

시드기야 제 11년 4월 9일 때는 한여름쯤 밤에 성은 결국 함락당했다. 그들은 성으로 입성하였다. 이스라엘 군대는 쇠약해졌고 식량도 떨어져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였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이 성에 머무는 자는 칼과 기근과 전염병에 죽으리라 그러나 갈대아인에게 항복하는 자는 살리니 그는 노략물을 얻음 같이 자기의 목숨을 건지리라(2).” 이를 두고 설상가상(雪上加霜)이라 한다. 눈이 퍼부었는데 그 위에 다시 서리가 내린 형국이 되었다.

 

예루살렘은 난공불락의 천혜의 요새였다. 이를 다윗이 빼앗아 수축하고 누구도 그 성으로 함부로 들어올 수 없었다. 사람들은 이를 자긍하였다. “대적과 원수가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갈 줄은 세상의 모든 왕들과 천하 모든 백성이 믿지 못하였었도다(애 4:12).” 그러나 그들의 죄로 하나님은 진노하셨고 하나님의 보호가 풀리면서 난공불락의 성(成)도, 삼손이 머리가 밀린 후 맥을 못 춘 것 같이 약해졌다. 그렇게 바벨론 왕의 방백들이 중문을 점령하였다. “바벨론의 왕의 모든 고관이 나타나 중문에 앉으니 곧 네르갈사레셀과 삼갈네부와 내시장 살스김이니 네르갈사레셀은 궁중 장관이며 바벨론의 왕의 나머지 고관들도 있더라(렘 39:3).”

 

중문은 제 2의문으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어문에서는 부르짖는 소리가, 제 이 구역에서는 울음 소리가, 작은 산들에서는 무너지는 소리가 일어나리라(습 1:10).” 성의 중간을 가로질러 세워진 벽 사이에 있는 문이었다. 결국은 “바벨론의 왕이 립나에서 시드기야의 눈 앞에서 그의 아들들을 죽였고 왕이 또 유다의 모든 귀족을 죽였으며 왕이 또 시드기야의 눈을 빼게 하고 바벨론으로 옮기려고 사슬로 결박하였더라(렘 39:6-7).” 이 꼴을 당하기까지 저들은 자만하였고 스스로들 자신들이 옳다고 그토록 주의 종을 박해하였다.

 

그에 따른 결국은 “사령관 느부사라단이 성중에 남아 있는 백성과 자기에게 항복한 자와 그 외의 남은 백성을 잡아 바벨론으로 옮겼으며 사령관 느부사라단이 아무 소유가 없는 빈민을 유다 땅에 남겨 두고 그 날에 포도원과 밭을 그들에게 주었더라(9-10).” 일부는 잡혀가고 일부는 남겨졌다. 저들은 <중문>에 앉아 성을 내려다보며 명령을 내린다. 방백들의 이름이 본문에 나온다. 그런데 그 이름들이 거칠고 상스럽다. 거기에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과 관계있는 뜻을 지닌 ‘엘리야김, 힐기야’란 이름을 지닌 사람들이 앉아 있다. 그런데 지금은 이방신의 이름과 관계있는 뜻을 지닌 ‘네르갈레셀, 삼갈르보’ 등의 이름을 지닌 자들이 앉았다. 죄가 얼마나 슬픈 결과를 초래하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제 예레미야가 오랫동안 예언한 것 즉 북쪽 왕국의 족속들이 몰려와 예루살렘 문 입구마다 버티고 앉아 있으리라던 말씀이 이루어졌다. “내가 북방 왕국들의 모든 족속들을 부를 것인즉 그들이 와서 예루살렘 성문 어귀에 각기 자리를 정하고 그 사방 모든 성벽과 유다 모든 성읍들을 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 1:15).” 이 일이 이루어지기까지 수없이 많이 돌이킬 수 있는 기회와 돌아올 수 있는 상황을 마련하시고 기다리셨다. 그러다 이처럼 이방 신상들이 세워지던 곳에 이방의 방백들이 점령하였다는 것은 어찌 보면 마땅한 결과이다.

 

시드기야는 성문마다 점령하여 지키고 있는 바벨론 왕의 방백들에게 들킬까 변장을 하고 그의 안전을 도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시기를 틈타 죄책감과 두려움을 안고 성을 벗어났다. 어두움뿐이었고 아무도 그를 보호할 수 없었다. “유다의 시드기야 왕과 모든 군사가 그들을 보고 도망하되 밤에 왕의 동산 길을 따라 두 담 샛문을 통하여 성읍을 벗어나서 아라바로 갔더니(39:4).” 그렇게 그는 바벨론 군사에 발견되고 체포되었다. 그는 나름의 최선의 길을 택하였지만 도망가지 못했고, 여리고 평원에서 추격자들의 손에 사로잡혔다.

 

바벨론 왕은 시드기야를 반역자로 심판하였고, 사형이 언도되지는 않았지만 자식들이 눈 앞에서 죽는 꼴을 목격하였고, 그 눈까지 뽑혀져서 끌려갔다. 당시 시드기야는 불과 32세의 나이였다. 자녀들은 어렸을 것이고 그 중에는 갓난아기도 있었을 것이다. 어린 자녀들이 그처럼 무참히 살해되는 것을 보는 눈과 그 눈마저 뽑혀지는 일은 참으로 잔인한 결과이다. 그러나 이 일은 앞에서도 경고되었고 돌이킬 수 있는 기회는 있었다. “네 아내들과 자녀는 갈대아인에게로 끌려가겠고 너는 그들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바벨론 왕의 손에 잡히리라 또 네가 이 성읍으로 불사름을 당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38:23).”

 

또한 느브갓네살은 유다의 모든 귀족들을 죽였다. “바벨론의 왕이 립나에서 시드기야의 눈 앞에서 그의 아들들을 죽였고 왕이 또 유다의 모든 귀족을 죽였으며(6).” 저들은 당대 권력을 누리던 자들이었고 선지자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던 이들이었다. 이 막다른 골목에서 이 일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지방의 유지들도 포함되었다. 그런 뒤 “왕이 또 시드기야의 눈을 빼게 하고 바벨론으로 옮기려고 사슬로 결박하였더라(7).” 하나님의 말씀에 눈을 감았던 그는 결국 필요 없는 눈이 뽑히었다. 저는 이제 남은 일생을 어둠 속에서 살게 되었다. 우리의 무지(無知), 무각(無覺), 무인(無認)함으로 사는 동안 흑암(黑暗) 중에 왕래하는 자들 같이 되었다.

 

그들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여

흑암 중에 왕래하니 땅의 모든 터가 흔들리도다

(시 82:5).

 

죄란 결국 말씀을 대할 때 눈 감고, 귀 닫고, 이를 느끼지 못함으로 이러한 결과를 초래하였다. 바벨론 왕은 시드기야를 죽이지는 않고 바벨론으로 끌고 갔다. 이를 위해 ‘두 개의 구리 사슬로 그를 묶었다.’ 거기서 그는 이제 남은 일생을 비참하게 보내야 한다. 이 모든 비극적인 이야기는 앞서 이미 다 밝히고 경고하고 예언하여 전해준 말씀에 있었다. 이를 저들은 듣지 않았고 오히려 기분 상해하며 전하는 자를 가두거나 죽였다. “그 성벽이 파괴되매 모든 군사가 밤중에 두 성벽 사이 왕의 동산 곁문 길로 도망하여 갈대아인들이 그 성읍을 에워쌌으므로 그가 아라바 길로 가더니 갈대아 군대가 그 왕을 뒤쫓아가서 여리고 평지에서 그를 따라 잡으매 왕의 모든 군대가 그를 떠나 흩어진지라(왕하 25:4-5).”

 

성경은 예언의 말씀이다. 이를 무시하고 저마다 무슨 점을 보고 앞날에 대해 듣고자 하여 무속을 따라간다. 타로가 요즘은 유행처럼 번졌다. 같은 건물의 몇 곳에도 타로 점을 보는 곳이 있고 심지어 이를 배우려는 수강생도 모은다. 어디 철학관도 있고 새로운 형태의 무당, 무속인들의 세련된(?) 변모로 거부감도 없이 많은 이들이 여기에 관심을 둔다. 젊은이들이 이리로 끌려간다. 결국 얼마 안 있어 성은 불탔다. 성전 궁전 등 모든 것이 불타고 성벽은 무너졌다. “갈대아인들이 왕궁과 백성의 집을 불사르며 예루살렘 성벽을 헐었고(8).” 기어코 멸망의 순간이 다가왔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마 23:37).”

 

주께서 절규하셨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눅 13:34).”

 

그렇게 남은 백성들은 바벨론으로 잡혀갔다. “사령관 느부사라단이 성중에 남아 있는 백성과 자기에게 항복한 자와 그 외의 남은 백성을 잡아 바벨론으로 옮겼으며(9)” 이제 그들은 조국의 그 아름다운 땅과 그 안에 있는 소유를 더는 누릴 수 없다. 다만 이제 짐승들처럼 정복자들에 의해 끌려가야 했다. 정복자들은 그들의 포악한 주인이 되었다. 낯선 땅에서 그들은 정복자들의 처분만 바랄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들은 가혹하게 그들을 혹사할 자들이었다. 폭군(Tryrant)이란 단어는 본래 갈대아에서 유래한 것이다. 군주란 단어 대신 갈대아의 일상어로 사용되었다. 이 말은 그들이 주인 노릇을 할 때 다른 누구보다 난폭하리라는 것을 짐작케 한다.

 

유대인들 소수의 무리가 유대 땅에 남아 있었는데, 그들은 아무 것도 잃을 것이 없고, 저항할 필요도 없는 ‘가난한 백성들’이었다. 그들은 자유로웠고 고향에 남아있을 수 있었다. 또한 시위대장은 그들에게 그들이 전에는 주인이 되리라 꿈도 못 꾸었던 포도원과 밭을 주었다. “사령관 느부사라단이 아무 소유가 없는 빈민을 유다 땅에 남겨 두고 그 날에 포도원과 밭을 그들에게 주었더라(10).” 이는 참 오래 묵상하게 한다. 변화막측(變化莫測)한 하나님의 섭리에 입이 저절로 벌어지는 것 같다.

 

어떤 이들은 몰락하고 포로로 끌려가는데 어떤 이들은 졸지에 벼락부자가 되었다! 기록되기를 ‘배고픈 자는 맛있는 것으로 배불리 먹고, 부자는 빈 손으로 돌아가리라’ 함과 같이 되었다. 어떤 이들의 멸망은 어떤 이들의 출세를 시사한다. 그러므로 풍성할 때는 ‘기뻐하되 기쁘지 않는 자처럼 하고’, 곤경에 처해서 ‘눈물이 흐를 때도 울지 않는 자처럼 해야 한다’고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고전 7:30-31).”

 

건방을 떨고 교만해하다 그 결과가 어찌 되는가를 본문은 처절하게 보여준다. 곧 행위대로 갚으시는 하나님의 섭리 앞에서 우리는 두려운 줄 알아야 한다. 모 회사 대표가 직원들을 폭행하는 사건으로 사회가 어지럽다. 결국 미국 본사에서 저와의 계약을 파기하였고, 저는 거만함과 폭력으로 재판을 받게 될 신세가 되었다. 권력이란 무상(無常)하여 있다가도 없는 것인데 4년짜리 국회의원도 권력이라고, 5년짜리 대통령으로 나라를 뒤집어보겠다고 다들 저 난리다. 이제 그들의 불의는 처벌이 내려졌고, 반면 가난한 자들은 인내심 있는 고통으로 모든 걸 거저 얻었다. 그 보상은 그들의 억울함을 보상하고도 남는 것이다. 곧 ‘진실로 하나님은 계셔서 세상을 심판하신다’는 원리가 세상 이치에서도 보여주며 경고된다.

 

심판이 있는 가운데서도 긍휼은 나타난다. 예레미야에게 베풀어진 은혜로운 섭리는 우리로 이를 알게 한다. 예루살렘이 파멸되고 모든 사람들의 마음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을 때 예레미야는 그의 구속이 가까워움을 보고 용기를 얻어 머리를 들었다. 예루살렘의 제 2의 파멸이 가까웠을 때 그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였다. 예레미야는 목놓아 설교하였다.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주민이 그 분향하는 신들에게 가서 부르짖을지라도 그 신들이 그 고난 가운데에서 절대로 그들을 구원하지 못하리라(렘 11:12).”

 

그런 가운데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예레미야를 보살펴 주라는 특별한 명령을 내렸다. 또한 그를 정중히 대하게 명하였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예레미야에 대하여 사령관 느부사라단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그를 데려다가 선대하고 해하지 말며 그가 네게 말하는 대로 행하라(렘 39:11-12).” 그러자 느브사라단과 베벨론 왕의 모든 장관들이 이 명령을 엄수하여 그를 옥에서 풀어 주고 온갖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이에 사령관 느부사라단과 내시장 느부사스반과 궁중 장관 네르갈사레셀과 바벨론 왕의 모든 장관이 사람을 보내어 예레미야를 감옥 뜰에서 데리고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에게 넘겨서 그를 집으로 데려가게 하매 그가 백성 가운데에 사니라(13-14).”

 

느부갓네살의 관대한 처사는 오만한 군주의 알량한 선처다. 이 가련한 예언자를 폭군은 호의로 보살폈다. 일찍이 정탐꾼들로부터 예언자에 관한 정보를 들었을 것이다. 예언자가 왕과 백성들을 종용하여 자기에게 항복하라고 하였고, 유다와 다른 나라들을 바벨론 왕이 쳐부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는 사실을 말이다. 비록 예언자가 바벨론도 결국은 망하리라고 예언하였다는 말을 들었겠지만 느부갓네살은 당시 개의치 않았고, 특별한 호의를 표시하듯 가장 천한 자의 봉사와 고통을 보살피듯 갇힌 예레미야를 풀어주었다. 성을 점령하기도 전에 왕이 이러한 명을 내린 것과 방백들은 치열한 전투 중에서 이 명을 준수해애 했다! 유다 왕 시드기야와 이스라엘 방백들이 당한 치욕에 대해서, 상대적으로 예레미야를 옥에 집어넣었던 사실이 중첩되며 인생사다홍치마란 말이 떠오른다.

 

하나님의 백성과 그의 사역자들은 자칭 거룩한 성에 속해있다는 자들보다 이교도들에게 더 공정하고 친절한 대접을 받는 것은 아이러니하나 역사적으로도 흔히 있는 일이었다. 가령 바울도 대제사장 아나냐보다는 로마의 왕 아그립파에게 더 큰 은혜를 입고 공정한 심판을 받았다. 그러니 하나님을 몰라서 무지한 게 아니라 그 아는 것을 무시함으로 무지한 자들보다 어리석은 결과를 얻는 것이다. 예레미야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그의 수고를 보상하셨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내가 진실로 네 대적으로 재앙과 환난의 때에 네게 간구하게 하리라’고 약속하였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를 강하게 할 것이요 너에게 복을 받게 할 것이며 내가 진실로 네 원수로 재앙과 환난의 때에 네게 간구하게 하리라(15:11).”

 

예레미야는 예언자로서 그의 사명에 충성하였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약속하신 대로 저를 안전히 보호하셨다. 수천 명이 칼날에 쓰러져 죽임을 당하고, 끌려가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저를 보호하셨다. 상대적으로 자신은 안전하다고 주장하며 옳다고 외치던 거짓 선지자들은, 자신들에게는 결코 임하지 않으리라던 심판으로 죽임을 당하였다. “그러므로 내가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내 이름으로 예언하여 이르기를 칼과 기근이 이 땅에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는 선지자들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노라 그 선지자들은 칼과 기근에 멸망할 것이요(14:15).”

 

오늘 본문으로 다시금 확신하는 바, 말씀은 이루어진다. 이 경고의 말씀을 듣고 돌이켜 주 앞에 회개하지 않으면 어림없다. 또한 에벳멜렉이 받은 보답은 그가 예레미야에게 친절을 베푼 보상을 받은 것이다. 예레미야는 에벳멜렉이 자기에게 보인 친절에 감사하고 자기대신 하나님이 갚아 주실 것을 구했다. 에벳멜렉은 ‘예언자의 이름으로 예언자를 구하였으므로 예언자의 상을 받았다.’ “너는 가서 구스인 에벳멜렉에게 말하기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말씀에 내가 이 성에 재난을 내리고 복을 내리지 아니하리라 한 나의 말이 그 날에 네 눈 앞에 이루리라… 내가 그 날에 너를 구원하리니 네가 그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지 아니하리라렘 내가 반드시 너를 구원할 것인즉 네가 칼에 죽지 아니하고 네가 노략물 같이 네 목숨을 얻을 것이니 이는 네가 나를 믿었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시더라(16-18).”

 

하나님은 그토록 오랫동안 경고하셨다. 예루살렘에 임할 것을 에벳멜렉에게 알게 하셨다. 그는 예레미야가 참된 예언자라는 많은 증거를 받았다. 에벳멜렉은 닥쳐 올 심판에 대해 두려워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용감했다. 에벳멜렉이 재난을 피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내가 너를 구원하리니’ 또 ‘내가 단정코 너를 구원할 것인즉’ 하는 말씀이 반복된다. 그는 하나님의 예언자를 구덩이에서 구출하였고 돌보았다. 그러므로 ‘네가 예레미야의 생명을 구한 것은 잘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네 생명이 노략물을 얻음같이 되리라’ 하고 이를 이루셨다.

 

우리는 주 앞에 아뢰고 구하여야 한다. 역사적으로나 상황적으로 갈대아인에게 항복하라는 예레미야의 증거가 당대의 사람들에게 어찌 들렸을지, 비난받아 마땅할 수 있다. 우리의 판단으로는 마치 매국노 같은 발상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근본은 저들의 우상숭배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거역한 데 따른 죄의 결과이다. 이를 호도하고 어처구니없이 애국을 강조하는 처사는 역겹다. 오늘 본문은 우리의 현실을 직시하게 한다. 처한 상황으로 전부가 아니다. 그 근본적인 원인을 인정하고 주 앞에 돌이켜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버려 흩으셨고

분노하셨사오나 지금은 우리를 회복시키소서

주께서 땅을 진동시키사 갈라지게 하셨사오니

그 틈을 기우소서 땅이 흔들림이니이다

(시 60:1-2).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하심 앞에서 무얼 할 수 있을까? 다만,

 

주를 경외하는 자에게 깃발을 주시고

진리를 위하여 달게 하셨나이다 (셀라)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를 건지시기 위하여

주의 오른손으로 구원하시고 응답하소서

하나님이 그의 거룩하심으로 말씀하시되

내가 뛰놀리라 내가 세겜을 나누며

숙곳 골짜기를 측량하리라

(4-6).

 

고로,

 

우리를 도와 대적을 치게 하소서

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니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하게 행하리니

그는 우리의 대적을 밟으실 이심이로다

(11-1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