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

하현. 2026. 1. 9. 03:49

 

예레미야가 미스바로 가서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에게로 나아가서 그 땅에 남아 있는 백성 가운데서 그와 함께 사니라

렘 40:6

 

내 마음이 약해 질 때에 땅 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이심이니이다

시 61:2-3

 

 

‘말씀이 여호와께로서 예레미야에게 이르니라’는 내용은 “십일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42:7).” 하는 것으로 뒤에 이어진다. 본문은 예레미야도 잡혀 사슬로 결박되어 가다가 그다랴와 머물게 된 정황을 설명하고 있다. 그다랴는 유다 총독으로 “예레미야가 아직 돌이키기 전에 그가 다시 이르되 너는 바벨론의 왕이 유다 성읍들을 맡도록 세운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에게로 돌아가서 그와 함께 백성 가운데 살거나 네가 옳게 여기는 곳으로 가거나 할지니라 하고 그 사령관이 그에게 양식과 선물을 주어 보내매(40:5).” 하는 내용으로 이해를 돕는다.

 

이를 결정하는 것은 “사령관 느부사라단이 예루살렘과 유다의 포로를 바벨론으로 옮기는 중에 예레미야도 잡혀 사슬로 결박되어 가다가 라마에서 풀려난 후에 말씀이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1).” 그리 이루어졌다. 여기 ‘라마’는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약 8km 떨어진 곳이다. 포로들은 여기에 집결되어 수용되었다가 바벨론으로 보내지게 되었다. 예레미야도 다른 포로들과 마찬가지로 사슬에 묶여 이곳에 있었다. 이는 분명 포로들을 취급하는 데 있어 어떤 잘못이 있었음을 뜻한다.

 

느부갓네살은 예레미야에 대해 상당한 대우를 해주라고 명령했다. 그 명령에 따라 예레미야는 이미 석방 되었다(39:11-14). 그러나 예루살렘에서 유다인들을 잡아들이는 책무를 맡았던 병사들의 착오로 예레미야도 포로로 잡혔으며, 다른 포로들과 함께 바벨론으로 끌려가기 위해 사슬에 묶여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어 있었다. 그러나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이 그를 발견했다. 그는 즉시 예레미야를 석방했다. 느부사라단은 예루살렘 파괴 이후 한 달 만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그 성에 대한 파멸을 더욱 철저히 시행하였고 포로들을 끌어가는 대열을 조직하였다(왕하 25:8-12).

 

말씀이 여호와께로서 예레미야에게 임하였다는 것은 오늘 본문에서는 명문화된 내용이 없다. 곧이어 느부사라단의 입을 통해 전달되는 예레미야의 설교가 소개된다. 느부사라단의 입에서 나온 내용과 이어지는 사건들이 본문에 언급된 ‘여호와의 말씀’에 있어 서론에 해당하는 셈이다(말씀이 임하니라). 본문은 말씀이 꼭 예언의 말씀 자체라기보다 역사적 사건을 통한 계시적 메시지라는 측면으로 이해된다.

 

본문에서 느부사라단의 신앙 표현이 드러난다. “사령관이 예레미야를 불러다가 이르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곳에 이 재난을 선포하시더니 여호와께서 그가 말씀하신 대로 행하셨으니 이는 너희가 여호와께 범죄하고 그의 목소리에 순종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이제 이루어졌도다 이 일이 너희에게 임한 것이니라(2-3).” 곧 이방의 저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졌음을 인정하고 있다. 바벨론 당국은 유다의 종교에 대한 정보를 사전에 수집하였다. 특히 바벨론에 항복하라는 메시지를 선포한 예레미야에 대해 익히 알고 있었다. 따라서 본 구절에서 느부사라단은 예레미야의 메시지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즉 ‘너희가 여호와께 범죄하고’ 그래서 오늘의 이런 일이 임한 것 이니라, 하는 것으로 갈대아인의 군대 장군인 느부사라단이 예레미야가 선포한 말씀을 알고 있었다는 게 놀랍고, 이를 다시 그의 입으로 인정하는 것도 의미 있다. 그런 뒤 예레미야를 인정하는 것은 물론 살려주며 ‘네 손의 사슬을 풀어 너를 해방하노니’ 하고 그의 뜻대로 행하도록 협조하고 있다. “보라 내가 오늘 네 손의 사슬을 풀어 너를 풀어 주노니 만일 네가 나와 함께 바벨론으로 가는 것을 좋게 여기거든 가자 내가 너를 선대하리라 만일 나와 함께 바벨론으로 가는 것을 좋지 않게 여기거든 그만 두라 보라 온 땅이 네 앞에 있나니 네가 좋게 여기는 대로 옳게 여기는 곳으로 갈지니라 하니라(4).”

 

예루살렘이 함락되면서 이후 몇 년 사이에 발생하였던 사건들과 예언들을 다루며(39-45장) 연속적으로 전달하시는 말씀을 뒤따르게 된다. 여기서 예루살렘의 함락과 시드기야의 수욕 및 백성들의 바벨론 포수와 빈민들의 잔류에 대해 보았고, 이어 2차에 걸친 예레미야 석방과 삽입 구스인 에벳멜렉에 대해 기록하였다. 이어 오늘 본문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군대장관 느부사라단이 예루살램 왕궁 시위대 뜰에 연금되어 있다가 정확하게 알 수 없는 이유로 바벨론에 포로들 사이에 끌려가던 예레미야를 라마에서 발견하였다. 그리고 그에게 자신의 거취를 결정할 수 있는 자유를 주고 있는 것이다.

 

예레미야는 미스바에 머물고 있던 그다랴에게로 가서 그 땅에 남아 있던 백성들과 합류한다. “예레미야가 미스바로 가서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에게로 나아가서 그 땅에 남아 있는 백성 가운데서 그와 함께 사니라(6).” 느부갓네살이 예레미야를 석방하고 선대하게 한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였다. 하나님의 섭리에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우연’과 ‘마침내’의 어느 지점이 있다. 이를 통하여 하나님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우연 속에 감추시고 마침내 가운데 드러내시는 것을 본다. 곧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잠 25:2).”

 

사실 우리는 ‘우연’이 지나서야 ‘필연’을 알 수 있다. 필연은 그럴 수밖에 없는 일로 ‘틀림없음’이다. 이를 알지 못할 때는 언제나 누구라도 긴가민가하다 회의하고 갈등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다 누구는 이루어지는 확신이 들고 누구는 이내 곁길로 지나 세상으로 간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는 ‘믿음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다. 더러는 말도 안 될 때 믿음으로밖에 달리 받을 수 없다. 고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 하심도 그렇다. 현실적으로는 말씀을 알 수 없다. 타당하지 않고 상식적이지 못하다. 그런 가운데 오늘도 바벨론의 장군이 예레미야를 인정하고 그에게 자유를 부여하는 것이 놀랍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유다 왕과 백성들에게 바벨론에 항거하지 말고 항복하라고 권고하였다. 그것에 대해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예레미야를 친바벨론주의자로 간주하였을 것이다. 이에 따른 에벳멜렉 구원 예언은 내용 전개상 그가 예레미야를 구출한 사건으로 나온다. “왕궁 내시 구스인 에벳멜렉이 그들이 예레미야를 구덩이에 던져 넣었음을 들으니라 그 때에 … 에벳멜렉이 왕궁에서 나와 왕께 아뢰어 이르되… 그들이 그를 구덩이에 던져 넣었으니 그가 거기에서 굶어 죽으리이다 하니, 왕이 구스 사람 에벳멜렉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는 여기서 삼십 명을 데리고 가서 선지자 예레미야가 죽기 전에 그를 구덩이에서 끌어내라(38:7-10).”

 

결국 바벨론에 친화적이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랐을 뿐이다. 상대적으로 말씀을 거역한 시드기야와 유다 고관들의 운명은 구스인이면서도 하나님을 경외한 에벳멜렉의 운명을 보다 극명하게 대조하게 한다. 곧 오늘 이러한 말씀을 연이어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우리가 어떠한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를 돌아보게 한다. 우리의 판단과 기준, 특히 신앙처럼 여겨지는 신념의 한계가 결국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요인인 것을 새삼 되새기게 된다. 즉 우린 종종 사회적 위신과 사람들의 시선, 보편적인 진리로 눈이 가려지고 귀가 막힘으로 자신들의 신념을 절대적인 신앙으로 붙들려는 잘못에 처하게도 된다는 사실이다.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를 의뢰하는 자의 궁극적인 운명을 확인할 수 있다. 실로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고 그의 말씀을 거부하는 자는 당장은 형통한 듯 보인다 해도, 결국은 멸망이며 수치일 뿐임을 듣는다. 동시에 하나님을 의뢰하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는 당장은 고난을 당하고 형통하지 못한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의 은혜와 보호하심 아래 궁극적으로는 구원과 참된 복을 누리게 된다는 사실을 본다. 이는 이 땅에서 뿐 아니라 내세에서도 일치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편지하기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빌 1:22-23).” 곧 당장의 이런저런 현실로 비추어보면 실의에 빠질 수밖에 없어서, 우리가 산 자와 죽을 자 사이에 끼어 있는 동안에 천국을 사모함은 당연하다. 그럼에도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24).” 하면서 자신의 사역에 확신을 가지고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25-26).” 곧 우리가 오늘도 살아서 사는 동안에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게 사명이었다. 하여 이 아름다운 고백이 언제나 나를 붙드신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숱하게 들으며 자랐을 이 말씀인데, 기어이 목사고시를 통과하고 안수식을 앞두고 며칠 집회를 할 때 예비 목회자들 사이에 앉아 말씀을 듣고 찬양을 하면서 나는 뜨겁게 울었다. 그때의 눈물이 나로 하여금 이 말씀으로 위로를 삼게 하였다. ‘사나 죽으나’ 나로 이처럼 주 앞에 세우시려 하신 데 따른 하나님의 섭리를 다는 확신할 수 없었다 해도 ‘주의 것이라’는 것에 안도하고 안심하였다. 그때의 황홀함은 눈물로만 적셔져서 흘러내렸다. 누구나 그랬을 테지만 나는 그때 나 같은 게 뭐라고… 날 왜 이렇게까지 부르시고 세우시고 여기까지 인도하시는가? 감격스러울 따름이었다. 지금도 종종 지치고 힘에 겨울 때 이 말씀은 언제나 나로 다시 굳세게 서게 한다.

 

이는,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어 있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살전 5:10).”

 

이러한 사실을 인생에서 누구라도 나보다 더 강렬하게 체험하며 살았을까? 일찍이 나로 생후 6개월에 질병을 앓게 하심으로 나의 부친을 돌이키는 데 단서가 되었다. 결국 모든 사업까지 털리면서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나의 부친은 이 말씀으로 붙들렸다. 아이 넷에 빚더미에 쫓기면서 어찌 그 시점에서 목회를 감행할 수 있었을까? 덕분에 부친의 강렬하고 전투적인 목회 현장을 같이 돌면서 지독했던 가난과 지긋지긋한 사람들의 박해와 생전 누구도 경험하지 못했을 나환자촌에서의 4-5년 동안의 생활은 가히 명품의 삶이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는 날에 나환자촌의 병원 수술대에 있었던 것도, 우연히 그곳이 손양원 목사가 계셨던 여수 애양원 교회였고, 예닐곱 명의 소경 장로들이 성경 66권을 다 암송하였고 그들과 어울렸던 시간들. 6개월 남짓 후 퇴원 후 돌아간 곳이 경기도 어디 나환자촌 교회였다니… 앞서 나의 병원 생활에서 저들과의 생활과 심히 낯설지는 않았던 것. 그곳에서의 한 소녀로 인해 둔재나 특수아동으로 치부되던 내가 책을 읽고 글을 쓰기 시작했던 사실도… 어린 게 첫사랑의 감정을 느끼면서 4년 남짓 그곳에서 생활하는 동안의 간절했던 세례와 회심과 서원의 경험들. 이후 곁길로 돌아가는 동안에도 하나님의 손길은 거짓말처럼 안 믿는 자나 여러 다른 종파의 사람들의 손길로 신학부와 신대원을 마치기까지 인도하셨던 일들, 오늘 이 작은 교회를 이루어 가면서의 어찌 표현하기 힘든 상한 영혼들과의 만남까지….

 

오늘 예레미야가 같은 동족이 아닌 갈대아인의 장군에 의한 호의와 인정으로 자유를 얻는 여정으로, 지나온 나의 날들도… 우리 모든 성도들의 간증의 삶도 결코 다르지 않을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불의하지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히 6:10).” 하심과 같이 “예레미야가 미스바로 가서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에게로 나아가서 그 땅에 남아 있는 백성 가운데서 그와 함께 사니라(렘 40:6).” 그곳은 가난하고 비루하여 남겨진 사람들이 모였다. “그 모든 유다 사람이 쫓겨났던 각처에서 돌아와 유다 땅 미스바에 사는 그다랴에게 이르러 포도주와 여름 과일을 심히 많이 모으니라(12).”

 

우리가 사는 동안 주와 함께 한다는 것은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계 2:2-3).” 오직 주가 아신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4-5).” 곧 우리는 수시로 벗어나고 길을 잃고 방황하며 갈등하기 일쑤인데 그럼에도,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신 32:10).”

 

우린 이를 살면서 사는 동안에 체험하고 간증하여 주를 찬송하는 사람들이다. 그리하여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감추사

내 앞에서 나를 압제하는 악인들과

나의 목숨을 노리는 원수들에게서

벗어나게 하소서

(시 17:8-9).

 

오늘도 주의 도우심으로 숨겨져서,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121:5-6).

 

하여 오늘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7-28).” 하신 말씀으로 붙들려서 이처럼 말씀 앞에 나온다. “예레미야가 미스바로 가서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에게로 나아가서 그 땅에 남아 있는 백성 가운데서 그와 함께 사니라(렘 40:6).” 하심 같이,

 

하나님이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며

내 기도에 유의하소서 내 마음이 약해 질 때에

땅 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이심이니이다

(시 61:1-3).

 

그리하여,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머물며

내가 주의 날개 아래로 피하리이다 (셀라)

주 하나님이여 주께서 나의 서원을 들으시고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가 얻을 기업을

내게 주셨나이다

(4-5).

 

이에,

 

그가 영원히 하나님 앞에서 거주하리니

인자와 진리를 예비하사 그를 보호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이름을 영원히 찬양하며

매일 나의 서원을 이행하리이다

(7-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