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하현. 2026. 1. 11. 04:22

 

선지자 예레미야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 말을 들었은즉 너희 말대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고 무릇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하시는 것을 숨김이 없이 너희에게 말하리라… 우리가 당신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보냄은 그의 목소리가 우리에게 좋든지 좋지 않든지를 막론하고 순종하려 함이라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면 우리에게 복이 있으리이다 하니라

렘 42:4, 6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시 63:1

 

 

인생이 광야와 같다면 오늘 이 시편의 기도는 절실하다. 하나님은 어느 시대에서나 출애굽한 곳으로 돌아가는 것을 원치 아니하셨다. 오늘 말씀에서도 “너희 유다의 남은 자여 이제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만일 애굽에 들어가서 거기에 살기로 고집하면 너희가 두려워하는 칼이 애굽 땅으로 따라가서 너희에게 미칠 것이요 너희가 두려워하는 기근이 애굽으로 급히 따라가서 너희에게 임하리니 너희가 거기에서 죽을 것이라(15-16).”

 

이는 애굽을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으로 놓고 우리로 그 곳에서 불러내신 뒤에 다시는 돌아가지 말 것을 이르시는 것이다. 앞서 예레미야 선지자가 이스마엘의 칼날을 피하였다. 여호와께서 그를 숨기신 것, 그를 보호하신 것은 이것이 처음은 아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인데, 이는 성도로 사는 우리의 삶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더러는 같이 믿는 자들로도 공격의 대상이 되곤 하지만 동시에 기도를 청하는 자로 여겨져 오늘도 예레미야를 찾는다.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이르되 당신은 우리의 탄원을 듣고 이 남아 있는 모든 자를 위하여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해 주소서 당신이 보는 바와 같이 우리는 많은 사람 중에서 남은 적은 무리이니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마땅히 갈 길과 할 일을 보이시기를 원하나이다(2-3).” 곧 우리의 바른 기도는 범사에 하는 기도이다. 저들이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당신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보냄은 그의 목소리가 우리에게 좋든지 좋지 않든지를 막론하고 순종하려 함이라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면 우리에게 복이 있으리이다 하니라(6).” 더러는 내가 원하는 기도와 하나님의 뜻이 맞지 않아 갈등이 생길 때도 있다.

 

가령 생활의 어려움으로 도움을 청하나 하나님은 이에 침묵하시거나 다른 것으로 더 어렵게 하시기도 한다. 이와 같은 범사(凡事)에도 주 앞에 기도하는 일, 온갖 우려와 염려가 찾아드는 일상에서 주를 바라는 것이 바른 기도이다. 지혜는 말하길 “그 때에 너희가 나를 부르리라 그래도 내가 대답하지 아니하겠고 부지런히 나를 찾으리라 그래도 나를 만나지 못하리니 대저 너희가 지식을 미워하며 여호와 경외하기를 즐거워하지 아니하며 나의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나의 모든 책망을 업신여겼음이니라(잠 1:28-30).” 기도가 드려지지 않을 때 우린 안다. 마음에 꺼림이 있고 주를 멀리하게 하는 죄의 요인이 있어서이다.

 

그럼에도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골 4:2).” 이는 성경의 기본자세다. 우리로 이르시길,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 그런데 들어주지도 않으실 것 같은 때에 기도하기란 궁극적으로 우리로 주의 뜻을 알게 한다. 처음엔 나의 요구나 필요를 구하느라 할 말을 다 내놓다가 어느 순간에 이르러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게 된다. 기도의 힘이다. C. S. 루이스도 이르기를 ‘우리가 기도한다고 하나님이 뜻을 바꾸지는 않으시지만 그럼에도 기도하는 것은 우리로 우리의 뜻이 바뀌게 하려 하심이다.’ 언제나 하나님은 우리 편이시다. 가장 좋은 것으로 선을 이루신다. 우리는 당장의 것을 구하나 하나님은 그 이상의 것을 주려고 하신다.

 

결국 기도는 내 뜻을 관철하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는 데서 성사된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말씀을 들으려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우리의 간구도 가증스럽다. 돈을 구하고 건강을 바라고 형통함을 원하지만 그것으로 주의 선하심을 따라 살려 하기보다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처럼 혹은 자신의 허영과 욕구를 바라는 데서, 이를 마치 하나님의 선을 이루려는 듯 간구한다. “사람이 귀를 돌려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잠 28:9).” 부끄러운 일이지만 한참 엉터리로 생활할 때 나는 거의 매주 복권을 샀다. 그리고 기도할 때면 이것으로 교회를 세우고, 어디 구제를 하고… 하는 식으로 ‘선을 찾는 늑대’로 나 자신조차 속이는 삶이었다. 단적인 예이나 이와 같이 우리의 본심은 마치 카펫 아래 밀어 넣은 먼지처럼 겉으로만 그럴 듯하였다.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요일 5:14).”

 

오늘 여기 ‘모든 군대 장관, 요하난, 그리고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예레미야를 찾았다. 그리고 ‘그들이 가까이 이르러’ 기도를 부탁하였다. 이는 선지자 예레미야가 기도함으로 현재의 위급한 시기에 자신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하나님의 지시가 무엇인가를 물어주기를 바란 것이다(2-3). 이때 저들은 예언자에게 경의를 표한다. 가난하고 천하였지만 예레미야를 인정하였고, 자신들의 지휘 아래 있었지만 주의 종의 기도에 겸손히 복종하는 자세로 나아갔다. ‘당신은 우리의 간구를 들으소서.’ 하는 데서 그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먼저는 주의 종으로 예레미야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인정하였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하는지 모르오니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소서.’ 하는 것이다.

 

당시 저들은 하나님의 지시를 절대적으로 따르겠다고 한다. 모두가 포로로 끌려가고 ‘남은 자들’로 그들 스스로 가리켜 동정을 받아야 될 자들임을 인정하였다. ‘우리는 남은 자들인데 많은 중에서 조금만 남았사오니, 우리가 삼킴을 당한다는 것은 시간문제로 우리가 삼킴을 당한다면 가련한 일임을….’ 그리하여 그들은 하나님의 지시를 바라고 있었다. 어떻게 행해야 할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파국을 돌아보시고 그의 자비로 다스리게 간구하여 주소서.’ 하는 것이다. 그들은 ‘예언의 영’에 의해 지시를 받을 것을 기대한다. 오늘로 비유하면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이다. ‘예언의 영’은 우리로 말씀을 듣게 하고 이 말씀으로 완성된 하나님의 뜻을 밝혀준다. 하여 ‘지혜의 영’이 우리 마음을 지배할 때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알 수 있다.

 

하여 주의 종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그를 통하여 그들에게 주시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이든지, 그것에 보태거나 수정하거나 감함이 없이 행하겠다고 하는 것이다. “그들이 예레미야에게 이르되 우리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당신을 보내사 우리에게 이르시는 모든 말씀대로 행하리이다 여호와께서는 우리 가운데에 진실하고 성실한 증인이 되시옵소서 우리가 당신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보냄은 그의 목소리가 우리에게 좋든지 좋지 않든지를 막론하고 순종하려 함이라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면 우리에게 복이 있으리이다 하니라(5-6).” 이는 이제 구약의 시대를 지나 신약을 살면서 은혜 중에 우리가 곧 예레미야다. 하나님의 뜻을 말씀으로 알기 원하신다.

 

그런 자세로 교회를 다니고, 말씀을 전하는 자에게 그들의 기도를 갈망한다. 그들, 목회자들은 무엇보다 사람들을 위하여 성실히 기도해 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예레미야가 말한다. ‘너희 말대로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리라.’ 사무엘이 무시를 당하였어도 그랬던 것처럼,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길을 너희에게 가르칠 것인즉(삼상 12:23).” 당시 그들이 예레미야를 무시하였지만 그는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치 아니하였다.’ 하는 자세로 오늘 이 이른 시간에 교회로 나온다. 말씀 앞에 앉는다. 묵상을 하며 누구의 어떤 사연과 우리가 처한 오늘의 상황을 주 앞에 아뢴다. 생각하고 주를 부르고, 사연을 아뢰며 주를 찾는다.

 

이 일은 동시에 모든 성도의 권리이면서 동시에 의무가 되었다. 특히 우리 곁에서 성경적인 조언을 바라는 사람들에게 할 수 있는 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전해야 할 의무가 있다. 같은 조언이라도 성실하게 해주어야 한다. 그것을 듣는 이가 기쁘게 하든지 불쾌하게 생각하든지, ‘그들을 위하여 유익한 것은 무엇이건 숨기지 말아야 한다.’ 그들의 신뢰가 무시당하지 않았음을 깨닫도록 ‘하나님의 모든 뜻과 숨은 섭리를 그들에게 선포해야 한다.’

 

사실 본문의 정황은 그들이 겉으로 꾸민 것에 불과했지만 과감히 자기들의 진실을 하나님 앞에 호소한다. 곧 ‘꾸민 것’ 그 속에 바라는 꿍꿍이가 따로 있다 하지만 그들의 말은 표면적으로 볼 때 대단히 훌륭했다. “우리가 당신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보냄은 그의 목소리가 우리에게 좋든지 좋지 않든지를 막론하고 순종하려 함이라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면 우리에게 복이 있으리이다 하니라(6).” 결국 ‘우리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하시는 모든 말씀대로 행하리이다.’ 하고 다짐하지만… 실은 자신들이 듣고 싶은 좋은 말만 듣길 원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행여 바른 소리로 꾸짖고 성경으로 나무란다면 열에 아홉은 감정이 상한다. 더는 편한 사이일 수가 없다.

 

늘 나는 이를 경험한다. 그래서 적당히 좋은 말로 위로하거나 침묵하고 만다. 몇 번을 권하는 데 있어 돌려 말하다, 들으려하지 않으면 내버려둔다. 옳고 그름을 내가 판단할 수 없다. 또한 내 말을 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나 역시 전하는 자로서는 저가 듣지 않을 때 상처가 된다. 감정이 상한다. 힘에 부쳐서 더는 관여하기를 멈춘다. 그렇게 대부분은 적당한 타인이 된다. 친절한 타인으로 입바른 소리로 족할 따름이다. 정작 그 영혼으로 힘들어하며 마음을 다해 관여하다 내가 상처를 받기 일쑤다. 그럼에도 전해야 하는가, 자주 갈등한 적이 있다. 이런 심정을 주가 아시고,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거든 그 성에서 떠날 때에 너희 발에서 먼지를 떨어 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 너희 동네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도 너희에게 떨어버리노라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 하라(눅 9:5, 10:11).”

 

듣는 영도 주가 더하시지만 들으려 하지 않는 영도 주가 내버려두신다. 하여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롬 1:19, 21, 24).” 대체로 하나님을 잘 안다고 여기는 이들이 더 완고함을 느낀다. 나름 성경을 공부하고 나름 그 신앙에 확신으로 강퍅하여질 수도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하나님을 모르거나 안 믿는다고 하던 자들보다 더 어렵다. 하긴 예수님 때도 가장 예수를 박해하고 거부했던 이들이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제사장들이었다.

 

누가 어떤 일을 주의 이름으로 하려 한다. 보기에는 저들의 삶조차 주 앞에 온전하지 않으며 그 생활은 더 엉망이다. 나태와 무기력과 자신들이 좋아하는 기호들로 생활이 기울었다. 그런 가운데 아이 교육에 자신들의 욕구가 앞서고 주의 일에 명분만이 우선하였다. 서로는 사네마네 이혼을 운운할 정도로 다툼이 잦았고, 온갖 막말과 언행이 아이 앞에서 자행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도 아이 학교를 그만두고 자신들이 가정에서 키우겠다며, 어느 교회의 대안교육 교재를 선호하였고, 그러한 프로그램에서 아이를 더욱 더 고립시켰다. 내가 보면서 그냥 내버려두는 게 가장 나은 교육일 것 같은데 자신들이 지나치게 아이에게 책임을 다해야 하는 것처럼 극성이었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아이로 사회성결여와 대인기피로 이어지게 하였다. 그때 늘 저들의 인사는 기도해달라는 것이었다.

 

오늘 본문에서 이들은 자신들이 순종하겠다고 맹세하며 엄숙한 선언이 강조되지만, 그 뒤 일어날 불순종의 현실을 자신들은 부정하고 있었다. 본문에서 예레미야는 요하난을 위시한 군대 장관들과 모든 백성을 불러 모으고 또 그들이 간구와 맹세의 사실을 다시금 주지시킨 후 여호와의 메시지를 들려주고자 한다. “그가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그와 함께 있는 모든 군 지휘관과 백성의 낮은 자로부터 높은 자까지 다 부르고… 너희가 이 땅에 눌러 앉아 산다면 내가 너희를 세우고 헐지 아니하며 너희를 심고 뽑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너희에게 내린 재난에 대하여 뜻을 돌이킴이라(8, 10).”

 

이어서 그들에게 증거하심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는 너희가 두려워하는 바벨론의 왕을 겁내지 말라 내가 너희와 함께 있어 너희를 구원하며 그의 손에서 너희를 건지리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희를 불쌍히 여기리니 그도 너희를 불쌍히 여겨 너희를 너희 본향으로 돌려보내리라 하셨느니라(11-12).” 하나 그들이 어떠할지 아시고, 경고가 나온다. “그러나 만일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복종하지 아니하고 말하기를 우리는 이 땅에 살지 아니하리라 하며 또 너희가 말하기를 아니라 우리는 전쟁도 보이지 아니하며 나팔 소리도 들리지 아니하며 양식의 궁핍도 당하지 아니하는 애굽 땅으로 들어가 살리라 하면 잘못되리라(13-14).” 이는 마치 우리의 단면을 보는 듯하다.

 

그들은 하나님을 ‘그들의 하나님’이라 부른다. 이는 예레미야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그렇게 부르도록 격려했다. “선지자 예레미야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 말을 들었은즉 너희 말대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고 무릇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하시는 것을 숨김이 없이 너희에게 말하리라(4).” 예레미야는 내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겠노라고 한다.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목소리에 청종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와의 관계에서 우리로 복종할 것을 원하신다.

 

이어서 예레미야의 설교가 전해진다(7-22). 자기더러 하나님의 뜻을 물어보라고 요청한 사람들에게 답변하는 것이다. 이 말씀은 즉시로 임하지 않고 ‘십일 후에’ 임하였다. “십일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7).” 더러는 이처럼 말씀이 더딘 것 같다. 이 기다리는 시간은 절대적이라 기일과 상관없이 오랫동안 기다리는 것 같다. 더러는 들으시지 않으신 것도 같다. 우린 늘 당장에, 지금, 바로, 어떤 응답을 요구한다. 못 견디겠고 답답해서 다른 수단으로 무속을 찾고 이단의 길로 빠지기도 한다. 흔히 용하다는(?) 이의 기도응답은 그 자리에서 뭔가 확답이 있어서 시원하다. 그러나 엄연히 성경은 이르시길,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합 2:3).”

 

오늘 말씀은 그렇게 하여 ‘이 땅에 거하기를 바라셨다.’ 저들의 어려움을 안다. 하나님은 그러한 어려움을 근심하시기도 하였다. “자기 가운데에서 이방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를 섬기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곤고로 말미암아 마음에 근심하시니라(삿 10:16).” 솔직히 하나님도 속상하시다. 당신의 백성이 매인 자로 끌려가고, 남은 자로 빈궁한데, 이와 같이 “참으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판단하시고 그 종들을 불쌍히 여기시리니 곧 그들의 무력함과 갇힌 자나 놓인 자가 없음을 보시는 때에로다(신 32:36).” 그럼에도 참고 기다리심은 ‘광야 40년’의 생활이 필요할 때가 있고, 앞서 애굽의 430년 생활도 필요하였다. 모든 게 다 정한 때가 있고 그 기다림으로 무르익어야 할 때가 있는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는 너희가 두려워하는 바벨론의 왕을 겁내지 말라 내가 너희와 함께 있어 너희를 구원하며 그의 손에서 너희를 건지리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희를 불쌍히 여기리니 그도 너희를 불쌍히 여겨 너희를 너희 본향으로 돌려보내리라 하셨느니라(11-12).” 오늘 말씀은 그러한 하나님의 뜻을 저들이 듣고 깨달아 강하게 붙들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이 잘 되길, 우리 삶이 주 앞에서 온전하기를 원하신다. 곧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7).” 오늘은 실패자 같고 낙심이 나를 짓누르지만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호 11:8).”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하심으로 새 힘을 얻으며,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내가 주를 의지하리이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하올지라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혈육을 가진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시 56:3-4).

 

할 때에,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63:1).

 

이는,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2-3).

 

나의 생명보다 주의 인자하심을 더욱 신뢰하고 귀히 여기며,

 

이러므로 나의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의 손을 들리이다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새벽에 주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하오리니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겁게 부르리이다

(4, 6-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