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애굽 신들의 신당들을 불지르리라 느부갓네살이 그들을 불사르며 그들을 사로잡을 것이요 목자가 그의 몸에 옷을 두름 같이 애굽 땅을 자기 몸에 두르고 평안히 그 곳을 떠날 것이며 그가 또 애굽 땅 벧세메스의 석상들을 깨뜨리고 애굽 신들의 신당들을 불사르리라 하셨다 할지니라 하시니라
렘 43:12-13
하나님이여 내가 근심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원수의 두려움에서 나의 생명을 보존하소서 주는 악을 꾀하는 자들의 음모에서 나를 숨겨 주시고 악을 행하는 자들의 소동에서 나를 감추어 주소서
시 64:1-2
“각 사람의 속 뜻과 마음이 깊도다”는 말씀이 와 닿는다. 하긴 ‘천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알 수 없다’는 속담이 적절한 것 같다. 같은 사안을 놓고도 저마다 그 생각이 다르고 속으로 품고 있는 마음이 같을 수는 없다. 일련의 사태나 오늘 본문을 보면서 궁극적으로는,
의인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그에게 피하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는 다 자랑하리로다
(시 64:10).
하는 말씀에서 새로운 자세를 바로 하게 된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그 아무리 말씀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뜻을 전하여도 백성들의 마음은 패역하였고 이내 “이에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모든 군 지휘관과 모든 백성이 유다 땅에 살라 하시는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고… 애굽 땅에 들어가 다바네스에 이르렀으니 그들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함이러라(3, 7).”
결국 수천 년이 흘러서 세월이 아무리 바뀌고 또 다른 세상이 된 것 같다지만, 하나님께서 ‘바벨탑을 건설하는 자’들에게 하신 말씀과 같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 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창 11:6).” 결국 흩으시고 또 말씀으로 권능으로 우리들에게 보이셔도, 지금 예레미야가 관계하고 있는 백성도 그때 그 시절 그리하여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7-8).”
이러한 결과는 여전하여서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 1:19-20).”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21-23).”
이것이 오늘 우리의 실체가 아닐까? ‘이 후로는 그 경영하는 일을 금지할 수 없으리로다(창 11:6).’ 하심으로 조치를 취하셨고, 극단적으로는 사람의 수명을 줄이시고,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6:3).” 급기야 물로 심판하심으로 모두를 진멸하시기까지 하셨는데,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11).” 결국 오늘 이 백성들도 애굽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였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신 것을 사람들이 개의치도 않았다.
예레미야는 백성들이 싫어하는 눈치를 알면서도 그가 전해야 할 말을 그들에게 전하였다. 그가 전한 말씀을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말씀하라 하신 것이다. 그들은 그 말씀을 모두 들었다. 그러나 우선 그들은 예레미야의 메시지가 하나님에게서 온 것임을 부정하였다. “…예레미야에게 말하기를 네가 거짓을 말하는도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는 애굽에서 살려고 그리로 가지 말라고 너를 보내어 말하게 하지 아니하셨느니라(2).” 여기서 몇 가지 생각해볼 수 있겠다.
먼저 우리의 불순종의 원인은 교만이다. 교만 때문에 하나님과 사람 사람에 불화가 생긴다. 처음 사람들도 스스로 판단하여 ‘과연 그럴까?’ 하는 사탄의 유혹으로 선악과를 먹었다. 이후 사람들은 하나님보다 높아지려고 바벨탑을 쌓았다. 교만은 하나님 이상으로 먼저 하려는 마음의 실체이다. 그러한 때마다 하나님은 말씀하셨고, 종들을 보내셨고, 예언하시고 말씀을 전하게 하셨다. 오늘에 이르러는 그 말씀이 입체적으로 성경이라는 문서로 우리 앞에 펼쳐졌다. 처음 사람 아담의 때부터 모든 사람들이 어떠했는가를 그때마다 그 사건의 배경과 결과를 우린 한 눈에 다 볼 수 있다.
그럼에도 결국 달라지지 않았고 지금도 ‘자기들이 하고 싶은 것’을 한다. 그 일을 막는 것에 대해 적대감을 느낀다. 신앙도 주체가 자신이라 여긴다. 소위 자기주도적인 삶을 지향한다. 또 그러한 계획이 저지당하는 것을 참을 수 없다. 사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지혜의 소치라기보다 하나님의 계획에 의한 것이다. 바로 왕도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겠는가?’ 하고 물으며 교만하였다. “바로가 이르되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 아니하리라(출 5:2).” 저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인정하기 싫었던 것이다.
오늘 일련의 우리 사회 현상도 똑 같다. 서로의 약점을 잡고, 자신의 기득권을 쥐고,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되고 오늘의 적이 내일의 동지가 되는 일은 흔하다. 끝내 잘못이 드러나고 증거들이 쏟아져도 저들은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하는 자세로 자신들을 옳다고 여긴다. 속된 말로 혼자 죽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교만은 겸손할 줄 모르는 마음으로 하나님이 지옥보다 싫다.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죽고 난 뒤의 영벌을 관계하지 않는다.
결국 불복종에는 그에 대한 정당한 구실이 있다. 오늘 본문의 백성들도 예레미야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것으로 우선 부정하였다. 그들은 예레미야를 향해 ‘하나님께서 너를 보내지 아니하셨다’고 부정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전해진 말씀을 믿지 않았다. 오늘 날도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과 같다. 교회를 부정하거나 일개 종교의 하나로 여기는 데서도 같은 의미다.
이렇듯 부정하는 이유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면 하나님의 법대로 살아야 하고 그러면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련의 사람들이 잘못을 인정하지 못하고 사과하지 못하는 것은 진심으로 사과하는 순간 책임이 따르기 때문이다. 그러느니 오늘의 거짓을 붙들고 더욱 더 극과 극으로 치닿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완고한 마음이란 불신앙의 기본이다. 제멋대로의 불복종은 그와 같이 자신의 이익을 우선하려는 마음에서이다.
그렇게 저들은 애굽으로 갈 것을 결심하였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유다 땅에 거하려고’ 결심하지 않았다. 그들의 세력 안에 있는 모든 자들은 함께 애굽으로 데려가고자 하였다. 유다 땅에 대한 간절한 열정 때문에 ‘돌아온 자’들의 자유까지도 박탈하려 하였다. 그들이 자유로이 선택하도록 하지 않고 강권하여 그들과 함께 애굽으로 이끌어갔다.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모든 군 지휘관이 유다의 남은 자 곧 쫓겨났던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유다 땅에 살려 하여 돌아온 자 곧 남자와 여자와 유아와 왕의 딸들과 사령관 느부사라단이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에게 맡겨 둔 모든 사람과 선지자 예레미야와 네리야의 아들 바룩을 거느리고(5-6).” 이 여정은 낯선 나라, 우상이 가득 찬 나라로의 여로이다.
조국을 버리는 것은 물론 하나님의 보호하심까지도 버리고 저들은 애굽으로 가려 하였다. 이내 하나님의 심판의 예언은 정해졌다.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 “그가 와서 애굽 땅을 치고 죽일 자는 죽이고 사로잡을 자는 사로잡고 칼로 칠 자는 칼로 칠 것이라(11).” 이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내가 애굽 신들의 신당들을 불지르리라 느부갓네살이 그들을 불사르며 그들을 사로잡을 것이요 목자가 그의 몸에 옷을 두름 같이 애굽 땅을 자기 몸에 두르고 평안히 그 곳을 떠날 것이며, 그가 또 애굽 땅 벧세메스의 석상들을 깨뜨리고 애굽 신들의 신당들을 불사르리라 하셨다 할지니라 하시니라(12).”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로 무엇을 따를 것인가? 생각하게 하신다. 성경은 누누이 전하시는 바, “너희는 의인에게 복이 있으리라 말하라 그들은 그들의 행위의 열매를 먹을 것임이요 악인에게는 화가 있으리니 이는 그의 손으로 행한 대로 그가 보응을 받을 것임이니라(사 3:10-11).” 결국 우리의 신앙이란 나의 의지나 생각을 꺾고 하나님의 뜻에 순정하느냐 아니 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호사야의 아들 아사랴와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이란 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빙자하여 예레미야의 예언을 거짓이라 매도하는 장면이 오늘 우리의 모습 같다.
저마다 이런저런 교회의 부정과 부패를 들어 매도한다. 어느 목사의 행태를 핑계로 종교인으로 싸잡아 자기들 좋을 대로 판단한다. 그런 이유로 교회를 안 다니고 나름의 신앙을 자기 멋대로 믿는다. 누가 언제부터 교회를 안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하나님을 믿는 자’로 여긴다. 코로나 이후 이와 같은 신앙 아닌 신앙을 붙들고 사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게 주일을 끼고 어디 여행을 계획한다. 하긴 평소에도 정해진 시간에 교회로 가서 예배드리는 일을 멀리한 지 오래다. 사람들이 싫다는 이유다. 그러면서 무슨 동호회니 어디 모임이니 하는 사람들과는 어울려서 해외여행도 가고 주말을 끼고 취미 활동한다. 그러면서도 저는 절대 자신을 안 믿는 자로 여기지 않는다. 마치 같이 살지도 않으면서 부부라고 하고 사랑한다고 하는 꼴 같다. 자기 뜻을 굽힐 수 없어서다.
이방 나라 장군 나아만이 엘리사의 말에 순종하여, “엘리사가 사자를 그에게 보내 이르되 너는 가서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 하는지라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이르되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왕하 5:10-11).” 명색이 장군인데, 당대의 강대국으로 자존심이 상할 일이었다. 종종 우리의 생각이 앞설 때,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한대 또 두 번째 소리가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려져 가니라(행 10:14-16).”
우리의 판단 기준이 모호할 때 말씀으로 척도를 삼아야 한다. 자신의 감정이나 관례, 사람들의 생각이나 의견에 좌고우면(左顧右眄)해선 안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원한다면 먼저 자기 마음을 기경(起耕)해야 한다. 자기 생각으로 완고한 마음을 갈아엎지 않으면 길가나 돌밭이나 가시덤불에 떨어지는 말씀 같다. 그러므로 시편은 이러한 세계를 들려준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시 1:1-2).
굳은 결심이 필요하다. 기준이 분명해야 한다. 살다보면 가장 가까운 아내나 자식으로 흔들릴 때가 많다. 타협하거나 포기하는 경우가 그런 이유다. 한 아이의 엄마는 그렇게 자신의 이교도로 배교하는 것을 수용하였다. 아이는 어려서 교회를 다니며 신앙으로 자랐다. 그 엄마는 새벽예배를 나가며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서 항상 주를 인정하는 사람이었다. 글방이 교회가 되고 내가 뒤늦게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된다는 소식에 누구보다 기뻐하며 지지하였다. 아이도 성실하게 잘 따랐다. 그러다 사춘기를 지나 아이는 카이로의 대학으로 갔다.
몇 년의 시간이 지났다. 어느 날 찾아와 이슬람교도가 되어 정식으로 이태원 어디 사원에서 세례도 받았다고 했다. 오랜만에 아이엄마와 통화하며 그 심정을 위로 하고 헤아리려했는데, 저이는 의아하다는 듯 ‘아이가 좋다면…’ 하는 말로 얼버무렸다. 알고 보니 그 시점에 모든 게 잘 풀려서 소원했던 남편과의 사이도 좋고 그 사업도 잘 되고, 무엇보다 아이가 고급장교가 되었고 장래가 총망 받는 자리에 보장되었다.
아,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131:1).
이게 참 쉬운 게 아니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그러나 우리는 번번이 그 이상을 꿈꾼다. 그것으로 마치 신앙의 점수를 매기려는 것도 같다. 내가 아는 아무개 형님은 기억에 누구보다 말씀 중심으로 한 영혼을 사랑하는 목회자였는데 그렇게 정치적인 인물로 교단과 사회에서 활동이 왕성한가보다. 이제 60대 초반인데 총회 노회장을 꿈꾸며 빈번하게도 여러 모임을 결성하고 사람들과 활동하느라 바쁘다는 소문을 들었다.
‘옳다, 그르다’를 떠나 자기주장과 그 생각이 완고할 때 앞서 몇몇의 모습처럼 자기중심의 신앙으로 관철한다. 교회를 거부하고 예배는 동영상으로 대체한다. 교회 사람들과의 친밀한 성도의 교제보다 여러 동호회에서 서로가 ‘친절한 타인’으로의 관계로 만족한다. 서로 예의바른 남남으로 ‘거기까지’ 선을 긋고 살면서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자신한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마 7:22).” 내가 보면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의 믿음으로 자긍한다. 그러나 결말이 두렵다.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23).”
더는 돌이킬 수 없는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 예수님은 “롯의 처를 기억하라(눅 17:32).” 항상 나는 이 말씀이 무시무시한 경고로 들린다. 아직은 가능한 게 살아서 산 자들은 돌이킬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데… 이내 적당할 동안에는 도무지 돌이킬 수 없는 것일까?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11-12).”
세상이 아무리 어떠하다 해도,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 2:15-16).” 실은 세상이 부럽고 그렇듯 활동적으로 자기위주의 신앙으로 건강하게, 활발하고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이 부럽다. 같은 신앙생활을 하는데도 나만 쭈글쭈글 한 것 같고, 다들 못 할 거 없이 다 하면서 애굽이면 어떤가? 하고 되묻는 듯하다.
하나님이여
내가 근심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원수의 두려움에서
나의 생명을 보존하소서
(시 64:1).
나는 오늘도 시편의 세계에서 시편의 목소리로 기도한다.
주는 악을 꾀하는 자들의 음모에서 나를 숨겨 주시고
악을 행하는 자들의 소동에서 나를 감추어 주소서
그들이 칼 같이 자기 혀를 연마하며
화살 같이 독한 말로 겨누고 숨은 곳에서 온전한 자를 쏘며
갑자기 쏘고 두려워하지 아니하는도다
(2-4).
하여 주 앞에 고할 때,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일을 선포하며
그의 행하심을 깊이 생각하리로다
의인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그에게 피하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는 다 자랑하리로다
(9-1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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