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즉 칼을 피한 소수의 사람이 애굽 땅에서 나와 유다 땅으로 돌아오리니 애굽 땅에 들어가서 거기에 머물러 사는 유다의 모든 남은 자가 내 말과 그들의 말 가운데서 누구의 말이 진리인지 알리라
렘 44:28
하나님이여 찬송이 시온에서 주를 기다리오며 사람이 서원을 주께 이행하리이다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
시 65:1-2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몇 년 사이의 일들로 39장에서 45장까지의 내용이다. 그런 가운데 유다에 잔류한 선민들의 이야기로 애굽에 이주를 강행하는 내용과 애굽 함락을 기록하고 있다(43:1-13). 애굽으로 이주하여서도 우상 숭배를 고집하는 유다의 잔류한 선민들을 행태가 가관이다. 저들에게 심판이 예언된다. 하나님께서 애굽 땅 곧 믹돌과 다바네스와 놉과 바드로스 지방에 흩어져 사 는 유다의 잔류민들에 대해 예언을 주셨다. “애굽 땅에 사는 모든 유다 사람 곧 믹돌과 다바네스와 놉과 바드로스 지방에 사는 자에 대하여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44:1).”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조차 우상을 숭배하기에 여념이 없는 유다의 백성들의 악행에 대해 심판을 선언하신다. 유다에 잔류한 이들이 직접 체험한 유다의 멸망 원인이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으로 우상을 숭배한 데 있음을 지적한다(2-6). 또한 하나님께서 유다의 멸망을 초래한 우상 숭배의 악행을 애굽에 이주하고도 고집하는 유다의 잔류민들에 대해 그 어리석은 행태를 지적하고 심판이 내려질 것을 알린다(7-14).
유다가 우상을 숭배하다가 멸망하였음에도 우상 숭배라는 악습을 버리지 못하고 이주하여 간 애굽 땅에서도 이를 고수한다는 게 말이 안 된다. 그런 거 보면 우리가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 신앙이 온전하지 못한 것에 대해 돌아보게 한다. 가령 어제는 오전 일찍 병원으로 가서 몇 가지 검사와 평소의 약을 타서 왔다. 기다리는 게 힘들어서 가급적이면 너무 일찍 가서 사람들이 북적거리기 전에 기다리는 편인데, 오래 된 간호사 누가 전날에 영종도 어디로 점을 보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바람이 너무 불어서 어땠다는 자기들끼리의 수다를 들었다. 내가 알기로 저이는 교회를 다니고 내가 목사인 것을 아는 사람이라, 평소에도 반갑게 인사하는 정도이다. 강풍으로 인해 차가 뒤집어지는 줄 알았다는 둥 자신이 너무 샤머니즘에 빠지는 것 같다는 둥… 우스갯소리 하듯 하는 말에 공연히 마음이 쓰였다.
그런데 이런 일이 흔하다. 누가 믿는 이로 어디 가게를 새로 열면서 고사를 지낸다. 누군 어디서 받았다며 부적 같은 것을 가게 한편에 붙였다. 그러면서 주일에는 또 교회도 간다. 우리가 영적으로 얼마나 무지한지, 오늘 본문이 보여주는 그대로다. “내가 나의 모든 종 선지자들을 너희에게 보내되 끊임없이 보내어 이르기를 너희는 내가 미워하는 이 가증한 일을 행하지 말라 하였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고 다른 신들에게 여전히 분향하여 그들의 악에서 돌이키지 아니하였으므로 나의 분과 나의 노여움을 쏟아서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를 불살랐더니 그것들이 오늘과 같이 폐허와 황무지가 되었느니라(4-6).”
영적인 무지와 완고함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다. 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다들 그러니까 그냥 가볍게 여겨 그리 행한다. 그런 가운데서도 우리는 이와 같은 영적 무지와 완고함을 경계해야 하고 더욱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의 말씀에 온전하게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런 뜻으로 이와 같은 말씀을 묵상하게 된다. 오늘 날 여러 선지자들을 보내던 그 시절 이상으로 하나님의 은혜는 성경으로 완결되어 늘 우리 손에 들렸다. 성경이 없어서 성경을 못 읽는 집은 없다. 핸드폰으로도 성경이 열리고 들리고, 여느 기독교 방송마다 설교도 풍부하게 들을 수 있다. 그러나 듣고도 이를 못 들으면, 읽고도 이를 못 읽으면 이보다 더 어처구니없는 무지가 또 있을까?
이는 영적으로 안이하면서 그렇다. 저마다 다들 적당하여서 그런 것 같다. 사네 못 사네 하면서도 다들 사는 게 적당하여서 신앙이 그리 절박하지는 않다. ‘재미로’ 영종도까지 가서 어디 용한 점쟁이에게 무얼 묻고 왔다는 이의 무용담 아닌 수다 같은 재미지는 이야기를 우연히 엿들으면서 나는 뭐라 말할 수도 없었다. 속된 말로 웃자고 한 말이라는 데 죽자고 말한들 들을 리 없고…
믹돌은 애굽 동북 변경 펠루지움 남쪽 20km 지점에 있다. 다바네스는 애굽 삼각주 동쪽에 위치한 성읍으로 라암세스 동남 13km 지점에 위치해 있다. 43장에서 유다 잔류민들이 이주를 결정한 성읍으로 제시된 도시다. 놉은 애굽의 주요 성읍으로 카이로 남쪽 20km 지점에 위치해 있다. 바드로스는 애굽 위쪽 특정 도시를 나타낸다기보다 애굽의 남쪽 지역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 곧 이들 지명은 유다 사람들이 소수였지만 애굽 땅 곳곳에 산재하여 정착하고 지냈음을 나타낸다. 곧 애굽 전역에 흩어져 살았을 것을 추정하게 된다.
분명히 예레미야는 저들이 애굽으로 내려가면 하나님께서 저들로 포로가 되고 칼,기근,전염병으로 심판하실 것을 알렸다. “그리고 너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내 종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을 불러오리니 그가 그의 왕좌를 내가 감추게 한 이 돌들 위에 놓고 또 그 화려한 큰 장막을 그 위에 치리라 그가 와서 애굽 땅을 치고 죽일 자는 죽이고 사로잡을 자는 사로잡고 칼로 칠 자는 칼로 칠 것이라(43:10-11).” 그러나 자기들의 고집을 꺾지 않았고 마침내 애굽으로 내려갔고, 애굽 각지로 흩어져 정착하게 되었다. 그들은 애굽으로 가기로 결정한 자신들의 계획이 옳았다고 자찬하였다. 그렇게 점차 애굽 사람으로 동화되어 갔고, 선민의식은 희미해지고 그 정체성을 망각한 채 우상을 섬기며 이방 사람들처럼 살았다.
오늘 이 현상에서 예레미야를 통해 하나님은 다시 말씀하신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을 주신 것은 두 가지 의도가 있다. 먼저는 죄악을 고집한 자들과 말씀을 거부하고 애굽에 내려간 자들을 향한 심판을 경고한다. 아울러 동시에 회개의 기회로도 풀이된다. 다시 말해 아직은 말씀이 주어진다는 것은 회개할 기회가있다는 것이다. 비록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지속적으로 불순종을 자행하며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음에도 하나님께서는 다시 회개의 기회를 주시기 위해 이처럼 말씀하시는 것이다. 곧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이 어디 있든 무엇을 하든 그 자리에서도 당신의 백성을 지켜보시며 그 삶에 함께하시며 간섭하신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런 부분에서 나의 경우가 너무 뚜렷하게 확신한다. 차마 그때 어떤 시절을 보냈는지 일일이 말하기 부끄러우나 그런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늘 내 곁에 계셨고 내 곁의 사람들을 선별하셨다. 이는 내가 그리 느낀 게 아니라 실제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형태로 저들의 도움도 있었다. 내 의지나 노력에 비해 저들이 나를 귀히 여기며 잘해준 것도 안다. 실질적으로 큰 도움을 받기도 했고 과분할 정도로 나를 위하는 것도 느꼈다. 그러면서도 저들과 다른, 저들처럼 ‘그런 자리’에는 머물지 못하게도 하셨다. 가령 무슨 고사를 지낼 때 저들이 나를 먼저 빠져 있으라고도 했다. 같이 어울리면서도 나의 신앙과 믿음을 저들이 존중하고 가려주었다.
물질적으로도 그렇다. 말도 안 되는 상황으로 치달을 때도 저들은 아무 조건 없이 내주었고, 심지어 나의 신학과 목사가 되기까지 저들의 손길은 마르지 않았다. 신기하지? 그러다 신학을 마치고 목사가 되고 난 뒤로는 정말이지 거짓말처럼 모두가 증발하듯 사라졌다. 내가 외면하고 멀리한 결과가 아니다.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저들은 나를 경계하고 어려워하다 하나둘 멀어져서 지금은 자취를 감추었다. 다윗은 시편에서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하는 신앙 고백으로 나의 이 심정을 알게 한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시 139:7-10).
이를 나는 실감한다. 실은 내가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들과 어울려 악의 구렁텅이에서 지내듯 함부로 행할 때도, 어디에 있든지 어디로 피하든지 하나님은 나를 놓아두지 않으셨다. 마치 요나와 같이 하나님은 니느웨로 가라 하실 때 임의로 다시스로 향하는 배에서의 모든 여정 가운데서도 그 배 가장 밑바닥에서 하나님은 요나를 불러내셨던 것처럼. 나로 마땅히 서 있어야 할 곳,마땅히 행해야 할 것,마땅히 품어야 할 마음을 품고 살 수 있도록 끝까지 관여하심을 느낀다. 하여 “그는 사람의 길을 주목하시며 사람의 모든 걸음을 감찰하시나니 행악자는 숨을 만한 흑암이나 사망의 그늘이 없느니라(욥 34:21-22).”
그러므로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시느니라(잠 15:3).” 하여 오늘도 나를 지키신다.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시며 아무리 깊은 곳,은밀한 곳에 거한다 할지라도 나를 지켜보시며 돌이켜 주의 길로 세우셨다. ‘황무지’의 사전적 의미는 ‘손을 대어 거두지 않고 내버려 둔 거친 땅’이다. 아무리 기름진 땅도 사람이 손을 대지 않고 거름을 주지 않으면 그 땅은 황무지로 변한다. 우리의 영혼도 그와 같다.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을 산다. 가장 무서운 것은 징계가 아니라 하나님이 내버려두실 때이다. 이에,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롬 1:28-31).”
이는 남 이야기가 아니다. 어느 격언에 보면 “밭을 망치고 싶다면 그냥 그 밭을 내버려두면 된다”고 했다. 사람도 같다. 그 영혼도 다르지 않다. 우리 삶이 황무한 것은 무가치한 것을 추구할 때이고, 이를 그대로 방치하는 것으로 그 삶의 끝은 허무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언제든, 어디서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면 하나님은 그 은혜에 부합하는 삶으로 우리를 거두실 것이다. “대저 견고한 성읍은 적막하고 거처가 황무하며 버림 받아 광야와 같은즉 송아지가 거기에서 먹고 거기에 누우며 그 나무 가지를 먹어 없이하리라 가지가 마르면 꺾이나니 여인들이 와서 그것을 불사를 것이라 백성이 지각이 없으므로 그들을 지으신 이가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시며 그들을 조성하신 이가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시리라(사 27:10,11).”
하여,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히 12:15-16).”
우리로 오늘 우리의 삶을 살피라고 하신다. “그 나머지로 신상 곧 자기의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엎드려 경배하며 그것에게 기도하여 이르기를 너는 나의 신이니 나를 구원하라 하는도다 그들이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함은 그들의 눈이 가려서 보지 못하며 그들의 마음이 어두워져서 깨닫지 못함이니라(사 44:17-18).” 우리도 다를 게 없다. 방심하면 어느새 우리도 그 자리에서 저들과 같은 문화와 이치와 삶의 이상을 꿈꾸며 사람 중심의 삶으로 산다. 그렇듯 “새긴 우상은 그 새겨 만든 자에게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스승이라 만든 자가 이 말하지 못하는 우상을 의지하니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나무에게 깨라 하며 말하지 못하는 돌에게 일어나라 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그것이 교훈을 베풀겠느냐 보라 이는 금과 은으로 입힌 것인즉 그 속에는 생기가 도무지 없느니라(합 2:18-19).”
누가 자주 기도를 부탁하는데 저의 내용은 정말이지 늘 같다. 가끔은 내가 무슨 점쟁이나 무당이라 여기는가? 하고 의아할 정도로 어찌될까를 묻고 지금 하는 가게에 대해 복을 빌어 달라 하며, 마치 복채라도 줄 것처럼 무언가를 바란다. 솔직히 어떤 기도도 나오기 어렵다. 그저 저를 불쌍히 여겨주시기를… 이미 예배도 구했고, 말씀을 권했고, 하나님을 의지할 것을 바랐으나 그런 얘기는 하나마나다. 그냥 늘 가게 잘 되게, 하는 일이 어떻고, 그러니 무슨 문제가 어찌 될지…. 저의 관심은 하나님이 아니다. 자신의 영혼도 아니다. 당장의 돈벌이로 사느라 사는 데 따른 아둔함으로 그런다. 이에,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갈 1:6).”
누구의 삶을 듣다보면 보이는데 저는 여전히 다른 데서 이유를 찾고 행복을 추구하다 우울증으로 시달리고 아이가 지능이 낮거나 장애판정을 받는 처지에 놓이면서까지 이를 모른다. 하긴 두 아이의 엄마는 아이들과 예배를 드렸으면 하는 소리에 질겁을 했는지, 내게 보내는 것을 거절하더니 이혼 후로 사는 게 막막하다는 이유로 요즘은 노래방도우미로 뛴다. 아이들 말로 유추하면 그렇다. 소위 친구들인 이모들이 모여 같이 이야기 하는 것을 들었는데, 아이들도 눈치는 다 있다. 그게 뭔지는 모르지만 도우미가 어떻고 노래방이 어떻고… 큰 애는 정신박약증세를 보이고 작은 애는 조울증으로 병원 약까지 먹어야 하는 실정에서 아이들 엄만 먹고 사는 문제로만 돌아친다. 한때는, 젊을 때는, 처녀 때는… 하는 말로 자신들도 교회를 다녔고 믿었던 사람들임을 강조하는 게 또 보통이다. 그러니 참 문제는 문제다.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도에서 돌이켜 떠나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따르면 저주를 받으리라(신 11:28).” 그러니 사느라 그렇다는데 뭐라 한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수 24:15).”
이를 보면서 누굴 탓하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호 11:8).” 우리가 하나님의 심정을 알기는 할까? 오늘도 같은 말씀이다.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게서 멀리하라(요일 5:21).” 그리하여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출 20:3-4).”
부디 헛된 것으로 우상을 삼아 경배하지 않기를, 이는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하는 일과 같아서 “그런즉 칼을 피한 소수의 사람이 애굽 땅에서 나와 유다 땅으로 돌아오리니 애굽 땅에 들어가서 거기에 머물러 사는 유다의 모든 남은 자가 내 말과 그들의 말 가운데서 누구의 말이 진리인지 알리라(렘 44:28).” 하는 오늘 본문의 말씀이 강하데 들린다.
할 때에,
하나님이여 찬송이 시온에서 주를 기다리오며
사람이 서원을 주께 이행하리이다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
(시 65:1-2).
나로서는 기도할 뿐이다. 내 곁의 한 영혼들을 두고 주께 아뢰고 고하는 것뿐, 저들은 말을 들으려 하지 않음으로,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
(4).
하여,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땅의 모든 끝과 먼 바다에 있는 자가 의지할 주께서
의를 따라 엄위하신 일로 우리에게 응답하시리이다
(5).
그러할 때에
주께서 밭고랑에 물을 넉넉히 대사
그 이랑을 평평하게 하시며 또 단비로 부드럽게 하시고
그 싹에 복을 주시나이다
주의 은택으로 한 해를 관 씌우시니
주의 길에는 기름 방울이 떨어지며
들의 초장에도 떨어지니
작은 산들이 기쁨으로 띠를 띠었나이다
(10-12).
그때에,
초장은 양 떼로 옷 입었고
골짜기는 곡식으로 덮였으매 그들이 다
즐거이 외치고 또 노래하나이다
(1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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