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다 와서 들으라

하현. 2026. 1. 14. 04:53

 

너는 그에게 이르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보라 나는 내가 세운 것을 헐기도 하며 내가 심은 것을 뽑기도 하나니 온 땅에 그리하겠거늘 네가 너를 위하여 큰 일을 찾느냐 그것을 찾지 말라 보라 내가 모든 육체에 재난을 내리리라 그러나 네가 가는 모든 곳에서는 내가 너에게 네 생명을 노략물 주듯 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 45:4-5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너희들아 다 와서 들으라 하나님이 나의 영혼을 위하여 행하신 일을 내가 선포하리로다 내가 나의 입으로 그에게 부르짖으며 나의 혀로 높이 찬송하였도다

시 66:16-17

 

 

우리의 사명은 주를 찬송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의 상황이 어떠하든지 주를 바라고 의뢰하는 일이다. 하여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하는 욥의 고백과 오늘 시편의 노래처럼,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우리를 단련하시기를 은을 단련함 같이 하셨으며

우리를 끌어 그물에 걸리게 하시며

어려운 짐을 우리 허리에 매어 두셨으며

사람들이 우리 머리를 타고 가게 하셨나이다

우리가 불과 물을 통과하였더니

주께서 우리를 끌어내사 풍부한 곳에 들이셨나이다

(시 66:10-12).

 

누가 말하길 ‘인생으로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고 한 것도 이 모든 ‘우연’과 ‘필연’ 사이에서 하나님이 역사하심이다. 이에 바울은 우리의 사명이 이 모든 만물이 생기기 전, 우리를 이 땅에 두시기도 전에 이루어졌음을 설교하였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그 이유는 뚜렷하다.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곧 우리로 어떠하든지 주를 인정하고 찬송하게 하심이다(엡 1:4-6). 이것이 우리의 존재의 이유다.

 

오늘 본문은 예루살렘이 함락될 당시로부터 이후 몇 년 사이에 발생하였던 일이다. 곧 예레미야의 예언으로 바벨론 제1차 침공(주전 605년)을 전후해서 제4차 침공(588-586)으로, 예루살렘의 함락과 그 직후까지의 주요 사건을 다루고 있다. 당시 임박한 유다의 심판과 선지자 예레미야의 개인적인 박해로 인하여 고뇌하던 중에 조력자로 있는 바룩을 향하여 이와 같은 예언을 기록하게 하시는 것을 본다.

 

이를 나의 것으로 읽으면 이 묵상글쓰기가 나의 날들을 기록하며 주께서 어찌 나 같은 자를 감당하시고 함께 하시는가를 기록하는 것과 같다. 나아가 바울은 이를 우리의 사명을 삼아,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고후 3:3).” 하는 진술로도 연관 지을 수 있겠다.

 

하여 오늘 본문의 시작은 “유다의 요시야 왕의 아들 여호야김 넷째 해에 네리야의 아들 바룩이 예레미야가 불러 주는 대로 이 모든 말을 책에 기록하니라 그 때에 선지자 예레미야가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렘 45:1).” 당시는 바벨론의 유다 침공이 임박하였던 여호야김 4년 즉 주전 605년의 일이다. 바룩은 예레미야가 불러주는 대로 유다에 대한 예언을 기록하였다. 이 내용이 예레미야 36장에 기록되어 있다. 오늘 본문은 예레미야서 구성상 36장 4절 이후에로 놓인다. “이에 예레미야가 네리야의 아들 바룩을 부르매 바룩이 예레미야가 불러 주는 대로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신 모든 말씀을 두루마리 책에 기록하니라(36:4).”

 

이에 다시 성경을 이처럼 편집하여 구성하신 것은, 곧 유다가 멸망한 사실을 알리고 난 후에 이런 내용을 배치한 것은, 예레미야가 여호야김 시대까지의 받은 예언과 그 이후 예루살렘 함락 때까지 받은 모든 예언도 바룩의 대필을 통하여 기록되었음을 보여준다. 오늘 본문 1절 후반에 보면 ‘예레미야가 불러주는 대로 이 모든 말을 책에 기록하니라’ 하는데 주목하게 한다.

 

곧 이를 또 나의 이야기로 가져오면 나는 자주 지난 날 나의 일과 속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셨는지를 나에게조차 객관화시키는 것 같이 기록한다. 또한 오늘의 일과에서도 그 면면이 하찮은 듯하나 모든 시공간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주목하려는 것이다. 이는 우선 나의 시선이 근시안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판단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가령 그때마다 구하는 게 있다. 실은 사는 동안의 우리의 요구는 간단하다. 건강하게 잘 먹고 잘 살기를 바라는 것, 그런데 삶은 꼭 사람을 발 걸어 넘어뜨리듯 어려움을 더한다.

 

가령 누가 어떤 일로 기도를 부탁할 때, 저는 여전히 어디 가게가 안 나간다며 빨리, 좋은 작자를 만나 인수하여 되풀이 되고 있는 월세나 관리비가 손해나지 않게 구한다. 사실은 매우 직접적이다. 우린 그리 고상하지 않다. 사는 게 그렇듯 고상을 떨고 우아함을 과신하지만 다들 한 끼 먹고 싸고, 자기만족으로 무슨 일을 추구하고 성취감으로 돈을 벌고 남부럽지 않게 사는 게 기도내용이다. 그런데 저이의 기도 부탁을 들을 때마다 느끼는 것은 저의 시선이 늘 ‘거기’에 머무는 것 같아서 말이다. 한동안 어디 회사에서 일하면서 받는 스트레스로 힘들어하다, 결국은 그만두고 장사를 시작한 모양인데 또 그 지경이라…. 사는 게 실은 고상할 게 없다. 이에 우리의 기도도 그처럼 고상할 게 없다.

 

할 때 오늘 여기 ‘바룩의 자세’에서 말씀을 대하는 태도를 되새기게 된다. 즉 수동적으로 예레미야가 불러주는 것을 받아 적는 게 전부가 아니다. 그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이를 제대로 기록하려면, 일단 들어야 한다. 듣는다는 것은, 현재 자신의 처지나 상황에서 멈춰야 한다. 하던 말을 멈춰야 하고 생각을 집중해야 한다. 내가 가장 힘들어하는 상대가 자기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런 경우 나로서는 입을 다문다. 무슨 말을 하다가도 그만 둔다. 듣기가 안 되는 사람은 혼잣말에 익숙하다. 곧 자기 혼자 진지하다. 그리고 저 혼자 서운해 한다. 그런 경우 또 저는 상대가 듣지 않는다고 실망한다. 자기 맘대로 해석하고 판단하고 감정을 뒤챈다.

 

바룩의 자세는 우선 듣는 말에 집중했다는 것이다. 이는 곧 바룩은 ‘하나님께 집중하였다’는 것이다. 말을 귀로만 듣고서는 기록하기 어렵다. 욥의 증언으로도 알 수 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5).” 저는 그 혹한 고난을 통과하면서 알았다. 듣기만 하는 것으로는 알 수 없다. 가장 무서운 게 풍문으로 들어 아는 것이다! 귀로 듣기만 할 때이다. 남의 말이 천 리 길을 달리는 것도 그 때문이다. ‘발 없는 말이 천 리 간다’는 것도 그런 의미다.

 

오늘 우리 사회의 이 사달이 난 것도 그 때문이다. 결국은 특검의 구형이 내려졌다. 사형과 무기징역을 받은 당사자들은 여전히 반성이 없다. 하다못해 ‘전두환’만 못하다. 여전히 이를 또 전하는 말쟁이들이 있다. 요즘처럼 개인방송이 자유로운 것이 문제다. 지껄이는 대로 말인 줄 안다. 모 목사가 구속당했다. 추종자들은 종교탄압이라 떠든다. 그 자체가 모순인 게 그리고는 길거리로 나간다. 스스로 종교라 하면 최소한 교회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하지 않을까? ‘너는 어느 쪽이냐?’ 하는 따위의 관점으로 말하려는 게 아니라, 그만큼 ‘말하기’도 중요하지만 ‘듣기’가 중요하다는 것을 오늘 본문에서 바룩이 보여준다.

 

바룩은 이를 예레미야의 말로 듣지 않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고, 기록했습니다. 열왕기상 3장 9에서 솔로몬이 하나님께 구한 것도 바로 <듣는 마음>이었다.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이와 반대로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 사울의 실패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아서이다.

 

“사울이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하였기 때문이라 그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넘겨 주셨더라(대상 10:13-14).”

 

여기 주목하는 게 몇 가지 있다. 첫째는 듣지 않는 것이 범죄다. 둘째, 듣지 않으니 말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셋째, 듣지 않고 지키지 않으니까 얼토당토않게 ‘신접한 자에게 가르침을 청했다.’ 정말이지 오늘 우리 사회의 현상과 너무 똑같다. ‘극우’니 ‘극좌’니 하는 사람들은 모두 한 쪽 귀만 열고 사는 사람들이다. 끼리끼리 듣고 떠들어대는 사람들이다. 넷째, 신자가 그럴 때 결국 하나님께 묻지 않는다. 묻지 않는 것은 들으려는 의지가 없기 때문이다. 듣지 않으려는 것은 다른 것으로 꽉, 들리기 때문이다. 냅다, 자기 말만 하는 사람치고 남의 사정을 헤아리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차라리 듣기만 하는 자가 오히려 폭넓게 배려하는 경우는 있다. 다섯째, 결국 이런 자는 하나님이 죽이신다. 자연사 이상의 죽음을 뜻한다.

 

곧 ‘사울이 여호와께 묻지 않았다.’ 오늘 우리는 어떠한지? 묻는다는 것은 듣기를 원함이다. 사울은 묻지 않았다. 묻지 않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야기를 들을 수 없었다는 소리다. 그저 자기 말만 하는 사람이 그렇다. 늘 기도를 부탁하는 누구는, 그런데 한 번도 먼저 교회 사정이나 나의 형편은 어떤지? 하고 물은 적이 없다. 늘 보면 돈돈거리며 악다구니 쓰는 시장통 같다. 그러니 그런 이가 말씀으로 듣겠나? 예배로 오겠나? 하나님으로 집중이 되겠나? 참다못해 물으면 다닌다, 다닐게, 그럴게 하고 말은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은 것을 안다.

 

인생을 누가 한 권의 책이라고 했다. 오늘 여기 이 짧은 다섯 줄 분량의 본문에서 50권 분량의 메시지를 들을 수 있다. 바룩이 신중하였고 주목하였던,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책으로 소중히 기록하였다. 단지 예레미야의 말이 아니었다. 먼저 예레미야는 전제하였다. “바룩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렘 45:2).” 설교를 할 때나 들을 때 우리의 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나는 종종 설교원고를 준비할 때 며칠씩 들릴 때까지 듣기에 전념한다. 본문을 옮겨오고, 프린터해서 단어의 뜻을 찾아보기도 하고, 그 의미를 되새기다가도 나의 미련함으로 답답하여 어려워한다. 그러다 불쑥 들린다. 오늘 바룩의 자세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네가 일찍이 말하기를 화로다 여호와께서 나의 고통에 슬픔을 더하셨으니 나는 나의 탄식으로 피곤하여 평안을 찾지 못하도다(5).”

 

이는 선지자로 예레미야의 고뇌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심정이기도 하겠다. 우리는 하나님이 들려주시는 말씀을, 우리 마음에서 깊이 한 절, 한 절씩을 새겨들어야 한다. 그것이 묵상이다. 묵상은 듣는 일이다. 내가 나의 이야기를 떠드는 것 같지만 그때 그 일에서 하나님의 하신 일, 그의 말씀을 듣는 일이다. 그때는 못 들었던, 들리지 않았던 소리가 이제는 ‘눈으로 보인다.’

 

고작 열 살 된 아이의 시선에서 저 아담했던 예배당 모습이나 열다섯 살 때 나환자병원에서나, 소경장로들과의 시간과 대화에서나, 돌아왔을 때 느닷없던 나환자촌 교회에서의 생활이나, 그때 만난 사람들의 모습이나, 이야기나, 사연이나, 저마다의 슬픔이나 … 그 모든 일과 가운데 하나님은 말씀하고 계셨다. 남의 옥상에 가건물을 짓고 살았던 상황에서, 교회 형이 자살하였던 사건에서, 늘 놀림당하며 괴롭힘의 대상으로 지냈던 상황에서 … 우연은 하나도 없었다. 오늘에 와서 보니 모든 게 다 필연이었다.

 

말씀은 결국 하나님이 내 삶에서 일하시는 것이다. 그의 흔적이시다. 나의 이야기 속에 하나님의 거룩한 이야기가 숨겨져 있었다. 그 거룩한 이야기가 오늘의 나를 성장시키고 변화시키고 있었다. 내가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스쳐지나왔던 시간들인데도, 이제 명령하시길, “너는 그에게 이르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보라 나는 내가 세운 것을 헐기도 하며, 내가 심은 것을 뽑기도 하나니’ 온 땅에 그리하겠거늘(4)” 그리하여 내가 살았고, 살아서 오늘도 주의 말씀을 전하는 것일 테니,

 

“네가 너를 위하여 큰 일을 찾느냐 그것을 찾지 말라! 보라, 내가 모든 육체에 재난을 내리리라. 그러나 네가 가는 모든 곳에서는 내가 너에게 네 생명을 노략물 주듯 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5).”

 

오늘의 이 한 날이 그리하여 소중한 것을. 이 한 시간을 귀히 여김으로 새벽을 깨우시는 주 앞에서, 여호야김 통치 시대의 저 ‘말씀에 대한 무관심’과 ‘불순종의 결과’를 되새기게 된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들에 대한 핍박이 극에 달하였던 때이다. 점점 더 시끄럽다. 고요히 주 앞에 서기 어렵다. 조용히 주의 말씀을 들으려는 사람들이 줄어간다. 저마다 떠들어 젖힌다. 자기 말만하려 하고 자기만 옳다고 소리친다. 더 크게, 더 요란하게 … 시장통을 지날 때면 여기저기서 흥정하려고 서로 떠든다. 듣는 자가 귀를 쫑긋 세워도 떡집 앞에서 과일 가격이나 생선 가격을 다 알아들을 정도이다.

 

소리가 혼재된 거리 같이 복음이 뒤섞여 귀담아 듣는 이들마저 환멸이 든다. 그러니 누가 대들듯 물어 유대교나 기독교나 이슬람교나 다 같은 하나님이라 운운하여 역사를 들먹이는 게 훨씬 더 설득력이 있다. 바룩의 사역은 그저 듣고 받아 적는 일이다. 그럼에도 많은 핍박을 당하였고,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는 유다 동족을 보면서 낙심이 커져만 갔다. 말씀으로 거룩한 삶이란 이처럼 고단하고 고달프기도 하다. 사회가 그래서도 그렇고 자신 안의 아우성도 너무 지독하다. 환멸과 갈등이 끝이 없다. 그럴 때면 ‘바룩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하고 오늘도 나의 이름이 불리고 하나님은 나의 삶 속에서 말씀하신다. 내 이야기인데 하나님의 이야기가 들린다. 나의 사는 모습인데 하나님의 일하심이 보인다. 슬픔이 더해져 고통을 당하나, 고통이 곧 사역이 된다. 바룩은 조국인 유다에 임할 무서운 심판의 내용을 기록하였다(36:1). 그 내용을 많은 사람들 앞에 낭독하는 일은 감당하기 어려운 괴로움이고 두려움이다(36:5-8). 유다는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듣고 회개는커녕, 거짓이라 반박한다. 당시 남유다의 왕은 여호야김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두루마리를 불태웠다(36:22-23). 말씀을 받아 적고, 대언하고, 모욕을 당하고, 현실적인 어려움을 직면하면서도 감당해야 했다.

 

바룩의 조부(祖父)는 마세야다. “나의 숙부의 아들 하나멜과 매매 증서에 인 친 증인 앞과 시위대 뜰에 앉아 있는 유다 모든 사람 앞에서 그 매매 증서를 마세야의 손자 네리야의 아들 바룩에게 부치며(32:12).” 예루살렘의 성읍을 관장하는 관료였다. 어찌 보면 바룩은 관료가 되어, 현재의 삶에 안주할 수 있었다. 그럼 지금처럼 괴롭지 않게 살 수 있었다. 그런 그는 예레미야를 만났고 영적으로 유다의 회복을 위한 사역에 동참했다. 듣지도 않는 유다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조금이라도 전해야 했다. 받아쓰고 전달하는 일이란 더러 무모한 것 같다.

 

이와 같을 때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5:9, 16:33).”

 

세상이 아무리 어떻다 해도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창 6:8).” 곧 오늘도 나는 은혜로 산다. 하여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히 10:38-39).” 그러므로 오늘도 “너는 그에게 이르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보라 나는 내가 세운 것을 헐기도 하며 내가 심은 것을 뽑기도 하나니(렘 45:4).” 이를 듣고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온 땅이여 하나님께 즐거운 소리를 낼지어다

그의 이름의 영광을 찬양하고 영화롭게 찬송할지어다

(시 66:1-2).

 

그리하여 우리는 찬송한다.

 

만민들아 우리 하나님을 송축하며

그의 찬양 소리를 들리게 할지어다

그는 우리 영혼을 살려 두시고

우리의 실족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는 주시로다

(8-9).

 

그렇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너희들아

다 와서 들으라

하나님이 나의 영혼을 위하여 행하신 일을

내가 선포하리로다

내가 나의 입으로 그에게 부르짖으며

나의 혀로 높이 찬송하였도다

(16-17).

 

그리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가 내 기도를 물리치지 아니하시고

그의 인자하심을 내게서 거두지도 아니하셨도다

(2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