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하현. 2026. 1. 16. 04:31

 

오호라 여호와의 칼이여 네가 언제까지 쉬지 않겠느냐 네 칼집에 들어가서 가만히 쉴지어다 여호와께서 이를 명령하셨은즉 어떻게 잠잠하며 쉬겠느냐 아스글론과 해변을 치려 하여 그가 정하셨느니라 하니라

렘 47:6-7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셀라)

시 68:19

 

 

하나님은 우리의 역사(歷史) 가운데 역사(役事)하신다. 악한 날에 악인들을 들어 쓰시고,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잠 16:4).” 이에 오늘 이 블레셋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오호라 여호와의 칼이여 네가 언제까지 쉬지 않겠느냐 네 칼집에 들어가서 가만히 쉴지어다 여호와께서 이를 명령하셨은즉 어떻게 잠잠하며 쉬겠느냐 아스글론과 해변을 치려 하여 그가 정하셨느니라 하니라(렘 47:6-7).”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은 언제나 애굽인들을 친구로 삼았다. 저를 의지하고 도움을 청하였으나 성경은 애굽을 거짓된 친구로 간주하신다. 그와 반대로 블레셋은 이스라엘의 숙적이었다. 이스라엘에 인접해 있었기 때문에 블레셋은 애굽보다 수시로 위협이 되었다. 다윗 시대에 블레셋은 꼼짝하지 못했다. 그러나 느부갓네살이 그들을 인접 국가들과 함께 멸해 버리기까지 그들은 늘 머리를 흔들며 이스라엘에 위협하는 존재였다.

 

그런 그들에 대하여 멸망이 예고되고 있다. 이 예언이 주어진 시기는 바로가 가사를 치기 전이다. 애굽 왕이 가사를 친 때가 언제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갈그미스를 원정하는 도중이었거나 요시야 왕을 살해하고 돌아올 때였거나 그 후 예루살렘을 구원하고자 왔을 때였는지 확실하지 않다. 본문은 그런 블레셋에 대하여 여호와의 말씀이 주어진다. 그들이 한참 강성하고 탐욕에 젖어 최적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을 때였다. 곧 모든 게 잘 되고 어떤 시련도 겪지 않던 시기에 말씀이 임하신다.

 

우리 생각으로 그들의 안녕을 저해하는 아무런 요소도 보이지 않는다. 예레미야는 그런 가운데 저들의 파멸을 예언하고 있다. 그 후 곧 예언의 징조로 바로가 가사를 쳤고, 이로써 그들 나라의 슬픔은 시작된 것이다. “바로가 가사를 치기 전에 블레셋 사람에 대하여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1).” 모두가 안이하게 평안하다고 할 때, 나름을 방책을 세우고 자신할 때 앞서 경고의 말씀은 주어지는데… 이는 매우 의도적이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는 성경의 원칙을 볼 수 있다. 영적으로 믿음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이런 경고의 말씀은 들릴 리 없다.

 

롯의 두 사위가 소돔의 멸망을 두고 재촉할 때 이를 농담으로 들었다는 것처럼, “롯이 나가서 그 딸들과 결혼할 사위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 곳에서 떠나라 하되 그의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더라(창 19:14).” 노아의 120년 방주 사역 중에도 사람들은 이에 무관심했던 것처럼, “당시에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6:4).” 우린 모두 닥치기 직전까지 듣지 않는다.

 

예수님이 설교하신 것처럼,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마 24:37-39).” 우리는 모두 ‘그 때’를 알지 못함으로,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40-41).” 바로 그 직전까지도 ‘에이, 설마!’ 하는 소릴 하는데 저마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하면서도 ‘설마’ 한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42).”

 

오늘도 다를 게 없어서 우린 또 방심한다. 이에 본문은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물이 북쪽에서 일어나 물결치는 시내를 이루어 그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것과 그 성읍과 거기에 사는 자들을 휩쓸리니 사람들이 부르짖으며 그 땅 모든 주민이 울부짖으리라(렘 47:2).” 이는 앞서도 살핀 것처럼 그 시점을 ‘바로가 가사를 치기 전’으로 하고 있는데, 블레셋에 대하여 언급하는데서 ‘바로가 가사를 공격한 때’가 언제인지가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주전 609년 애굽의 바로 느고의 원정과 연계되어 바로 느고가 북쪽으로 진군하여 므깃도에서 유다 군대를 패배시키고 또 요시야를 전사시켰다. “요시야 당시에 애굽의 왕 바로 느고가 앗수르 왕을 치고자 하여 유브라데 강으로 올라가므로 요시야 왕이 맞서 나갔더니 애굽 왕이 요시야를 므깃도에서 만났을 때에 죽인지라(왕하 23:29).” 역사적으로 이 시기를 살피는 것은 이를 전후하여 이와 같은 경고의 말씀이 실현되기까지 누구도 이 말을 듣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곧 우리도 우리의 어떤 문제가 결국은 터지고 나서야 돌아보는 것과 같다.

 

이를 오늘 성경은 ‘물이 북방에서 일어나 창일하는 시내를 이루었다’고 하였다. 이 구절은 바벨론 군대의 등장을 묘사하는 것이 분명하다. 이사야는 이와 유사한 표현을 앗수르 군대에도 적용하였다. “그러므로 주 내가 흉용하고 창일한 큰 하수 곧 앗수르 왕과 그의 모든 위력으로 그들을 뒤덮을 것이라 그 모든 골짜기에 차고 모든 언덕에 넘쳐 흘러 유다에 들어와서 가득하여 목에까지 미치리라 임마누엘이여 그가 펴는 날개가 네 땅에 가득하리라 하셨느니라(사 8:7-8).” 어쩌면 예레미야는 여기서 유프라테스 강의 범람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렇듯 그게 무엇인든지, 언제라도 주가 역사하신다는 것이다.

 

‘모든 것’은 히브리어로 가득함, 충만함이란 뜻으로 풍요로운 수확이나 부(富)를 가리킨다. 다시 본문을 보면 “보라 물이 북쪽에서 일어나 물결치는 시내를 이루어 그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것’과 그 성읍과 거기에 사는 자들을 휩쓸리니” 하고 경고하고 있다(2). 그때에야 “사람들이 부르짖으며 그 땅 모든 주민이 울부짖으리라” 하는 데서 아차, 하고 두려움이 인다. ‘물’은 많은 사람과 많은 민족들을 의미한다. “또 천사가 내게 말하되 네가 본 바 음녀가 앉아 있는 물은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이니라(계 17:15)." ‘물’은 또한 큰 위협적인 재난을 뜻한다.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물들이 내 영혼에까지 흘러 들어왔나이다

(시 69:1).

 

곧 ‘그들은’ 북방에서 일어났다. 거기서 아름다운 기후와 비를 쫓는 바람이 오리라고 말한다. 지금은 차가운 기후에서 발생된 무서운 폭풍우가 오리라고 한다. 갈대아의 군대가 홍수처럼 그들의 땅에 밀려올 것이다. 이 사건은 예루살렘이 파멸되기 전에 일어났다. 이 시기는 이스라엘에서 그다랴의 통치 때로 갈대아 군대가 이스라엘에서 퇴각한 직후이다. 블레셋의 영토는 매우 적은 것이어서 이같이 막대한 군대에 의해 순식간에 점령될 수밖에 없다.

 

이 침략으로 블레셋인들은 당황할 것이다. 사람들은 싸울 기력을 잃고 주저앉아 어린아이처럼 울 것이다. ‘그 땅 모든 거민이 애곡할 것이다.’ 그러므로 각처에서 통곡 소리가 난다. “군마의 발굽 소리와 달리는 병거 바퀴가 진동하는 소리 때문에 아버지의 손맥이 풀려서 자기의 자녀를 돌보지 못하리니(렘 47:3).” 죽고 사는 문제가 이처럼 늘 코앞에 닥쳐 들숨과 날숨 같이 매순간 우릴 위협한다. 그것은 ‘말발굽 치는 소리와 달리는 병거 바퀴 울리는 소리’ 같다. 그런데 듣지 못한다. 낌새를 눈치 채지 못한다. 그와 함께 적이 휩쓸고 들어온다.

 

그 순간 ‘부모가 그 자녀를 돌아보지 못하리라.’ 누가 누굴 챙길 수 있는 겨를이 없다. 안전을 서로 돌볼 수 없다. 심지어는 어느 지경에 처했는지도 관심을 갖지 못할 것이다. 그들의 ‘손에 힘이 빠져서’ 어린 자녀들을 함께 데리고 가지 못할 것이다. 자녀들을 돌보지 못해 방치한다. 실제로 그런 상황 속에서 속수무책인 가정들이 내 곁에 여럿 있다. 두 아이는 방학 동안 방치된다. 부모는 이혼하여 각자의 길을 산다. 아이를 맡은 엄마는 돈이 궁하여 ‘도우미’로 뛴다. 밤새 술로 시달리다 낮 동안은 혼수상태다. 아이들은 피곤에 떨어져 잠든 엄마를 뒤로 하고 각자의 핸드폰으로 게임에 빠져든다. 정신적으로도 정상이 아니라고 하는데 어찌 돌볼 기력이 없다.

 

혼이 빠져서 자기들의 분신이라던 자녀들까지 내팽개쳤다. 그렇게 한쪽은 떠나고 한쪽이 아이를 맡았다. 아이가 자라 성인이 되어서도 지능은 그 순간에 머물고 있다. 서울대, 연고대를 다니던 아이가 중도에 학업을 중단하고 은둔형외톨이로 살아간다. 강박과 조현이란 진단을 받고 입원과 퇴원을 반복한다. 결국은 돈이겠다 싶어 부모는 각자 돈벌이에 여념이 없다. 그러므로 누구는 자녀들에게 너무 지나치게 집착하고, 누구는 방치하듯 포기했다. 저들 모두 자녀 이야기로 운다. 어느 쪽도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은 같다. 그렇게 일이 터지기까지 앞서 여러 번 경고의 신호음이 울리듯 복음은 전해졌다. 저들의 공통점은 모든 게 닥치기 전까지 이를 부정하였다는 것이다. 물론 지금도 다를 바 없지만….

 

그렇듯 ‘블레셋 땅이 약탈을 당하여 황폐하리라.’ 하는 오늘 본문의 경고가 우리 현실에 울린다. “이는 블레셋 사람을 유린하시며 두로와 시돈에 남아 있는 바 도와 줄 자를 다 끊어 버리시는 날이 올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갑돌 섬에 남아 있는 블레셋 사람을 유린하시리라(4).” ‘두로와 시돈에 남아 있는 바 도와 줄 자를 다 끊어’ 우리 곁의 실제 삶이 드러난다. 모든 도움의 손길도 끊겨버렸음을 나타내고 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이 블레셋을 점령한 것은 늘 도움을 주던 페니키아를 공격하기 위한 사전 조치였다. 페니키아의 주요한 두 도시 ‘두로와 시돈’은 주전 594년과 587년, 그리고 그 이후에도 계속 바벨론에 저항했다. 느부갓네살은 예루살렘을 함락시킨 후 두로를 포위하여 공격하였다.

 

오늘의 모든 과정은 과거의 역사가 보여주는 실체다. ‘갑돌 섬’은 지중해 해변 블레셋의 땅이다. “여호와께서 갑돌 섬에 남아 있는 블레셋 사람을 유린하시리라.” 블레셋 사람들은 이곳에서 나와 팔레스틴 연안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블레셋의 멸망 이후 두로와 시돈도 최종적으로 항거하다 마침내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했다. 그리하여 “가사는 대머리가 되었고 아스글론과 그들에게 남아 있는 평지가 잠잠하게 되었나니 네가 네 몸 베기를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5).” 이는 곧 가사에 거하는 주민들이 깊은 슬픔과 곤경에 처해 있음을 나타낸다. 그들이 그러한 슬픔과 곤경 속에서 머리털을 밀었다. 자기 몸에다 깊은 상처를 내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괴로움을 나타낸다.

 

한편으론 우상 숭배의 일환으로, “정오에 이르러는 엘리야가 그들을 조롱하여 이르되 큰 소리로 부르라 그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은 그가 잠깐 나갔는지 혹은 그가 길을 행하는지 혹은 그가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 하매 이에 그들이 큰 소리로 부르고 그들의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들의 몸을 상하게 하더라(왕상 18:27-28).” 자신들의 신을 부르기 위해 몸을 자해하는 것이다. 그렇게 ‘아스글론과 그들에게 남아 있는 평지가 멸망되었다.’ 아스글론은 가사, 아스돗, 가드, 에그론 등 블레셋의 다섯 도시들 중의 하나이다.

 

이렇듯 성경의 역사적 지리적 배경을 살피고 찾아보면서 하나님의 뜻이 경고의 메시지와 함께 이루어지는 것을 알게 된다. “여호와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물의 머리이심이니이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물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사람을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대상 29:11-12).” 이에 대하여 시편의 시선은 항상 같다.

 

하늘이 주의 것이요 땅도 주의 것이라

세계와 그 중에 충만한 것을 주께서 건설하셨나이다

(시 89:11).

 

하여,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나는 이 말씀에서 항상 안정을 얻는다. 나는 주의 것이라는 것, 오늘의 내가 어떠하든지 나의 것이 아니라 주의 것으로 주가 함께 하실 것임으로 안도하는 것이다. 사실 헬리코박터균이 있어 1차 제균치료로 일주일간 항생제 복용을 했는데 두 달 뒤 이번에 검사에서 다시 또 2차 제균치료를 권하였다. 평소에도 진통제로 속이 울렁거리고 식은땀이 나면서 어지럼까지 느끼며 구토와 설사를 일으킬 때도 있는데, 어제 처방된 약을 들고 나는 기겁을 했다. 항생제가 각각 두 알씩 그 외 다른 약제까지 포함된 것을 하루 네 번, 열흘간 복용하라는 것이다. 우선은 곧 주일이라 혹시 몰라 주일 지나고 먹기는 먹어야 할 텐데…. 어제도 승모근, 어깨, 무릎 통증으로 주사를 맞으려고 하다가 하루 더 미루듯 참았다. 몸의 통증도 일이라면 일이라, 아픈 게 사역이란 생각이 들 정도인데, 가끔은 사는 게 참 고단할 뿐이다. 거기에 무릎 수술 후 아직도 휠체어 생활을 하는 아내를 밀고 산책을 하다, 아직도 가야 할 길을 생각하였다.

 

누구는 심한 우울을 호소하고, 누구는 가게로 힘겨워하고, 아이문제로 곧 중학교 배정이 있는데 정신과 진단을 요구 받을 뒤라 누구는 그저 울고, 이혼에 두 아이 다 정상적이지 못한 상태로 혼자 감당해야 하는 이나…. 우리의 이러한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도 괴로워하시는 일이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영광을 위하여 나를 너희를 노략한 여러 나라로 보내셨나니 너희를 범하는 자는 그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이라 내가 손을 그들 위에 움직인즉 그들이 자기를 섬기던 자들에게 노략거리가 되리라 하셨나니 너희가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리라(슥 2:8-9).”

 

우린 다만 주께 아뢰어,

주는 주의 종들이 받은 비방을 기억하소서

많은 민족의 비방이 내 품에 있사오니

여호와여 이 비방은 주의 원수들이

주의 기름 부음 받은 자의 행동을 비방한 것이로소이다

(시 89:50-51).

 

그렇게 때가 가까움을 알고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8-9).” 오늘도 이처럼 말씀 앞에서 블레셋에 관한 경고의 말씀에서 우리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경고를 아니 사랑의 외침을 듣는다. 애통함으로 회개할 수 있는 기회는 ‘그 일이 일어나기 전에’ 곧 오늘의 이런저런 어려움이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닌 것을 앎으로, “그 때에 너희가 나를 부르리라 그래도 내가 대답하지 아니하겠고 부지런히 나를 찾으리라 그래도 나를 만나지 못하리니 대저 너희가 지식을 미워하며 여호와 경외하기를 즐거워하지 아니하며 나의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나의 모든 책망을 업신여겼음이니라(잠 1:28-30).”

 

부디,

 

하나님께 노래하며 그의 이름을 찬양하라

하늘을 타고 광야에 행하시던 이를 위하여

대로를 수축하라 그의 이름은 여호와이시니

그의 앞에서 뛰놀지어다

(시 68:5).

 

이는,

 

하나님이 일어나시니 원수들은 흩어지며

주를 미워하는 자들은 주 앞에서 도망하리이다

연기가 불려 가듯이 그들을 몰아내소서

불 앞에서 밀이 녹음 같이

악인이 하나님 앞에서 망하게 하소서

의인은 기뻐하여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기뻐하고 즐거워할지어다

(1-3).

 

오늘도 우리로 주 앞에 기뻐하게 하시기를,

 

주께서 말씀을 주시니

소식을 공포하는 여자들은 큰 무리라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셀라)

(11, 19).

 

그러므로

 

네 하나님이 너의 힘을 명령하셨도다

하나님이여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것을 견고하게 하소서

(2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