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많은 인자와 구원의 진리로 내게 응답하소서

하현. 2026. 1. 17. 04:42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그의 노여워함의 허탄함을 아노니 그가 자랑하여도 아무 것도 성취하지 못하였도다

렘 48:30

 

여호와여 나를 반기시는 때에 내가 주께 기도하오니 하나님이여 많은 인자와 구원의 진리로 내게 응답하소서

시 69:13

 

 

모압에 대한 정의다. 심판이 임하였다. 모압을 파멸한 이는 모든 군대를 다스리시는 ‘만군의 여호와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다. “모압에 관한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오호라 느보여 그가 유린 당하였도다 기랴다임이 수치를 당하여 점령되었고 미스갑이 수치를 당하여 파괴되었으니(1).” 요즘 부쩍 느끼고 묵상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하심이다. 그는 그의 백성을 괴롭게 하는 것들에 대하여 심판하신다.

 

원래 이스라엘은 모압과 상관도 말 것을 명령하셨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모압을 괴롭히지 말라 그와 싸우지도 말라 그 땅을 내가 네게 기업으로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롯 자손에게 아르를 기업으로 주었음이라(신 2:9).” 그러므로 모압의 파멸은 하나님의 일이다. 말씀하신 대로 정확하게 그의 일을 이루시는 분이다. “파멸하는 자가 각 성읍에 이를 것인즉 한 성읍도 면하지 못할 것이며 골짜기가 멸망하였으며 평지는 파멸되어 여호와의 말씀과 같으리로다(렘 48:8).”

 

우리 삶에서 모압은 무엇일까? 나로 대적하게 하는 ‘모든 의미들’이겠다. 가령 아브라함에게 조카 롯은 가련하였다. 그의 부친이 죽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갈 바를 알지 못하면서도 나아갈 때, 롯이 따라나섰다. 이는 귀히 여길 수 있겠다. 그러나 롯이 성장하고 서로가 부유하여 다툼이 일자, 아브라함은 가만히 갈라질 것을 권하였고 롯은 소돔으로 갔다.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창 13:10).” 하여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주하였고 롯은 그 지역의 도시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12).”

 

소돔이 멸망할 때 롯은 두 딸과 함께 구원 받았다. 후에 롯을 술 취하게 하여 두 딸이 각각 동침하여 큰 딸이 낳은 후예가 모압이 되었다. “큰 딸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모압이라 하였으니 오늘날 모압의 조상이요(창 19:37).” 그리고 작은 딸의 후예가 암몬이다(38). 결국 모압은 롯의 후예들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같이 조카 롯은 갈데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왔다. 오늘 본문은 이에 대한 심판을 하나님이 강행하시는 내용이다. ‘모압에 대한 말씀이라’ 하고 시작하고 있다.

 

모압은 사해 동편에 위치하였다. 남쪽으로는 세렛 강가에 닿고 북쪽으로는 아르논 강이 있고 서쪽으로는 사해, 동쪽으로는 사막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 작은 왕국의 경계가 아르논 강을 넘어갈 때도 있었다. 본문에 언급되고 있는 도시들은 아르논 북부에 있던 도시들이다. 모압의 팽창기에 속했던 지역이다. 출애굽 당시 아르논 북부 지역은 아모리 족속 시혼 왕의 지배 하에 있었다. 그 후 이 지역은 르우벤과 갓 지파에 의해 정복되었다(민 32:33-38). 모압 왕 메사 당시(주전 9세기)에는 이 지역이 모압의 영토로 넘어갔다.

 

모압의 멸망에 대한 예언이 소개되면서, ‘슬프다 느보여, 기랴다임이 수치를 당하여’ 하고 기술한다. 느보는 르우벤 지파의 한 도시였다가(민 32:3, 38), 모압의 도시가 되었다. 사해 북단 동쪽으로 약 19km 떨어진 느보 산 부근이었을 것이다. 기랴다임 역시 르우벤 지파의 도시였으나, 그곳에서 발굴된 모압 비문에서 밝혀진 바 이곳도 모압의 도시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모압에 관하여 ‘파멸하는 자’가 이를 것이라고 하여 심판을 예언하는 바, “파멸하는 자가 각 성읍에 이를 것인즉 한 성읍도 면하지 못할 것이며 골짜기가 멸망하였으며 평지는 파멸되어 여호와의 말씀과 같으리로다(8).” 곧 그 파멸에 사용될 도구로 그들을 추격하는 칼을 가지고 올 것이라 한다. “너도 조용하게 되리니 칼이 너를 뒤쫓아 가리라(2).” 또한 “날이 이르리니 내가 술을 옮겨 담는 사람을 보낼 것이라 그들이 기울여서 그 그릇을 비게 하고 그 병들을 부수리니(12)” 하고 은유적으로 진술되고 있다.

 

그리하여 모압인들의 일부는 도주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포로로 사로잡혀 갔다. ‘파괴하는 자들’은 스스로 선동을 하여 모압인을 괴롭게 하였다. 그들은 모압의 중요한 성읍의 하나인 헤스본에서 모해한다. 그들이 목적하는 바는 바로 모압 나라의 파멸이다. 그러므로 본문에 이르기를 ‘와서 그를 끊어서 나라를 이루지 못하게 하자’고 한다. 침략자들을 돌이킬 수 있는 아무런 방법이 없다. 그들이 온 것은 모압을 약탈하려는 것뿐 아니라 모압을 파멸하기 위한 것이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침략자들에게 모압을 철저히 유린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여호와의 일을 게을리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요 자기 칼을 금하여 피를 흘리지 아니하는 자도 저주를 받을 것이로다(10).” 결국 ‘여호와의 일을 태만히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한다. 이 피를 흘리는 일, 파괴하는 일을 태만히 하는 자들, 악을 악으로 응징하여 그 참상이 혹독함을 알 수 있다. ‘여호와의 일’은 때로 우리가 상상하는 그 이상의 참혹하고 돌이킬 수 없는 끝으로 치닫게 하신다. 악은 악으로 철저히 이 일을 수행함으로 악을 멸한다.

 

갈대아인들이 이 책임을 맡았다. 그것은 은밀한 지시에 의한 것이다. 그들은 모압 족속들을 파멸할 책임을 맡았다. 어리석은 동정으로 칼을 금하여 피를 흘리지 않고 자비를 베풀어서는 안 된다. 모압에게 베풀 자비가 없다. 사울 왕이 아말렉 족속을 봐줌으로 또한 아합이 벤하닷을 가게 하였음으로 스스로 저주를 자초하였던 일을 기억한다. 칼을 불러들여 스스로 저주를 초래하는 결과이다.

 

오늘 날 서로를 적대시하며 야욕을 일삼는 강대국이나 가난한 나라들의 소요와 참상은 이를 묵상하는 데 이해를 더한다. 가령 최근에 이란에서 반정부시위가 유혈사태로 번져 수천 명의 자국민을 사살하는 장면이 생중계되는 것을 본다. 이에 미국이 개입하려 하며 기회를 엿보고 있다. 일련의 현실이 성경을 묵상하는 데 있어 교훈을 더한다. 악이 악을 처단하고 이를 또 봐줄 때, ‘너의 생명이 그의 생명을 대신하여 죽으리라’ 하고 오늘 말씀은 일갈한다. “여호와의 일을 게을리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요 자기 칼을 금하여 피를 흘리지 아니하는 자도 저주를 받을 것이로다(10).”

 

결국은 교만이 아집으로 스스로를 파멸에 이르게 한다. 앞서 애굽과 블레셋에 이어 모압에 대한 이야기다. “오호라 느보여 그가 유린 당하였도다 기랴다임이 수치를 당하여 점령되었고 미스갑이 수치를 당하여 파괴되었으니(1).” 이는 스스로 자초한 일이다. 모압의 산들로 동시에 전략적 요충지였다.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은 교만이다. 교만은 회개할 기회를 저버린다. 스스로를 옳다고 여김으로 듣지를 않는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서도 모압에 회개를 촉구하셨다. “모압에 관한 경고라 하룻밤에 모압 알이 망하여 황폐할 것이며 하룻밤에 모압 기르가 망하여 황폐할 것이라(사 15:1).”

 

 

“우리가 모압의 교만을 들었나니 심히 교만하도다 그가 거만하며 교만하며 분노함도 들었거니와 그의 자랑이 헛되도다(사 16:6).”

 

이는 오늘 우리에게 향하신 선포다. 말씀은 설득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권고를 하는 게 아니다. 포고령이나 전쟁선포와 같이 우리의 의중을 따지지 않는다. 이를 억울하게 생각할 수 없는 것은 그동안 셀 수 없이 많은 경고와 기회와 기다림이 주어졌다. 많은 선지자와 사도들을 통하여 말씀하셨다. 그때마다 듣지 않고 외면하였던 게 교만이다. 모압의 멸망은 교만의 결정판이다. ‘모압의 교만을 들었나니 심히 교만하다 그가 거만하며 교만하며’ 하고 이사야는 선언하였다. “우리가 모압의 교만을 들었나니 심히 교만하도다 그가 거만하며 교만하며 분노함도 들었거니와 그의 자랑이 헛되도다.” 이것이 설마 오늘의 나는 아닐지? 우리 스스로의 옳다 여기는 일상은 아닐지?

 

공감능력이 없는 자들은 교만하기 때문이다. 교만은 나태한 영혼의 산물이다. 스스로 이룬 게 많고 이를 자부하는 마음이 은연중에 자신을 지배한다. 누가 뭐라 하면 순순히 인정하지 못한다. 잘못이 없다. 일련의 사법부 중계를 보면서 새삼 우리의 완고한 교만의 실태를 보고 있다. 사형이 구형되었을 때 실실 웃던 얼굴이 다른 사유에서 유죄로 판단되어 5년형이 처해질 때는 얼굴이 굳어졌다. 길바닥에서는 여전히 지지 세력들이 자신들의 주장으로 그 세계에 갇혀 소리 지른다. 지옥의 단면을 보는 듯하다. 회개가 없고 뉘우침도 반성도 없이 원망과 탓만 하는 곳이다.

 

성경은 우리를 부르신다.

 

너희 모든 성도들아 여호와를 사랑하라

여호와께서 진실한 자를 보호하시고

교만하게 행하는 자에게 엄중히 갚으시느니라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 강하고 담대하라

(시 31:23-24).

 

세상이 아무리 악으로 건재한 것 같다하여도,

 

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눈은 낮추시리이다

(18:27).

 

결국 하나님은 우리의 미래를 확정하셨다. 오늘 2절이 이를 역설적으로 다루고 있다. “모압의 찬송 소리가 없어졌도다 헤스본에서 무리가 그를 해하려고 악을 도모하고 이르기를 와서 그를 끊어서 나라를 이루지 못하게 하자 하는도다 맛멘이여 너도 조용하게 되리니 칼이 너를 뒤쫓아 가리라(2).”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에게 이르시길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이에 아브라함은 조카를 어찌 하기보다 떨어져 거리를 두었다. 건드리지 않고 다툼을 멀리했다. 그런데 우린 더러 악을 도모하기까지 묵인한다. 곁에 그대로 두거나 그 곁에서 산다. ‘나는 안 그런다’고 하지만 쫓아내지 않음으로 가시가 된다. 가나안을 정복할 때 ‘괜찮겠지’ 하고 놓아둔 것들로 저들이 올무에 걸렸다.

 

“확실히 알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민족들을 너희 목전에서 다시는 쫓아내지 아니하시리니 그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며 덫이 되며 너희의 옆구리에 채찍이 되며 너희의 눈에 가시가 되어서 너희가 마침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이 아름다운 땅에서 멸하리라(수 23:13).”

 

이처럼 ‘서로가 다름을 인정한다’는 나름의 허용과 타협과 ‘더불어 사는 세상’에서 우린 알아야 한다. “모압으로 취하게 할지어다 이는 그가 여호와에 대하여 교만함이라 그가 그 토한 것에서 뒹굴므로 조롱 거리가 되리로다(26).” 그런 저들을 인정하고 서로 다름이라 하여 방치하다 어느새 우리가, 교회가 그런 행태로 변질되어간다. 교인이라 하면서 선뜻 자신을 신자라 하지 못한다. 신자라고 여기면서도 제자로는 살기 싫어한다. 적당하게 ‘종교 하나쯤 가지고 사는 위안’ 정도로 족하게 여긴다. 알다 보니 내 곁에 교회를 다니네, 기독교인이네 하면 할 거 다하며 사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여느 종교 가운데 하나를 스스로 선택하여 믿는 자 행세를 하는 경우다.

 

이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모압 주민아 두려움과 함정과 올무가 네게 닥치나니 두려움에서 도망하는 자는 함정에 떨어지겠고 함정에서 나오는 자는 올무에 걸리리니 이는 내가 모압이 벌 받을 해가 임하게 할 것임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43-44).”

 

여기에 스스로는 그럴 리 없다고 장담하는 자는 화 있을 것이다. 천하의 바울도 스스로를 끊임없이 돌이켰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설마 바울이 믿음이 없어서 버림을 당할까 두려웠을까? 아니다. 저는 단호하여서,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15:31).” 하물며 오늘의 나는 어떠한지? 할 만큼하고 있고 이만하면 됐다, 하는 심정으로 신앙을 가졌다고 자부하며 살고 있지는 않은지?

 

말씀은 일갈한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 3:1-2).” 하실 때 나는 실상에서 어떠한가? 돌아봐야 한다. 보면 교회도 가고 점(占)치러도 가고, 세상이 추구하는 것으로 주의 복이라고 우긴다. 교회도 이를 부추겨 이 땅의 행복을 약속한다. 그러나 다시 성경은 일러,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 3:12-13).”

 

어제 아이는 응급실로 급히 갔다. 기형으로 태어나 총망 받던 아이아빠는 오직 아이를 돌보느라 자신을 희생하였다. 제 몸을 가누지 못하는 아이라도 키가 크고 자기 고집도 있어서 목에 관을 뚫고 옆구리에 튜브를 연결하고 살고 있는데… 두 부부는 어느새 50이 넘어서면서 아이를 건사하는 게 힘에 부친다. 그러니 기도뿐이라, 일생을 눈물로 성전을 지킨다. 상대적으로 두 아이를 둔 가정의 어디는 이번에 아이들이 무슨 대학에 가고 어디서 두각을 나타냈다며 축복을 운운하고 자축한다. 근사한 데서 와인 잔을 기울이고 곧 아이들은 외국으로 나가 공부할 것인가, 그러느라 신앙은 싱거워서 아이들은 각자의 길로 가고 부부도 적당히 누리며 자칭 종교인으로 산다.

 

두 가정을 일반화할 수 없으나 교만과 순종은 상충하고 겸손과 자만은 대립한다.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눅 12:19-21).” 할 때에 성경의 관점은 일관되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골 3:5-6).”

 

가깝게도 나는 늘 이런 도전을 받는다. 교회를 할 거면 좀 더 ‘앞날을 바라보고’ 하면서 누가 어디에 어떤 형태로 투자해서, 그래야 성도들도 오고 교회가 좀 발전이 있지… 하면서 혀를 끌끌 찬다. 본인은 혹여 교회에서 중직이라도 맡길 것 같으면 혹시 몰라서 사양하고 늘 손님처럼 멀찍이 다닌다. 혼자서 열심히 성경도 보고 연구하고 동시에 늘 어디 부동산과 투자와 돈벌이를 구상하며 늘 보면 참 열심히 산다. 그러다 불쑥 내게 하는 말이 이제 60인데 아직도 남은 날을 위해 어디 돈을 좀 모아야지, 하면서… 하긴 저들 말이 맞다. 그러다 나 역시 한숨이 나기도 하는데,

 

나는 설 곳이 없는 깊은 수렁에 빠지며

깊은 물에 들어가니 큰 물이 내게 넘치나이다

내가 부르짖음으로 피곤하여 나의 목이 마르며

나의 하나님을 바라서 나의 눈이 쇠하였나이다

(시 69:2-3).

 

기도할 때도 염려가 앞을 가리는 가운데,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우매함을 아시오니

나의 죄가 주 앞에서 숨김이 없나이다

주 만군의 여호와여 주를 바라는 자들이

나를 인하여 수치를 당하게 하지 마옵소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를 찾는 자가

나로 말미암아 욕을 당하게 하지 마옵소서

(5-6).

 

혹여 나의 아둔하고 몽매함이 하나님의 뜻을 저해할까 하여,

 

여호와여 나를 반기시는 때에 내가 주께 기도하오니

하나님이여 많은 인자와 구원의 진리로 내게 응답하소서

(13).

 

주께 아뢰고 응답으로 산다.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선하시오니 내게 응답하시며

주의 많은 긍휼에 따라 내게로 돌이키소서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서 숨기지 마소서

내가 환난 중에 있사오니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16-17).

 

그러할 때,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위대하시다 하리니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

(30-31).

 

그리하여,

 

곤고한 자가 이를 보고 기뻐하나니

하나님을 찾는 너희들아 너희 마음을 소생하게 할지어다

(3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