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모든 사람에게 전하기까지 나를 버리지 마소서

하현. 2026. 1. 19. 04:58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 날 그 때에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찾을지라도 없겠고 유다의 죄를 찾을지라도 찾아내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남긴 자를 용서할 것임이라

렘 50:20

 

하나님이여 나를 어려서부터 교훈하셨으므로 내가 지금까지 주의 기이한 일들을 전하였나이다 하나님이여 내가 늙어 백발이 될 때에도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가 주의 힘을 후대에 전하고 주의 능력을 장래의 모든 사람에게 전하기까지 나를 버리지 마소서

시 71:17-18

 

 

뜻하지 않은 일을 겪으면서 더러는 자기 우물에 갇히고 누구는 더 넓은 대지에 던져진다. 비로소 못 보던 것을 보고 그동안 느껴본 적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은 동일한데, 우물과 대지의 차이는 확연하다. 어려움을 겪거나 즐거움을 겪거나 우리는 일찍이 하나님의 돌보심으로 이것을 알고 있었다. 하여 지혜자는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 7:14).” 곧 이 둘은 항상 병행하여 온다. 그러므로 즐거울 때는 찬송하고 어려울 때는 돌아보아 주께 고한다. 이것으로 자신의 신앙을 가늠할 수 있다.

 

더러는 거꾸로 간다. 즐거우면 주를 잊었거나 멀리하고 힘들 때면 세상으로 기웃거리며 스스로의 위안을 찾는다. 이를 성경은 교만이라 한다. 곧 자기주도적인 삶이란 우리 신앙의 본질과 상충한다. 교만에 대하여 오늘 본문은 앗수르며 바벨론의 멸망에 있어 그 원인으로 판단하였다. “교만한 자가 걸려 넘어지겠고 그를 일으킬 자가 없을 것이며 내가 그의 성읍들에 불을 지르리니 그의 주위에 있는 것을 다 삼키리라(32).” 곧 우리 스스로의 주도적인 삶이 아니라 주를 의뢰함으로 주께서 우리를 모태에서부터 알게 하셨음을 시편의 시각으로 보여준다.

 

주 여호와여 주는 나의 소망이시요

내가 어릴 때부터 신뢰한 이시라

내가 모태에서부터 주를 의지하였으며

나의 어머니의 배에서부터 주께서 나를 택하셨사오니

나는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시 71:5-6).

 

그러므로 우리는,

 

나의 혀도 종일토록

주의 의를 작은 소리로 읊조리오리니

나를 모해하려 하던 자들이

수치와 무안을 당함이니이다

(24).

 

가장 어려운 게 자신을 직시하고 이를 인정하며 순응하는 일인 것 같다. 보면 노인들의 경우 저마다의 남은 고집으로 하나하나 무너지는 것 같다. 죽어도 휠체어는 타지 않는다. 기저귀를 차지 않는다. 변기를 사용하지 않으려 한다. 끝까지 할 수 있을 것 같아 운전면허를 반납하지 않는다. 그러다 어느 순간에 이르러 어쩔 수 없다고 여길 때마다 한 뼘씩 훅, 하고 더 늙는 것 같다. 그러는 동안 가족이든 누가 수발을 드느라 힘에 겹다. 이를 곁에서 보면서 어떻게 설명하기 어려운 우리 안의 어떤 아집과 교만을 느끼고는 한다. 남의 입장으로는 알 수 없다. 당사자만 아는, 그것도 지극히 개인적으로 느끼거나 변하는 것 같다. 기어이 죽음에 굴복할 때까지 그러는 것 같다.

 

오늘 본문으로 바벨론의 멸망과 그 심판의 결과를 보면서 애굽이나 앗수르나 암몬이나 모압이나 … 모두의 멸망이 하나의 의미로 귀결되는 것 같다. 이를 오늘 본문은 외치게 한다. “너희는 나라들 가운데에 전파하라 공포하라 깃발을 세우라 숨김이 없이 공포하여 이르라 바벨론이 함락되고 벨이 수치를 당하며 므로닥이 부스러지며 그 신상들은 수치를 당하며 우상들은 부스러진다 하라(2).” 곧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와 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앗수르의 왕을 벌한 것 같이 바벨론의 왕과 그 땅을 벌하고 이스라엘을 다시 그의 목장으로 돌아가게 하리니 그가 갈멜과 바산에서 양을 기를 것이며 그의 마음이 에브라임과 길르앗 산에서 만족하리라(18-19).”

 

주의 백성을 위한 거였다. 이내 저들은 멸망할 것이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 날 그 때에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찾을지라도 없겠고 유다의 죄를 찾을지라도 찾아내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남긴 자를 용서할 것임이라(20).” 이 엄연하고 지극히 차등이 있는 섭리 가운데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끝까지 버려두지 않으신다는 것을 확인한다. 더러는 저들 손아귀에서 온갖 고통을 당하는 것 같고 그것으로 물들어 우상숭배와 이방의 삶으로 끝장날 것 같은데, 그러는 동안 교만한 자를 물리치심이었다.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교만한 자여 보라 내가 너를 대적하나니 너의 날 곧 내가 너를 벌할 때가 이르렀음이라(31).”

 

그렇게 해서 “교만한 자가 걸려 넘어지겠고 그를 일으킬 자가 없을 것이며 내가 그의 성읍들에 불을 지르리니 그의 주위에 있는 것을 다 삼키리라(32).”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이스라엘 자손과 유다 자손이 함께 학대를 받는도다 그들을 사로잡은 자는 다 그들을 붙들고 놓아 주지 아니하리라(33).” 그러는 이유가 하나님을 부르고 찾고 의지하게 하려 하심이었으니 “그들의 구원자는 강하니 그의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라 반드시 그들 때문에 싸우시리니 그 땅에 평안함을 주고 바벨론 주민은 불안하게 하리라(34).” 그리하여 결국은 주의 백성만이 남고 열국의 모든 이방족속은 사라질 것이다. 이로써 구원은 주께 있음이고 우리는 주를 찬송하게 하심이다.

 

하여,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 날 그 때에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찾을지라도 없겠고 유다의 죄를 찾을지라도 찾아내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남긴 자를 용서할 것임이라(20).”

 

더는 우리 죄악은 아무 상관도 없다. 이는 주가 남긴 자를 용서하셨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남은 자 사상’은 오늘을 사는 데 있어 신앙을 온전히 붙들게 한다. 어느 때보다 말씀은 풍성하고 종교의 자유는 개별적인 자기 선택의 범주가 되어 원만하다. 누구라도 교회를 선택하고 종교도 자기 방식으로 고를 수 있다. 마음만 먹으면 듣거나 직접 말하기가 수월하여 ‘개인방송’도 얼마든지 가능한 시대에 산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혼탁하고 혼미한 진리부재의 시대를 살고 있다. 이에 대하여,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마 24:4-6).”

 

이는 오늘을 두고 하신 말씀 같이 온갖 신앙과 교파가 발에 치일 정도로 많다. 교회도 여기 저기 내키는 곳으로 옮겨갈 수 있고, 스스로의 생각이나 학식으로 목사의 설교나 지적수준을 평가할 수 있다. 가량 내 곁의 누구는 교회에 참 열심인데, 여러 주제로 성경공부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 그런데 꼭 무슨 말을 하다보면 설교가 어떻고 그 깊이가 어떻고, 하는 식으로 평가하는 일은 예사다. 너무 감성적이네, 초신자위주로 설교하네, 본문의 깊이가 없네, 하는 식이라 나는 종종 듣고 있기조차 민망하다. ‘그럴 거면 차라리 너도 자지!’ 하였던 어릴 적 부친의 말이 떠오른다. 중학교 때였나? 한참 교회에 열심일 때 우리 또래는 수요예배 금요예배도 나가고 새벽예배까지 참석하곤 하였다. 어느 날 밥상머리에서 무슨 얘기 끝에 예배시간에 누가 졸고, 누군 딴 짓을 하고, 아예 잠을 자는 사람도 있다면서 아버지 앞에 말했다. 그때 들은 말이다. ‘차라리 너도 자지 그랬니!’

 

오늘 여기 예레미야를 통해 주어진 바벨론에 대한 말씀이 있다. 모든 일은 말씀대로 이루어졌다. 한 말씀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한다. 바벨론 왕은 예레미야에게 매우 호의를 베풀었다. 그러나 그는 바벨론의 파멸을 예언해야 했다. 사사로운 정이나 감정에 이끌려 이를 피할 수 없다. 심지어 아닌 것을 알면서 하나님의 화평을 약속할 수 없다. 이는 거짓 선포이다. 바벨론 파멸이 도래하였다. 이 소식을 은폐해선 안 된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알게 하시기 위하여 심판을 행하셨음’을 우리는 만민이 알게 해야 한다(시 9:16). 바벨론의 우상들이 파괴될 것이다. 벨과 므로닥은 바벨론의 으뜸가는 신들이다. 이 신상들이 수치를 당하며 부스러질 것이다. 이를 전달해야 한다. 국토는 파괴될 것이고, 메데와 고레스를 경유하여 바벨론을 공략한 앗수르로부터 민족이 일어나서 바벨론을 황폐시킬 것이다.

 

바벨론을 칠 백성은 바벨론의 북쪽에 위치하였다. ‘모든 재앙은 북으로부터 온다’는 말처럼 인류의 역사는 이를 증명한다. 하나님은 로마를 칠 민족들을 더 먼 북쪽에 예비하셨다. 북방 민족들인 코트족과 반달족이 옛 로마를 몰락시켰던 것이다. 상대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말씀과 위로는 뚜렷해진다. 실제 바벨론에게 귀환할 때에 유다의 두 지파에는 이스라엘 열 지파에 속한 사람들이 섞여 있었다. 그들은 돌아올 것이다. 그들의 회개와 변화에 대한 약속이 다른 약속들을 이루는 통로가 된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 날 그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돌아오며 유다 자손도 함께 돌아오되 그들이 울면서 그 길을 가며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구할 것이며 그들이 그 얼굴을 시온으로 향하여 그 길을 물으며 말하기를 너희는 오라 잊을 수 없는 영원한 언약으로 여호와와 연합하라 하리라(4-5).”

 

‘울며 여호와께 구할 것’은 우리의 공통된 결론 같다. 나도 자주 눈물을 흘리며 오늘의 감사에 예전의 회개가 더해지면 더한데, 내 곁의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자신의 오늘로 신세한탄을 하는 듯하다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던 날들을 감사하며 운다. 후회와 낙심으로 일그러진듯한데 실상은 감사의 눈물이 귀하다. 물론 자기 넋두리로 서러워 우는 사람들도 있다. 실상은 그렇게 시작한다. 그러다 못내 부끄러워 더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기도 하지만 신앙 안에서 서로 교제하는 사람들 같은 경우 대부분은 ‘그리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올린다.’ 그때의 뜨거운 눈물은 같이 울게 한다. 죄에 대한 회개의 눈물이요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기쁨의 눈물이다.

 

우린 그렇게 ‘여호와께 그 뜻이 무엇인지 문의할 것이라’ 하는 말씀과 같이 슬픔에만 잠겨 있지 않고 주의 위로를 찾는다. 가령 요즘 아내가 우울하다. 시무룩하니 힘들어한다. 하긴 거의 평생을 크게 아픈 적이 없던 사람이라, 무릎 수술 후 꼼짝없이 6주간을 휠체어로 생활하려니까 답답하면서 불안하기도 한 모양이다. 그 일로 온 가족이 서로 도우며 심지어 아들은 이번 달 말에 또 시험이 있는데도 식사를 차리고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돌리고 쓰레기를 내다버린다. 거반 집안일은 끝이 없다. 나는 장모의 변기를 치우고 약을 챙기고 방 안에 있어야 할 따뜻한 물이며 기타 필요한 것을 그때마다 가져다둔다. 아내는 휠체어로 쫓아다니며 일일이 참견하고 투덕거린다. 딸애는 직장생활과 결혼준비로 정신이 없다.

 

지난 토요일에는 장모와 아내, 두 휠체어를 끌고 아들과 딸과 같이 아파트 산책을 하고 큼지막한 빵집에 들러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그런 가운데도 시무룩해하는 아내에게 참다못해 뭐라 한 마디 했다. 감사할 것이 이렇게 많은데 지금 이 순간이 우울하다며 처져있으면 어쩌나, 하는 소리였다. 이해는 하지만 그러고 늙어가며 죽음을 기다리는 이도 있고 평생을 그리 살아야 하는 사람도 있다. 그래도 몇 주 뒤면 걸을 수 있고 곧 상견례도 해야 한다는데… 평소 어머니께 그러려니 하고 함부로 하던 것을 회개하라고도 했다. 감사할 것을 찾지 못하면 걱정과 염려가 봇물 터지듯 불만과 원망으로 채워진다. 나름 그래도 매일 아내 휠체어를 끌고 가까운 마트나 카페에도 가는데, 이 얼마나 감사한가? 그날은 할머니까지 모시고 나간다니까 아들도 따라나선 것인데…. 우리에겐 남이 알 수 없는 능력이 있다. 곧 애통하며 주를 구할 수 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

 

주의 위로보다 귀한 게 어디 있겠나? 하나님으로 나의 구주삼고 구하며 찾는 자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오늘은 늘 어렵다. 성경의 사람들도 같았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39-40).” 고로 오늘 우리의 온전함은 무조건적으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 것이고, 믿음으로 나아가는 일이다.

 

오늘은 마치 칼에 칼이 더해져 다 같이 고통 가운데 있으나 이는 교만을 꺾으려는 것이다. “칼이 자랑하는 자의 위에 떨어지리니 그들이 어리석게 될 것이며 칼이 용사의 위에 떨어지리니 그들이 놀랄 것이며 칼이 그들의 말들과 병거들과 그들 중에 있는 여러 민족의 위에 떨어지리니 그들이 여인들 같이 될 것이며 칼이 보물 위에 떨어지리니 그것이 약탈되리라(36-37).” 오늘 이와 같은 말씀으로 다시 한 번 주 앞에 엎드려서,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주께서 내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내 모든 죄를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사 38:17).” 곧 우리의 고통까지도 보장된 축복을 담보로 한다.

 

이를, “너희로 환난을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환난을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자기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에 나타나실 때에(살후 1:6-7).” 반드시 우리로는 주가 용서하심이 죄악이 없으리니, 오늘 말씀도 “그 날 그 때에는 … 죄악을 찾을지라도 없겠고 … 죄를 찾을지라도 찾아내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남긴 자를 용서할 것임이라(렘 50:20).” 그러므로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우리가 주를 앙망하오니 주는 아침마다 우리의 팔이 되시며 환난 때에 우리의 구원이 되소서(사 33:2).”

 

그러므로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내가 영원히 수치를 당하게 하지 마소서

주의 의로 나를 건지시며 나를 풀어 주시며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사 나를 구원하소서

(시 71:1-2).

 

우린 그 어떤 형편과 사정 가운데서도 주께 아룀으로,

 

주 여호와여 주는 나의 소망이시요

내가 어릴 때부터 신뢰한 이시라

내가 모태에서부터 주를 의지하였으며

나의 어머니의 배에서부터 주께서 나를 택하셨사오니

나는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5-6).

 

나로 그럴 수 있는 주의 자녀로 삼으셨으니,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더욱 찬송하리이다

(14).

 

할 때에,

 

내가 측량할 수 없는

주의 공의와 구원을 내 입으로 종일 전하리이다

내가 주 여호와의 능하신 행적을 가지고 오겠사오며

주의 공의만 전하겠나이다

하나님이여 나를 어려서부터 교훈하셨으므로

내가 지금까지 주의 기이한 일들을 전하였나이다

(16-18).

 

그리하여,

 

내가 주를 찬양할 때에 나의 입술이 기뻐 외치며

주께서 속량하신 내 영혼이 즐거워하리이다

나의 혀도 종일토록 주의 의를 작은 소리로 읊조리오리니

나를 모해하려 하던 자들이 수치와 무안을 당함이니이다

(23-2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