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

하현. 2026. 1. 22. 05:06

 

그들의 모든 악을 주 앞에 가지고 오게 하시고 나의 모든 죄악들로 말미암아 내게 행하신 것 같이 그들에게 행하옵소서 나의 탄식이 많고 나의 마음이 병들었나이다

애 1:22

 

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 주께서 빛과 해를 마련하셨으며 주께서 땅의 경계를 정하시며 주께서 여름과 겨울을 만드셨나이다

시 74:16-17

 

 

모든 것이 주의 것이다. 주의 것이 아닌 것이 없다. 생존도 주의 것이고 멸망도 주의 것이다. 예전의 화려했던 날들도 주의 것이고 오늘의 낡음과 누추함도 주의 것이다. 이를 바울은 아름답고 역설적으로 설교하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그러므로 우리가 어떠하든지 우리의 속사람은 새로워지게 하려하심으로,

 

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

주께서 빛과 해를 마련하셨으며

 

하늘이 주의 것이요 땅도 주의 것이라

세계와 그 중에 충만한 것을 주께서 건설하셨나이다

(시 74:16, 89:11).

 

오늘 여기 선지자의 눈물이 있다. 애가(哀歌)는 너무나 애절하기 때문에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자들의 슬픈 노래이다. 예루살렘의 재난이 너무나 무겁고 너무나 심한 괴롭힘을 당하였다. 그들은 시민으로서의 지위를 잃었다. 거민이 많던 성읍이 적막해졌다. 하여서 “슬프다 이 성이여!” 하고 운을 띄고, “전에는 사람들이 많더니 이제는 어찌 그리 적막하게 앉았는고!” 하며 한탄한다. “전에는 열국 중에 크던 자가 이제는 과부 같이 되었고, 전에는 열방 중에 공주였던 자가 이제는 강제 노동을 하는 자가 되었도다(1).”

 

이것은 놀라움이다.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이와 같은 놀람은 ‘무엇이 이러한 재난을 가져왔는가?’ 하고 묻는 것 같다. 그저 ‘슬프다! 슬프다!’ 하고 탄식할 뿐인데, 궁극적으로는 “그의 고통을 무서워하여 멀리 서서 이르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 견고한 성 바벨론이여 한 시간에 네 심판이 이르렀다 하리로다… 이르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이여 세마포 옷과 자주 옷과 붉은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민 것인데… 티끌을 자기 머리에 뿌리고 울며 애통하여 외쳐 이르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이 큰 성이여 바다에서 배 부리는 모든 자들이 너의 보배로운 상품으로 치부하였더니 한 시간에 망하였도다(계 18:10, 16, 19).”

 

결국 이 땅의 모든 성은 장망성과 같아서 파멸의 도시, 멸망의 성이다. 이 모든 파멸의 원인은 우상숭배로 인한 것이다. “그 날에 애굽 땅에 가나안 방언을 말하며 만군의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는 다섯 성읍이 있을 것이며 그 중 하나를 멸망의 성읍이라 칭하리라(사 19:18).” 예루살렘의 오늘도 그러하다. 이제는 백성들은 포로로 끌려갔다. 마치 이러한 결국은, “지혜가 길거리에서 부르며 광장에서 소리를 높이며 시끄러운 길목에서 소리를 지르며 성문 어귀와 성중에서 그 소리를 발하여 이르되 너희 어리석은 자들은 어리석음을 좋아하며 거만한 자들은 거만을 기뻐하며 미련한 자들은 지식을 미워하니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잠 1:20-22).” 하고 부지런히 외쳐 부르는 것 같다.

 

심판은 처참하고 슬픔이 난무하다. 성전은 하나님의 집이고 예루살렘은 안전하고 영원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그것도 할례 없는 이방인에 의해 파괴된 것이다. 이를 목격한 예레미야 선지자가 극도의 경악과 놀라움을 이 한마디의 말로 압축하고 있다.

 

“슬프다 이 성이여!”

 

‘슬프다’ 하는 말은 극히 비극적 상황을 묘사할 때 사용한다. 이사야도 이 성에 대하여, “신실하던 성읍이 어찌하여 창기가 되었는고! 정의가 거기에 충만하였고 공의가 그 가운데에 거하였더니 이제는 살인자들뿐이로다(사 1:21).” 하며 탄식하였다. 유다의 수도였던 예루살렘은 평상시 유다 민족의 구심점이었다. 상업 활동이 활발하였고 사람들의 발랄하고 즐거운 웃음소리가 가득하였다. 그러나 이제 참혹하고 황폐화되어 폐허로 변했으니, 예레미야는 이러한 파멸의 비극을, 예루살렘을 남편과 자식을 잃은 ‘과부’로 묘사하고 있다. 그녀는 옛날의 영광을 회상함과 동시에 현재의 한탄스러운 상황을 돌아보면서 애도한다. 이러한 과부로 표현하는 예화는 우리의 깊은 슬픔과 외로움과 절망을 한층 더 깊숙이 묘사하기 위한 것이다. 예루살렘은 에돔이나 모압 등 주변 나라를 지배하였으나 이제는 포로가 되었고 버림받았다.

 

“밤에는 슬피 우니 눈물이 뺨에 흐름이여 사랑하던 자들 중에 그에게 위로하는 자가 없고 친구들도 다 배반하여 원수들이 되었도다(애 1:2).” 이러한 절망은 예리미야의 마음을 상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주 앞에 호소한다. “그들의 모든 악을 주 앞에 가지고 오게 하시고 나의 모든 죄악들로 말미암아 내게 행하신 것 같이 그들에게 행하옵소서 나의 탄식이 많고 나의 마음이 병들었나이다(22).” 여기서 우린 과부와 같이 주 앞에 애통하며 우리의 상한 영혼을 고한다. 현실은 비극적으로, ‘유다는 사로잡혀 갔도다.’ 하고 진술한다. “유다는 환난과 많은 고난 가운데에 사로잡혀 갔도다 그가 열국 가운데에 거주하면서 쉴 곳을 얻지 못함이여 그를 핍박하는 모든 자들이 궁지에서 그를 뒤따라 잡았도다(3).” 포로로 잡혀간 유다 백성에게 눈 돌린다. 그들이 자발적으로 사로잡혀감으로서 살아남기는 했으나 예루살렘은 폐허로 남았다.

 

“너희가 이 땅에 눌러 앉아 산다면 내가 너희를 세우고 헐지 아니하며 너희를 심고 뽑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너희에게 내린 재난에 대하여 뜻을 돌이킴이라(렘 42:10).”

 

하신 주의 약속을 붙들어야 한다. ‘사로잡혀 갔도다.’ 하는 것은 실상 자발적인 포로를 의미하기보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다. 주의 백성이 이방 땅에 끌려가 온갖 수모를 당하는 현실을 애통해 하는 것으로, 세 차례에 걸쳐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사실은 슬픔이나 필연적이다. 곧 “보라 여호와의 날 곧 잔혹히 분냄과 맹렬히 노하는 날이 이르러 땅을 황폐하게 하며 그 중에서 죄인들을 멸하리니 하늘의 별들과 별 무리가 그 빛을 내지 아니하며 해가 돋아도 어두우며 달이 그 빛을 비추지 아니할 것이로다(사 13:9-10).”

 

그러므로 오늘 우리로도 일깨워 마치 견고한 성 같은 하루하루의 날들이 얼마나 약한 것인지,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빠르도다 여호와의 날의 소리로다 용사가 거기서 심히 슬피 우는도다 그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황폐와 패망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흑암의 날이요 나팔을 불어 경고하며 견고한 성읍들을 치며 높은 망대를 치는 날이로다(습 1:14-16).” 우리가 나이가 들면서 뜻하지 않았던 여러 슬픔이 우리로 오늘 이처럼 주의 길에 서게 하였음을 인정하게 한다. 다시 말하면 진리를 떠난 길은 비극적 종말의 길이다. 성경은 이를 빗대어,

 

“참 과부로서 외로운 자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하거니와 향락을 좋아하는 자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딤전 5:5-6).”

 

지나놓고 보니 저마다 자기만의 성(成)이 있다. 더러는 열등감이랄 수 있고 더러는 피해의식이라 할 수 있으나 그 마음은 남들과 견주어서 그보다 못한 것에 대해 슬퍼하게 한다. 아이 결혼을 앞두고 아무 것도 해주는 게 없는 나로서는 의연한 듯 속상하고 애틋하다. 남은 티가 안 나서 그런 것이겠으나 아내는 자신의 속상함으로 나더러는 아무렇지 않냐고 물었다. 어찌 내 속이라고 아무렇지 않겠나만 나로서는 줄 수 있는 게 없어 기도뿐이라, 주께 아룀으로 바랄 뿐이다. 누가 뭘 해주네, 거기서 얼마를 더했네, 하는 말을 들을 때면 기죽을 만도한데… 나는 목사가 되고 주의 종으로 살면서 홀가분하다.

 

의연한 것은 아니라도 전에처럼 조바심치고 마음 상해하지 않는다. 나의 길에 아이들이 있었고 주가 나를 돌이키시는 데 있어 어떻게 다루시고 여기에 세우셨는가를 딸애도 안다. 정말이지 보잘것없이 내세울 것 없는 교회로나마 몇몇 상한 영혼으로 씨름하는 게 고작이라하겠으나, 거기서도 기죽을 게 없다. 그것으로 주가 내게 맡기신 것이라 여겨서 나 하나 건사하는 일도 사역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는 일생을 기형아로 태어난 아이를 건사하느라 자기 인생을 걸고 골병이 들었다. 나름 잘 나가가는 내외로 어디 시설에 맡기고 자신들은 그 좋은 실력으로 살았어야 한다고 말하는 이도 있으나,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이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저들로 그리 인도하심에 순종한 것뿐이다.

 

누군 또 자신도 조현인데 이혼 후 아이를 맡으면서 그 증세를 알았고, 아이 또한 조현인 것을 뒤늦게 알았다. 아이는 거기에 지능까지 저하돼서 지적장애도 가지고 있다. 아이엄마는 젊을 때 신학을 하고 잠시나마 교회 사역에 참여하였다. 저의 인생에서 결혼과 이혼은 잠재된 정신과적 증상을 발현시켰다. 두 모녀가 조현으로 사는 삶이란 상상 그 이상의 서러움이 따른다. 그런 가운데 친구 내외가 저들과 친밀히 지내며 신앙 안에서 교제한다. 친구가 교회에 헌신하면서 달라진 것 가운데 하나는 공감능력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친구지만 저는 늘 입바른 소리로 옳고 그름을 따지고 스스로는 성실하게 사는 것을 무기로 가지고 상대를 평가하고 무시했었다. 그런 그가 두 모녀와 같이 내외가 일본으로 여행도 갔다.

 

삶의 여러 질곡에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하나님의 택하심과 붙드심으로 알게 된다.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삼상 2:6-7).” 인생이 그야말로 주의 손길로 이루어지는 주의 것이라는 데서 안도한다. 그러므로 “시온의 도로들이 슬퍼함이여 절기를 지키려 나아가는 사람이 없음이로다 모든 성문들이 적막하며 제사장들이 탄식하며 처녀들이 근심하며 시온도 곤고를 받았도다(애 1:4).” 하는 데서 주의 권능을 생각한다. 우리의 교만은 우상숭배로 드러난다. 하나님보다 우선하는 모든 게 우상이다.

 

너희 뿔을 높이 들지 말며

교만한 목으로 말하지 말지어다

무릇 높이는 일이 동쪽에서나 서쪽에서 말미암지 아니하며

남쪽에서도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느니라

(시 75:5-7).

 

주가 행하시는 일을 본다. 누구는 더 가까이서 보고 누구는 멀 발치께서 본다. 멀찌감치 떨어져 따르다 베드로는 예수를 세 번 부인하였던 것처럼, 가까이 설 수 있는 자폐 아이의 부모로, 불구의 몸으로, 가난으로, 외로운 정신병으로 힘에 겨워 주를 부를 때… 이는 궁극적으로 복이다. 기형적인 아이를 둔 아버지로 자기 생을 온통 주신 바 그 아이를 위해 살았던 이는 누구보다 교회 곁에 살았다. 매일 저녁 두 부부는 교회에 올라와 기도한다. 요즘은 추운 날씨라 서로 교대로 아이를 돌보면서 한 사람씩 교회로 와 기도하고 간다. 남들 눈에 어떨지, 그들 마음은 어떨지, 가히 짐작은 할 수 없으나 그리하여 더욱 주를 사모함이란 큰 상급이 될 것이다. 상대적으로 누군 고아로 불구로 악착같이 살아서 손에 쥔 것을 나눌 줄 모른다. 교회에 인색하고 모든 사람을 경계한다. 하나님을 바랄 때도 필요에 의한 것뿐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의 도우심과 그의 손길이 가장 크고 귀하다. 이를 오늘 성경은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 “유다는 환난과 많은 고난 가운데에 사로잡혀 갔도다 그가 열국 가운데에 거주하면서 쉴 곳을 얻지 못함이여 그를 핍박하는 모든 자들이 궁지에서 그를 뒤따라 잡았도다(애 1:3).” 바벨론에 의해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는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이 바벨론의 왕이 그 땅을 위임한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를 죽였으므로 그들이 갈대아 사람을 두려워함이었더라(렘 41:18).” 이를 두고 이사야는 언급하길,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패역을 거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거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부드럽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사 1:4-6).”

 

이것이 오늘의 예루살렘이다. 단적인 예이기는 하나 어릴 적부터 교회에서 자랐고 신앙으로 처녀 때까지 바로 살던 이가 있다. 안 믿는 이와 결혼하여 아이를 낳았는데 전신마비였다. 저는 아이의 기형적인 출생으로 낫기를 바라며 주께 빌고 또 빌다, 주의 뜻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요구만 구하여 안 믿는 남편을 따라 교회를 떠났다. 아이를 건사하느라 저의 인생은 멈추었고 집안에서 숨기듯이 살았다. 둘째 아이가 태어났으나 이를 기뻐하기보다 첫애로 인해 경계하고 외면하며 대했다. 아이는 늘 혼자였고 집에 있으면서도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자랐다. 글방에 다닐 때만 해도 발랄하여 몰랐다가 글을 쓰면서 그의 속이야기가 세상으로 나왔다. 작가가 되고 싶었고 동시에 배우가 되려 했다. 어느 순간 아이는 몇 차례 실패로 들어앉아 은둔형외톨이가 되었다.

 

일련의 이야기들은 극적이나 모두가 우리 곁의 이야기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 아니면 피할 곳이 없다. “대저 음녀의 입술은 꿀을 떨어뜨리며 그의 입은 기름보다 미끄러우나 나중은 쑥 같이 쓰고 두 날 가진 칼 같이 날카로우며 그의 발은 사지로 내려가며 그의 걸음은 스올로 나아가나니 그는 생명의 평탄한 길을 찾지 못하며 자기 길이 든든하지 못하여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느니라(잠 5:3-6).” 하나님을 피해 사는 일이란 그러하여, 나는 어제 평생을 고위관료로 지내던 이가 내란공범으로 23년 구형을 선고 받는 모습을 보면서 여러 생각이 교차했다.

 

말씀도 삶도 우리의 일상도 주를 일깨운다. 더러는 외줄타기 같은 인생이나 ‘협착한 곳’을 지날 때 주가 함께 하심을 누리고 의지할 수 있는 삶으로 복되다. 나는 가진 것도 없고 더러는 모두에게 짐 같이 버려질 수밖에 없으나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행 10:34-35).” 하여 오늘도 별 것 아니나 새벽에 일어나 추운 날씨를 무시하고 교회로 나와 이와 같이 묵상글을 쓴다. 쓰면서 주께 아뢰고 누구를 생각하고 어떤 사연을 아뢴다. 눈물겨운 일이나 아직은 내가 스스로 걸을 수 있고, 한 손으로라마 자판을 치며 글자로 주를 찬송할 수 있어서 감사하고 송구하다.

 

누구의 우울증을 두고 기도한다. 저가 이 종에게, 우리 교회에 베푼 사랑과 긍휼을 주가 아시니 부디 갑절의 은혜로 갚아주시기를. 친구 내외가 같은 교회 조현모녀와 함께 일본여행을 갔다는 것에 왠지 그 수고와 마음씀이 감사하였다. 아흔둘의 장모를 휠체어에 태워 병원을 갈 때 아내가 휠체어에 앉아 따라올 때 그 모습이라니, 누가 앞서 문을 열어주고 엘리베이터를 양보하는 데서 감동한다. 저들끼리 결혼준비를 하고 각자 저축한 돈으로 어디 작은 아파트 한 채 장만하려는 것도 감사하고… 나의 한 날의 경우 어느 것 하나도 주의 은혜로만 산다. 감동과 감사가 나로 의연하게 한다. 주를 바람으로 가능하다.

 

예루살렘이 훼파되어 황량하여 “밤에는 슬피 우니 눈물이 뺨에 흐름이여” 하고 탄식하는 선지자의 마음에서 주님을 느낀다. “시온의 도로들이 슬퍼함이여” 이에 “딸 시온의 모든 영광이 떠나감이여” 하는 이의 심정도 헤아리면서 그 이유를 찾게 된다. “그의 더러운 것이 그의 옷깃에 묻어 있으나 그의 나중을 생각하지 아니함이여 그러므로 놀랍도록 낮아져도 그를 위로할 자가 없도다 여호와여 원수가 스스로 큰 체하오니 나의 환난을 감찰하소서(9).” 우리의 원수가 설마 우리 자신의 교만이 아니기를, 우리가 주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사랑하는 우상으로 인한 것은 아니기를,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이여 너희에게는 관계가 없는가 나의 고통과 같은 고통이 있는가 볼지어다 여호와께서 그의 진노하신 날에 나를 괴롭게 하신 것이로다(12).” 오늘 우리로 괴롭게 하는 것을 놓고 중보한다.

 

그리할 때 “여호와는 의로우시도다 그러나 내가 그의 명령을 거역하였도다 너희 모든 백성들아 내 말을 듣고 내 고통을 볼지어다 나의 처녀들과 나의 청년들이 사로잡혀 갔도다(18).” 이에 “여호와여 보시옵소서 내가 환난을 당하여 나의 애를 다 태우고 나의 마음이 상하오니 나의 반역이 심히 큼이니이다 밖에서는 칼이 내 아들을 빼앗아 가고 집 안에서는 죽음 같은 것이 있나이다(20).”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출구는 주께 아룀으로 구하는 것이다. “그들의 모든 악을 주 앞에 가지고 오게 하시고 나의 모든 죄악들로 말미암아 내게 행하신 것 같이 그들에게 행하옵소서 나의 탄식이 많고 나의 마음이 병들었나이다(22).”

 

할 때에,

 

그들이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우리가 그들을 진멸하자 하고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모든 회당을 불살랐나이다

(시 74:8).

 

주 앞에 고함으로 더욱 확실한 것은,

 

하나님은 예로부터 나의 왕이시라

사람에게 구원을 베푸셨나이다

(12).

 

그러므로

 

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

주께서 빛과 해를 마련하셨으며

주께서 땅의 경계를 정하시며

주께서 여름과 겨울을 만드셨나이다

(16-17).

 

이 모든 것에서 주를 바람은 기도하게 하여,

 

학대 받은 자가 부끄러이 돌아가게 하지 마시고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가 주의 이름을 찬송하게 하소서

하나님이여 일어나 주의 원통함을 푸시고

우매한 자가 종일 주를 비방하는 것을 기억하소서

주의 대적들의 소리를 잊지 마소서

일어나 주께 항거하는 자의 떠드는 소리가

항상 주께 상달되나이다

(21-2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