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
애 3:33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시 76:10
우리로서 슬픔을 다스리는 법을 일깨운다. 마음껏 슬퍼하고 괴로우나 이를 나타내는 대상은 분명하다. 있는 그대로의 상황을 고하나 이 또한 들으시고 보시고 계신 이가 있음을 확실히 한다. 살며 배우며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져 가고 우리의 속사람은 새로워져 간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우리로 인생을 살게 하신 이가 우리의 고초를 모르실 리 없고, 우리로 근심하게 하시나 그것이 본심은 아니라는 것을 밝힌다.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애 3:33).”
이에 예레미야는 괴로움에 떨면서 주를 바란다. 우리로도 괴로움을 처리하는 법을 알게 한다. 먼저는 우리가 괴로운 일을 당할 때 주 앞에 아뢰는 것은 권리이면서 특혜다. 그럴 때 우리의 괴로움이 소망이 된다.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되오나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20-23).” 마음에 담아두었다는 것은 묵상이다. 어려움을 두고 주께 아룀으로 사람을 의지하지 않는다. 자신의 수단으로 이를 해결하려 꾀를 내지 않는다. 세상과 결탁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의 실패는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썩은 갈대 지팡이 같은 애굽’을 의지하려 했던 것이다. 신기하고 놀라운 일은 이 모든 교훈이 우리로 인생의 괴로움을 다루는 법을 일깨운다. 입 밖으로 내면 원망이 된다. 남을 탓하게 된다. 스스로 정당함을 주장하느라 거짓을 일삼게 된다. 누구의 호응과 동조에 마음이 기운다. 서로의 위로가 자칫 ‘죄를 죄로’ 인정하는 데 실패하게 한다. 죄를 죄가 아니라고 하는 순간 변명은 늘어지고 남을 비교하고 오히려 누구를 저주하고 비난하게 된다. 그러나 이를 마음에 두고 있음으로 주의 이름을 부를 때,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23).” 곧 회개의 힘은 무한한 자유를 선사한다. 우리의 믿음은 회심의 뒷면으로 회개가 이뤄질 때 속죄의 은총이 감싼다.
죄책에서 벗어난다. 사람을 가장 피폐하게 하는 것은 죄책감이다. 아무도 모르지만 스스로 수치를 느낀다. 부끄러움을 감당하게 된다. 그럴 때 두 가지 방향으로 나아가는데 먼저는 위축되고 피해의식으로 사로잡힌다. 우울감으로 일그러진 영혼은 항상 의기소침하고 우유부단하다. 또 다른 배면으로는 완고해지고 거짓에 거짓을 더한다. 망상은 사실과 거짓이 혼재된 상태이다. 이는 모두 자신의 죄책을 스스로 짊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를 ‘마음에 두어’ 곧 우리 믿는 자들의 마음에는 주의 영이 함께 하심이니, 주께 아룀으로 자유로워진다. 이를 바울은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나는 이 말씀 한 구절로 안도한다. 내가 주의 것이라는 데서 더는 나의 문제가 나의 문제로 괴롭힐 수 없다. 내 안의 어려움이나 괴로움이 근심과 낙심을 주기도 하지만 그리하여 주를 더욱 간절하게 바라게 된다. 하여 예레미야는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23).” 하고 주를 찬송한 것이다. 유다의 파멸은 처절하였다. 왕의 자식들은 공개처형되고 시드기야 왕은 이를 목격한 후 눈알이 뽑혀 끌려갔다. 백성들은 포로가 되었고 예루살렘은 유린당했다. 예레미야는 이러한 이유를 자각하고 있었다. 환난의 와중에도 진멸되지 않은 사실을 감사하게 된다.
백성과 자신이 처한 현실 앞에서 깊은 좌절을 느꼈던 예레미야가 도리어 감사하는 마음으로 소망을 지니게 된 것이다! 소망은 당면한 참상을 망각하거나 경감시키려는 게 아니다. 우리의 상한 심령을 여호와께로 향하게 한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심을 우리는 안다. 믿음이란 어찌 증명할 수 없는 우리 안의 변화다. 이를 칼빈은 불가항력적인 은혜라고 했다. 주의 인애하심으로 우리는 이러한 자유를 얻는다. 주의 인애 곧 자비하심은 ‘헤세드’라 하여 ‘여호와의 언약적 사랑과 신실하심’을 뜻한다. 주의 긍휼하심이 같은 의미다. 우리가 주의 긍휼하심이 아니면 무엇으로 살까? 그리하여 선지자 예레미야는 선포한다.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행위들을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40).” 여기서 예레미야는 앞에 언급된 자각 곧 죄를 인정하고 주의 긍휼하심을 바라는 믿음으로 근거하여, 회개하고 함께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을 촉구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더불어 맺으신 언약은 영원한 것이다. 오늘의 이 파멸과 괴로움이 끝이 아니고 영원한 것도 아니다. 우리를 향한 고난의 진정한 목적은 회개와 회복의 길이 열게 한다. 예레미야의 설교는 이 주제로 선포된다. 저도 알고 있었다. “딸 내 백성의 파멸로 말미암아 내 눈에는 눈물이 시내처럼 흐르도다 내 눈에 흐르는 눈물이 그치지 아니하고 쉬지 아니함이여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살피시고 돌아보실 때까지니라(48-50).”
곧 저의 시선은 하나님께로 향한다. 귀로 듣고자 하는 말씀의 핵심도 주의 음성이다. 그러므로 ‘마음과 손을 아울러 들자’ 하고 외친다. 마음으로 뿐 아니라 몸도 같이 따라야 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헛되다. 거짓이다.’ 이는 야고보의 설교에서 나온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4, 17).” 그렇다면 나의 믿음은 살았는지 죽었는지, 스스로 쉽게 알 수 있는 것으로 자신의 행함의 반경을 살펴보면 된다.
가까운 이 가운데 누구는 교회는 안 가도 자신은 믿는다고 한다. 말씀으로 가까이 하지 않아도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한다. 전혀 믿는 자 같이 살지 않는데도 스스로는 믿음이 있는 줄 안다. 곁의 사람들은 그가 믿는 자인 것을 알지 못한다. 늘 같은 자리에서 같이 즐기고 씨름하고 걱정하고 근심하다, 요령껏 습관처럼 거짓으로 일을 무마하려 하기는 매일반이다. 저가 믿는 자였다는 사실에 오히려 웃음이 난다. 하지만 우린 그럴 수 없다는 것을 바울은 우리로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했다.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고후 2:15-16).”
뿐만 아니라 우리는 의식적으로 쓰여진 ‘그리스도의 편지’로 안 믿는 자들에게 읽혀져야 한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고후 3:3).” 우리 안에 새겨진 말씀은 낡아지거나 지워질 수 없다. 더러 켜켜이 먼지가 쌓여 감추어질 수는 있어도 그것은 돌에 새긴 것 같이 쌓인 것을 치워내면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약 2:18).” 믿음을 논쟁으로 삼으려는 것은 어리석다.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하고 허탈해진다(20). 우리의 속사람이 날로 새로워진다는 것은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26).” 그와 같이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 있다.
이때 우리도 사람이라 고통이 없을 수는 없으나 오늘 예레미야와 같이 똑같은 고초와 참혹한 현실을 겪으면서도 “여호와여 내가 심히 깊은 구덩이에서 주의 이름을 불렀나이다(애 3:55).” 우리의 능력은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간구할 수 있다. “주께서 이미 나의 음성을 들으셨사오니 이제 나의 탄식과 부르짖음에 주의 귀를 가리지 마옵소서(56).” 이는 약속의 말씀으로 근거하는 자녀들로서의 정당한 권리다. “내가 주께 아뢴 날에 주께서 내게 가까이 하여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하셨나이다(57).” 그러므로 처한 현실과 상관없이 우리는 자유하다. “주여 주께서 내 심령의 원통함을 풀어 주셨고 내 생명을 속량하셨나이다(58).”
하여 우리의 사명도 드러난다. 곧 우리는 세상을 중재하는 중보자다. 모세가 그랬듯이 “모세가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 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출 32:31-32).” 저들의 죄를 알지 못하는 자를 위하여 “내가 말하기를 이 무리는 비천하고 어리석은 것뿐이라 여호와의 길, 자기 하나님의 법을 알지 못하니 내가 지도자들에게 가서 그들에게 말하리라 그들은 여호와의 길, 자기 하나님의 법을 안다 하였더니 그들도 일제히 멍에를 꺾고 결박을 끊은지라(렘 5:4-5).” 하여 예레미야도, 예수님도 우리를 위해 중보한다.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13).”
이어서 기도하시길,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15-17).” 곧 오늘 우리로 이 땅에 살아서 사는 동안에 알게 하시려고, 고난으로도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하고 아뢴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도 주신 바,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우리는 이 진리 안에서 자유하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32).”
오늘 본문으로 ‘예레미야의 고난’을 읽는다. 모두 같이 겪는 고난이지만 우리 믿는 자들의 고난은 소망을 갖게 한다. 시편도 찬송하기를,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시 103:3-5).
이는 공의로운 것으로 심판은 우리의 기쁨을 회복한다.
여호와께서 공의로운 일을 행하시며
억압 당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심판하시는도다
(6).
가령 일련의 내란재판을 보면서 통쾌한 것도 저들의 거짓과 억지주장으로 고통당하던 마음에서 놓여나기 때문이다. 세상은 곧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할 것이나 우리가 이를 간절히 바람은 마치 억울하고 서러워서 어디 하소연할 수 없었던 피해자의 유족들 심정과 같다. 주를 믿음으로 감내하고 감수하며 살아야 했던, 가난하고 매인 자들이 돌아와 시온을 다스리고 밭을 일구었던 것처럼… “가난한 백성은 남겨 두어 포도원을 관리하는 자와 농부가 되게 하였더라(렘 52:16).” 이처럼 우리 신앙의 아이러니한 현상은 고통 가운데 우리가 주를 더욱 바람이다.
엄연히 하나님은 진노하신다. “여호와의 분노의 매로 말미암아 고난 당한 자는 나로다(애 3:1).” 곧 믿는다는 것으로 유달리 고통을 당한 사람, 즉 하나님의 진노의 매로 인하여 고통을 민감하게 느끼는 사람으로 사는 것이 복인 이유다. 누구와의 통화에서 나의 고질적인 감정이입은 저의 사연을 두고 울게 한다. 이로써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한다. 한참을 듣다, 듣는 것으로 시달리면서 나로 더욱 주를 바라게 한다. 물론 당황하고 캄캄한 어둠 속에 같이 처하게 되는 것 같다. 이처럼 예레미야는 “나를 이끌어 어둠 안에서 걸어가게 하시고 빛 안에서 걸어가지 못하게 하셨으며… 나를 어둠 속에 살게 하시기를 죽은 지 오랜 자 같게 하셨도다(2, 6).” 하고 어려움을 토로한다.
우리의 괴로움으로 우리가 주를 바라게 되는 일은,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시 76:10).
하는 오늘 시편의 이 한 구절로 함축된다. 오늘 우리의 고난의 목적은 주를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다. 우리로 인생을 살며 사는 동안의 이유는 이미 창세전에 예정된 바, 주를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4-6).” 그러므로 오늘 예레미야의 슬픈 노래는 우리로 소망을 갖게 한다.
이에 바울 사도 역시,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우리의 이 소망은 성령으로 부음 바 된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그리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신 이유이기도 하다. 곧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5-6).” 그러므로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에 우리는 ‘마음에 두어’ 주를 더욱 갈망하여야지 함부로 입을 열어서는 안 된다.
나를 모든 죄에서 건지시며
우매한 자에게서 욕을 당하지 아니하게 하소서
내가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아니함은
주께서 이를 행하신 까닭이니이다
(시 39:8-9).
하여 주를 인정할 때,
하나님은 유다에 알려지셨으며
그의 이름이 이스라엘에 알려지셨도다
그의 장막은 살렘에 있음이여
그의 처소는 시온에 있도다
(76:1-2).
비로소 우리의 본향은 윤곽을 드러낸다. 그때에,
주께서는 경외 받을 이시니
주께서 한 번 노하실 때에
누가 주의 목전에 서리이까
주께서 하늘에서 판결을 선포하시매
땅이 두려워 잠잠하였나니
곧 하나님이 땅의 모든 온유한 자를 구원하시려고
심판하러 일어나신 때에로다 (셀라)
(7-9).
이를 앎으로,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10).
이 놀라운 진리가 우리 신앙의 생활에서 증명된다. 고달프고 괴로우나 그래서도 주 앞에 선다. 주의 날을 기다리게 한다. 그리하여,
너희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께 서원하고 갚으라
사방에 있는 모든 사람도
마땅히 경외할 이에게 예물을 드릴지로다
그가 고관들의 기를 꺾으시리니
그는 세상의 왕들에게 두려움이시로다
(11-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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