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여 보시옵소서 주께서 누구에게 이같이 행하셨는지요 여인들이 어찌 자기 열매 곧 그들이 낳은 아이들을 먹으오며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어찌 주의 성소에서 죽임을 당하오리이까 늙은이와 젊은이가 다 길바닥에 엎드러졌사오며 내 처녀들과 내 청년들이 칼에 쓰러졌나이다 주께서 주의 진노의 날에 죽이시되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고 도륙하셨나이다 주께서 내 두려운 일들을 사방에서 부르시기를 절기 때 무리를 부름 같이 하셨나이다 여호와께서 진노하시는 날에는 피하거나 남은 자가 없나이다 내가 낳아 기르는 아이들을 내 원수가 다 멸하였나이다
애 2:20-22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께 감사하고 감사함은 주의 이름이 가까움이라 사람들이 주의 기이한 일들을 전파하나이다
시 75:1
어떤 일을 두고 우리 손에 들린 것은 기도이다.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막 9:29).” 하심으로 답이 된다. 기도는 우리로 능력을 준다. 하여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하심을 붙들고 선다. 오늘 본문에서 예루살렘의 비극적인 참상과 그 비참한 현실의 주관이 여호와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면서, 선지자 예레미야는 기도한다. 이 일이 ‘이스라엘의 하나님’되시고 ‘시온과 예루살렘의 하나님’ 되시는 이가 행하심인 것을 두고 슬퍼한다.
우리가 신음하는 어려움은 모두 하나님의 손에 놓여 있음이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심으로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당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다. 하나님께서 채찍질하고 진노와 격렬한 노하심으로 징벌하신다. 하나님께서 원수가 되어 싸우신다. 이것이 고통과 재난 중에 더욱 괴롭히고 쑥과 담즙 같이 쓰다. 하나님의 기쁨이 교회에 있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이스라엘에게 영광이 되기 위한 것이다. 지금은 화를 내시고 적으로 간주하지만 선지자가 슬프게 애곡하는 점은, “슬프다 주께서 어찌 그리 진노하사 딸 시온을 구름으로 덮으셨는가 이스라엘의 아름다움을 하늘에서 땅에 던지셨음이여 그의 진노의 날에 그의 발판을 기억하지 아니하셨도다(애 2:1).” 우리의 원수가 아닌 사랑의 하나님이 이루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노하신 날(1)’, ‘노하신 날(2)’, ‘맹렬한 진노 가운데 끊으시고 던지시며(3)’, ‘진노로 분개하신 날(6)’이다. 이로써 하나님의 사랑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은 그의 진노보다 더 두려운 것이 없다. 사랑의 채찍은 깊은 상처를 준다. “맹렬한 진노로 이스라엘의 모든 뿔을 자르셨음이여 원수 앞에서 그의 오른손을 뒤로 거두어 들이시고 맹렬한 불이 사방으로 불사름 같이 야곱을 불사르셨도다(3).” 이 불은 소멸의 불이며, 동시에 소생의 불이다. 소돔과 고모라에 내린 재앙의 불과 유황이 아니라, 우리 영혼을 회복시키시기 위한 것이다.
비록 “원수 같이 그의 활을 당기고 대적처럼 그의 오른손을 들고 서서 눈에 드는 아름다운 모든 사람을 죽이셨음이여 딸 시온의 장막에 그의 노를 불처럼 쏟으셨도다(4).” 우리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과 슬픔이나 동시에 그간의 죄악 됨을 씻을 길 없어 붓는 속량의 불길이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단호하였다.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1:32).” 그러므로 오늘의 어려움마저도 주의 사랑이라.
주전 586년 여호와의 심판이 예루살렘에 내려졌다. 현장에서 예레미야는 선민의 처절한 비탄과 소망을 슬픔의 노래로 진술한다. 본문의 구성은 네 편의 비탄 시(詩)와 한 편의 기도 시로 구성되었다. 애가서는 다섯 편의 시로 구성된 연작시이다. 직면한 선민의 고통과 절망 속에 여호와께 향한 절대 신앙에 근거한 소망과 간구로 주의 이름을 부른다. 우리로서는 기도뿐이라, “여호와여 보시옵소서 주께서 누구에게 이같이 행하셨는지요 여인들이 어찌 자기 열매 곧 그들이 낳은 아이들을 먹으오며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어찌 주의 성소에서 죽임을 당하오리이까?” 하고 주께 묻고(20), 우리의 실상을 진술한다. “늙은이와 젊은이가 다 길바닥에 엎드러졌사오며 내 처녀들과 내 청년들이 칼에 쓰러졌나이다 주께서 주의 진노의 날에 죽이시되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고 도륙하셨나이다(21).”
오늘 말씀을 읽으며 주의 품에 거하는 삶이란 거룩한 삶을 추구하는 것이라 여겨진다. 이는 약속으로 “너희가 내 규례와 계명을 준행하면 내가 너희에게 철따라 비를 주리니 땅은 그 산물을 내고 밭의 나무는 열매를 맺으리라(레 26:3-4).” 곧 오늘의 축복은 순종의 산물이고, 어려움은 사랑의 소산이며, 괴로움과 역경은 치유의 손길이다. 하여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여시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를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 오직 너는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고 지켜 행하며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그 말씀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다른 신을 따라 섬기지 아니하면 이와 같으리라(신 28:12-14).”
우리의 거룩은 스스로 근신하여, ‘오직 너는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고 지켜 행하며’ 먼저는 지켜 행하는 삶이다. 또한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그 말씀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좌고우면하지 않고 한 길 가는 삶이다. 그리고 ‘다른 신을 따라 섬기지 아니하면 이와 같으리라.’ 즉 하나님 외에 다른 것으로 위로를 삼거나 의지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룩한 삶을 위한 우리의 수고는 겸손이었다. 스스로 높일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아름다움을 하늘에서 땅에 던지셨다.’ 그러므로 나는 먼저 생각하기를 교회를 지키는 일이다.
“주의 거룩한 성읍들이 광야가 되었으며 시온이 광야가 되었으며 예루살렘이 황폐하였나이다 우리 조상들이 주를 찬송하던 우리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성전이 불에 탔으며 우리가 즐거워하던 곳이 다 황폐하였나이다(사 64:10-11).” 오늘의 이와 같은 현상 가운데 주신 바 교회를 사랑하는 일, 이로써 교만에 오르지 않는 것이다. “네 영화가 스올에 떨어졌음이여 네 비파 소리까지로다 구더기가 네 아래에 깔림이여 지렁이가 너를 덮었도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사 14:11-13).” 내가 높이면 주가 낮추신다. 내가 낮추면 주가 높이신다.
겉으로는 멀쩡하나 속은 시끄럽다. 마음이 어려워 나의 모친은 입맛을 잃고 끼니를 넘기는 일도 어려워한다. 속에 담긴 내용은 우리 딸애의 결혼으로 그 마음이 속상한 것이다. 뭐라도 해주고 싶은데 가진 게 없어서 기도뿐이라고 하지만 마음은 또 그렇지가 않은 것이다. 첫 손녀였고, 첫 정이라 할 정도로 같이 사는 시간 동안 남다른 애정과 사랑을 쏟은 것이라 그러하다. 마음 편히 드시라, 하고 말씀드려도 소용이 없는 몸의 반응으로 결국은 한의원에라도 가야 했다. 이를 어린 것들이 알기는 할까? 나 역시 마음은 그러하여서 괜찮은 척 하면서도 자괴감인지 서글픔인지, 공연히 자주 눈물이 난다. 딸애는 덕분에 자신이 효녀 심청이가 되었다며 농담처럼 말하는데 실제가 그러해서 더욱 미안하고 안 됐다.
하물며 주의 백성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치시고 시온을 폐허로 만드셔야 했으니 그 마음이 어떠하실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선지자는 이를 두고 중재자가 되어 기도한다. “주께서 내 두려운 일들을 사방에서 부르시기를 절기 때 무리를 부름 같이 하셨나이다 여호와께서 진노하시는 날에는 피하거나 남은 자가 없나이다 내가 낳아 기르는 아이들을 내 원수가 다 멸하였나이다(22).” 이는 곧 우리 하나님은 결코 노하게 하는 원인 이상으로 노하시지 않는다. 그들과 맺은 하나님의 계약은 만일 그들이 하나님의 목소리를 잘 청종하면, “네가 그의 목소리를 잘 청종하고 내 모든 말대로 행하면 내가 네 원수에게 원수가 되고 네 대적에게 대적이 될지라(출 23:22).” 하여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하는 한 ‘원수같이 활을 당기셨다’가도, ‘대적처럼 모든 손을 들고’ 칼을 뽑으셨다 해도 하나님은 정말로 그 자녀의 원수가 아니시다.
모친과 통화하면서 어릴 적 아이들 이야기를 했다. 유난히 두 아이 다 붙임성이 있어서 기껏 매를 맞거나 야단을 들어도 곧 언제 그랬냐는 듯 곁에 와 안기고 부대끼며 치댔다. 생각해보면 그게 고마운 것이다. 가령 요즘도 나는 헬리코박터균 2차 제균치료로 독한 항생제를 먹으면서 속이 울렁거려 힘들어하고, 아내는 반달연골파열로 수술을 하고 휠체어 생활을 하고 있다 보니 아이들의 마음 씀이 눈에 보인다. 퉁명스러운 듯하나 밥하고 설거지 하고 온갖 집안일을 도맡아 하는 아들이나 무슨 유산균이니 양배추즙이니 하는 것들로 먹여대는 딸애나…. 이제 다들 장성하여 그 표현하는 방식도 달라진 것 같은데 다르지 않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노하시는 때에도 원수로서 노하시는 게 아니라 노하심으로 바로 잡으시려는 사랑의 진노인 것을 확인하게 된다. 마치 가장 사랑하는 자가 사랑하는 이의 잘못이나 고통을 보고 가장 심하게 화를 내면서도 돌보고 싸매고 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우린 더욱 주를 바라며 의지하게 된다. 고로 “항상 경외하는 자는 복되거니와 마음을 완악하게 하는 자는 재앙에 빠지리라(잠 28:14).” 이때 우린 우리의 고통 가운데 주의 사랑을 진하게 확신할 수 있다. 바울의 고백 같이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9-10).”
오늘의 나의 나 된 것, 비록 남들처럼 뭔가 도움이 될 여력은 없는 것이라 슬픈 마음이 들 때 나의 없음으로 오히려 아이들이 더욱 주를 바라며 강하였다. 우리 삶에 있어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나의 나 됨이 주의 은혜라. 그런 가운데 오늘을 사는 일, 이 일 또한 맡기신 사명으로 여겨진다. 그런 가운데 주를 바람으로 교회를 바로 세우시고 나의 활동반경을 지정하셨다. 하여 오늘 말씀은 나로 하나님 앞에 어떤 자세를 취할 것인지, 나의 자세를 돌아보게 한다. 있는 그대로 감사함은 주를 인정하는 일이다. 없는 것으로 슬퍼하지 않으며 나의 약함으로 노여워하지 않을 때 주를 사랑함이 증명된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4:21).”
나는 무엇으로 주를 사랑함을 증명할 것인가? 할 때에 주신 바 오늘의 모든 처지와 사정으로 감사히 여기는 것,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20).” 하심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위선과 남을 의식하는 것으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하나님은 거짓을 싫어하신다.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사 1:13).” 있거나 없거나, 잘났거나 못났거나 오늘 이 모습 이대로.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출 34:6-7).” 우리를 향한 주의 사랑이 중요한 것이지 우리가 주를 얼마나 대단히 섬기고 요란하게 사역을 감당한들 주가 감동하실까? 고로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롬 2:6-8).” 마음은 속상하여 저 혼자 볶아치기 일쑤지만 그래서도 기도뿐이다. 주 앞에 아뢰며 입을 삐쭉거려 울음을 참아낼 때,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의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그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 주니
그의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
(시 37:25-26).
곧 오늘 우리의 생사화복(生死禍福)이 모두 주의 손길이라, 무엇으로든지 주를 인정하고 주께 아뢰는 것이 주의 권능이었다. 나는 할 수 없으나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하는 것으로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의 길을 따라가며 그를 경외할지니라(신 8:5-6).” 그러므로 나의 일상이 교훈이 된다. 일련의 사태와 상황들이 모두 복이 있다. 이에 돌이킬 수 있고, 더욱 주를 의뢰할 수 있음으로 욥의 아름답고 찬란한 고백과 같이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부디 나의 남은 모든 날들이 그러하여서 ‘주의 인자하심이 나의 생명보다 귀하다’는 고백으로 남은삶이 되기를. 고로,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히 12:6-8).”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의 형국과 그 참혹함으로 오히려 주의 지극하신 사랑을 볼 수 있다면, 고난의 목적은 분명해진다.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고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사 그들이 가다가 뒤로 넘어져 부러지며 걸리며 붙잡히게 하시리라(사 28:13).” 이로써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 4:7).” 더러는 억지로라도 복종하게 하심은 마귀를 대적하게 하려 하심이니,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벧전 5:8-9).”
나는 오늘 말씀을 슬픈 눈으로 읽다 밝은 마음으로 소망을 갖게 된다. 이런저런 마음의 어려움으로 주를 바라다가 어느 순간에 찬송이 되고 영광의 기쁨이 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께 감사하고 감사함은
주의 이름이 가까움이라
사람들이 주의 기이한 일들을 전파하나이다
(시 75:1).
이를 알고 인정하고 찬송하는 것이 은혜이다. 쥐뿔도 자랑할 게 없고 내세울 것도 없고 도움이 될 만한 어떤 능력도 안 된다 해도,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느니라
(7).
그리하여
나는 야곱의 하나님을 영원히 선포하며 찬양하며
또 악인들의 뿔을 다 베고 의인의 뿔은 높이 들리로다
(9-1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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