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하현. 2026. 1. 25. 05:19

 

여호와께서 그의 분을 내시며 그의 맹렬한 진노를 쏟으심이여 시온에 불을 지르사 그 터를 사르셨도다리라 하였도다

애 4:11

 

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내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

시 77:1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섣불리 말할 수 없다. 주의 뜻을 따라 선교를 떠난 부부의 아이를 출산과 동시에 하루 만에 데려가실 때의 황망함을… 아이가 삐뚤어져 세상을 따라 갈 때 주께로 돌이킬 것을 기도하였더니 암 진단을 받고 돌아왔을 때를… 나름은 열심을 다해 교회를 섬기고 주의 뜻을 따라 산다고 하였는데 하던 일을 멈추게 하시더니 옴짝달싹 못하게 손발을 묶어놓은 것 같은 우울증에 빠졌을 때…. 곧 우리는 삶을 영위하는 데 있어 느닷없는 경지가 모호해질 때의 아찔함에 대하여, 각각의 상황이나 여건은 다르나 고백은 하나였다. 하나님을 인정함으로 그것까지도 주어진 사명으로 삼을 때이다.

 

태어났다가 하루 만에 아이를 떠나보낸 선교사 내외는 며칠은 애통하다 하나님의 권능을 인정하였다. 그들은 비로소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욥 1:21).” 이 한 구절의 말씀 앞에 승복하였다. 암에 걸리면서 치료와 발병을 거듭하는 가운데서 어느 때보다 간절하게 주를 바라게 되어 온 가족이 하나 되는 것에 감사하게 된 이도 있다. 아이의 장애 판정으로 서러움에 목이 메나 그런 가운데 주가 더욱 가까이서 돌보시고 함께 하심을 느끼게 되었다고 누구는 고백하였다.

 

오늘 여기 선지자 예레미야의 애가(哀歌)는 우리들로 하여금 주의 사랑이 더욱 강하고 굳건하심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여호와께서 노하여 그들을 흩으시고 다시는 돌보지 아니하시리니 그들이 제사장들을 높이지 아니하였으며 장로들을 대접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애 4:16).” 이는 마치 수술을 집도하는 의사의 손길이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가르고 떼어내어 환자의 건강을 회복하려는 것과 같다. 곧 우리 영혼이, “우리가 헛되이 도움을 바라므로 우리의 눈이 상함이여 우리를 구원하지 못할 나라를 바라보고 바라보았도다(17).” 그렇듯 우린 알게 모르게 하나님 외의 것으로 위로 받길 바라며 산다.

 

애가는 하나님의 심판이 예루살렘에 행하여짐으로 슬픔과 슬픈 변화에 대해서만 노래하는 게 아니다. ‘금과 같고 정금과 같았던’ 주의 돌보심을 마다하고 함부로 굴다 ‘완전한 아름다움과 온 땅의 기쁨’이 필요하다는 것에 눈을 뜨게 한다. 곧 오늘의 안녕과 평안으로 복이 아니라 그 이상의 무엇, 어떤 기쁨의 확신이 우리 안에 소망으로 주어져야 한다. 이를 위해 오늘은 그 성읍이 흐려지고, 변화되고, 광택을 잃고, 가치를 잃어 옛 성읍의 자취조차 잃었으나 단지 예전의 안녕과 평화를 기대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이 땅에서의 기쁨이나 사랑은 부스러기와 같다.

 

이를 알게 하는 데 있어 ‘성전이 황폐하여졌다.’ “슬프다 어찌 그리 금이 빛을 잃고 순금이 변질하였으며 성소의 돌들이 거리 어귀마다 쏟아졌는고 순금에 비할 만큼 보배로운 시온의 아들들이 어찌 그리 토기장이가 만든 질항아리 같이 여김이 되었는고(1-2).” 성전은 예루살렘의 영광이요, 보호였다. 그것이 적의 손 에 버려졌다. 이 금은 성전‘의’ 금으로 성전에 속할 때 금이다. 정금은 금으로 입혀진 것이다. “온 성전을 금으로 입히기를 마치고 내소에 속한 제단의 전부를 금으로 입혔더라(왕상 6:22).”

 

성전이 불탔을 때 금은 마치 가치가 없는 것처럼 연기에 그을리고 더럽혀졌다. 쓰레기 속에 버려졌다. 그것은 ‘변하였다.’ 그것은 일반적인 용도로 바뀌었다. 그것으로는 아무 것도 만들지 못할 것 같다. 기묘하게 새겨진 성소의 돌들은 갈대인들에 의해 부서지고 내던져졌다. 모든 게 길거리에 버려진 것 같다. 신앙이 좋았고 믿음으로 사명을 다하려던 이에게 닥치는 황망한 일은 우리로 놀라게 한다. 욥의 고난으로 그의 친구들이 멀리 떨어져서 가까이 오지도 못하고 슬퍼하듯 의아할 때가 있다. 이는 본인도 같은 것이라, 장성하여 신앙을 버리고 사는 아이를 두고 주께로 돌아오기를 기도하였는데 암에 걸려서 왔을 때의 황망함은 주 앞에서 소리 죽여 울게 한다. 곧 구별됨 없이 다른 것과 같이 파괴되는 것 같으나 우리가 알지 못하는 범주의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하나님의 섭리란 그런 것이다.

 

특별히 시온의 아들들이라고 하는 왕들과 제사장들이 유린당할 때 우린 어리둥절하다. 하나님의 집과 다윗의 집이 있는 시온에서 벌어지는 일이라 더욱 그렇다. ‘정금에 비교되어졌다.’ 이제 ‘질항아리같이 여겨진다.’ 버려져서 쓸모없거나 다시 그 의미를 찾기는 불가능할 것 같다. 우리가 바라는 회복은 예전 같이 돌아가 이를 회상함으로 족할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로 더욱 전진하게 하는 회복이다. 마치 부러졌다 붙은 뼈가 더욱 단단한 것 같이 우리로 이 보배 같은 진리를 질그릇에 주신 것은 그러해서이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

 

하여 오늘 우리로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은 슬픔에 빠지게 하는 일일지라도, 설령 큰 아이를 잃고 얼마 뒤 나머지 어린 세 딸도 한꺼번에 잃고 난 뒤 비로소 ‘내 평생에 가는 길’에서 ‘내 영혼 평안해’ 하고 주 앞에서 찬송할 수 있는 것과 같다. 두 아들을 죽인 범인들을 용서하여 양자로 삼을 수 있었던 사랑이다.

 

그들은 질그릇같이 깨어지고, 그 안에 기쁜 것이 없는 그릇과 같이 내던져졌다. 그들은 가난하게 되고 포로로 잡혀가, 거기서 천하고 비열하게 되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그들을 짓밟고 모독하였다. 하나님의 백성들 위에 놓여진 모욕은 우리들에게 애가의 사건이 되어야 한다는 것에 유의하자. 때로 우리의 신앙은 비이성적이고 합리적이지도 상식적일 수도 없는 일 같으나, 이는 마치 알을 땅에 버려두는 광야에 있는 타조와 같이 잔인하다.

 

“타조는 즐거이 날개를 치나 학의 깃털과 날개 같겠느냐 그것이 알을 땅에 버려두어 흙에서 더워지게 하고 발에 깨어질 것이나 들짐승에게 밟힐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그 새끼에게 모질게 대함이 제 새끼가 아닌 것처럼 하며 그 고생한 것이 헛되게 될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나니(욥 39:13-16).”

 

우리의 신앙은 지혜와 무지 사이의 경계를 걷는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무지는 죄다. 알지 못함을 두고 용서의 사유로 삼을 수 없다. 누구라도 하나님을 모른다고 말할 수 없게 하신다. 앎으로 누구는 믿음으로 구원에 나아가고 누구는 더욱 자신의 완고함으로 주를 부정한다. 결국 죄란 우리가 지닌 존귀함을 훼손한다.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대하지 못하게 한다. 그러니 함부로 대하거나 물건을 취급하듯 돈으로 환산하다. 직업과 지역으로 차별하고 성별과 학벌로 가늠할 때도 있다. 일련의 장관 후보자 청문회를 잠깐씩 보다 저의 변명 뒤에 숨겨진 사람의 됨됨이를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가 주를 경외함이란 수치스럽고 슬픔에 젖은 삶일지라도 이를 더하신 이를 기리며 존귀함을 잃지 않는 것이다. 하여,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하지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시 49:12, 20).

 

스스로를 짐승만도 못한 사람으로 전락시켜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다. 강남 어디 그 정도 평수의 집을 얻고자 편법을 쓰고, 이를 변명하느라 자식의 내밀한 병명까지, 그것도 사실인지 의심스럽지만 그렇게까지 해야 저 정도 위치를 누리며 살 수 있는 것인가? 하는 환멸이 들기도 했다. 마치 기적처럼 여리고 성을 점령하고 모두가 할렐루야로 하나님을 찬송하고 환희에 찰 때,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 삽디의 손자 갈미의 아들 아간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졌음이라(수 7:1).” 그것도 고작 “내가 노략한 물건 중에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그 무게가 오십 세겔 되는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가졌나이다 보소서 이제 그 물건들을 내 장막 가운데 땅 속에 감추었는데 은은 그 밑에 있나이다 하더라(21).” 우리의 실상이 그러하다.

 

또한 위엄에 뛰어난 사람들, 뛰어나게 고결한 사람들도 일반적인 재앙을 다른 사람들과 같이 겪는다는 것을 오늘 본문은 알게 한다. “전에는 존귀한 자들의 몸이 눈보다 깨끗하고 젖보다 희며 산호들보다 붉어 그들의 윤택함이 갈아서 빛낸 청옥 같더니 이제는 그들의 얼굴이 숯보다 검고 그들의 가죽이 뼈들에 붙어 막대기 같이 말랐으니 어느 거리에서든지 알아볼 사람이 없도다(7-8).” 그들은 매우 깨끗하고, 산뜻하고, 옷을 단정히 입고, 몸을 씻고, 향료를 발랐다. 존귀한 자들이란 나실인의 서약을 이행하여, ‘주께 그 몸을 구별하여 드린 사람들’을 의미한다. 이를 세상은 저의 이력으로 평가하고 품위와 인격은 평판으로 가름한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은 나실인 같이 비록 그 머리는 자르지 않았다 할지라도 식사를 삼가고 자주 몸을 씻고, 특히 하나님께 자신을 바쳐서 하나님과 더불어 대화를 즐거워하는 자이다.

 

죄로 언제든 깨질 수 있은 질그릇 같은 존재이나 존귀는 이를 소중히 여겨 그 안에 담긴 보배를 간직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단호하게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아들은 아버지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할 것이요 아버지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하리니 의인의 공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겔 18:20).” 이처럼 죄는 개별적이라 우리가 죄 많은 세상에서 살고 있다고 하나 물이 스며들지 않는 배와 같이 천성을 향한 항해는 계속된다. 하여 바울은 설교하기를,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롬 6:21-22).”

 

하여 세상은 아무리 어떻다 해도, 심지어는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시고

내 원수를 생각하셔서

평탄한 길로 나를 인도하소서

(시 27:10-11).

 

오늘도 일련의 사회 현상이나 예루살렘이 훼파된 것과 시온이 추락하는 사건은 오늘 우리 신앙의 반면교사가 된다. 결국 “악인은 자기의 악에 걸리며 그 죄의 줄에 매이나니 그는 훈계를 받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죽겠고 심히 미련함으로 말미암아 혼미하게 되느니라(잠 5:22-23).” 그러므로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고전 10:11).” 고로 이러한 교훈과 의로 교육하심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인식하는 것이 지혜이고 은혜이다.

 

우리의 본성은 참으로 기이하여서 살만하고 적당하면 신앙도 해이해진다. 세상이 늘 문 앞에 있다. 다들 주식 이야기에 누가 어디를 얼마에 사네, 직장은 어딜 다니고 직장은 어떻고 하는 소리에,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신 8:12-14).”

 

그런 가운데 우리로 정신 차리게 하려 하심인데,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 같이 비칠 것이며 네 치유가 급속할 것이며 네 공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사 58:7-8).” 부디 주신 바 나로 할 수 있는 것으로 주를 바라며 찬송하고 의지하게 하시기를.

 

예루살렘은 서서히 함락되었고, 오래 끌면서 죽었다. 기근은 어떤 심판보다 길었고 파멸을 가중시켰다. 예루살렘의 파멸은 소돔의 파멸보다 더욱 끔찍하다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소돔은 순간에 엎드러졌다. 불의 소나기와 유황이 순식간에 소돔을 처치했다. 소돔은 예루살렘과 같이 오랜 포위를 당하지도 않았다. 주의 손으로 즉각적인 멸망과 심판이었다. 상대적으로 예루살렘은 고통과 비참한 속에서 여러 달을 끌면서 고통은 지속되었다. 조금씩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느끼면서 죽어갔다. 예루살렘의 죄악이 소돔의 죄보다 더 하나님을 노하게 하였던 것이다. 소돔은 하나님의 말씀이나 예루살렘이 가진 은총을 갖지 못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의 심판은 소돔의 심판보다 무자비하다.

 

나는 종종 우리 믿는 자들의 지루하고 지속적인 고통을 이해하지 못했다. 가령 어느 아이의 아빠는 서른이 되면서 쉰 살이 되는 동안까지도 기형적인 아이를 돌보느라 자신의 청춘과 꿈과 모든 낭만은 사라졌다. 거의 매일 아이를 돌보고 24시간 아이 곁에서 아이를 건사하는 일로 일생을 바쳤다. 저를 볼 때면 오랜 기근을 생각한다. 그러느라 위장병을 달고 산다. 온 관절과 육신이 일찍부터 고통을 퍼붓는다. 더러는 그런 저의 판단과 삶을 두고 뭐라 말을 하는데, 나는 그의 헌신을 주를 향한 것이라 이해한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좇으라’ 하신 예수의 사명으로 제자의 삶을 살았다고 본다. 사지를 못 쓰는 아이를 안고 매일 성전에 올라 기도를 하고 예배를 인도하며 교회의 주역으로 산다. 물론 그의 아내는 안정된 직장이라 가장의 역할을 대신하지만 퇴근하고 집에 와서도 아내의 소임을 다하였다. 나에게 저들 부부의 삶은 그 자체로 교훈이 되고 더러는 책망을 더한다.

 

결국 어느 선교사의 책에서 아이를 잃고 쓴 고백과 같이 단 하루 세상에 보내셨다 데려가신 하나님의 권능을 찬송하고 경외함으로 주어지는 한 영혼 한 영혼을 더욱 더 사랑한다는…. 이와 같은 진술은 결코 아무나의 것이 아니다. 오늘 본문에서 새삼 느끼는 바, 아주 지루하고 오래도록, 지속적이며 장기적으로 망가져간 예루살렘을 생각하면서 주가 참고 또 기다리셨던 그 사랑을 연상하게 된다. 곧 우리의 구원은 보장된 것이나 우리의 성장은 각자의 몫이다. 이 땅에서의 평가나 그 기준으로 더 좋은 집과 직업과 지위로 평가되는 게 성화가 아니다. 물론 열심을 다해 주어진 삶을 사는 것으로 놀라운 성장을 보일 수 있으나 그 평가가 이 땅의 것으로는 아니라는 것이다. 저가 70평대 강남 아파트를 가졌든지, 연봉이 수억 원이 넘는 지위를 가지고 살았든,

 

많은 군대로 구원 얻은 왕이 없으며

용사가 힘이 세어도 스스로 구원하지 못하는도다

구원하는 데에 군마는 헛되며

군대가 많다 하여도 능히 구하지 못하는도다

(시 33:16-17).

 

그러므로 오늘도,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62:1-2).

 

이러한 고백이 이 땅의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버리면서 가능하겠나? 무슨 난센스 퀴즈도 아니고, 장관 후보자에게 누가 묻기를 그 집을 팔겠냐? 논란의 여지가 없도록 팔겠냐? 하고 묻는데 그 답은 모호하였고 결단은 미뤄졌다. 오늘을 사는 동안 내가 놓지 못하고 사는 일체의 것이 다 그러하다. 나는 주의 것으로,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8-9).” 우리 믿음의 결기가 그러할 때,

 

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내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

(시 77:1).

 

누군가 날 위해 기도하는 중보의 은혜로 살면서 동시에 나의 목소리 내 음성으로 주를 부르짖지 않으면 또한 동시에,

 

내가 하나님을 기억하고 불안하여 근심하니

내 심령이 상하도다 (셀라)

(3).

 

주를 바라고 믿는 일이 두려움이어서야,

 

내가 옛날 곧 지나간 세월을 생각하였사오며

밤에 부른 노래를 내가 기억하여 내 심령으로,

내가 내 마음으로 간구하기를

주께서 영원히 버리실까,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실까,

그의 인자하심은 영원히 끝났는가,

그의 약속하심도 영구히 폐하였는가,

하나님이 그가 베푸실 은혜를 잊으셨는가,

노하심으로 그가 베푸실 긍휼을 그치셨는가 하였나이다 (셀라)

(6-9).

 

곧 우리가 주를 사랑하면 할수록 그 사랑을 더욱 더 차지하고자 때로는 불안하고 근심에 찰 수 있으나,

 

또 주의 모든 일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며

주의 행사를 낮은 소리로 되뇌이리이다

하나님이여 주의 도는 극히 거룩하시오니

하나님과 같이 위대하신 신이 누구오니이까

주는 기이한 일을 행하신 하나님이시라

(12-14a).

 

하여 오늘도,

 

주의 백성을 양 떼 같이

모세와 아론의 손으로 인도하셨나이다

(2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