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들의 구속자이심을 기억하였도다

하현. 2026. 1. 26. 05:27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

애 5:21

 

하나님이 그들을 죽이실 때에 그들이 그에게 구하며 돌이켜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고 하나님이 그들의 반석이시며 지존하신 하나님이 그들의 구속자이심을 기억하였도다

시 78:34-35

 

 

우리가 죄악을 저지르면 하나님의 용서는 ‘해가 뜨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반복된다. 우리는 죄의 문제에서 해방되었어도 죄악의 문제로부터는 자유로울 수 없어서 숱하게도 죄를 짓고 산다. 순간적인 혈기나 오해, 비난, 비판과 남을 정죄는 일 등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일상적이다. 오가는 사람을 보면서도 어떤 비판을 일삼는 식이다. 하물며 무엇에 대한 자신의 판단과 기준을 주장할 때 상대를 함부로 여기고 대하는 것은 비일비재하다. 더 들어가면 우리 안에는 무의식적으로 우상숭배가 일어난다. 무작위로 소원을 빌고, 영험하다 느껴지면 그 앞에서 머리를 조아린다. 나아가 의도적인 죄악까지 더하면 한도 끝도 없다. 그러다 순간 이를 인식하고 주께 용서를 구하면 주가 용서하신다.

 

오늘 시편의 시각으로도,

 

그들이 광야에서 그에게 반항하며

사막에서 그를 슬프시게 함이 몇 번인가

그들이 돌이켜 하나님을 거듭거듭 시험하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노엽게 하였도다

(시 78:40-41).

 

그런 가운데서,

 

이에 그가 그들을 자기 마음의 완전함으로 기르고

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하였도다

(72).

 

오늘 본문의 예레미야는 이를 기억하고 주께 간구한다. ‘여호와여 기억하소서.’ 우리의 죄악으로 인하여, “우리의 마음에는 기쁨이 그쳤고 우리의 춤은 변하여 슬픔이 되었사오며 우리의 머리에서는 면류관이 떨어졌사오니 오호라 우리의 범죄 때문이니이다(애 5:15-16).” 이처럼 우리의 죄는 순식간에 기쁨을 잃게 하고 춤이 변하여 슬픔이 되게 한다. 이때 우리의 일은 기도다. 하나님께 아뢰고 쏟아 놓을 때 하나님의 귀와 눈은 언제고 우리를 향하신다. 이를 앎으로 선지자는 주가 살펴주시기를 구한다. “여호와여 우리가 당한 것을 기억하시고 우리가 받은 치욕을 살펴보옵소서(1).” 이는 기쁨이 있던 자리에서 슬픔이 압도하기 때문에, 은혜로운 보좌의 발판에서 악한 마음이 요동치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 슬픔을 터뜨리면 그 슬픔은 평안의 무게가 된다.

 

“우리 하나님이여 광대하시고 능하시고 두려우시며 언약과 인자하심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여 우리와 우리 왕들과 방백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조상들과 주의 모든 백성이 앗수르 왕들의 때로부터 오늘까지 당한 모든 환난을 이제 작게 여기지 마옵소서(느 9:32).”

 

하고 아뢰는 일, 저마다 어떤 어려움을 안고 사는 세상에서 우선은 우리가 범한 죄의 치욕을 인정하는 게 중요하다. 예레미야의 기도는 그렇게 시작한다. 이어서 “우리의 기업이 외인들에게, 우리의 집들도 이방인들에게 돌아갔나이다(애 5:2).” 오늘 이 형편과 사정을 아뢴다. 우리가 살면서 당한 수치와 부끄러움을 가슴에 안고 사는 일이 무섭다. 그럴 때면 기도를 붙들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오늘 말씀은 재차 알게 한다. 하였을 때,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조금 있으면 내게 돌을 던지겠나이다(출 17:4).” 모세가 주 앞에 엎드렸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하나님이여 원하건대 그를 고쳐 주옵소서(민 12:13).”

 

이어 우리는 자신의 죄를 고한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들을 섬김으로 주께 범죄하였나이다 하니” 주가 일깨우신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시되 내가 애굽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암몬 자손과 블레셋 사람에게서 너희를 구원하지 아니하였느냐(삿 10:10, 11).” 이처럼 아사 왕도 “아사가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여호와여 힘이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는 주밖에 도와 줄 이가 없사오니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가 주를 의지하오며 주의 이름을 의탁하옵고 이 많은 무리를 치러 왔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우리 하나님이시오니 원하건대 사람이 주를 이기지 못하게 하옵소서 하였더니(대하 14:11).”

 

요나로 인해 풍랑을 만난 이들이 기도하기도, “무리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여호와여 구하고 구하오니 이 사람의 생명 때문에 우리를 멸망시키지 마옵소서 무죄한 피를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주 여호와께서는 주의 뜻대로 행하심이니이다 하고(욘 1:14).” 이렇듯 성경 곳곳에서 우린 찾아볼 수 있다. 그들 누구라도 구하며 주 앞에 자신의 죄를 고할 때,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렘 31:31).” 그렇듯 기도는 사람으로 살면서 필연적인 반응이다. 그 대상이 다른 데 대해서는 논할 바 아니지만, 죄를 주 앞에 고하지 않을 때는,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 세대에 돌아가리라(마 23:35-36).”

 

그 죄악의 값이 자신은 물론 자식에게도 돌아간다는 사실이다. 결국 하나님의 정의에 우리를 복종시키신다. 이는 단순히 하나님이 내리시는 벌로써의 의미가 아니라 돌이켜 주께로 다시 나올 수 있도록,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잊으시오며 우리를 이같이 오래 버리시나이까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애 5:20-21).” 곧 우리를 바로 잡기 위하여 하나님은 정의로 행하시고 모든 일에서 주를 인정하게 한다.

 

이에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에 의존하여, ‘주여! 우리의 열조들이 죄를 범하였고, 우리는 그들의 죄로 인하여 마땅히 매를 맞습니다. 그들은 장차 올 재난을 받지 않은 채 옮겨갔고, 우리가 당하는 이 재난을 보지도 아니했고, 몫을 나누어 살지도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죄악을 짊어졌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의로우시지만 우리의 경우는 불쌍하고, 동정을 받아야 한다고 고백합니다.’ 하는 내용으로 읽힌다. “우리의 조상들은 범죄하고 없어졌으며 우리는 그들의 죄악을 담당하였나이다(7).” 이로 인하여 “우리의 마음에는 기쁨이 그쳤고 우리의 춤은 변하여 슬픔이 되었사오며 우리의 머리에서는 면류관이 떨어졌사오니 오호라 우리의 범죄 때문이니이다(15-16).”

 

그러므로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21).” 곧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주 앞에 구하여야 한다. 회개가 일어나야 하고 주의 은혜의 손길을 바라야 한다. 이런 점에서 의외로 “그 둘 중의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이르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마 21:31).” 죄가 더 많은 곳에 은혜가 크다. 그렇다고 죄를 지을까?

 

이에 바울은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녀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고전 6:15).” 하고 더는 그러지 말 것을 이른다. 회개는 단순히 반성이 아니다. 후회도 아니다. 이를 인정하고 돌이켜 전혀 다른 존재로 새 사람을 입는 일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4).” 하여 이제 우리는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골 3:10).” 할 때에 우리의 진정한 평안은 하나님을 의지할 때인 것을 깨닫게 된다. 이를 오늘 예레미야는 고통의 자리에서 역설한다. “우리는 아버지 없는 고아들이오며 우리의 어머니는 과부들 같으니(애 5:3).” 이 처지에 무얼 바랄 것인지?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시 18:2-3).

 

오늘을 살면서 이와 같은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신중하고 근신하여 살 수 있다면,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잠 18:10).” 곧 은혜를 받은 것도 중요한 일이나 그것을 올바르게 지키며 사는 것이 더 중요하였다. 곧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1-2).” 누구의 어떤 사연과 그 일을 두고 같이 씨름하듯 주 앞에 나아갈 때, 실상은 이미 받은 은혜가 넘치도록 많은데도 그것을 말 그대로 넘쳐서 버려지게 하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속된 말로 있을 때 잘하라는 말처럼, “이르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시옵고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에서 쉬소서(창 18:3-4).” 이와 같이 주를 알고 섬기는 삶은 이어져야 한다. 그게 어려울 때는 적당할 때이다. 살만하면 이상하게 세상으로 기우는 게 우리 삶의 무게라,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만일 내가 주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와 말씀하신 이가 주 되시는 표징을 내게 보이소서(삿 6:17).” 우리는 연거푸 표징을 구한다. 이 어리석고 한심한 나에게 오늘도 이처럼 이른 아침 무사히 주 앞에 나와 말씀 앞에 세우시고 이를 글로 기록하게 하시는 일이라,

 

내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나를 고치소서 하였나이다

(시 41:4).

 

저마다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병든 사회를 살아가면서 숱한 감염이 옮기고 번져서 서로가 서로를 보며 ‘에이, 설마!’ 하게 한다. 아이의 결혼으로 새삼 이 소식을 알리는 데 있어서 평소 소원했던 사이에 그러기가 민망하다. 평소 연락이 닿고 나름 왕래가 있었으면 모르겠는데 어느 순간 단절과 같이 끊긴 사이에서 새삼 연락이라니… 그런데 하나 둘 연락을 하다 보니 의외로 여러 명이다. 새삼 연락이 닿은 친구나 아이하고 이런저런 안부를 물을 때 그 어색함이라니! 누가 그러길 다 그런 거라며, 자신이 알아서 동기들 방에 올리고 소식을 전하겠다고 하는데 제지하였다. 한 친구와는 수 년 만에 연락이 닿았는데, 예전에 그 시절의 이야기로 이어지다 한참을 통화했다. 그러면서도 서로가 어려운 게 벌어진 시간 사이로 저마다의 사연이 숨어 있는 것이다. 불쑥 말을 꺼내기도, 이를 듣고 있기도 서로가 이젠 의자를 치운 빈 공간 같다.

 

오늘 본문으로 보면 집을 잃었고 목축을 하던 땅을 빼앗겼다. 이제는 끼니를 더하기 위해 자유를 팔아야 했다. “우리가 애굽 사람과 앗수르 사람과 악수하고 양식을 얻어 배불리고자 하였나이다 우리의 조상들은 범죄하고 없어졌으며 우리는 그들의 죄악을 담당하였나이다(애 5:6-7).” 나름은 이 땅에서 이 나이쯤 살다보니 다들 일가를 이뤄 저마다의 세계를 살고 있는데 예전에 같이 어울리던 그런 세대가 아니다. 유다는 본래 수확이 많은 땅이었다. 지금은 그 땅의 거민이 바뀌었다. 애굽인과 앗수르인에게 아부하고 빌붙어서 살아야 한다. 먹을 것을 얻기 위해 생명을 무릅쓰고 죽지 못해 사는 듯 산다. “광야에는 칼이 있으므로 죽기를 무릅써야 양식을 얻사오니(9).”

 

저마다 이런저런 소문과 사연이 있는데 그 속을 다 보일 수 없는 나이들이 된 것이다. 그러다보니 열에 아홉은 소위 빈말뿐이고, 안부를 묻는 정도에서 거기까지다. 나는 이게 어려운데 다들 그러고 사는 것이라며 아내도 친구도 핀잔을 했다. 어제는 문득 아내가 내게 바보가 된 것 같다며 농담도 진담도 아닌 말을 하였다. 이런저런 말 중에 나온 것이라 어떤 의미인지, 느낌만 와 닿았다. 하물며 아이들도 돈이나 현실적인 이야기는 내게 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현실과 동떨어진 곳에서 살아가고 있는 느낌이 종종 든다. 모두가 죽기 살기로 사는데 나만 헐렁한가, 싶기도 하고. 뭐라 설명하기는 어려운데 친구들에게 연락하는 일이나 뭐라 말을 꺼내거나 듣고 그저 그러려니 하는 인사치레로 오가는 말들이 버거운 것 같다.

 

사실 좀 그런 면이 강한 걸 느낀다. 교회에서도 예배나 어떤 형식에 있어 생략하거나 없이 하는 것들이 늘었다. 너무 말씀만 강조한다면서 누군가 타박도 핀잔도 아닌 말을 한 것 같다. 돌이켜 신대원을 하면서 만난 마틴로이드 존스 목사의 설교들이나 저서가 나로 하여금 고리타분하게 한 것인가? 병적으로 나는 목사의 저서를 다 찾아서 읽고 간직하고 되새긴다. 존 파이퍼니 오스왈드 챔버스니 하는 일들도 같다. 뭐랄까 경건주의자로 보수적이고 말씀 위주로 그 외의 것들을 경계하게 되었다. 가령 부활절이나 성탄절의 어떤 행사를 나는 멈추었다. 그 의미를 확대하면서 오히려 우리의 사소한 행사나 의식을 축소하거나 없이 한 것이다. 가령 연세 많은 장모는 부활주일에 왜 삶은 달걀을 안 주는가? 하고 염려처럼 말하기도 했다. 어떤 분위가나 형식을 비판하는 것은 아니지만 정작 그 의미를 되새기다보면 가만히 말씀 앞에 앉는 것으로 족하였다.

 

오래 된 사이의 관계도, 서로 다른 관점으로 저 세계를 바라며 사는 사람들과의 교류도, 사느라 이 땅에서의 일로 부산하고 분주한 이들의 열심도… 오히려 일상의 사소하고 소소한 일들이 어려운 일이 되었다. 그러니 이 감정은 나로서도 표현하기 어려워서 시편을 생각하였는데,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셀라)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셀라)

(시 32:1-5).

 

이와 같은 은혜로 사는 삶이라,

 

내 백성이여, 내 율법을 들으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며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을 드러내려 하니

이는 우리가 들어서 아는 바요

우리의 조상들이 우리에게 전한 바라

(78:1-3).

 

하고 오늘의 시인도 말한다. 나의 삶을 정의하자면,

 

보라 그가 반석을 쳐서 물을 내시니 시내가 넘쳤으나

그가 능히 떡도 주시며

자기 백성을 위하여 고기도 예비하시랴 하였도다

(20).

 

그러하였고 그러하여서 은혜뿐이라,

 

하나님이 그들의 반석이시며

지존하신 하나님이 그들의 구속자이심을 기억하였도다

(35).

 

그리하여,

 

그들은 육체이며 가고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바람임을 기억하셨음이라

(39).

 

한데 우리의 세상에서,

 

그 때에 하나님이 애굽에서 그의 표적들을,

소안 들에서 그의 징조들을 나타내사

 

그가 자기 백성은 양 같이 인도하여 내시고

광야에서 양 떼 같이 지도하셨도다

(43, 52).

 

이를 인정함으로 산다. 곧

 

하나님이 그들의 반석이시며

지존하신 하나님이 그들의 구속자이심을 기억하였도다

 

이에 그가 그들을 자기 마음의 완전함으로 기르고

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하였도다

(35, 7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