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대아 땅 그발 강 가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부시의 아들 제사장 나 에스겔에게 특별히 임하고 여호와의 권능이 내 위에 있으니라
겔 1:3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의 영광스러운 행사를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
시 79:9
에스겔이 환상을 본다. 주의 강권하심으로 그 앞에 섰다. 세상 어디도 하나님의 통치가 머물지 않는 곳은 없다. 때는 제 삼십 년 어느 날이다. “서른째 해 넷째 달 초닷새에 내가 그발 강 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을 때에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모습이 내게 보이니(1).” 이를 정확히 밝히지 않으심은 그게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제사장들은 30세에 직무를 수행한다. 당시 선지자요 제사장이었던 에스겔이 소명을 받은 나이도 그러할 것이다. 또한 희년에서 30년이 지난 때일 수도 있다. 혹은 요시야의 종교 개혁이 시행된 즉위 18년부터 30년이 지난 때(주전 593년)를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 칼빈은 요시야 왕 18년에 유월절 의식이 실행되어진 점으로 미루어 이때가 희년으로 추정된다고 언급하면서 이를 지지한다.
어쨌든 그 해 4월, 이는 바벨론의 담무스 월로 오늘로 치면 6, 7월에 해당한다. 그발 강가에서 하늘이 열렸다. 하늘이 열렸다는 것은 여러 해석이 또 가능할 테지만, 하나님이 성도의 눈을 열어 비밀한 일을 보이실 때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이상’은 그러하다. 이상은 ‘보다’는 의미로 하나님의 계시를 가리킨다. 여호야긴 왕의 사로잡힌 지 5년의 일이다. “여호야긴 왕이 사로잡힌 지 오 년 그 달 초닷새라(2). 즉 바벨론의 2차 침입(597년)이 있은 지 5년째 되는 해를 말한다. 중요한 것은 ‘여호와의 말씀이 특별히 임하였다’는 것이다.
에스겔의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강하게 하시다’ 혹은 ‘하나님께서 단련시키시다’의 뜻이다. 포로 기간 중 유다의 죄악성과 심판, 예루살렘의 파괴 및 회복 등을 전한 그의 사역에 적합한 이름이다. 제사장 가문이면서 선지자 사역을 감당한 자이다. 사무엘, 예레미야, 스가랴 등도 같다. 그에 눈이 열리고 말씀이 임하시고, 여호와의 권능이 그 위에 있었다. “갈대아 땅 그발 강 가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부시의 아들 제사장 나 에스겔에게 특별히 임하고 여호와의 권능이 내 위에 있으니라(3).” 권능은 손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권능, 능력을 나타내는 손으로 ‘여호와의 권능’이란 표현이 자주 쓰인다.
이에 에스겔이 환상을 본다. 매우 구체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환상에 대한 설명이 공상적이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에 독특한 방법으로 자신을 나타내기 기뻐하신다. 아브라함이 처음 단을 쌓았던 날과 장소로 돌아가면, “그가 네게브에서부터 길을 떠나 벧엘에 이르며 벧엘과 아이 사이 곧 전에 장막 쳤던 곳에 이르니 그가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창 13:3-4).” 곧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즐겁고 은혜로운 은총을 상기시킨다. ‘하나님이 너를 위해 행하신 것을 남들에게 고하라.’는 의미로 우리의 간증과 말씀 선포는 성도의 의무다. 삶의 여정에서 하나님을 목도하고 묵상하고 이를 살펴 자신의 변화된 삶을 나타내는 일은 중요하다. 에스겔이 이 환상을 본 시기를 기록한 것은 그 때문에도 사실을 기반으로 한다.
나이가 30에 그는 제사장직을 수해하였다. 하나님은 에스겔을 예언자로 세웠다. 그때는 ‘여호야긴 왕이 사로잡힌 지 5년’ 되던 때이다(2). 그냥 30년이 아니라, 주의 날에 성령에 감동되었던 사도 요한의 경우와 같다. 요한은 그날에 큰 소리를 듣는다.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계 1:10).” 이를 대적들은 비웃는다. “예루살렘이 환난과 유리하는 고통을 당하는 날에 옛날의 모든 즐거움을 기억하였음이여 그의 백성이 대적의 손에 넘어졌으나 그를 돕는 자가 없었고 대적들은 그의 멸망을 비웃는도다(애 1:7).” 그런 점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손길로 붙들리고 그의 말씀에 주의하는 것을 다른 이들은 쉽게 공감할 수 없다. 하여 주의 권능의 날에 일이 시작된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규를 내보내시리니
주는 원수들 중에서 다스리소서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시 110:2-3).
이는 곧,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권능의 궤와 함께 평안한 곳으로 들어가소서
(시 132:8).
주가 일하심이다. 나는 이를 확신한다. 나의 초라했던 날들이 어느 순간도 화려하지 않았던 적이 없던 것은 그날마다 주의 권능이 함께 하셨음을 알게 된 후이다. 어릴 적 열등생에서 둔재나 지적장애까지 염두에 둔 판단은 일순간 교회 안에서 이루어진 ‘천사게임’으로 한 사람을 예비하셨고, 저가 생전처음 건넨 편지와 관심으로 미숙하였던 아이는 글자에 눈을 뜨고 사랑에 녹아서 주를 더욱 바라는 마음으로 나아갔다. 이 우연과 필연 사이에서 하나님은 일하셨다. 여수 애양원 나환자촌에 있는 병원에서의 수술과 그 사이 부친이 경기도 양주군의 나환자촌 교회로의 부임은 우연을 가장한 하나님의 설계이다. 그곳에서의 4년 남짓한 생활은 유년의 시절 나의 정서와 신앙과 학업에 대한 깊이를 달리하게 하였다. 무엇보다 천사게임 후 이어지는 그녀와의 3년 가까운 편지 활동은 거짓말 같지만 하루 두 통 아침저녁으로 서로 주고받으며 나의 하루 일과 중 가장 특이하고 조용하며 요란하고 활발했던 일이다.
그뿐인가? 나는 미처 몰랐던 그 앞전의 일도 이후의 일도 그 어느 것도 하나님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것이 없음을 설명할 수 있다. 나의 개인적인 체험이고 관점이라 누구의 이핼 구하는 게 아니라, 이처럼 에스겔의 환상과 견주어 나의 일상도 전혀 다르지 않다는 소신으로 하는 말이다. 곧 우리 성도의 개별적 간증의 날들은 모두가 같은 의미로 환상적이며 몽환적이고, 이성적이며 현실적으로 그 당사자로서는 강한 인상이다. 어쩌면 우린 그것으로 확신의 틀을 다진다. 이는 오늘도 매순간 다르지 않다. 당장은 모호했던 것이 조금 지나 선명해질 때도 있다.
당시 에스겔은 우울한 형편에 놓여 있었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은 이 환상으로 그를 영예롭게 하셨다. 그렇게 하심으로 자기 백성에게 은총을 베푸셨다. ‘에스겔은 갈대아인의 땅인 그발 강가에서 사로잡힌 자 중에 있었다.’ 형편이 어떠한지 짐작이 된다. 저마다 어떤 놀랍고 신기하고 좋은 일에서 주의 응답을 운운하는데 꼭 그런 것은 아니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로 숨어들어 은둔한지 40년만에 하나님의 권능이 그에게 임하셨다. 다시 말하지만 권능은 하나님의 손이다. 실제 하나님은 그 손으로 우리의 뒷덜미를 낚아채시기도 한다. 강한 충격 가운데 하나는 그날 나는 죽을 거였다. 충남 당진 어느 깊은 계곡의 저수지는 수심 30미터 가까이 된다고 했다. 이틀째 낚시를 하고 있을 때, 새벽언저리에 안개가 자욱한데 순간 내 안의 내밀한 중에 죽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났다.
앞서도 몇 번 그런 충동으로 우울하던 시기였다. 모 단체에서 인간의 환멸을 경험하고 그만 두었는데 나중에 보니 중간부 대부분이 뇌물로 엮여 고소를 당하였다. 바로 그 직전에 나를 빼내시듯 그만두게 하셨고, 갑자기 아이들을 가르치던 글방이 감옥 같이 여겨졌고 가족들은 어깨를 짓눌렀다. 사랑하는 문학은 진절머리가 났고 사람들과의 관계도 지겨웠다. 그때에 짚은 안개가 모든 세계를 삼켰을 때 골 깊은 산 저수지의 고요함은 그야말로 적막강산이었다. 혼자였을까? 순간 깊은 저수지로 들어가고 싶다는 충동, 저만치 깜빡거리는 두 개의 야광찌는 마치 작은 문이 열린듯 했다. 순간 일어서서 가만히 걸어들어도 될 것 같은 마음으로 의자 손잡이를 잡았는데, 누가 날 뒤에서 붙든 것처럼 순간 꼼짝할 수 없었고, 그렇게 엉거주춤한 자세로 앉은 것도 선 것도 아닌 자세에서 느닷없이 쏟아지는 눈물은 오히려 당황스러웠다. 이도저도 못하다 순간 주님, 하고 울먹거리자 모든 게 뒤집어졌다.
이런 현상? 우리 믿는 자들로 저마다의 환상은 작던 크던 놀라운 역사로 그 남은 삶을 지배한다. 본문 당시 대부분의 하나님의 백성들은 ‘갈대아인의 땅에 사로잡혀 있었다.’ 유다 민족의 일부는 아직 고국에 있었고, 그 중 일부는 가장 우수한 사람들로 포로가 되어 먼저 끌려와 있었다. 예레미야의 환상에서 이들은 ‘좋은 무화과’였고, 하나님은 이들을 좋은 무화과 같이 좋게 하기 위하여 갈대아인의 땅에 보내셨다고 기록한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이 곳에서 옮겨 갈대아인의 땅에 이르게 한 유다 포로를 이 좋은 무화과 같이 잘 돌볼 것이라(렘 24:5).” 하나님의 생각과 현실은 꼭 부합되지는 않는다. 포로로 끌려가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에게 유익하게 더하시기 위해 그들을 징벌하시고, 그들을 징벌하시는 때에 선지자를 세워 율법으로 교훈하게 하셨다!
여호와여 주로부터 징벌을 받으며
주의 법으로 교훈하심을 받는 자가 복이 있나니
이런 사람에게는 환난의 날을 피하게 하사
악인을 위하여 구덩이를 팔 때까지 평안을 주시리이다
(시 94:12).
시인이 시선은 성도의 간증과 맞닿아 있다. 우리가 환난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임하신다. 어느 때가 좋다, 하고 단정할 수 없지만 대체로 어려울 때, 춥고 매서운 바람이 불 때 하늘이 청명하듯 하나님의 큰 자비하심은 우리의 역경 가운데서 확연히 드러난다. 그 말씀을 경청하고 주목하게 하심도 주의 권능으로다. 이후 나는 낚시터에서 돌아와 가족들 앞에서 무너졌다. 엉엉 울었고 이후 새벽예배를 나가기 시작했다. 그해 신대원은 낙방을 하였지만 이듬해 신대원을 정식으로 준비하면서 가정예배가 드려지기 시작했고, 새벽예배가 이루어졌다. 말씀과 징계의 막대기는 서로 협동하고 협력한다.
고난으로 “그들의 귀를 열어 교훈을 듣게 하시며 명하여 죄악에서 돌이키게 하시나니(욥 36:10).” 엘리후의 설명이 맞다. 욥은 고난으로 배웠다. “만일 일천 천사 가운데 하나가 그 사람의 중보자로 함께 있어서 그의 정당함을 보일진대 하나님이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사 그를 건져서 구덩이에 내려가지 않게 하라 내가 대속물을 얻었다 하시리라(33:23-24).” 세상은 이를 알지 못하고 본디 우리의 본성도 ‘고난으로’가 아닌 ‘형통함으로’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는 데에 집중하기 마련이다. 그런 가운데, ‘사로잡힌 지 5년 되는 때’에 에스겔이 환상을 본 것이다. 주의 뜻을 본 것이다. 자신도 ‘그발 강가에 자리 잡고 있던 포로였다.’ 저들은 그 강가에서 울었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시 137:1).
우리의 눈물은 놀라운 정화작용을 일으킨다. 슬픔도 기쁨도 모두 울음으로 표출된다. 이는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 1:16-17).” 평소 우리가 알지 못하고 무심하게 지나치던 것들에서 주의 손길을 본다. 여기서 ‘네 얼굴’이 묘사되는데, “그 속에서 네 생물의 형상이 나타나는데 그들의 모양이 이러하니 그들에게 사람의 형상이 있더라… 그 얼굴들의 모양은 넷의 앞은 사람의 얼굴이요 넷의 오른쪽은 사자의 얼굴이요 넷의 왼쪽은 소의 얼굴이요 넷의 뒤는 독수리의 얼굴이니… 그 생물들은 번개 모양 같이 왕래하더라(5, 10, 14).”
곧 네 생물의 얼굴 모양과 관련하여 각각 네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으며, 그 얼굴들은 사람과 사자와 소와 독수리의 모양이었다. 네 얼굴과 관련하여 이들을 유다의 사람, 동물, 가축, 조류 등 만물의 대표로 상정하여 이해된다. 이 네 얼굴에 대해서 각각 사람의 얼굴은 지혜를, 사자의 얼굴은 용기를, 소의 얼굴은 충직함을, 독수리는 민첩함을 상징한다. 곧 하나님을 섬기며 수종드는 그룹들이 이처럼 지혜와 용기와 충직함과 민첩함을 상정하여 네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이는 우리의 삶을 표현하는 것으로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사 43:7).” 하신 말씀에 합하여 사는 삶을 묵상한다.
동시에 사복음서의 특징도 이와 같은데, 마태복음은 왕로서의 예수님을, 마가복음은 종으로서의 예수님을, 누가복음은 인자로서의 예수님을, 요한복음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님을 증거한다. 이에 마태는 예수님을 짐승의 왕인 사자로, 마가복음의 예수님은 충직한 소로, 누가복음의 예수님을 사람으로, 요한복음의 예수님은 독수리로 대입하게 한다. 즉 예수님은 본문의 네 생물이 가진 모든 자질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수행하신다. 이어 하나님의 천사들은 하나님을 위하여 봉사하고, 지혜와 용기와 충성과 민첩함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존재들이다. 네 얼굴이 상정하는 인격과 자질로 하나님을 뜻을 이루어가는 데 있어 그의 손길에 붙들려 사는 일이 중요하다.
곧
“그가 이르시되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매우 쉬운 일이라 내가 또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사 49:6).”
이에 바울은 예수님에 대하여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하고 설교하였다. 우린 결국 강인하고 강직하고 열심을 다해 주의 뜻을 따른다. 그리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우리로 고난에 두시기도 한다. 연단하심으로 굳세게 하신다. 환난 중에 고통당하는 일이 좋은 게 아니고, 그 일로 ‘예언의 영’ 곧 말씀 보고 듣고 느끼는 권능이 충만하여진다. 어느 곳에 있든지 하나님과의 친교는 그래서도 유지돼야 한다.
그러할 때에,
우리는 우리 이웃에게 비방 거리가 되며
우리를 에워싼 자에게 조소와 조롱 거리가 되었나이다
(시 79:4).
사람들은 이를 그저 우연한, 특별하나 다들 그럴 수 있는 일에 너무 의미를 부여한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하여 오늘의 나를 어떤 선입견으로 보기도 한다. 하나,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영원히 노하시리이까 주의 질투가 불붙듯 하시리이까
주를 알지 아니하는 민족들과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는 나라들에게
주의 노를 쏟으소서
(5-6).
우린 우리의 억울함으로 주께 아뢴다. 비록 ‘갈대아 땅 그발 강 가에서 여호와의 말씀’을 가까이 하고 사는 것 같은 세월이나, 그런 가운데 ‘여호와의 권능’이 우리 위에 있으리라. 그러므로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의 영광스러운 행사를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
(9).
주의 도우심을 바란다. 안 믿는 저들로 증거가 되게 하시기를.
갇힌 자의 탄식을
주의 앞에 이르게 하시며
죽이기로 정해진 자도
주의 크신 능력을 따라 보존하소서
주여 우리 이웃이 주를 비방한 그 비방을
그들의 품에 칠 배나 갚으소서
우리는 주의 백성이요 주의 목장의 양이니
우리는 영원히 주께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대대에 전하리이다
(11-1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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