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인자에게 주의 손을 얹으소서

하현. 2026. 1. 28. 05:11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네 발로 일어서라 내가 네게 말하리라 하시며 그가 내게 말씀하실 때에 그 영이 내게 임하사 나를 일으켜 내 발로 세우시기로 내가 그 말씀하시는 자의 소리를 들으니

겔 2:1-2

 

주의 오른쪽에 있는 자 곧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인자에게 주의 손을 얹으소서

시 80:17

 

 

믿음은 값없이 주신 선물이고 신앙은 이에 따른 우리의 의지다. ‘네 발로 일어서라’ 하시는 데는 그의 말씀을 행하고자 하는 의지를 요구하시는 것이다. 이에 ‘내가 말하리라’ 하심은 교제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의 전형이다. 비록 그 현실은 어렵고 고달파서, “인자야 너는 비록 가시와 찔레와 함께 있으며 전갈 가운데에 거주할지라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의 말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도 그 말을 두려워하지 말며 그 얼굴을 무서워하지 말지어다(6).” 이와 같다 하여도 “너 인자야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듣고 그 패역한 족속 같이 패역하지 말고 네 입을 벌리고 내가 네게 주는 것을 먹으라 하시기로(7). 우리는 우선 말씀을 받아야 한다.

 

“내가 보니 보라 한 손이 나를 향하여 펴지고 보라 그 안에 두루마리 책이 있더라(9).”

 

먼저는 부르심이다. ‘인자야!’ 하며 ‘그가 이르신다.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네 발로 일어서라 내가 네게 말하리라 하시며(1).” 인자는 부르시는 대상을 일컫는다. 물론 하나님이시면서 또한 사람의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한다.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단 7:13).” 그러나 여기에서는 문맥적으로도 에스겔을 향한 부르심이다. 특히 에스겔서에서는 93회 표현되고 있다. 모두 전능하신 하나님의 위엄 앞에서 연약한 우리의 존재를 의미한다. 신약에서 거의 대부분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요 12:23).”

 

먼저 우리를 부르시고 ‘일어서라’ 명하신다. 이는 하나님께 대한 경배의 태도에서 하나님의 명령과 뜻을 수행하고자 하는 헌신의 자세를 취한다. ‘부르심’ 곧 소명은 동시에 ‘보내심’ 즉 사명으로 이어진다. 이어서 오늘 본문은 선민의 타락과 그에 대한 공의의 심판의 날로 남유다의 멸망과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에 대해 알게 한다. 이에 따른 에스겔의 사명을 다루고 있다. 패역한 선민을 향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 우선이다. “너 인자야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듣고 그 패역한 족속 같이 패역하지 말고 네 입을 벌리고 내가 네게 주는 것을 먹으라 하시기로 내가 보니 보라 한 손이 나를 향하여 펴지고 보라 그 안에 두루마리 책이 있더라(8-9).”

 

실은 이 말씀을 전하는 일이 직선적이지만은 않다. 하나님께서는 말씀 앞에 선 에스겔을 향해 당신의 영으로 일으켜 말씀하기 시작한다. 에스겔의 파송하시기 전에 이스라엘 자손들의 실상을 알리신다. “인자야 너는 비록 가시와 찔레와 함께 있으며 전갈 가운데에 거주할지라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의 말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도 그 말을 두려워하지 말며 그 얼굴을 무서워하지 말지어다 그들은 심히 패역한 자라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너는 내 말로 고할지어다(6-7).” 그런 자들로 그에 따른 반응이 어떨지, 어떻든지 ‘너는 내 말로 고할지어다.’ 하고 명령하신다.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간 땅에서 선지자로 활동하기란 결코 녹록하지 않을 것이다. 다니엘의 경우 주전 605년, 1차 바벨론 포로로 잡혀갈 때 나이로 그는 굳은 결의가 있었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단 1:8).” 당시의 상황과 그 여건을 감안할 때 이는 매우 확고한 의지의 표명이고 믿음으로의 결단이었다. 개인적으로도 나는 ‘뜻을 정하여’ 하는 이 말씀에서 나를 자주 다잡는다. 처음 이 말씀이 나를 붙드신 때는 목사 고시를 두 번씩이나 떨어질 때이다. 그것도 처음에는 논술에서, 다음에는 새로 도입된 심리검사에서 그런 것이라 나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오죽하니 면접관 목사님이 안타까운 듯 앞으로 어쩔 것인가? 하고 물었을 때 나는 이 말씀을 마음에 두고 말하였다. 떨어지고 또 떨어져도 나로서는 이 길뿐이라, 뜻을 정하지 않으면 달리 물러설 곳을 알지 못했다. 당시 글방에서 예배드리고 같이 모이던 아이들도 이 의지와 결단으로 자주 결속을 다지고는 했다. 뿐만 아니라 오늘까지도 ‘뜻을 정하여’ 나의 이 난관을 헤쳐 간다. 이는 모두가 하나님 없이도 잘 사는 세상 같은데서 우리의 신앙을 지키며 사는 일이란, “인자야 너는 비록 가시와 찔레와 함께 있으며 전갈 가운데에 거주할지라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의 말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도 그 말을 두려워하지 말며 그 얼굴을 무서워하지 말지어다(겔 2:6).”

 

이를 바탕으로 누구의 어려움에 대해, 그러한 상황에서도 신앙을 버리지 않고 온전히 ‘한 길 가는 순례자’로 굳건하기를 바랐다. 혼자 독처하며 극한 불구의 몸으로 자신을 건사하는 일에조차 힘이 들어서 하루가 늘 고통인 이가 있다. 저는 날 때부터 버려져 기형적인 몸을 뒤뚱거리며 일반인들 사이에서 살아왔다. 늘 불편하고 어디가 아픈 몸으로 견디었지만 나이가 들면서 그 몸은 낡아지기 마련이라 더욱 그렇다. 도우미도 오고 요양사도 와서 돌봐준다고는 하나 더욱이 요즘처럼 아픈 날들은 혼자서 견디기가 어렵고 두렵다. 종종 저는 농담처럼 고독사를 염려한다. 나는 그의 외로움과 고통을 어찌 다 이해하기는 어렵다. 이를 두고 ‘너는 비록 가시와 찔레와 함께 있으며’ 하심이 와닿는다.

 

더러는 하루해가 ‘전갈’ 같을 때가 있다. 아흔둘이 되는 장모는 자다가 낮은 침대에서 얼굴이 떨어져서 혼자 한참을 애먹었다고 하였다. 며칠이 지나면서 그 얼굴은 온통 시퍼렇게 멍이 퍼져갔다. 아침마다 예배를 드릴 때면 그런 ‘가운데에 거주할지라도’ 하는 말씀으로 그 고통의 깊이를 가눌 길 없다. 한데 말씀은 이르시는 것이다.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의 말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물론 오늘 이 말씀이 당시 바벨론에서의 생활로 직접적인 적들로부터의 공격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저마다의 일상이 그러하다. 이를 단순화해서 몸의 장애나 늙음을 두고서 한정할 수 없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힘에 겨운 날들로, 부모의 이혼과 폭압에서 불안장애와 분노조절장애 등이 중첩되었다. 동생아이는 약물에 의지하여 하루의 감정을 견디는데 이제 겨우 열 살이다.

 

내 곁의 사람들을 둘러볼 때도 이렇듯 자신들의 ‘가시와 찔레’로 고통 받고, ‘전갈 가운데에 거주’하는 것 같이 고달프고 어려운 처지의 경우가 다 있다. 자식으로 인해서든지 자신으로 인한 것으로든지, 이에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 가운데에 선지자가 있음을 알지니라(5).” 먼저는 자신을 향해 이처럼 선포해야 한다. 억지로라도 그리해야 한다. 나는 일찍이 뜻을 정하였고, 날마다 나를 쳐서 이처럼 교회로 이끌어 온다. 오늘내일이면 끝나는데 헬리코박터균이 있다면서 1차 제균 치료를 위해 먹은 약이 듣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 2차로 먹는 것은 약의 강도가 두세 배 높고 많은데 그것을 하루에 네 번씩 먹고 있다. 독한 항생제위주라 속이 울렁거리고 더러는 어지럽기도 하다. 속이 답답하고 토하고 싶은 것을 참고도 있다.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속이 불편하고 어지럽다. 추운데 굳이 교회로 나오는 것은 ‘뜻을 정하여’ 그리한다. 오늘 우리의 이런저런 사정과 사연들은 ‘패역한 족속’ 같다. 나름은 잘 관리하고 다독이며 산다지만 뜻대로 되지 않을 때가 더 많다. 이에 오늘의 관점은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주신 바, 나의 몸이고 한 날이며 연약한 부분이라 해도, 나로 알게 해야 한다. ‘그들 가운데에 선지자가 있음을 알지니라.’ 곧 우리를 괴롭히는 고통 중에 또는 어려운 사정 가운데 하나님의 뜻은 엄연히 존재한다. 아무리 그렇다 할지라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의 말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하신다. 내가 내게 먼저 말씀으로 선포하지 않으면 어떤 우울과 슬픈 감정이, 원망과 불평하는 말들이 내 속에서 일어나기 시작한다.

 

말씀으로 선포하지 않으면 불안과 불평의 말들로 공격당한다. 에스겔은 주전 597년 2차 바벨론 포로기에 25세의 나이로 바벨론으로 잡혀갔고, 5년 뒤인 30세에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다. 말 그대로 적지에서 말씀을 선포하는 일이란, 상상만으로도 끔찍하고 두려운 일이다. 그래서 에스겔서를 보면 온통 놀라운 이상체험을 바탕으로 하는 내용이 가득하다. 이는 다니엘서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서 체험한 것과 일맥상통한 것으로, 하나님은 극한 어려움으로도 주의 일을 감당하게 하시는데 더러는 신유와 신비한 은사로 가득하다. 앞서 하늘나라로 가셨지만 저이는 꼽추에 난쟁이 여성으로 강릉 어디에서 기도원 원장을 감당하였다. 저에게는 신유의 은사로 상대를 읽고 위로하거나 꾸짖는 사역이 주어졌다. 그런 가운데 목회자 내외가 유독 그곳을 자주 찾아 홀로 묵상하며 대화하며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다. 뒤늦게 내가 붙들려 목사가 돼야 했을 때, 아니 그럴 것을 알고 저이는 늘 내게 신유의 은사를 달라고 구하라 했었다.

 

그런 점에서 에스겔과 다니엘의 사역이 일반적이지 않다는 것을 본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상황이 어떠했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늘 자신을 보았다. 그 연약하고 깨지기 쉬운 질그릇의 존재로 주 앞에 섰다. 곧 자신들의 본질을 망각하지 않았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겸손할 수 있었고, 주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처신할 수 있었다. 이는 에스겔서에게 ‘인자’라는 호칭을 무려 93회나 사용하는 것으로도 짐작이 간다. 이러한 극적이고 개인적인 체험으로 교만을 경계하신 것이다. 곧 누구보다 실감나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실은 비록 ‘가시와 질레’로 ‘전갈 가운데서’의 생활 같았다 해도 연약한 자신의 연약함으로 주께 더욱 의지할 수 있었다.

 

바울도 자신의 약한 육신을 두고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12:7).” 먼저는 이를 두신 하나님을 인정하였다. 물론 그 생활이 고단하고 고통스러워서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8)” 나 역시 하루에도 몇 번씩 약한 육신으로 인한 우울과 슬픔을 토로한다. 몸을 건사하는 일이 하루 일과 중에 가장 고단한 일이다. 그럴 때면 주의 이름을 부르며 울고 싶은데,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9).” 하는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다.

 

요즘은 아내 휠체어를 밀고 어디 산책이라도 나가는데 그래서 그런지 괜찮았던 오른쪽 어깨가 아파서 매일 파스를 붙이고 산다. 이 한 팔이 나의 모든 신체 가운데 가장 유용하게 일하는 것이어서 가끔은 두렵다. 사는 게 실전이듯 말씀도 실제이다. 에스겔을 부르신 하나님이 오늘 우리를 부르심이다. 하나님이 임의로 나를 세우셨으니,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으며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가 없사오니 이는 주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숨기시며 우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소멸되게 하셨음이니이다 그러나 여호와여, 이제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사 64:7-8).”

 

하여 오늘도 묵상으로 하루를 먼저 열고 이를 글로 쓰느라 오른쪽 어깨가 유난히 힘들다. 뭘 꼭 이렇게 해야 하나? 싶은 생각도 들곤 하는데 내가 아는 나는 한 번의 예외로 모두가 쓰러질 수 있다. 마치 도미노처럼 한 토막의 한 날의 수고가 쓰러지면 삽시간에 나의 나태와 무기력과 어리석음이 순식간에 나로 넘어뜨릴 것을 안다.

 

처음 글방에서 교회로 예배가 이루어지던 날부터 나의 묵상글쓰기가 하루도 빠짐없이 이어지고 있어 10년을 훌쩍 넘기고 어느덧 15년차인 것 같다. 이는 자부심이 아니라 여전히 나의 나 된 것, 그 미련하고 합리화하여 회피하는 성향을 내가 잘 알기 때문이다. 한참 안정제를 여러 번 먹은 날은 유난히 새벽에 일어나기가 힘들다. 오늘도 침대에 앉아 한참을 눈을 감고 망설였다. 그때마다 다니엘을 생각하고 에스겔를 떠올린다. 뜻을 정해야 하고, 부르심에 응해야 한다.

 

‘인자야 네 발로 일어서라’ 하심은 그만한 의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잘 하고 못 하고’가 아니라 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뜻을 정하여 일어서려 할 때 주의 권능이 손을 잡아 이끄신다. 주로 아침에 찬물로 세수하는데 그 이유도 나름은 그런 의미에서다. 우리가 사는 동안 잃지 말아야 하는 즐거움으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시 51:12).

 

구원의 즐거움이 없이 이 땅에서 무엇으로 기뻐하며 살 수 있을까? 모든 게 다 일시적이며 곧 또 시들기 마련이어서 마음도 다들 그렇지 아니한가? 급격히 늘어가는 이혼과 재혼의 빈도도, 그로 인하여 아이들의 영혼이 병들어가는 일에 있어서도,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을 내게 입히시며 공의의 겉옷을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석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사 61:10).” 하는 이와 같은 기쁨을 상실한 영혼들이 상한 상태로 주의를 병들게 한다. 나의 편협한 경험의 한계이겠으나 아이가 좀 아프다 싶으면 이혼한 가정이 대부분이다. 이런저런 어려움을 호소하는 경우는 대부분이 ‘예전에 교회를 다녔다.’ 지극히 나의 사적인 경험이겠으나 그런 가운데서도 누구보다 주를 의지하고 바라며 목숨을 걸고 헌신하는 이들 또한 하나님과의 남다른 체험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네 발로 일어서라 내가 네게 말하리라” 하실 때, 설령 “비록 가시와 찔레와 함께 있으며 전갈 가운데에 거주할지라도” 이를 준수하는 삶이 복이다. 이는 마치 적지에서 주가 확증하시는 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의 말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도 그 말을 두려워하지 말며 그 얼굴을 무서워하지 말지어다.” 하심은 주가 지키실 것이고, 내 편이고, 나를 도우시는 이심을 알게 한다(1, 6). 그러므로 “너 인자야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듣고 …내가 네게 주는 것을 먹으라” 하실 때, “보니 …그 안에 두루마리 책이 있더라.” 곧 말씀으로 서야 한다(7, 9). 하여 “그가 그것을 내 앞에 펴시니 그 안팎에 글이 있는데 그 위에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되었더라(10).”

 

이에 오늘도 주의 말씀을 의지하여,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빛을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

(시 80:3).

 

주께 구하고 바라는 이 한 가지 일,

 

만군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회복하여 주시고

주의 얼굴의 광채를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

(7).

 

하고 기도할 때에,

 

만군의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돌아오소서

하늘에서 굽어보시고 이 포도나무를 돌보소서

주의 오른손으로 심으신 줄기요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가지니이다

(14-15).

 

하여,

 

주의 오른쪽에 있는 자 곧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인자에게 주의 손을 얹으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에게서 물러가지 아니하오리니

우리를 소생하게 하소서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17-18).

 

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돌이켜 주시고

주의 얼굴의 광채를 우리에게 비추소서

우리가 구원을 얻으리이다

(1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