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발견한 것을 먹으라 너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하라 하시기로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를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겔 3:1-3
내 백성아 내 말을 들으라 이스라엘아 내 도를 따르라
시 81:13
성령의 감동으로 성경이 기록되었다. 성령의 감동으로 성경을 읽는다. 성령의 감동으로 성경을 듣는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를 오늘 본문은 여실히 드러낸다. 에스겔이 성령의 감동으로 듣는다. “또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발견한 것을 먹으라” 곧 말씀은 듣는 것이고 듣는 것은 스민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읽기는 씹는 것으로 삼켜서 먹어야 한다. 하고, “너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하라.” 여기서 먹는 것과 말하는 것이 동일시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없고, “하시기로” 이는 그에 순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 우리가 임의로 성경을 읽고 듣고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닌 것을 생각하게 된다. ‘내게 먹이시며’ 또한 “내게 이르시되” 이를 주지시켜서 그 중요함을 강조하는 것 같이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를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이것이 우리 속에서 어떻게 소화되어 어느 과정을 거처 활동하게 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하심으로 말씀을 읽고 듣는 일에 그 의미를 알 수 있겠다(1-3).
‘성령의 감동으로’란 하나님의 영광을 마주하는 일이다. 이를 어찌 설명하기 어려우나 누가 시켜서도, 누구를 의식해서도 아니고, 그냥 그렇게 하게 하시는 자의 의지에 따라 행함이 있다. 가령 나의 경우는 오늘까지도 이어지는 새벽 시간에 주 앞에 나아오는 일이겠다. 돌이켜 주의 길을 가겠다고 뜻을 정하였을 때부터, 표현이 좀 그렇지만 홀린 듯 나는 새벽예배를 나가기 시작했다. 이처럼 새벽에 나아와 말씀 앞에 앉고 나를 주 앞에 세우는 일에 있어 나의 의지로는 아니다. 예전에 문학을 한답시고 밤과 낮이 바뀐 사람처럼 살던 때도 있었다. 그러던 자가 자발적으로 새벽을 깨운다는 것은 어림없다. 또한 말씀 읽기의 즐거움에 대하여는 몇 권의 성경을 바꾸어야 할 정도로 밑줄을 긋고 메모를 하고 다시 새로 성경을 사서 밑줄을 긋고 메모를 하기를 여러 번이었다.
이렇듯 성령의 감동으로 하는 일에 대하여 절대 나 자신의 의지로 하는 게 아님으로 그 사실을 만족해서는 안 된다. 오늘 1절을 보면, “또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발견한 것을 먹으라 너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하라 하시기로(1).” 먼저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으로 모양을 하신 이가 그 모양을 목도하고 그 자리에 엎드리는 에스겔을 향해 일어서라고 말씀하셨다. “그 사방 광채의 모양은 비 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라 내가 보고 엎드려 말씀하시는 이의 음성을 들으니라(1:28).” 우린 감히 하나님에 대해 묘사하고 설명할 길이 없다.
나의 편협한 경험과 그 가운데서 느꼈을 감정으로 설명하는 것이 전부이겠으나 그 또한 나의 한계일 뿐이다. 언급하였듯이 그러한 영광의 형상의 모양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감히 그것을 바라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 본능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면 그 위엄 앞에 경외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 가령 번개가 치고 천둥이 울릴 때면 몸을 웅크리고 머리를 감싸고 엎드리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향해 일어나 말씀을 받으라는 것이다.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고하라’ 하신다. 이는 선지자 에스겔이 전할 말씀을 하나님께서 친히 전해주셨음을 뜻한다.
또 한편으로는 그 전해주신 말씀이 그에게 힘과 능력을 공급해준다는 뜻도 내포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가 영이요 생명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요 6:63).” 에스겔과 비슷한 시기에 남유다에서 활동을 했던 예레미야의 경험을 상기하면, 저에게도 말씀을 주심으로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렘 1:9).” 하신 것과 같다. 더욱 구체적으로는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 내가 기뻐하는 자의 모임 가운데 앉지 아니하며 즐거워하지도 아니하고 주의 손에 붙들려 홀로 앉았사오니 이는 주께서 분노로 내게 채우셨음이니이다(15:16-17).”
곧 우리가 성도로 사는 일은 각자의 직분이 있고 그 사정과 상황에서 말씀을 듣고 전하는 자들이다. 직접 설교로 말하는 이가 있고 이를 듣고 자기 삶으로 실천하는 자도 있다. 이를 가서 전한다는 것은 ‘고하라’는 명령으로 ‘정복하다’, ‘파괴하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이는 처음 사람 아담에게 부여된 말씀이기도 하였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8).” 하신 것과 같이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이르시길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9-20).”
이는 우리의 사명이다. 고하는 자들이다. 전해야 한다. 나는 글을 쓰고 누가 읽는다. 말하고 듣는다. 누구는 운전하고, 청소하고, 직장을 다니고, 가정을 돌보면서 이를 실천한다. 고한다는 것은 주어진 삶을 정복하는 일로 다스리는 것이다. 이때에 “…말하라 하시기로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겔 3:1b-2).” 곧 내가 먹은 게 아니다. 읽은 게 어디로 흡수되어 어떻게 활동하는지, 우리는 내장 속의 일을 알지 못한다. 한참 성경을 탐독하였듯 고리타분한 설교자들의 성경 연구 도서들을 읽어냈다. 특유의 독법이랄 수 있지만 나는 로이드 존스 목사든 존 파이퍼 목사든 오스왈드 챔버스든 우연히 혹은 누구 소개로 읽다 빠져들면 그의 전 저서를 다 사서 읽고는 한다.
곧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를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3).” 하는 말씀과 같이 그게 왜 재밌는지, 요즘도 여러 번 다시 읽으며 그 앞에 새로 읽는 날짜를 적어두곤 하는데 어떤 것은 여러 번이라 책장이 해졌다. 곧 오늘 에스겔이 전파할 말씀이 전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되었음을 보여준다. 이와 같이 우리가 성도로 사는 일이란 우선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고 영감을 받은, 읽기와 듣기와 쓰기가 병행한다. 나의 아흔이 넘은 장모는 기도문을 헌금봉투 가득 적어서 올린다. 성경을 공책에 옮겨 적고 자신이 쓴 것을 되뇌어 소리 내며 읽는다.
참된 성도라면, 말씀이 이처럼 주어지게 될 때 그것을 듣고자 하는 열망이, 전하지 않을 수 없는 강권하심을 체험한다. 나처럼 소극적인 사람은 글로써, 적극적인 사람은 보다 대내외활동으로 그 차이는 다소 있겠으나 안 그러고는 베길 수가 없다. 예레미야도 이와 동일한 심정에서,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렘 20:9).” 그러하였고, 베드로와 요한도 산헤드린 공회에서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행 4:20).”
오늘 에스겔도 그와 같이 말씀을 전하지 못할 때에 “내가 네 혀를 네 입천장에 붙게 하여 네가 말 못하는 자가 되어 그들을 꾸짖는 자가 되지 못하게 하리니 그들은 패역한 족속임이니라 그러나 내가 너와 말할 때에 네 입을 열리니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 들을 자는 들을 것이요 듣기 싫은 자는 듣지 아니하리니 그들은 반역하는 족속임이니라(26-27).” 하는 것이다. 실제 말씀을 먹을 때는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하는 고백이 이와 같다.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를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3).”
비록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내용은 심판과 경고의 내용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이러한 모든 과정을 통해 궁극적으로 당신의 선하고 아름다운 뜻을 이루신다. 그런 측면에서 꿀처럼 달다. 또한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성도의 영혼에 힘과 기쁨을 공급해준다는 일반적인 의미다. 시편에서 노래하는 것처럼,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
(시 19:9-10, 119:103).
이를 예레미야도 고백하길,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 내가 기뻐하는 자의 모임 가운데 앉지 아니하며 즐거워하지도 아니하고 주의 손에 붙들려 홀로 앉았사오니 이는 주께서 분노로 내게 채우셨음이니이다(렘 15:16-17).” 이를 인위적으로 요구하거나 구성할 수 없다. 나의 묵상글쓰기나 설교원고가 그 자체로도 ‘읽는 나’로 하여금 그 마음에 기쁨과 즐거움이 되기를 바란다. 곧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두루마리를 달라 한즉 천사가 이르되 갖다 먹어 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 하거늘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갖다 먹어 버리니 내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계 10:9-10).”
모두가 한 목소리로 증거 하는 것이다. 말씀이 소명이고, 천상의 체험이다.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전능하심과 절대자이심을 깨닫게 하고 이를 감당할 것과 그 명령을 따라 순종할 것을 알려준다. 이는 놀랍고도 황홀한 체험이다. 예전의 나였으면 종교서적에 대한 선입견으로 피하였다. 읽으면서도 감동은 없고 분석만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이야기’를 즐거워하는 데 있어 친구와의 대화에서도 그런 경우와 아닌 경우가 갈린다. 아주 오래 된 친구이고 저마다 교회를 다니고 직분을 맡아 충성하지만 친구라는 이유로 너무 쉽게 일상의 너스레를 떨거나 듣곤 한다. 상대적으로 삶 가운데서 주의 체험으로 이어지는 말들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기쁘고 즐겁다. 가령 아이들 이야기를 할 때도 그래서 신앙과 삶이 연계되어 고민하거나 기뻐할 때 서로의 대화는 즐겁다.
이상한 일은 가장 오래 된 친구면서 친했던 친구인데 늘 일상의 먹고 사는 이야기라 그런 대화의 뒤끝이 쓰다. 흔히 수다의 차이는 다르다. 우리는 언제부턴가 그 이야기 가운데 하나님을 나타내게 된다. 말씀이 명하시는 바이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사 60:1).” 서로의 잡담 같은 대화 가운데서 그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은연중에 나타내거나 증거할 수 있는 것은 증표다. 주와 함께 하는 것의 냄새와 같다. 생선 가게에 있다오면 비린내가 난다. 고깃집에 다녀와도 불냄새나 고기 양념 냄새가 난다. 그렇듯 우리의 대화는 현재의 위치나 관심을 풍길 수밖에 없다. 하여 바울은,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고후 2:15-16).” 아무리 세상이 혼탁하고 어지럽다 해도,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17).” 이 놀라운 진리로 우리가 산다. 거짓에 거짓을 더하고 공정하지 못한 재판으로 세상은 요지경이라 해도 우리의 중심은 굳건하다. 하나님은 사명자로 부르신 자들에게 성령의 능력을 충족하게 채워주신다. ‘그 영’이란 하나님의 영으로 당연히 성령을 가리킨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임하셔서 말씀을 먹게 하심으로 “가서 내 말로 그들에게 고하라” 하신다(4). 서로 알고 못 알아들을 리 없다. “너를 언어가 다르거나 말이 어려워 네가 그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할 나라들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니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냈다면 그들은 정녕 네 말을 들었으리라(6).” 문제는 못 알아듣는 게 아니라 듣지 않는 굳은 마음이라,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은 이마가 굳고 마음이 굳어 네 말을 듣고자 아니하리니 이는 내 말을 듣고자 아니함이니라(7).”
이를 아시면서도 주가 보내신다.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이를 모든 말을 너는 마음으로 받으며 귀로 듣고 사로잡힌 네 민족에게로 가서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10-11).” 그럼에도 주가 주의 백성에 대한 마음이 어떠한지를 알겠다. 굳은 마음으로 ‘듣든지 아니 듣든지’ 우리의 의무는 ‘그들에게 고하라’ 하심이다. 이럴 때 어떤 회의와 갈등이 일어나는데, “주의 영이 나를 들어올려 데리고 가시는데 내가 근심하고 분한 마음으로 가니 여호와의 권능이 힘 있게 나를 감동시키시더라(14).” 세상으로, 혹은 어떤 결과로 기뻐하는 것이 아니요 주의 권능으로, 주의 손길로 나를 감동시키신다.
“그러나 네가 그 의인을 깨우쳐 범죄하지 아니하게 함으로 그가 범죄하지 아니하면 정녕 살리니 이는 깨우침을 받음이며 너도 네 영혼을 보존하리라(21).” 말씀을 말하고 듣고의 목표는 깨우침으로 영혼의 보존이다. 이는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거기서 내게 임하시고 또 내게 이르시되 일어나 들로 나아가라 내가 거기서 너와 말하리라 하시기로(22).” 나의 생각이나 판단을 접도 “내가 일어나 들로 나아가니 여호와의 영광이 거기에 머물렀는데 내가 전에 그발 강 가에서 보던 영광과 같은지라 내가 곧 엎드리니(23).” 결국은 “주의 영이 내게 임하사 나를 일으켜 내 발로 세우시고 내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가서 네 집에 들어가 문을 닫으라(24).”
순종은 더러 우리를 더 곤란하게 하나 “너 인자야 보라 무리가 네 위에 줄을 놓아 너를 동여매리니 네가 그들 가운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라(25).” 주의 강권하심이 오늘 우릴 불여잡으시고, “내가 네 혀를 네 입천장에 붙게 하여 네가 말 못하는 자가 되어 그들을 꾸짖는 자가 되지 못하게 하리니 그들은 패역한 족속임이니라(26).” 나를 주관하심으로 “그러나 내가 너와 말할 때에 네 입을 열리니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 들을 자는 들을 것이요 듣기 싫은 자는 듣지 아니하리니 그들은 반역하는 족속임이니라(27).” 쓰일 곳에 쓰이게 하심이다. 비록 이 처지나 사정이 어떠하든지,
내 백성이여 들으라 내가 네게 증언하리라
이스라엘이여 내게 듣기를 원하노라
(시 81:8).
기어이 하나님은 전하시고 뜻을 밝혀 우리들로 하여금 주의 자녀로 살게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육신으로 행하나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너희의 복종이 온전하게 될 때에 모든 복종하지 않는 것을 벌하려고 준비하는 중에 있노라(고후 10:3-6).”
하여,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살전 5:3).”
하여,
우리의 능력이 되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기쁘게 노래하며 야곱의 하나님을 향하여
즐거이 소리칠지어다
(시 81:1).
이는,
이르시되 내가 그의 어깨에서 짐을 벗기고
그의 손에서 광주리를 놓게 하였도다
(6).
삶의 무게에서,
네가 고난 중에 부르짖으매 내가 너를 건졌고
우렛소리의 은밀한 곳에서 네게 응답하며
므리바 물 가에서 너를 시험하였도다 (셀라)
(8).
그러므로
내 백성아 내 말을 들으라
이스라엘아 내 도를 따르라
…
또 내가 기름진 밀을 그들에게 먹이며
반석에서 나오는 꿀로 너를 만족하게 하리라 하셨도다
(13, 1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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