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보라 쇠똥으로 인분을 대신하기를 허락하노니 너는 그것으로 떡을 구울지니라
겔 4:15
하나님이여 일어나사 세상을 심판하소서 모든 나라가 주의 소유이기 때문이니이다
시 82:8
성경은 더러 어렵다. 여러 번 읽어도 이해하기 어렵다. 그렇게 며칠씩 입에 물고 있다 보면 어느새 녹아서 몰라도 아는 것으로 우리 안에 스민다. 종종 나는 시를 읽으면서 그런 절벽을 느낀다. 다시 또 다시 읽어도 무슨 말인지 어려울 때가 있다. 그렇게 여러 번 되뇌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게 읽혀지기도 한다. 시어와 성경의 언어는 함축어이다. 흔히 우리가 쉽게 여기는 사전적 의미는 그 뜻이 있어서 그 뜻을 따라가면 지시하는 바 그 의미를 파악하기도 한다. 그런데 함축적인 언어로는 까도 까도 그 속에 또 알갱이가 있는 양파 같아서 단면으로 쪼개지 않으면 이해가 어렵다. 어렵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 시집을 여러 날 들고 다니다가 습관처럼 읽는 순간 활짝 열린 문 같이 아, 하고 연관지어 이해할 수 있을 때 그것이 시구나! 하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그 의미부터 이해하려다 생각하기를 접었다. 에스겔은 예루살렘의 포위당함을 상징으로 표현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그 같은 수법은 신기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적합하다. 먼저는 흙벽돌 위에 예루살렘을 그리라는 명령을 받았다. “너 인자야 토판을 가져다가 그것을 네 앞에 놓고 한 성읍 곧 예루살렘을 그 위에 그리고(1).” 곧 예루살렘이 그의 순결을 지키고 있을 때는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그의 ‘손바닥에 새겼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사 49:16).” 그런데 오늘 말씀은 토판을 가져다 예루살렘을 그리게 하신다. 예루살렘성은 원래 가나안 원주민 여부스 족속의 성읍이었다(수 15:8, 63). 이후 다윗이 정복하여 다윗 성으로 명명하고(삼하 5:7), 하나님의 언약궤가 안치되면서 이스라엘의 수도로 부각되었다(삼하 6:16, 왕상 3:1).
결국 이 성읍에 하나님의 성전이 세워짐으로(왕상 6장) ‘하나님의 성’, ‘여호와의 성’, ‘거룩한 성’ 등으로 불렸다.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우리 하나님의 성,
거룩한 산에서 극진히 찬양 받으시리로다
터가 높고 아름다워 온 세계가 즐거워함이여
큰 왕의 성 곧 북방에 있는 시온 산이 그러하도다
…
우리가 들은 대로 만군의 여호와의 성,
우리 하나님의 성에서 보았나니
하나님이 이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시리로다 (셀라)
…
하나님의 성이여
너를 가리켜 영광스럽다 말하는도다 (셀라)
…
아침마다 내가 이 땅의 모든 악인을 멸하리니
악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의 성에서 다 끊어지리로다
(시 48:1-2, 8, 87:3, 101:8).
그런데 이 성읍을 ‘흙 위에 그리라’ 하신 것은 멸망할 것을 상징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범죄 할 경우 하나님의 이름을 두시고 친히 임재하신 곳도 황폐하게 하시는 거룩과 공의의 하나님이신 것을 나타내셨다. “내가 너희를 여러 민족 중에 흩을 것이요 내가 칼을 빼어 너희를 따르게 하리니 너희의 땅이 황무하며 너희의 성읍이 황폐하리라(레 26:33).” 그러나 “너희 남은 자에게는 그 원수들의 땅에서 내가 그들의 마음을 약하게 하리니 그들은 바람에 불린 잎사귀 소리에도 놀라 도망하기를 칼을 피하여 도망하듯 할 것이요 쫓는 자가 없어도 엎드러질 것이라(36).” 그러므로 주가 황폐하게 하실 때에도 ‘남은 자’는 보호할 것임을 모세의 때부터 강조하신 것이다. “그들이 전국에서 네 모든 성읍을 에워싸고 네가 의뢰하는 높고 견고한 성벽을 다 헐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의 모든 성읍에서 너를 에워싸리니(신 28:52).”
이와 같이 12지파의 이름이 대제사장의 흉패 위의 보석에 새겨졌었다. 그러나 이제 ‘신실한 성읍이 매춘부가 되었다.’ 무가치한 박석 곧 벽돌 위에 그 모습이 새겨져야 마땅하다. 에스겔은 이것을 자기 눈앞에 두어야 했던 것은, 눈이 마음을 움직이게 하기 때문이다. 에스겔은 예루살렘의 둘레에 조그만 성채를 건설하고, 공성퇴를 둘러 세우라는 명령을 받는다. “그 성읍을 에워싸되 그것을 향하여 사다리를 세우고 그것을 향하여 흙으로 언덕을 쌓고 그것을 향하여 진을 치고 그것을 향하여 공성퇴를 둘러 세우고(2).” 이는 바벨론 군대에 의해 예루살렘 성읍이 포위될 것을 의미한다.
이는 상대방의 성벽을 공격하기 위하여 흙으로 높이 쌓아 올린 언덕을 뜻하는 것 같이 성읍을 기어오르기 위해 사닥다리를 높이 세운다. 당시 성읍을 공격할 때 이러한 방법이 사용되었다. 공성퇴는 수양이 그 뿔로 받듯이 상대방의 성벽이나 성문을 무너뜨리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다. 앗수르 군의 공성퇴는 기다란 통나무 끝에 금속을 부착시키고 바퀴 달린 수레에 고정시켜 상대방의 성벽이나 성문을 무너뜨렸다. 에스겔은 포위된 도시와 포위자인 자기 자신 사이에 석쇠로 된 철성벽을 쌓았다. “또 철판을 가져다가 너와 성읍 사이에 두어 철벽을 삼고 성을 포위하는 것처럼 에워싸라 이것이 이스라엘 족속에게 징조가 되리라(3).” 이것은 단호한 결의다. 갈대아인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도성을 정복하려 한다. 도성을 정복하기까지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반면 유대인들은 결코 항복하지 않고 최후까지 싸울 결심을 한다.
에스겔은 그 성읍을 토판에 그리고 그림 앞에서 옆으로 누우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 성을 둘러싸는 격이다. 이것은 갈대아인의 군대가 그 도성 앞에 진을 치고 식량을 막을 것을 상상하게 한다. 그는 좌편으로 390일 누워있어야 했다. “내가 그들의 범죄한 햇수대로 네게 날수를 정하였나니 곧 삼백구십 일이니라 너는 이렇게 이스라엘 족속의 죄악을 담당하고(5).” 약 13개월에 해당하는 날이다. 예루살렘 포위 기간은 18개월이었다(렘 52:4-6). 그러나 18개월에서 5개월은 바로의 군대가 당도하고 포위가 잠시 풀린 기간으로 생각하면 날짜가 그대로 실현되었다. “시드기야 왕이 사람을 보내어 그를 이끌어내고 왕궁에서 그에게 비밀히 물어 이르되 여호와께로부터 받은 말씀이 있느냐 예레미야가 대답하되 있나이다 또 이르되 왕이 바벨론의 왕의 손에 넘겨지리이다(렘 37:17).”
390일을 390년으로 확대하면 예언자가 누워있는 동안, 그는 390년을 지내온 10부족의 북이스라엘의 죄책을 담당한 것으로도 이해된다. 여로보암을 시작으로 예루살렘의 멸망까지를 계산하면 실제로 390년이 된다. 그 후 에스겔은 우편으로 돌아누워 다시 40일을 있었다. 그것은 남유다의 죄악을 담당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 백성들에게서 측정된 죄악은 그들이 포로가 되기 전 40년 동안의 죄악이다. 곧 요시아 왕의 통치 13년 이후부터 기간이다. 예레미야가 예언하기 시작했던 때는 요시아 왕의 통치 13년이었다. 이때 성전에서 율법 책이 발견되었다. 백성들이 하나님과 맺은 그들의 계약을 새롭게 했다. 그들이 불경건과 우상 숭배를 계속하던 중 그러한 예언자와 왕을 가졌으며, 그런 계약의 결속을 가져왔음에도 불구하고 멸망하고 말았다. 개혁을 위한 도움과 이점을 가졌던 유다는 이스라엘에 비하면 훨씬 짧은 기간 안에 그들의 죄악의 분량을 가득 채운 셈이다.
죄로 금세 물드는 날들이라, 요즘은 누가 어떤 유튜브로 설교를 듣거나 어디 교회를 다닌다고 하면 그곳에 어디에 속했는가, 찾아보게 된다. 이처럼 좌편으로 390일, 우편으로 40일을 누워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흔히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면서 동편을 기준으로 방향을 정하여 누웠다. “동방 해 돋는 쪽에 진 칠 자는 그 진영별로 유다의 진영의 군기에 속한 자라 유다 자손의 지휘관은 암미나답의 아들 나손이요(민 2:3).” 그럼 좌편은 북쪽, 즉 북왕국 이스라엘 편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렇듯 에스겔이 이스라엘의 죄악을 담당하고 대신 고통을 당하는 것을 나타낸다.
이는 장차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실 것을 함축한다. 본문의 지시적인 의미가 그렇듯 고난을 받아 대속물이 되신 예수를 함축한다. 에스겔이 이스라엘의 죄악을 담당하고 고난을 받는 것은 그들을 대신한다기보다 그들의 대표로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다. 북이스라엘의 390년과 남유다의 40년을 합한 430년은 과거의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 살았던 애굽에서 430년 속박당한 햇수이다. 남왕국 유다의 40년은 유다 왕 후반의 범죄한 햇수다. 390년은 이스라엘 왕국의 분열 때부터 주전 538년 이스라엘의 포로 귀환 때까지의 약 390년을 가리킨다. 유다의 40년, 주전 586년에 예루살렘성은 함락되어 538년 포로 귀환 때까지이다.
이와 같이 성경을 풀어 되새기다보면 우리의 죄값이 참으로 긴 시간을 두고 수차례 회개의 기회를 더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모든 일은 ‘에스겔이 힘 있게 예루살렘을 둘러싸라는 명령을 받은 것’과 같다. “너는 또 네 얼굴을 에워싸인 예루살렘 쪽으로 향하고 팔을 걷어 올리고 예언하라(7).” 하나님이 어떤 큰일을 행하려 하실 때 그의 팔을 걷어 올리신다. “여호와께서 열방의 목전에서 그의 거룩한 팔을 나타내셨으므로 땅 끝까지도 모두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도다(사 52:10).” 이 예언의 말씀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하나님이 행하실 일로, 오늘에도 포함된다.
결국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 그러한 우리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이에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벧전 2:24-25).” 그리하여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일 2:2).” 이를 오늘 에스겔은 말씀을 따라 행한다. 말씀을 받은 그대로 순종하는 삶이 복이 있음을, 동시에 이것으로 우리의 사명인 것을 묵상하게 된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내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신 4:2).”
그리하여,
여호와여 주의 율례들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끝까지 지키리이다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하여 주소서
내가 주의 법을 준행하며 전심으로 지키리이다
(시 119:33-34).
할 때에,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 1:3).”
본문 후반부는 예루살렘의 파멸에 대한 에스겔의 예언에 이어 백성들에게 다가올 기근이 따를 것을 알린다. 에스겔은 여기에서 390일 동안 거친 음식과 부족한 물과 볼품없는 의복으로 그 자신을 금욕해야 했다. “너는 밀과 보리와 콩과 팥과 조와 귀리를 가져다가 한 그릇에 담고 너를 위하여 떡을 만들어 네가 옆으로 눕는 날수 곧 삼백구십 일 동안 먹되 너는 음식물을 달아서 하루 이십 세겔씩 때를 따라 먹고 물도 육분의 일 힌씩 되어서 때를 따라 마시라(겔 4:9-11).” 이것은 성읍의 모든 음식이 고갈될 때까지의 기근을 상징한다. 예레미야도 이를 감당하며 몸소 그 시기를 체험하였다. “이에 시드기야 왕이 명령하여 예레미야를 감옥 뜰에 두고 떡 만드는 자의 거리에서 매일 떡 한 개씩 그에게 주게 하매 성중에 떡이 떨어질 때까지 이르니라 예레미야가 감옥 뜰에 머무니라(렘 37:21).”
곧 우리의 날들이 세상의 기준 같이 소유하고 간직하여 대대로 물려주며 호의호식하는 삶으로 복이 아니다. 에스겔은 이 예언을 확실히 하기 위해 그리고 이스라엘 족속에게 징조를 보이기 위해 궁핍한 생활을 했으며, 하나님의 종들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바지하는 것으로 그러한 삶을 자초해야 한다. 내가 알기로 대형교회였으나 옥한흠 목사는 교인의 중간치 이하로 살려 노력했다. 선교사로 평생을 헌신하였던 분은 단벌 신사로 족하였다. 어디서 들은 저이의 간증 가운데 늘 사계절 같은 옷이라 어디 가면 자신이 목사인 것을 다들 알았다고 한다. 나는 신대원에서 어느 교수의 말에 화들짝 놀란 게 저의 지론은 목회의 성공여부는 목사가 타는 차의 배기량으로 알 수 있다고 했다.
그전에 내가 하나님을 피해 다닐 때, 교회는 성도들 숫자로 비례하여 건물이 옮겨졌다. 작은 월세에서 조금씩 더 큰 전월세로 평수가 넓어지고, 성전의 집기들도 남들에게 얻어 쓰다 더 좋은 새 것으로 바뀌는가 싶더니 급기야는 건축을 시작하였다. 나는 개인적으로 교회 건축과 동시에 ‘기근’이 몰려와 이자에 이자를 물며 같이 살았던 8년의 기간이 가장 고역이었다. 그때가 가장 암흑기로 교회를 멀리하였고, 신앙은 헌신짝처럼 버려져 죄악 중에 생활하였던 때이다. 그땐 그게 가장 지옥이라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면 급기야 교회는 다른 교회로 넘어가며 부채를 넘긴 뒤, 부친의 목회 인생은 빈털터리가 되어서야 영적으로 깊어졌다. 형제들도 뿔뿔이 흩어져서 각자의 목회를 이뤘고, 나만 그 핑계로 세상 속으로 숨으려다 잡히기까지 고역이었다.
우리 신앙의 신실함은 고통 중에 싹튼다. 어려움을 견디는 법을 배우는 동안 주를 신뢰하는 믿음은 단단해져, 몸을 복종시켜야 영혼이 산다. 사람들 사는 것처럼 살려다가 교인이 사회인이 되고, 더는 하나님과 상관없는 사회에 젖어 모든 축복의 척도가 기본적인 신앙으로 변해간다. “너희는 흉한 날이 멀다 하여 포악한 자리로 가까워지게 하고 상아 상에 누우며 침상에서 기지개 켜며 양 떼에서 어린 양과 우리에서 송아지를 잡아서 먹고 비파 소리에 맞추어 노래를 지절거리며 다윗처럼 자기를 위하여 악기를 제조하며 대접으로 포도주를 마시며 귀한 기름을 몸에 바르면서 요셉의 환난에 대하여는 근심하지 아니하는 자로다(암 6:3-6).” 더러는 우리의 모습도 같다.
더는 소망이 없을 것 같을 때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 자더니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왕상 19:5).” 하나님은 기어이 우릴 도우시고 함께 하신다.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8-9).” 선지자로 그 예언의 현장을 삶으로 보여주는 에스겔과 예레미야와 엘리야와 같이 우리는 고난으로 단련된 신앙으로 하나님을 더욱 깊이 구한다. 그렇게 건축하던 교회 건물로 사기를 당하고 모든 게 끝장난 것 같으나 교회는 여전히 주의 이름을 나타낸다. 부친은 그 후로 창세기와 아가서 로마서 강해를 집필하였고 요한복음과 에베소서를 이어가며 노년의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10).”
이에,
가난한 자와 고아를 위하여 판단하며
곤란한 자와 빈궁한 자에게 공의를 베풀지며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구원하여
악인들의 손에서 건질지니라 하시는도다
(시 82:3-4).
이는,
그들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여
흑암 중에 왕래하니 땅의 모든 터가 흔들리도다
(5).
하여 우리의 사역은 생명을 다하는 그날까지 연속적이다.
하나님이여 일어나사 세상을 심판하소서
모든 나라가 주의 소유이기 때문이니이다
(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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