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 곧 내가 너를 치며 이방인의 목전에서 너에게 벌을 내리되 네 모든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내가 전무후무하게 네게 내릴지라
겔 5:8-9
하나님이여 침묵하지 마소서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시고 조용하지 마소서 무릇 주의 원수들이 떠들며 주를 미워하는 자들이 머리를 들었나이다
시 83:1-2
선지자가 머리와 수염을 민다. 이를 나누어 심판의 징조로 삼게 하신다. “너 인자야 너는 날카로운 칼을 가져다가 삭도로 삼아 네 머리털과 수염을 깎아서 저울로 달아 나누어 두라 그 성읍을 에워싸는 날이 차거든 너는 터럭 삼분의 일은 성읍 안에서 불사르고 삼분의 일은 성읍 사방에서 칼로 치고 또 삼분의 일은 바람에 흩으라 내가 그 뒤를 따라 칼을 빼리라(1-2).” 날카로운 칼은 무기를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부정한 예루살렘(6:11)과 에돔(25:13)과 두로(26:6, 8)와 애굽(29:8, 9, 30:4)과 곡(38:21) 등을 멸망시키는 도구로 여러 번 언급된 바 있다.
그것으로 ‘머리털과 수염’을 깎았다. 율법에는 제사장들이 머리털이나 수염을 깎는 것을 금했다. “제사장들은 머리털을 깎아 대머리 같게 하지 말며 자기의 수염 양쪽을 깎지 말며 살을 베지 말고(레 21:5).” 더하여 부정한 것을 금하게 하셨는데도 이 일을 행하게 하셨다 “너는 그것을 보리떡처럼 만들어 먹되 그들의 목전에서 인분 불을 피워 구울지니라(겔 4:12).” 이는 통상적인 규례에 벗어나는 행동이다. 이것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백성들에게 임할 심판의 징조를 나타내시기 위함이다. 이를 저울에 달아 나누었다. 머리털과 수염을 3등분하기 위해 무게를 측량한 것이다. 곧 하나님의 심판은 공정하심을 증명한다. 범죄 한 백성들에 대한 심판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다.
하여 그 삼분지 일은 불사르게 한다. 이는 예루살렘 성읍이 바벨론 군대에 의해 포위되었을 때이다. “시드기야 제구년 열째 달 십일에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이 그의 모든 군대를 거느리고 예루살렘을 치러 올라와서 그 성에 대하여 진을 치고 주위에 토성을 쌓으매 그 성이 시드기야 왕 제십일년까지 포위되었더라(왕하 25:1-2).” 예루살렘 거민 중 삼분지 일이 기근이나 질병 및 기타 하나님의 소멸의 재앙에 의해 멸망당할 것을 암시한다. “너희 가운데에서 삼분의 일은 전염병으로 죽으며 기근으로 멸망할 것이요 삼분의 일은 너의 사방에서 칼에 엎드러질 것이며 삼분의 일은 내가 사방에 흩어 버리고 또 그 뒤를 따라 가며 칼을 빼리라(겔 5:12).” 그렇게 삼분지 일은 칼로 죽는다.
포위된 예루살렘 성읍이 함락당할 때 성읍 거민 중 삼분지 일이 대적들의 칼에 멸망당했다. “그 성벽이 파괴되매 모든 군사가 밤중에 두 성벽 사이 왕의 동산 곁문 길로 도망하여 갈대아인들이 그 성읍을 에워쌌으므로 그가 아라바 길로 가더니 갈대아 군대가 그 왕을 뒤쫓아가서 여리고 평지에서 그를 따라 잡으매 왕의 모든 군대가 그를 떠나 흩어진지라 그들이 왕을 사로잡아 그를 립나에 있는 바벨론 왕에게로 끌고 가매 그들이 그를 심문하니라(왕하 25:4-6).” 그리고 삼분지 일은 바람에 흩으셨다. 예루살렘 거민 중 삼분지 일이 대적들에 의해 이방 땅에 포로로 잡혀 가거나 피난처를 찾아 뿔뿔이 흩어지는 것을 비유한다.
“성 중에 남아 있는 백성과 바벨론 왕에게 항복한 자들과 무리 중 남은 자는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이 모두 사로잡아 가고… 노소를 막론하고 백성과 군대 장관들이 다 일어나서 애굽으로 갔으니 이는 갈대아 사람을 두려워함이었더라(왕하 25:11, 26). 이에 내가 그 뒤를 따라 칼을 빼리라고 하신다.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 멀리 이방으로 흩어진 자들에게까지 따라가서 임하여 징계하실 것을 말한다. 이 사실은 애굽으로 도피한 요하난과 여사냐 등의 멸망에서 엿보여진다(렘 42:1-44:30).
결국 예루살렘의 파괴를 선지자는 몸으로 알린다. 에스겔은 예루살렘에서 일어나는 일은 자기 자신에게서 일어나는 일로 생각할 만큼 예루살렘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전한다. 자기의 머리카락과 수염을 깎아야 했다(1). 하나님이 그 백성을 단호히 버릴 것을 상징한다. 그 백성은 무익한 세대였다. 그들을 버리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고, 그 백성을 전적으로 심판하는 것으로 예루살렘의 죄악들을 지우신다. 저들을 창기로 살인자로 규정하셨다. “신실하던 성읍이 어찌하여 창기가 되었는고 정의가 거기에 충만하였고 공의가 그 가운데에 거하였더니 이제는 살인자들뿐이로다(사 1:21).”
에스겔은 머리카락 증표는 하나님이 예루살렘에게 행하려는 무르익은 종말을 나타낸다. 앞서 선지자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손질되고 깨끗하게 되려하지 않는 머리카락을 처리하듯 철저한 파괴에 의해 밀어버리는 것이다. 그의 머리카락과 수염을 ‘저울에 달고, 그것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야 했다.’ 하나님의 심판은 막무가내로 진행되는 게 아니라 공정하고 질서 있게 ‘행위와 공의’라는 정확한 저울로 측량하신다. 하나님의 정의가 심판을 통해 각 사람에게 형량의 정한다. 하나님의 심판은 느닷없는 게 아니다.
본래 머리를 깎음으로 서원하기도 했다. “자기의 몸을 구별한 나실인은 회막 문에서 자기의 머리털을 밀고 그것을 화목제물 밑에 있는 불에 둘지며(민 6:18).” 이와 같이 바울도 결단하고 그리하였다. “바울은 더 여러 날 머물다가 형제들과 작별하고 배 타고 수리아로 떠나갈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함께 하더라 바울이 일찍이 서원이 있었으므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더라(행 18:18).” 곧 우리는 구별되어 자신을 성별해야 한다. 이 세상에 사는 자이나 그 목적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어지는 후반에서(5-17) 에스겔은 앞서 행한 네 가지 상정적 행위(4:1-5:4)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다루고 있다. 그중 5-7절은 에스겔의 상징적인 행위를 통하여 나타난 예루살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예루살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원인은 한 마디로 말하면 유다가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이방인들보다도 더한 악을 행하였다는 것이다. “그가 내 규례를 거슬러서 이방인보다 악을 더 행하며 내 율례도 그리함이 그를 둘러 있는 나라들보다 더하니 이는 그들이 내 규례를 버리고 내 율례를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 요란함이 너희를 둘러싸고 있는 이방인들보다 더하여 내 율례를 행하지 아니하며 내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를 둘러 있는 이방인들의 규례대로도 행하지 아니하였느니라(6-7).”
이에 시편은 찬송하길,
그가 그의 말씀을 야곱에게 보이시며
그의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보이시는도다
그는 어느 민족에게도 이와 같이 행하지 아니하셨나니
그들은 그의 법도를 알지 못하였도다 할렐루야
(시 147:19-20).
고로 하나님이 우리로 주의 자녀가 되게 하심은 전적인 은혜이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그러므로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신 7:6-7).” 한데 이를 더러 망각하고 사는 이유가 무얼까? 세상에 얽매여 남들처럼 사는 것으로 생을 다하려고 하는 데서 성도의 오류가 발생한다.
축복의 기준을 세상의 향방으로 출세나 성공으로 가늠할 때 우리의 신앙은 우상숭배로 변질된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상실하면 그렇게 된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5-6).” 고로 우리가 세상에 얽매이지 않기 위하여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 3:1-2).” 나는 한동안 이 구절을 책상 앞에 붙이고 살았다.
이는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2:12-14).” 하나님의 분명한 의지와도 연관이 있다. 그러므로 죄를 고집하며 사는 일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과 같다. “사람이 사람에게 범죄하면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만일 사람이 여호와께 범죄하면 누가 그를 위하여 간구하겠느냐 하되 그들이 자기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뜻하셨음이더라(삼상 2:25).”
종종 그런 벽에 부딪친다. 교회도 잘 나오고 나름 성경공부도 한다고 하는데 그 삶에서의 구별된 삶이 요구되면 거부하는 경우다. 가령 누가 요가를 한다. 나는 그것이 단지 운동이 아닌 다른 의미의 우상숭배인 것을 말한다. 그럼 상대는 너무 그러지 말라는 식으로 거부한다. 그저 자신은 운동일 뿐이라는 것이다. 누가 타로점을 보고 재미로 치부한다. 가벼운 변명 정도로 우습게 넘기는 것이다. 이럴 때 정색을 하고 이를 지적하면 거부감이 아닌 반감으로 나와 말을 안 하려고 하거나 더는 다른 곳으로 간다. 누가 또 얼토당토 않는 무슨 성경모임을 말했다. 처음엔 그런가 했다. 그런데 영매가 있고, 저가 기도를 받아 전달하여 무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미신적인 행태가 버젓이 교회 안에 존립한다. 중보기도를 떠나 그 이상으로 대신 누가 무얼 보았네, 들었네 하며 신유의 은사를 운운할 때는 이단이다.
이단이 별거 아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다른 누구, 또는 무엇을 대신하여 의미를 두고 매달리는 것이다. 대체로 목사나 성경공부 지도자가 그런 역할이 된다. 또는 십자가를 목에 걸고 가슴에 품고 부적처럼 들고 다니는 신앙도 다르지 않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데 있어서도 과도한 의미부여나 그 이상의 어떤 해석으로 오늘의 교주니 무슨 구원자니 대언모이 대모, 대부니 하는 따위들… 곧 이 모두는 이방의 종교를 모방하거나 각색한다. 사람이나 물건 그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과 나 사이에 중보자로 세울 수 없다. ‘대신’ 기도하고, 대신 들어주고, 대신 말해주고 하는 따위는 모두 다 똑같다. 종종 위중한 질병이나 위급한 상황에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의 그런 것은 다 악하다.
예루살렘의 멸망과 심판도 그러해서였다. 이방의 종교나 저들의 의식으로 저들 신 앞에 절하고 자식을 제물로 바치기까지 유일신 여호와 하나님을 떠난 것이다. 이에 “그 성읍을 에워싸는 날이 차거든 너는 터럭 삼분의 일은 성읍 안에서 불사르고 삼분의 일은 성읍 사방에서 칼로 치고 또 삼분의 일은 바람에 흩으라 내가 그 뒤를 따라 칼을 빼리라(2).” 오늘 말씀은 이를 역사 속에 행하셨다. 고로 “이는 그들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확실한 이해의 모든 풍성함과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니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골 2:2-3).” 곧 징계의 심판은 결국 돌이켜 주로 하나 되게 하려 하심이다.
“내가 이르되 또 너를 황무하게 하고 너를 둘러싸고 있는 이방인들 중에서 모든 지나가는 자의 목전에 모욕 거리가 되게 하리니 내 노와 분과 중한 책망으로 네게 벌을 내린즉 너를 둘러싸고 있는 이방인들에게 네가 수치와 조롱 거리가 되고 두려움과 경고가 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겔 5:14-15).”
우리가 살면서 주를 인정하지 못하면 주를 경외하지 않고, 주를 경외하지 못하면 자신의 이상과 사람들처럼 사는 일에서 전전긍긍하게 될 뿐이다. 나는 설교원고를 준비하면서 우리는 저마다 기업 무를 자로 살되, 이 때문에 교회에 다니고 예수를 믿으면서도 ‘그리스도의 구속’을 떳떳하게 말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의식하였다. 자신이 교회 다니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남들에게 나타내지도 못한다. 살면서 오늘의 현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기 꺼려하는 것은 근시안적인 안목으로 당장의 현실이 더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나오미를 대신하여 룻을 받아들임으로 기업 무를 자격이 우선하였던 자가 기를 거절하자 보아스가 그것을 받았다.
오늘 우리도 사람들과 잘 어울리고 세상에서 남들처럼 사는 게 더 옳은 것 같다. 다들 그러고 산다고 여진다. 남부럽지 않게 사는 게 꿈이다. 기를 쓰고 스펙을 쌓고 노후 대책을 세워 스스로의 기업을 지키고자 ‘기업 무를 자’의 권리와 책임을 회피한다. 그렇게 해서 정당하게 값으로 무를 권리를 상실한다. 덕분에 보아스에게 돌아왔다. 오늘도 우리가 받는 은혜는 은혜로 알 때 은혜가 크다. 저들은 증표로 신을 벗어 주어야 한다. 이는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는 양해각서 같은 것이다. 그렇게 ‘신 벗김을 받는 자’들로 성도랍시고 안 믿는 자들과 다를 바 없이 사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바울은 이에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하였는데, 버림을 당한다는 것은 천성을 향해 가던 길에서 이탈하기 쉬운 시대에 오늘 우리로도 경각심을 갖게 한다. ‘AI 시대’에 우리는 ‘룻과 같은 현숙함과 인애함’으로 신앙을 지켜야 하는데 자주 어긋난다. 보아스와 같이 자신에 찾아온 은혜의 권리를 알아채고 이를 놓치지 말아야 하는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돈의 노예로 팔리기 쉬운 상태다. 맘몬의 시대에 빠지면 신앙의 지각과 믿음의 분별이 안 된다. 우리는 ‘보아스와 같이 지혜롭고 기민하고 질서 있게’ 신앙을 지켜야 한다. 그리하여 룻은 다윗 왕의 고조모가 되었고, 보아스는 예수의 생명의 계대를 잇는 혈통이 되었다.
하나님이여 침묵하지 마소서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시고 조용하지 마소서
무릇 주의 원수들이 떠들며
주를 미워하는 자들이 머리를 들었나이다
(시 83:1-2).
세상이 너무 어지럽다. 통일교 특검이니 신천지 특별수사니 하면서 저것들 때문에 교회가 사회의 지탄을 받는다. 길거리 외침과 선동의 주역으로 나선 극우 보수 목사들 몇 때문에 싸잡아서 교회가 거북해졌다. 안 믿는 사람들은 그 이유 때문에도 개신교를 묶어서 욕한다. 신앙과 종교를 선택의 대상으로 놓고 자신들은 그래서 교회를 가느니 다른 종교를 믿겠다고 욕한다.
그들이 주의 백성을 치려 하여 간계를 꾀하며
주께서 숨기신 자를 치려고 서로 의논하여
말하기를 가서 그들을 멸하여 다시
나라가 되지 못하게 하여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다시는 기억되지 못하게 하자 하나이다
(3-4).
본질에서 벗어난 문제로 본질이 흐려지거나 달리하여 한다. 이 시대는 자유가 넘치고 자신의 선택이 우선이라 이와 같이 말씀이 경고로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그렇게 자초된 것이다. 하여 우리로 기도하게 한다.
나의 하나님이여 그들이 굴러가는 검불 같게 하시며
바람에 날리는 지푸라기 같게 하소서
삼림을 사르는 불과 산에 붙는 불길 같이
주의 광풍으로 그들을 쫓으시며
주의 폭풍으로 그들을 두렵게 하소서
여호와여 그들의 얼굴에 수치가 가득하게 하사
그들이 주의 이름을 찾게 하소서
(13-16).
그리하여
그들로 수치를 당하여 영원히 놀라게 하시며
낭패와 멸망을 당하게 하사 여호와라 이름하신 주만
온 세계의 지존자로 알게 하소서
(17-1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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