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하현. 2026. 2. 1. 05:20

 

너희 중에서 살아 남은 자가 사로잡혀 이방인들 중에 있어서 나를 기억하되 그들이 음란한 마음으로 나를 떠나고 음란한 눈으로 우상을 섬겨 나를 근심하게 한 것을 기억하고 스스로 한탄하리니 이는 그 모든 가증한 일로 악을 행하였음이라

겔 6:9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 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주나이다

시 84:5-6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로 사는 일이란, 포로로 끌려가서도 이방의 땅에서 산다 해도 주를 경외하는 ‘살아남은 자’들이다. 요셉과 다니엘과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그러했고 오바댜와 에스겔도 그러했다. 그런 가운데 이스라엘과 그들의 우상의 파멸을 예고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산들’을 향한 예언이다. “이르기를 이스라엘 산들아 주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주 여호와께서 산과 언덕과 시내와 골짜기를 향하여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나 곧 내가 칼이 너희에게 임하게 하여 너희 산당을 멸하리니 너희 제단들이 황폐하고 분향제단들이 깨뜨려질 것이며 너희가 죽임을 당하여 너희 우상 앞에 엎드러지게 할 것이라(3-4).”

 

이는 주의 백성들이 산마다 산당을 지었고 그곳으로 성소를 삼았다. 특히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을 배척하려 산당을 권장하고 제사를 실시했다. ‘산당’은 ‘높은 장소’라는 뜻이다. 이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 전부터 그곳에 존재해 있었다. “아침에 발락이 발람과 함께 하고 그를 인도하여 바알의 산당에 오르매 발람이 거기서 이스라엘 백성의 진 끝까지 보니라(민 22:41).” 따라서 하나님은 가나안 땅을 정복할 때 이 산당들을 헐도록 명하셨다. “그 땅의 원주민을 너희 앞에서 다 몰아내고 그 새긴 석상과 부어 만든 우상을 다 깨뜨리며 산당을 다 헐고 그 땅을 점령하여 거기 거주하라 내가 그 땅을 너희 소유로 너희에게 주었음이라(33:53).”

 

곧 우리가 점령하지 않으면 점령당한다. 고작 산당 때문일까, 싶지만 그러한 예외적인 사소한 일이 이처럼 최후를 불러왔다. 산당은 계속 존재했고, 기브온의 산당에는 하나님의 성막과 번제단이 있었다. “제사장 사독과 그의 형제 제사장들에게 기브온 산당에서 여호와의 성막 앞에 모시게 하여(대상 16:39).” 그리고 선지자 사무엘, 사울 왕도 산당에서 제사를 드렸다. “사울이 그의 사환에게 이르되 네 말이 옳다 가자 하고 그들이 하나님의 사람이 있는 성읍으로 가니라 그들이 성읍을 향한 비탈길로 올라가다가 물 길으러 나오는 소녀들을 만나 그들에게 묻되 선견자가 여기 있느냐 하니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있나이다 보소서 그가 당신보다 앞서 갔으니 빨리 가소서 백성이 오늘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므로 그가 오늘 성읍에 들어오셨나이다(삼상 9:10-12).”

 

솔로몬도 성전 건축 이전에 기브온 산당에서 일천 번제를 드렸다. “솔로몬이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아버지 다윗의 법도를 행하였으나 산당에서 제사하며 분향하더라 이에 왕이 제사하러 기브온으로 가니 거기는 산당이 큼이라 솔로몬이 그 제단에 일천 번제를 드렸더니(왕상 3:3-4).” 그러나 이 산당은 성전 건축 이후에도 계속 존재하였다. 오히려 수효는 늘어났고, 하나님을 거역하고 우상 숭배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이는 그들도 산 위에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 산당과 우상과 아세라 상을 세웠음이라 그 땅에 또 남색하는 자가 있었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국민의 모든 가증한 일을 무리가 본받아 행하였더라(14:23-24).”

 

이는 마치 오늘날 대세라 할 영상으로 드려지는 각종 예배의 형태이기도 하겠다. 그 필요가 코로나 유행으로 집단 감염이 우려될 때 각각 줌으로나 자체 영상을 동원하여 예배에 참가했다. 그랬던 것이 이제는 굳이 교회로 갈 필요나 직접 예배에 참가는 대체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내가 아는 누구는 그렇게 해서 그나마 큰 교회로 전전긍긍하듯 주일을 지키고 예배를 드리던 것마저 더는 성도의 교제도 교회의 치리도 필요치 않은 자기 좋을 대로 예배한다. 시간될 때 줌으로나 녹화영상으로 예배를 대체하다 그마저도 요즘은 유야무야한다. 그러면서 저는 이제 자주 주말을 끼고 가까운 해외여행이나 무슨 동호회 활동을 한다. 영상으로의 예배방식이 이 시대의 산당 제사라 할 수 있겠다. 나아가 큰 교회나 큰 교회의 계열교회라 하는 곳에서 본 교회의 담임 목사의 설교 영상을 실시간을 중계함으로 커다란 화면을 통해 버젓이 예배한다.

 

산당 제사는 히스기야나 요시야 같은 왕에 의해 담대히 산당을 헐어버리기도 했다. “그가 여러 산당들을 제거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왕하 18:4).” 그러나 그러한 종교 개혁 정책도 근본적인 실효를 거두지는 못했다. 이에 오늘 하나님께서 이 산당들을 제하신다고 하신 것은 이곳이 우상 숭배의 온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일을 거행하시는 이유를 오늘 본문은 밝힌다. “내가 너희가 거주하는 모든 성읍이 사막이 되게 하며 산당을 황폐하게 하리니 이는 너희 제단이 깨어지고 황폐하며 너희 우상들이 깨어져 없어지며 너희 분향제단들이 찍히며 너희가 만든 것이 폐하여지며 또 너희가 죽임을 당하여 엎드러지게 하여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게 하려 함이라(겔 6:6-7).”

 

이때 “너희 제단들이 황폐하고 분향제단들이 깨뜨려질 것이며 너희가 죽임을 당하여 너희 우상 앞에 엎드러지게 할 것이라(4).” 하심은 당시 저들은 태양상을 놓아 섬겼다. 태양상은 ‘빛나는 바알의 상’이라 하고, 고대 근동 지방에서 자주 행해졌다. 태양이 새겨진 조그만 판으로 장식된 분향단이 발굴되기도 했다. 므깃도에서는 네 모퉁이에 조그마한 뿔이 달린 석회암석 분향단이 발굴되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태양신상을 숭배하던 의식은 성경에 기록되었다. 므낫세는 “그의 아버지 히스기야가 헐어 버린 산당들을 다시 세우며 이스라엘의 왕 아합의 행위를 따라 바알을 위하여 제단을 쌓으며 아세라 목상을 만들며 하늘의 일월 성신을 경배하여 섬기며(왕하 21:3).” 이를 다시 요시야 왕이 헐었다. “또 유다 여러 왕이 태양을 위하여 드린 말들을 제하여 버렸으니 이 말들은 여호와의 성전으로 들어가는 곳의 근처 내시 나단멜렉의 집 곁에 있던 것이며 또 태양 수레를 불사르고(23:11).”

 

이렇듯 ‘산당’을 둘러싸고 ‘여러 우상 숭배’는 집요하게 오늘 우리의 신앙도 위협한다. 앞서 생각한 여러 영상 매체를 활용하여 교회를 대신하거나 자신이 예배를 향유하는 시대가 되었다. 이는 마치 애굽이나 바벨론 지역 등에서 태양 숭배가 팽배했던 것과 같이 점조직으로 가정예배가 교회를 대체하는 무교회주의가 일어나거나 나름의 성경공부나 묵상으로 주일 예배가 대체되고 있는 형국이다. 현실적으로 어떤지 자세히는 모르겠으나 벌써 십 수 년 전 신대원 때 아무개 교수는 자신 있게 주일의 개념을 타파하고자 자신은 주일을 일요일로 쉬고 다른 요일을 성일로 지킨다며 나름의 신세대 예배주의를 강의한 바도 있다.

 

그러니 모든 게 요지경이라, 하나님은 모세 율법에 의해 이를 철저히 금지시키셨다! “내가 너희의 산당들을 헐며 너희의 분향단들을 부수고 너희의 시체들을 부숴진 우상들 위에 던지고 내 마음이 너희를 싫어할 것이며… 또 그리하여 네가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해와 달과 별들, 하늘 위의 모든 천체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천하 만민을 위하여 배정하신 것을 보고 미혹하여 그것에 경배하며 섬기지 말라(레 26:30, 신 4:19).” 곧 ‘너희 우상 앞에 엎드러지게 할 것이라.’ 하는 오늘 말씀을 판단 기준으로 삼으셨다.

 

에스겔은 ‘얼굴을 산으로 향해야’ 했다. 에스겔이 이스라엘의 먼 땅을 바라볼 수 있다면, 먼저 ‘산들’이 저 멀리 보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재판관이 그의 판결문을 읽을 때 죄인들을 바라보듯, 에스겔은 산들을 바라보아야 했다. 이는 ‘이스라엘 산들’이다. 스스로들 ‘높고 강할지라도’ 에스겔은 산들의 근간을 흔들며 탄핵할 수 있는 심판권을 가진 자로 ‘얼굴을’ 그것에게 ‘향하여야’ 했다.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산을 향하여 그들에게 예언하여(겔 6:2).” 곧 ‘이스라엘 산들’은 ‘거룩한 산들’이었다. 그러나 타락하였고 하나님을 대신하는 온갖 우상의 온상이 되었다.

 

“너희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는 일어나서 산을 향하여 변론하여 작은 산들이 네 목소리를 듣게 하라 하셨나니 너희 산들과 땅의 견고한 지대들아 너희는 여호와의 변론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과 변론하시며 이스라엘과 변론하실 것이라(미 6:1-2).”

 

우리가 이를 듣든 안 듣든 하나님의 말씀은 선포된다. ‘여호와의 말씀이 작은 산과 시내와 골짜기로’ 울려 퍼진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은 말씀하시며 이것을 온 땅이 백성을 고발하는 증인이 될 것이다. 지금 전하여지는 말씀은 증거로 남을 것이다. 곧 산들은, 백성들이 다가오는 심판에 대한 경고를 받아들이지 않았음을 증언해 줄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부정했으며,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들을 박해했다. 하여 모든 우상과 우상 숭배자들이 전쟁의 검에 의해 완전 멸망을 당한다는 것을 미리 알리었다. 하나님 자신이 이스라엘의 산들을 치는 원정대를 이끄시는 셈이다.

 

‘보라, 나 곧 내가 칼로 너희에게 임할 것이다.’

 

그리하여 갈대아 사람들의 검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랐으며 그가 보내는 곳에 가서 그가 가리키는 곳을 비추어 전쟁을 이끌었다. 그렇게 하여 우상들과 그 모든 부속물들이 파괴될 것이다. 산 꼭대기에 있는 산당들이 황무하게 될 것이다. “내가 너희가 거주하는 모든 성읍이 사막이 되게 하며 산당을 황폐하게 하리니 이는 너희 제단이 깨어지고 황폐하며 너희 우상들이 깨어져 없어지며 너희 분향제단들이 찍히며 너희가 만든 것이 폐하여지며(겔 6:6).” 곧 오늘 우리가 우리 좋을 대로 산당을 짓듯 예배의 형식을 달리하며 그것으로 됐다, 하는 데 따른 책임을 스스로 져야 할 것이다. 뭐라 한들 이제 영상녹화나 줌으로 예배드리는 데 익숙해진 이들은 주 앞에 더 온전하기보다 자신의 여과시간으로 주일을 한낱 휴일의 개념으로 바꾸어간다.

 

이를 인식하고 죄악 됨을 인정해야 하는데 그러기가 쉽지 않다. 분명히 그런 우리를 향해 말씀은 선포된다.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그들이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들이라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은 빛으로 말미암아 드러나나니 드러나는 것마다 빛이니라(엡 5:11-13).” 그래서 권유하고 이에 우리의 주일성수와 교회중심의 신앙의 필요성을 강조하는데 저마다의 판단으로 듣지 않는다. 특히 내가 뭐라 하면 그건 내가 목사니까 그런다는 식이다. 여기서 목사고 아니고 그게 무슨 소용인지 모르겠다. 이런 자들에게도,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그들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따르게 하실까 함이라(딤후 2:25-26).”

 

곧 오늘도 죄악이 저질러지는 곳에 서 있다면 자신은 한 게 없다 해도 소돔과 함께 멸망할 것이다. ‘롯의 처를 기억하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주목해야 한다. 스스로 믿어 구원 받았다고 여기면서 나름은 현실 교회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목사들의 어떤 편향적이고 선동적인 설교에 반기를 들듯이 자신을 합리화시키며 거절한다. 가령 가까운 누가 그렇듯 줌으로나 영상으로 예배를 대신하면서 요즘은 부쩍 주일을 끼고 어디로 여행을 자주 다닌다. 우리 나이가 그럴 나이라고 젊을 때 번 것으로 더 늦기 전에 누려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에게 ‘예배는?’ 하고 물으면 핸드폰을 보이고 녹화영상을 가리킨다. 아,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시 1:1-2).

 

그러므로 “지혜로운 자는 두려워하여 악을 떠나나 어리석은 자는 방자하여 스스로 믿느니라(잠 14:16).” 하는 말씀으로 자신을 붙들어야 한다. 나 역시 아차, 싶으면 말씀 없이 사는 삶으로 익숙해질까 하여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골 3:5-6).” 우리로 땅의 지체를 죽이라 하심은 여러 산들의 산당과 그곳에서의 각종 우상을 타파해야 한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 이를 헛되이 받아 값싼 은혜로 삼으면 예배는 소홀해진다.

 

참된 삶이란 온전히 하나님을 섬기는 삶으로 나타난다.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요일 5:20).” 그러므로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게서 멀리하라(21).” 하심을 주목하면서, 그런 가운데서도 오늘 말씀과 같이 “너희 중에서 살아남은 자가 사로잡혀 이방인들 중에 있어서 나를 기억하되 그들이 음란한 마음으로 나를 떠나고 음란한 눈으로 우상을 섬겨 나를 근심하게 한 것을 기억하고 스스로 한탄하리니 이는 그 모든 가증한 일로 악을 행하였음이라(겔 6:9).”

 

이는 ‘남은 자’에 대한 약속이다. 구별된 소수의 ‘남은 자를 남겨 둘 것이다’는 말씀을,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생존자를 조금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으리로다(사 1:9).” 이에 그들로 내가 살고 나로 나의 후대가 산다. 믿음으로 이어가는 삶이 외줄처럼 위태롭고 가늘다 해도, ‘내가 칼을 피하는 사람들을 남겨 둘 것이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흩어진 사람들’ 가운데서도 주를 온전히 구하는 자들을 남겨두셨다. 그들은 참회하는 남은 자이다. “…우상을 섬겨 나를 근심하게 한 것을 기억하고 스스로 한탄하리니 이는 그 모든 가증한 일로 악을 행하였음이라(9b).” 분명 ‘회개의 이유’가 나와 있다. 여기서 심판과 자비가 동시에 나타난다. 심판은 ‘사로잡혀 갔던’ 것이다. 자비란 그들 포로의 땅에서 ‘검을 피한’ 자들이다. 그들은 세상 밖으로 쫓겨난 것이 아니라 닥친 십자가의 견책과 그 가운데 섞여 있는 자비를 붙들고 회개하는 우리 자신이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시 84:1-2).

 

그런 우리는,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10-11).

 

이와 같이 주를 사모함으로 주를 붙들고 산다. 그리하여,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 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주나이다

(5-6).

 

그렇게 오늘도 새 힘을 얻는다.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소서

야곱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이소서 (셀라)

우리 방패이신 하나님이여

주께서 기름 부으신 자의 얼굴을 살펴 보옵소서

(7-9).

 

그러할 때,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1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