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이 행하는 일을 보느냐 그들이 여기에서 크게 가증한 일을 행하여 나로 내 성소를 멀리 떠나게 하느니라 너는 다시 다른 큰 가증한 일을 보리라 하시더라
겔 8:6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주의 진리에 행하오리니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
시 86:11
하나님의 선민과 주변 국가에 대한 심판을 다루고 있다. 특히 유다에 대한 심판의 근거를 오늘 본문은 증거한다. 먼저는 ‘질투를 유발하는 우상’이 있다.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제 너는 눈을 들어 북쪽을 바라보라 하시기로 내가 눈을 들어 북쪽을 바라보니 제단문 어귀 북쪽에 그 질투의 우상이 있더라(5).” 또한 벽 사면에 이스라엘 족속들의 다양한 신상이 그려져 있고 70인 장로들이 제단을 드린다. “내가 들어가 보니 각양 곤충과 가증한 짐승과 이스라엘 족속의 모든 우상을 그 사방 벽에 그렸고 이스라엘 족속의 장로 중 칠십 명이 그 앞에 섰으며 사반의 아들 야아사냐도 그 가운데에 섰고 각기 손에 향로를 들었는데 향연이 구름 같이 오르더라(10-11).”
그리고 여인들이 ‘담무스’를 위해 애곡하였다. “그가 또 나를 데리고 여호와의 전으로 들어가는 북문에 이르시기로 보니 거기에 여인들이 앉아 담무스를 위하여 애곡하더라(14).” 그리고 성전 현관과 제단 사이에서는 25인의 제사장들 곧 24반열의 장로들이 성전을 등지고 동쪽을 향해 태양신을 숭배하는 의식을 거행한다. “그가 또 나를 데리고 여호와의 성전 안뜰에 들어가시니라 보라 여호와의 성전 문 곧 현관과 제단 사이에서 약 스물다섯 명이 여호와의 성전을 등지고 낯을 동쪽으로 향하여 동쪽 태양에게 예배하더라(16).”
에스겔은 소명을 받은 뒤 7일 후, 주전 593년 4월 12일에 이와 같은 계시를 받는다. 주어진 때로부터 약 1년 2개월이 지난 592년 6월 5일에 환상을 본다. 곧 우상숭배로 더럽혀진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환상이다. 이는 예루살렘의 멸망에 있어 가장 큰 원인이 되었다. 곧 하나님의 성전까지 우상으로 더럽힌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상숭배를 직접 보여줌과 동시에 환상의 말미에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통한 회복을 나타내신다.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네가 보았느냐 유다 족속이 여기에서 행한 가증한 일을 적다 하겠느냐 그들이 그 땅을 폭행으로 채우고 또 다시 내 노여움을 일으키며 심지어 나뭇가지를 그 코에 두었느니라 그러므로 나도 분노로 갚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긍휼을 베풀지도 아니하리니 그들이 큰 소리로 내 귀에 부르짖을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17-18).”
그런 가운데 오늘 시편의 한 구절이 나로 하여금 주 앞에 더욱 마음을 가다듬게 한다.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주의 진리에 행하오리니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
(시 86:11).
일생을 주의 인도하심과 도움으로 살았으면서도 이처럼 어그러진 길로 갔던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며 경각심을 가진다. 신앙이 타성에 젖으면 처음 가졌던 마음은 희미해진다. 본문은 이러한 근거로 성전이 어떻게 불결해지고 훼파되었는지, 우상의 실상을 고발하고 있다. 다시 정리하면 1-4절에서 사로잡힌 지 6년 곧 주전 592년 6월 5일에 유다의 장로들이 에스겔에게 나아온 때에 에스겔이 환상 중에 하나님의 영에 이끌려 유다의 예루살렘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장면을 목도한다. 성전의 안뜰로 해서 북향 제단문에 이르렀는데, 그곳에 ‘질투의 우상’이 자리하고 있다. 이어 성전 뜰 문과 연결된 담 안의 비밀 공간에서는 에스겔도 알고 있던 야아사냐를 비롯한 70인의 장로들이 각종 우상의 형상을 사방 벽에 그려 놓고 숭배 의식을 거행하고 있었다(7-13).
성전 뜰 북문에서는 여인 둘이 페니키아 지역의 우상인 담무스를 위한 종교 의식으로 애곡하고 있었다(14-15). 또 성전 안뜰의 성전 현관과 제단 사이에서는 25인의 제사장들 곧 대제사장 24반열의 제사장들이 성전을 등지고 동쪽을 향하여 ‘태양신 숭배’ 의식을 행하고 있었다(16). 이런 내용 앞에서 경악을 금치 못하겠다. 아무리 그래도 거룩한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어찌 이와 같은 추잡하고 어지러운 우상숭배가 어떻게 일어나고 있었을까?
솔로몬에 의해 건축된 이래 유다 11대 왕인 요담 때까지만 해도 성전만큼은 거룩하게 잘 유지 보존되었다. 아무리 부정하고 패역한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다 해도 북이스라엘의 아합의 딸이 유다 5대 왕이었던 요람의 아내가 된 아달라조차도 감히 예루살렘 성전을 더럽힐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러던 예루살렘 성전은 유다 12대 왕 아하스 때 이처럼 더럽혀지기 시작하였다. 즉 아하스가 앗수르의 우상의 제단을 성전에 세우면서 성전은 더럽혀지기 시작했다.
이를 히스기야 때 성전의 우상 제단을 제거하였으나 그의 아들 므낫세에 의해 다시 성전에는 일월성신을 위한 제단과 아세라 우상들을 세움으로 또다시 성전은 더럽혀지는 수난을 당했다. 이를 요시야가 다시 성전을 수리하면서 우상의 제단과 우상들을 제거하였으나 여호야김 때 성전에 다시 우상들이 세워졌다. 이와 같은 유다의 몰락은 성전을 더럽히는 빈도와 정도에 따른 것이다.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다. 당신의 이름을 두신 곳이다. 오늘 날에도 다를 게 없다. 신약 시대에 성도들을 다시 교회로 부르시고 세우심으로 성전은 하나님의 영이 머무는 곳으로, 거룩히 보존할 것을 강조하면서 이를 동시에 우리의 몸으로 삼으셨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 3:16-17).”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고후 6:16).”
고로 교회는 우리의 몸이면서 삶의 현장이다. 우리는 자신을 각종 죄와 우상으로부터 거룩하게 보존해야 할 의무가 있다. 항상 하나님께서 거룩한 산제사로 드려지는 삶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이를 위하여 저마다 의식적으로도 말씀 앞에 자신을 세워야 한다. 우리 몸은 본래 육의 정욕을 따르고자 하는 본능이 있어 이를 정복하고 다스려야 한다.
바울은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하였고, 심지어는 날마다 자신을 죽인다고 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예수께서는 이르시되,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이는 말씀에 순종하는 자만이 온전히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알 수 있다.
오늘 에스겔은 두 번째 환상을 보는데, “그가 손 같은 것을 펴서 내 머리털 한 모숨을 잡으며 주의 영이 나를 들어 천지 사이로 올리시고 하나님의 환상 가운데에 나를 이끌어 예루살렘으로 가서 안뜰로 들어가는 북향한 문에 이르시니 거기에는 질투의 우상 곧 질투를 일어나게 하는 우상의 자리가 있는 곳이라(겔 8:3)” 이때는 에스겔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온 지 6년째 되던 해이다. 주전 592년 6월 5일, 때는 에스겔이 처음 계시를 받은 때로부터 14개월이 지난 때이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처음 환상을 보이실 때 그를 향하여 430일간 좌로나 우로만 누워 지낼 것을 명하셨다. 이렇게 14개월이 채워진 뒤였다.
에스겔은 40일을 유다의 죄로 인하여, 390일은 북이스라엘의 죄로 인하여 모로 누워야만 했다. 그 기한 동안 부정한 연료로 구운 떡을 먹어야만 했다. 아울러 그는 자신의 머리털을 깎아 불사르고 칼로 쳐서 사방에 흩음으로, 질병과 이방의 침공이 사면에서 행해지는 ‘행위 계시’를 보여주었다. 여기서 에스겔은 예루살렘 성전 경내에서 우상숭배의 현장을 목격하는 환상을 보는 것이다. 이 환상을 통해 당시 예루살렘이 얼마나 타락해 있었는지, 또 우상에 찌든 삶을 살았는지 확인할 수 있다. 곧 선민이라지만 그들의 삶과 그 내면에 가증한 이방의 우상들이 어떠한지를, 더럽혀지는 성소를 보임으로 알게 하신다.
이러한 사실이 오늘 우리는 어떠한가? 하고 묻고 있는 듯하다. 교회가 또한 주를 믿는다고 하는 자들로 우리의 삶이 어떠한지 숙연한 마음으로 점검해야 한다. 죄악이 관영할 때, 아무리 세상이 어떻다 했어도 노아는 하나님께 철저히 순종하며 방주를 지었던 것 같이, 날마다 구원을 체험하며 하나님의 뜻을 더욱 더 깊이 깨달아 알아야 한다. 아브라함 역시 하나님께 순종하여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 갈 바를 알지 못하면서도 떠나갔던 것처럼, 심지어 뒤늦게 얻은 아들 이삭까지 번제로 바치라 하실 때도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던 것처럼…. 오늘 우리는 어떠한가? 하고 돌아보게 된다.
내 안의 한 쪽 문을 열어보면 돈이 필요한 현실에서 악한 세상과 결탁하여 살고 있지는 않은지…. 안 믿는 자들과 다를 바 없이 세상에서의 즐거움을 추구하며 스스로를 보상하는 삶처럼 살고 있지는 않은지…. 교회를 섬기는 데 있어 형식적으로 주의 이름을 부를 뿐 정작 생활의 면면은 더럽혀져 온갖 우상과 잡신을 마다하지 않고 사방에 붙인 그림들처럼 아무렇지 않게 어울려 살고 있지는 않은지…. 이에 성경은 묻는다. 우리의 온전한 순종은 하나님을 바로 알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바르게 살려하는지를…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눅 5:5-6).”
오늘 삶의 현장에서 점검하고 돌아보게 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그러기 위해서는 실질적인 생활이 뒷받침해야 하는데 우선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다음은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그리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는 것이다(롬 12:1, 2).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것은 막연한 구호가 아니다. 오늘 우리를 어지럽히는 문화와 예술이 또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모두 그러하다. 이에 구별됨이란 '근신의 삶'으로 자신을 어느 정도 세상과 거리를 두고 살아야 한다.
실제 안 믿는 친구들과 어울리는 일을 주의해야 한다. 저들의 인식과 판단은 세상을 기준으로 한다. 우리는 말씀을 따라 산다고 하는데 여기서 서로 부합할 수 없는 어떤 대립 구도가 형성돼야 마땅하다. 새해가 되고 다들 무슨 유행처럼 점괘를 보는데 믿는다고 하는 이들이 아무렇지 않게 어울려 저들과 다를 바 없이 한 해의 운세니 뭐니 따지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누가 새로운 일을 시작하면서 버젓이 고사를 지낸다. 액운을 막느니, 행운을 비니, 하는 따위의 물품들이 선물처럼 오간다. 무의식적으로는 문화나 상품으로 인식하여 저들의 문양과 그 호칭과 표현을 아무 거리낌 없이 따라한다. 대놓고 이를 선호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지만.
오늘 여기 성전에서 별의 별 짓을 다하고 온갖 우상을 갖다놓고 이를 애곡하고, 그 앞에 절하고, 제단을 차리고 하던 이들이 그저 일반인들이 아니었다. 당시 저들의 교회의 권속이요, 지도자들로 예배를 주관하고 말씀을 가르치던 자들이다. 곧 “이스라엘 족속의 장로 중 칠십 명이 그 앞에 섰으며… 이스라엘 족속의 장로들이 각각 그 우상의 방안 어두운 가운데에서 행하는 것을 네가 보았느냐?” 심지어는 “그들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지 아니하시며 여호와께서 이 땅을 버리셨다 하느니라.” 하고 거짓으로 선동하고 하나님의 뜻을 호도하였다(겔 8:11-12). 마치 오늘 우리 개신교회들이 구설수에 오르며 몇몇 극우 목사만 그러는 것 같지만 의외로 정치적 이념으로 종교적 신념을 심어주는 ‘미혹하는 영들’이 난무하다.
이에,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롬 1:22-25).”
오늘 본문의 내용과 우리의 실상이 중첩되면서 교회가 어쩌다 이렇듯 선동의 장이 되고 그 일을 가지고 온통 설교가 말씀으로가 아닌 현실 비판이나 누구의 구호로 바뀐 것인지……. 분명 하나님은 이를 소멸하신다.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신 4:24).” 설마, 하고 안일하게 굴어서는 이 놀라운 경고의 말씀을 바로 들을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또는 감사하자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히 12:28-29).”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주를 온전히 바라며 의지함으로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고전 3:13).” 오늘 우리가 당면한 현실이 또는 어려운 지경의 난감함이 우리로 불에 달구는 듯할 때, 분명한 것은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 1:17).” 하여 오늘도 시편으로 호흡하며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주의 귀를 기울여 내게 응답하소서
나는 경건하오니 내 영혼을 보존하소서
내 주 하나님이여 주를 의지하는 종을 구원하소서
주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종일 주께 부르짖나이다
(시 86:1-3).
주가 주신 날들로,
주여 내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오니
주여 내 영혼을 기쁘게 하소서
주는 선하사 사죄하기를 즐거워하시며
주께 부르짖는 자에게 인자함이 후하심이니이다
(4-5).
그러할 때,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께 부르짖으리니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리이다
(7).
하여,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주의 진리에 행하오리니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
(11).
그러므로
은총의 표적을 내게 보이소서
그러면 나를 미워하는 그들이 보고 부끄러워하오리니
여호와여 주는 나를 돕고 위로하시는 이시니이다
(17).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주의 성실하심이 주를 둘렀나이다 (0) | 2026.02.05 |
|---|---|
| 내가 준행하였나이다 (0) | 2026.02.04 |
| 성도들에게 화평을 말씀하실 것이라 (0) | 2026.02.02 |
|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0) | 2026.02.01 |
| 하나님이여 침묵하지 마소서 (0) | 2026.01.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