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나 여호와가 말하였으니 이룰지라

하현. 2026. 2. 17. 04:18

 

너의 불의를 행하여 이를 얻은 일과 네 가운데 피 흘린 일을 인하여 내가 손뼉을 쳤나니 내가 네게 보응하는 날에 네 마음이 견디겠느냐 네 손이 힘이 있겠느냐 나 여호와가 말하였으니 이룰지라

겔 22:13-14

 

내가 인자와 공의를 찬송하겠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찬양하리이다

시 101:1

 

 

죄를 시인하고 고백하는 일은 ‘완전한 길’로 가는 첫 걸음이다. 일련의 사태를 보면서도 느끼지만 저마다 잘못을 인정하지 못하고 억울함을 호소할 뿐이다. 심지어 생중계되듯 모든 일이 눈앞에서 펼쳐졌는데도 저마다는 의견이 분분하다. 이에,

 

내가 완전한 길에 주의하오리니

주께서 언제나 내게 임하시겠나이까

내가 완전한 마음으로

내 집안에서 행하리이다

(시 101:2).

 

하는 오늘 다윗의 고백을 되새기며 본문을 묵상하게 된다. 주어진 것에서 완전한 마음으로란 주를 인정하는 것으로 주가 내게 임하심으로다. 오늘 본문은 앞서 21장에서 심판의 임박함과 그에 따른 강도가 얼마나 극심할지를 알리고 그 심판의 구체적인 대상이 누구이고 어떠할지, ‘칼의 행동’으로 비추어 설명하였다. 이러한 분위기와는 달리 본문은 이스라엘이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던 이유에 대해 집중하고 있다. 곧 두괄식으로 선지자는 심판 선언을 하고, 그 심판의 원인을 밝힘으로 죄의 근거를 증명한다.

 

이후 예루살렘의 멸망을 최종적으로 선언한다(24장). 오늘 본문은 심판의 원인(1-12)을 살피고, 심판의 필연성(13-16)을 논거로 제시한 뒤, 심판의 목적(17-22)을 밝힘으로, 심판의 대상(23-31)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내용 전개는 이스라엘의 영적 타락이 총체적이고 민족의 부패로 확산되었음을 알리고, 선민으로서의 국가 존립 두 자체에 심대한 타격을 주고 있음을 제시한다. 그러면서도 내용의 전환에 있어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네 가운데 피를 흘리려고 뇌물을 받는 자도 있었으며 네가 변전과 이식을 취하였으며 이를 탐하여 이웃에게 토색하였으며 나를 잊어버렸도다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1, 12).” 하시는 것과 같이 이 모든 일의 주관이 하나님이심을 알게 한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여호와의 말씀이 네게 임하여 가라사대(17, 23).”

 

이는 선지자 에스겔의 독단적인 생각이 아닌 것이다. 이러한 표현이 반복되는 것은 이 예언의 말씀이 영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임을 누누이 강조한다. 본문의 특징은 이 심판의 이유를 밝히는 데 있다. 먼저는 그 지도계층의 사람이 부패하였다. “이스라엘 모든 방백은 각기 권세대로 피를 흘리려고 네 가운데 있었도다(6).” 실질적으로 저들은 부모를 공경하지 않고 이웃을 업신여긴다. “그들이 네 가운데서 부모를 업신여겼으며 네 가운데서 나그네를 학대하였으며 네 가운데서 고아와 과부를 해하였도다(7).” 무엇보다 주의 성전의 거룩함을 훼파하고 안식일을 더럽혔다. “너는 나의 성물들을 업신여겼으며 나의 안식일을 더럽혔으며(8).”

 

또한 서로가 반목하여 피흘리고 우상을 숭배하며 음란하다. “네 가운데 피를 흘리려고 이간을 붙이는 자도 있었으며 네 가운데 산 위에서 제물을 먹는 자도 있었으며 네 가운데 음란하는 자도 있었으며(9).” 심지어 부정하고 아비의 처를 범하거나, “네 가운데 자기 아비의 하체를 드러내는 자도 있었으며 네 가운데 월경하는 부정한 여인에게 구합하는 자도 있었으며(10).” 이웃을 추행하고 성적으로 문란하였다. “혹은 그 이웃의 아내와 가증한 일을 행하였으며 혹은 그 며느리를 더럽혀 음행하였으며 네 가운데 혹은 그 자매 곧 아비의 딸과 구합하였으며(11).” 뿐만 아니라 토색하고 피 흘리며 뇌물을 받아 하나님을 잊었다. “네 가운데 피를 흘리려고 뇌물을 받는 자도 있었으며 네가 변전과 이식을 취하였으며 이를 탐하여 이웃에게 토색하였으며 나를 잊어버렸도다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12).”

 

이와 같이 구체적으로 그 죄악이 사실로 드러나는 데도 저들은 이미 회개를 상실하였고 스스로 잘못을 시인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이 모두는 모세의 율법을 어긴 것은 물론 스스로들 선민의 지위를 박탈하여 행함이었다. 이를 근거로 부모를 업신여김은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고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레 19:3).” 하신 말씀에 위배된다. 또한 나그네를 학대하였는데,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이었었음이니라(출 22:21).” 하신 말씀과 배치된다. 또한 고아와 과부를 해하였다. “너는 센 머리 앞에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니라(레 19:33).” 하신 말씀에서 벗어났다.

 

안식일을 범함은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고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레 19:3).” 하신 말씀에서 어긋났고, 살인죄로 “살인하지 말지니라(출 20:13).” 하신 말씀에 정면으로 배치되고, 주의 제단을 더럽히는 일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쌓은 단 곁에 아무 나무로든지 아세라 상을 세우지 말며 자기를 위하여 주상을 세우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느니라(신 16:21-22).” 하신 말씀에서도 배역한 것이다. 음란죄(레 18:6-23), 불로 소득의 죄(출 23:8, 신 23:19)까지 모든 것이 모세 언약을 선민으로서의 삶으로 기준이 되어야 하는데 이를 거역함으로 그 삶의 질이 부패하였음을 낱낱이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곧 우리 성도의 삶으로도 이와 같은 삶의 기준은 신앙의 가늠좌가 된다. 더욱이 교회에서 또는 사회의 위정자들로 그 삶은 보다 엄격하고 모범이 돼야 하는데, “네 방백들은 패역하여 도적과 짝하며 다 뇌물을 사랑하며 사례물을 구하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치 아니하며 과부의 송사를 수리치 아니하는도다(사 1:23).” 곧 우리 신앙의 척도가 막연하고 추상적인 신을 찾는 게 아니다. 삶의 현장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나는데 “그들은 다 심히 패역한 자며 다니며 비방하는 자며 그들은 놋과 철이며 다 사악한 자라(렘 6:28).” 하는 평가가 사회로부터 교회가 받고, 안 믿는 자로부터 믿는 자들이 이와 같은 소리를 듣는 일은 덕이 되지 않는다. 보면 일반적으로 불교인은 너그럽고 부유하여 인자하다. 천주교인은 도덕적이고 남을 이롭게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유독 개신교하는 기독교는 사분오열로 자신들의 이익을 탐하기에 급급하다.

 

그리하여 “너희의 허물이 많고 죄악이 중함을 내가 아노라 너희는 의인을 학대하며 뇌물을 받고 성문에서 궁핍한 자를 억울하게 하는 자로다(암 5:12).” 하는 말씀과 같이 대체로 교인들이 더 악착같고 이기적이다. 심지어 “그 두령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 치면서 오히려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도다(미 3:11).” 이런 현상이 어쩌다 우리 사회에서도 공공연하게 사회의 지탄을 받는 이들 가운데 교인들이 많다. 무슨 인권위원인가 하는 이는 교회의 장로로 판사를 지냈는데 공정하지 못하다. 어디 유공단체의 아무개는 자신의 교회 사람들에게 무슨 기념관을 개방하고 사적으로 유용하였고 심지어 막말을 일삼았다.

 

그러니 안 믿는 누가 나더러 저런 지경을 빗대어 교회를 비난하고 싸잡아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을 듣곤 한다. 대놓고 어느 아이엄마는 글방으로서는 좋았는데 교회로서 같이 예배를 권하면서는 거절하였다. 목사가 되고 난 뒤 어떤 아이의 엄마는 나를 두고 종교인으로서는 싫다면서 그만두기도 하였다. 누구는 요즘 길거리의 선동과 모 극단적 정당의 행태를 놓고 자신은 교회를 다니느니 이슬람주의가 되겠다며 고개를 절레절레하였다. 곧 오늘 본문으로 우리의 죄악상이 교회는 물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데 준동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곧 우리가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홀히 함으로 종교적 타락을 초래하였다.

 

오늘 본문도 “너는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자기 가운데 피를 흘려 벌 받을 때로 이르게 하며 우상을 만들어 스스로 더럽히는 성아… 너는 나의 성물들을 업신여겼으며 나의 안식일을 더럽혔으며 네 가운데 피를 흘리려고 이간을 붙이는 자도 있었으며 네 가운데 산 위에서 제물을 먹는 자도 있었으며 네 가운데 음란하는 자도 있었으며(3, 8-9).” 이러한 사실을 지적한다. 나아가 인간 상호간의 도덕적인 규범을 파괴하는 일에 앞장 섰다. “그들이 네 가운데서 부모를 업신여겼으며 네 가운데서 나그네를 학대하였으며 네 가운데서 고아와 과부를 해하였도다… 네 가운데 자기 아비의 하체를 드러내는 자도 있었으며 네 가운데 월경하는 부정한 여인에게 구합하는 자도 있었으며 혹은 그 이웃의 아내와 가증한 일을 행하였으며 혹은 그 며느리를 더럽혀 음행하였으며 네 가운데 혹은 그 자매 곧 아비의 딸과 구합하였으며(7, 10-11).”

 

뿐만 아니라 보편적인 선행에 있어서도 가난한 자에 대한 수탈을 일삼듯 자신들의 부를 축적하는데 일조한다. “그들이 네 가운데서 부모를 업신여겼으며 네 가운데서 나그네를 학대하였으며 네 가운데서 고아와 과부를 해하였도다… 네 가운데 피를 흘리려고 뇌물을 받는 자도 있었으며 네가 변전과 이식을 취하였으며 이를 탐하여 이웃에게 토색하였으며 나를 잊어버렸도다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7, 12).” 그러니 이러한 모습이 오늘 우리의 실정이고 교회의 부덕함이 아니겠나? 복음을 전하고 돕고자 하는 마음이 순수하지 못하고 억지스럽다.

 

하나님은 오늘 이 타락한 이스라엘을 비추어 우리의 신앙과 삶은 어떠한지를 돌아보게 하신다. 결국 이러한 삶의 행태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다고 할 수 없다(1-12). 이로써 우리의 죄를 알게 하라고 말씀은 선언하신다. 우리의 수치스러운 행위를 시인하게 한다(3-5). 통치자들의 사악한 행위 그 뒷면에 교회가 드리워지는 데서 절망한다. 차라리 개인의 잘못으로 그치면 좋은데 그런 가운데 성경을 들고 가증스런 모습으로 자신의 신념을 부각시키는 것이 역겹다(6-12). 이는 하나님에 대한 왜곡된 지식을 사람들로 각인시켜 그러한 행위 자체가 우상 숭배가 아닐 수 없다. 곧 저의 손에 들린 성경과 가증스러운 자기정당화가 교회에 부정적인 인식을 가중시킨다.

 

자기들 생각과 욕심에 근거하여 자기 멋대로 하나님을 만들어냈다. 때문에 여호와는 우상의 출처를 ‘네가 만든’ 것으로 단정하셨다. “네가 흘린 피로 인하여 죄가 있고 네가 만든 우상으로 인하여 스스로 더럽혔으니 네 날이 가까웠고 네 연한이 찼도다 그러므로 내가 너로 이방의 능욕을 받으며 만국의 조롱거리가 되게 하였노라(4).” 우상은 하나님의 계시에 기초하지 않고, 자신들의 자의적인 생각으로 만든 모든 실체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 성도라면 말씀에 무지한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 더욱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해야 할 이유다. 시인은 이를 기반으로 시편의 세계를 구축하였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내가 모든 재물을 즐거워함 같이

주의 증거의 도를 즐거워하였나이다

 

주의 율례를 즐거워하며

주의 말씀을 잊지 아니하리이다

 

나로 주의 계명의 첩경으로 행케 하소서

내가 이를 즐거워함이니이다

(시 1:2, 119:14, 16, 35).

 

곧 오늘 우리 신앙의 문제는 스스로 하나님을 너무 잘 안다는 착각으로 각자의 신으로 둔갑하는 것이다. 더욱이 개인방송으로 설교나 강해를 하는 목사들이나 신학자들의 설교나 주장이 위태롭다. 너무 자의적으로 성경을 해석하거나 상대적으로 남을 적대시한다. 하나님에 대한 왜곡된 지식으로 불순종을 정당화하거나 심지어는 성경을 분해하여, 영적 무지의 우상숭배를 일삼는다. 가령 어느 성경만을 진리로 주장하며 나머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번역본을 이단시하는 것을 본다. 저가 진리라고 주장하는 성경 또한 여러 번역본의 하나일 텐데… 또 누구는 어느 단어나 문장을 확대하여 일반화하거나 축소함으로 성경을 편협하게 각인시킨다.

 

어쩌면 이 또한 나의 조심스러운 편견일 수 있겠으나 나는 그래서도 개인적인 유튜브 방송이나 개인채널의 설교나 성경강해를 경계한다. 서로 대면하여 어버버 해도 좋으니 일상을 공유하고, 말씀으로 위로함을 더하는 성경공부나 묵상교제를 선호한다. 그런데 이 또한 지엽적인 이유로 어려우면 ‘줌’으로나 ‘화상’으로 상호 공감이 실시간 가능한 가운데서 유지되는 게 좋다. 한 텀을 두고 받는 감정은 손상되기 쉽고, 한 사람 건너 전달되는 말씀은 더해지거나 빠질 수 있다. 말과 글이 다른 점이다. 나아가 말은 와전되어 진리를 왜곡하기 십상이다. 이는 불순종으로 이끌 뿐이다. 오늘 이스라엘 백성의 이와 같은 현실을 일일이 열거하고 있는 본문이 우리의 실상과 다르지 않게 묵상하도록 한다.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사 1:16-17).”

 

곧 말씀을 전하는 자는 더더욱 스스로도 지속적으로 말씀에 충만함을 덧입어야 한다. 예레미야처럼 “내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띠를 사서 내 허리에 띠니라(렘 13:2).” 할 때에 학개 선지자에게도 “그 달 이십사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학개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학 2:20)” 이와 같이 우리도 ‘말씀이 임하여 가라사대’ 하는 놀라운 임재와 충만함이 필요하다. 이는 우리가 그저 일개 소시민으로 사는 게 아니라, 각자는 성경과 말씀에 입각하여 삶을 주도하고 판단하는 입장으로 살아야 한다.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이는 “너희는 스스로 깨끗케 하여 거룩할지어다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레 20:7).” 하여 우리는 상황이 어떠하든지 승리하는 자로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그가 철장을 가지고 저희를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계 2:26-27).”

 

이에 따른 영적 각성은 사는 날 동안 매순간마다 우리로 자신을 돌아보게 해야 한다. 곧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벧전 5:8-9).” 하여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눅 21:36).” 하신 말씀에 다시금 다잡는 마음으로, “네 샘으로 복되게 하라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 그는 사랑스러운 암사슴 같고 아름다운 암노루 같으니 너는 그 품을 항상 족하게 여기며 그 사랑을 항상 연모하라(잠 5:18-19).” 주신 바 맡기신 한 날의 충성으로 오늘도 산다.

 

설날 아침, 조금은 더 이른 새벽에 교회로 올라와 말씀 앞에 앉았다. 어제 같이 장을 보고 전을 부치면서 딸애의 그런 모습이 이제 시집 가면 더는 보기 힘들겠다 생각하니 마음이 어렵기도 했다. 오전 일찍 가족들이 모일 텐데, 그러느라 서둘러 올라와 말씀 앞에 앉고 내 곁의 상한 영혼들을 떠올리며 중보하다, 오늘 말씀을 보며 느낀 것 같이 삶이 곧 사역이고 신앙인 것을 되새겼다. 한 생을 다하기까지 주가 맡기신 현실을 다할 때, 

 

내가 인자와 공의를 찬송하겠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찬양하리이다

내가 완전한 길에 주의하오리니

주께서 언제나 내게 임하시겠나이까

내가 완전한 마음으로 내 집안에서 행하리이다

(시 101:1-2).

 

고로,

 

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거하게 하리니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수종하리로다

(6).

 

하시는 주의 뜻을 살펴,

 

거짓 행하는 자가 내 집안에 거하지 못하며

거짓말하는 자가 내 목전에 서지 못하리로다

아침마다 내가 이 땅의 모든 악인을 멸하리니

죄악 행하는 자는 여호와의 성에서 다 끊어지리로다

(7-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