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창조함을 받을 백성이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하현. 2026. 2. 18. 05:12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의 미워하는 자와 네 마음에 싫어하는 자의 손에 너를 붙이리니 그들이 미워하는 마음으로 네게 행하여 네 모든 수고한 것을 빼앗고 너를 벌거벗겨 적신으로 두어서 네 음행의 벗은 몸 곧 네 음란하며 음행하던 것을 드러낼 것이라

겔 23:28-29

 

이 일이 장래 세대를 위하여 기록되리니 창조함을 받을 백성이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시 102:18

 

 

남북 이스라엘 선민을 대상으로 음행하는 여인으로 비유하여 “그들이 애굽에서 행음하되 어렸을 때에 행음하여 그들의 유방이 눌리며 그 처녀의 가슴이 어루만져졌나니 그 이름이 형은 오홀라요 아우는 오홀리바라 그들이 내게 속하여 자녀를 낳았나니 그 이름으로 말하면 오홀라는 사마리아요 오홀리바는 예루살렘이니라(3-4).” 하고 진술한다. 먼저 예루살렘이 사마리아의 음행을 답습한 사실(1-21), 그리고 당신을 배반하고 이방과 그 우상을 추종한 예루살렘에 대한 재판과 징벌의 집행을 진술한다(22-27).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그들이 사랑하다가 싫어하게 된 자들 곧 바벨론을 통하여 재판하고 그 정벌을 집행하실 것임을 말씀하고 있다. 이는 이전에 하나님을 배반한 북이스라엘을 재판하고 정벌하신 것과 동일한 방법으로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을 통하여 예루살렘을 정벌하되 ‘그들이 분내어 네 코와 귀를 깎아 버리고 남은 자를 칼로 엎드러뜨리며 네 자녀를 빼앗고 그 남은 자를 불에 사르며 옷을 벗기며 장식품을 배앗을 것’이라고 하셨다. 여기에 언급되는 일련의 행위는 당시 사회에서 남편이 행음한 아내를 응징하는 관습으로 예루살렘이 파멸될 것을 나타내고 있다.

 

이어서 하나님께서 사마리아의 범죄를 답습한 예루살렘에 동일한 영적 음행에 대해 사마리아와 동일한 방법에 의한 심판이 선언된다(28-34). 남북 이스라엘은 한 혈통으로 애굽에서 함께 음행하였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선민이 되었다는 사실을 앞에서 밝힌 것과 같다. 여기 두 자매의 이름은 오홀라와 오홀리바다. 이 중 언니인 오홀라는 ‘그녀 자신의 장막’이라는 뜻으로 사마리아 곧 북이스라엘을 가리킨다. 그들에게는 자신을 위해 세운 장막 곧 사마리아 성전이 있었다. 동생 오홀리바는 ‘내 장막이 그녀 안에 있다’는 뜻으로 예루살렘 곧 유다를 가리킨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을 위하여 세운 장막 곧 예루살렘 성전이 있었기 때문에 그리 부른다.

 

이들 모두 애굽에서 행음하였다고 하였다. 이는 이스라엘이 아직 출애굽하기 이전 애굽에서 종살이할 때 애굽의 우상들을 숭배하였음을 지시한다. 하나님께서는 이들과 더불어 언약을 맺고 그들을 선민으로 삼으셨다. 이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선민이 된 것이 그들의 의로움 때문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임을 보여준다. 그들의 우상숭배가 우연한 일이 아니라, 애굽에서부터 몸에 밴 습관에 따른 것임을 역설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어 남북 선민 모두 동반 타락에 대한 지적이 나온다(37-42). 공통적으로 우상들을 숭배하여 신앙적으로 간음한 사실, 하나님의 성소를 더럽힌 사실, 안식일을 범한 사실, 그리고 이방 나라들과의 정치적으로 내통하여 간음한 것과 같은 사실들을 진술하고 있는 것이다. 끝으로 여호와께서 이들 남북이스라엘 모두에게 심판을 선언하고 있다(43-49). 즉 하나님께서는 본남편인 당신을 저버리고 이방 열국과 간음을 저지름으로 이방과 간통한 남북 선민 모두를 이방 군대를 동원하여 심판하실 것을 알리셨다. 하여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 남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멸망한다.

 

북이스라엘이 멸망한 때로부터 약 130년이 지난 때인 오늘 이 본문은 남유다를 향한 에스겔의 예언이다. 미래 시제를 사용하여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 대하여 똑같이 심판을 선언하고 있다. 이는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하나님 앞에 같은 죄악을 저질렀음이다. 남유다도 이미 멸망당한 북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확정한다. 그리하여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 주전 722년에 멸망하였다.

 

오늘 본문은 이 ‘오홀라’ 곧 북이스라엘의 전례에도 불구하고 더욱 심해진 ‘오홀리바’ 곧 유다가 배반을 지적하여 이방과 그 우상을 추종한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유다는 북이스라엘보다도 더욱 음욕이 불붙듯 하여 북이스라엘이 추종하였던 앗수르는 물론 바벨론, 애굽 등과 행음하였고 그들의 우상들과 더불어 행음하였다. 남유다가 앗수르를 추종하였다는 것은 유다 12대 왕 아하스가 아람과 북이스라엘 연합군의 침공을 피하고자 앗수르와 그 우상을 의지한 것을 말한다. 바벨론을 추종하였다는 것은 히스기야 이후로 유다가 친바벨론 정책을 추진한 것과 애굽을 추종하였다는 것은 여호야김 시대부터 친애굽 정책을 추진한 것을 의미한다.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더럽힘을 받은 후 바벨론을 싫어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는 유다가 바벨론과 동맹을 맺었으나 바벨론이 강성해지면서 도리어 바벨론의 침공을 받게 되자 친바벨론 정책을 포기한 것을 의미한다. “그가 보고 곧 사랑하게 되어 사절을 갈대아 그들에게로 보내매 바벨론 사람이 나아와 연애하는 침상에 올라 음행으로 그를 더럽히매 그가 더럽힘을 입은 후에 그들을 싫어하는 마음이 생겼느니라(16-17).” 이는 주전 605년 바벨론의 1차 첨공으로 바벨론에 종속되자 친바벨론 정책을 포기하고 대신 친애굽 정책을 취하게 된 것을 말한다.

 

남유다의 경우, 북이스라엘이 이방과 그 우상을 추종하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사실을 목도하고도 그들의 행위를 답습하였다는 데서 이상할 정도로 어이가 없다. 곧 우리가 얼마나 죄의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한가를 보여준다. 너무 쉽게 넘어지면서 죄가 지닌 위험성과 그에 따른 비참한 결과에 대해 무감각한 삶을 사는 존재인지 알 수 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돌이켜 그들의 잘못과 다른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오히려 더 강성이 되어 따라하는 것이다. 진정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 우리가 얼마나 무던한 인식과 회개와 성결한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곧 하나님은 우리의 허물과 죄로 인해 죽었던 우리를 살리시고 사랑하셨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곧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5:26-27).” 그러나 대부분은 이를 망각하고 산다. 오히려 예전의 삶으로 다시 회귀하여 더욱 악하고 지독할 정도로 같은 죄에 빠져 살기도 한다.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계 3:4).” 곧 이 모든 상황에서도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남은 자들은 어느 시대나 존재하였다.

 

다들 저마다 하나님마저 이용하듯 섬기고 있는 시대에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마 21:13).” 우리는 신앙을 지켜 교회를 보존한다. 곧 다수의 엄청난 신자들이 통합과 야합 속에 길들여져 갈 때에도 저들을 따라 흘러가는 게 아니라, 그들 가운데서도 진정한 믿음으로 말씀을 보존하는 ‘남은 자’들이 있다. 하여,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이고

그 성산에서 예배할지어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심이로다

(시 99:9).

 

곧 오늘도 깨어 근신함으로 이 타락의 사회에서 믿음을 잃지 않고 사는 성도들은 죄 된 자아를 죽이는 데 날마다 충성한다. 세상이 아무리 요지경이고 교회가 이를 따라 어찌 변해가고 있다 해도,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9:27, 15:31).” 이와 같이 자신은 주 앞에서 의연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3-24).” 우리는 외부의 죄로 인함보다 내부의 죄 된 속성으로 더욱 절규하고 주께 부르짖는다.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시 19:12).

 

오늘도 이와 같이 주 앞에 아뢰어 나를 주께 내어드림인데, 여전히 우리의 영적 행음은 마음으로 뿐 아니라 행함으로도 나타난다. 종교적 신념을 정치적 신념으로 동화시켜 같은 맥락으로 착각하는 교인들이 늘고 있다. 왜들 교회가 앗수르나 바벨론과 같은 세상에서 저들과 결탁하여 의를 도모하려 하는지, 애굽에서 그토록 종노릇하고 살면서 우상화된 신앙으로 행음하였던 것을 하나님의 강권하심으로 출애굽하여 온전한 선민으로 살게 하신 것인데 말이다. 나를 돌아볼 때 내가 그토록 세상을 귀히 여기며 사람들과의 관계를 우선하여 살던 때를 절규한다. 그땐 그게 나를 구원할 줄 알았다. 같이 선을 도모하면 늑대라도 양이 될 줄 알았다. 그렇게 또 내 곁에 같이 했던 사람들은 사회적으로도 선하였고 성공한 위치에서 남부러울 게 없이 살았었다. 하나 저들의 공통점은 하나님과 세상을 혼용하였고 심지어는 모두가 다 하나님인 것으로 자부하고 신봉하며 살았다.

 

결국 영적으로 행음하는 삶이었다. 이는 육체적으로도 같았다. 거리낌 없이 다른 우상을 존중하고 위하여 함께 하는 사회를 꿈꾸었다. 모두의 다양성을 인정한다며 전능하신 하나님을 일개 여러 종교나 종파 가운데 한 신으로 여겨 죄악된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곧 “오홀라가 내게 속하였을 때에 행음하여 그가 연애하는 자 곧 그의 이웃 앗수르 사람을 사모하였나니 그들은 다 자색 옷을 입은 고관과 감독이요 준수한 청년이요 말 타는 자들이라(5-6).” 하여 “그가 앗수르 사람들 가운데에 잘 생긴 그 모든 자들과 행음하고 누구를 연애하든지 그들의 모든 우상으로 자신을 더럽혔으며 그가 젊었을 때에 애굽 사람과 동침하매 그 처녀의 가슴이 어루만져졌으며 그의 몸에 음란을 쏟음을 당한 바 되었더니 그가 그 때부터 행음함을 마지아니하였느니라(7-8).” 이와 같은 은유가 나의 지난날과 같다.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약 4:4).”

 

하는 말씀의 심각성을 애써 외면하였다. 이로 단단히 굳어진 사람은 교회의 확장과 부흥을 마치 이 땅의 사명으로 안다. 정치와 결탁하고 한 정치가를 지지하고 추앙하여 거리로 나선다. 서로가 공존관계인 것처럼 교회를 세력화하여 세상의 도구로 사용한다. 이 땅의 사상이나 철학이 아무리 선을 추구하고 의롭다 해도, 하여서 사람 살기 좋은 사회로 성장한다 해도,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 2:15-16).”

 

그러므로 세상 권세에 집착하는 모든 설교는 위험하다. 하나님을 참되게 섬길 수 없게 한다. 제 아무리 사상은 신념이 되고 신념은 신앙이 되어 우리의 삶을 결속시킨다 해도 “그가 젊었을 때에 애굽 사람과 동침하매 그 처녀의 가슴이 어루만져졌으며 그의 몸에 음란을 쏟음을 당한 바 되었더니 그가 그 때부터 행음함을 마지아니하였느니라(겔 23:8).” 곧 우린 그렇게 거룩하지도 온전하지도 못한 나약하고 부끄러운 존재일 뿐이다.

 

북이스라엘에 세워진 우상은 이스라엘의 창건자 여로보암이 솔로몬의 세상 권세에 집착하여 영적 행음에 따른 결과이다. 하여 여로보암은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 형상의 우상으로 제단을 만들었다. 벧엘과 단에 세워진 이 두 개의 우상 제단은 여로보암 때부터 이스라엘이 멸망하기까지 수많은 백성들을 타락시켰다. 이러므로 “솔로몬이 여로보암을 죽이려 하매 여로보암이 일어나 애굽으로 도망하여 애굽 왕 시삭에게 이르러 솔로몬이 죽기까지 애굽에 있으니라(왕상 11:40).”

 

이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골 3:5-6).” 할 때,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훌륭한 지각을 가진 자이니

여호와를 찬양함이 영원히 계속되리로다

(시 111:10).

 

오늘 이 본문으로 다시금 나의 현재를 생각한다. 과거의 나를 돌아볼 때면 탄식하고 애통하는 마음으로 그때마다 주 앞에서 회개의 기회를 얻는다. 결단코 하나님을 떠나, 진리를 찾을 수 없다. 세상과 혼용하여 다양성을 존중하고는 유일신 하나님을 바로 섬길 수 없다. 이를 주장할 때, “그러므로 내 백성이 무지함으로 말미암아 사로잡힐 것이요 그들의 귀한 자는 굶주릴 것이요 무리는 목마를 것이라 그러므로 스올이 욕심을 크게 내어 한량 없이 그 입을 벌린즉 그들의 호화로움과 그들의 많은 무리와 그들의 떠드는 것과 그 중에서 즐거워하는 자가 거기에 빠질 것이라(사 5:13-14).” 결국 세상으로 뻗은 뿌리로는 진리의 말씀을 흡수하기 어렵다. 하여,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렘 2:13).”

 

나는 이 말씀을 되새길 때마다 오늘 우리 사회의 또는 나의 삶이 추구하고자 하는 목적이 행여 이와 같지는 않은지를 돌아보게 된다. 그러므로 역사적으로도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고전 10:10-11).”

 

그러므로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고

나의 부르짖음을 주께 상달케 하소서

나의 괴로운 날에

주의 얼굴을 내게 숨기지 마소서

주의 귀를 기울이사 내가 부르짖는 날에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시 102:1-2).

 

하고 주 앞에 기도한다. 주어진 인생이란,

 

내 날이 기울어지는 그림자 같고

내가 풀의 쇠잔함 같으니이다

(11).

 

그러나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고

주의 기념 명칭은 대대에 이르리이다

주께서 일어나사 시온을 긍휼히 여기시리니

지금은 그를 긍휼히 여기실 때라

정한 기한이 옴이니이다

(12-13).

 

하는,

 

이 일이 장래 세대를 위하여 기록되리니

창조함을 받을 백성이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18).

 

그러므로 오늘도,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 같이 낡으리니

의복 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여상하시고 주의 년대는 무궁하리이다

주의 종들의 자손이 항상 있고

그 후손이 주의 앞에 굳게 서리이다 하였도다

(26-28). 아멘.